존경하는 재판장님께 드리는 글
작성자 황광우 (1958년생, 작가)
지난 2012년 10월 11일 KBS 저녁 뉴스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시인 황지우씨의 동생이자 `철학콘서트’의 저자인 황광우씨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지 33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법원은 판결문에서 “공소 근거인 긴급조치 9호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과 신체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해 무효이므로 황씨의 공소 사실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위의 보도 그대로, 저는 1978년 스무 살의 나이에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서울 시내 도처에 살포한 사실이 있으며,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2년의 금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러한 나의 반정부적 행위가 여느 파렴치범의 범법행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어서 나는 나의 전과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행위에 유죄를 선고한 그 법정의 판결이 잘못된 판결이었음을 사법부가 인정하는 날이 나의 생에 오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배우기는 하였으나 행정부와 사법부가 이렇게 다른 것임을 처음으로 실감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재판장님께 호소문을 작성하는 것도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자성”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활동으로 구금된 적이 있었고, 그 행위로 인하여 ‘광주민주유공자’의 예우를 받고 있으며, 1978년 대학 재학 시절 벌인 유신정권 비판 활동과 그로 인한 구속과 관련하여 이번 12월 4일 서울 지방 법원으로부터 소정의 형사보상금을 지급한다는 결정을 통보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1975년 고교시절 겪은 고초와 관련하여 법적 판결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1975년 5월의 저는 17번째의 생일을 넘기지 않은 소년이었습니다. 성인의 법적 기준인 18세도 되지 못한 소년들의 사건을 지금 재판장님께서는 심의하고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의 법적 사실과 실체적 진실 사이에는 일정 정도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소를 올린 저희들도 잘 알고 있는 바, 존경하는 재판장님께서 두 진실간의 차이를 잘 헤아려 달라 호소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올린 여러 서류에 잘 드러나 있듯이, 성년도 되지 못한 열일곱, 열여덟 학생들 16명을 광주 일고 학교 당국은 집단 제적시켰습니다. 제적 사유에 기재된 “유신 정권 반대 정치활동 관련”이라함은 긴급조치에 의거하여 집단 제적을 단행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2006년에 심사한 민주화운동 관련 인정 과정에서 국가권력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1974년 10월과 11월 광주일고에서는 두 차례의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가 감행되었습니다만, 당시 이 시위를 주도한 지병주나 손호상은 제적을 당하지 않았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1974년 8월 23일 긴급조치 4호가 해제되었고 따라서 74년 10월에는 정치활동을 이유로 학생을 제적시킬 법적 근거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1975년 4월 8일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면서, 광주일고 학교 당국은 긴급조치에 의거하여 박석면 이하 17명의 학생들을 제적시킬 법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긴급 조치에 의하면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소속 학교·단체·사업체 등에 대해 제적·해임·휴교·폐간·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습니다. 17인의 학생을 영장 없이 체포하였고, 집단 제적 조치를 한 것은 전형적인 긴급조치의 적용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적은 다 똑같은 제적이 아닙니다. 지난 군사독재 치하에서 대학교에 다니면서 수 천 명의 대학생들이 소위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제적되었던 사실을 재판장님도 잘 기억하실 걸로 압니다. 대학생의 제적은 고교시절의 제적과 달리, 일시적인 조치입니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늘 제적생은 다시 복학되었고, 언젠가는 졸업장을 받아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학생의 제적은 본인에게 그다지 절망스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고교시절의 제적은 다릅니다. 고등학생이 정치적 이유로 제적된 경우도 매우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아직까지 제적된 고등학생이 다시 복학하여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을 겁니다. 10대의 시기가 지나가 버리면 20대의 나이에 고등학교의 교복을 다시 입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관행이지 않습니까?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만남의 안정성과 지속성, 이것과 아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습니다만 고교시절에 맺는 교우 관계, 친구들과 오고가는 우정이 없는 그 독학생에게 남는 것은 황량함뿐입니다. 지금 저는 법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학생의 제적과 달리 고등학생의 제적은 아직 인생의 침로조차 정하지 못한 미성년자들을 사회 밖으로 내쫓아낸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냉혹 그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제적당하는 것은 이후 정상적인 사회 진출의 차단을 의미하는 일이었기에, 학교를 가지 못하고 이 학원 저 학원 떠돌아 다녀야 하는 자식의 처지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아픈 가슴이야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법무당국의 반론 그대로 우리가 겪은 인권 유린을 입증할 법적 서류가 부족함을 안타깝지만 우리도 인정합니다. 서광주 경찰서의 연행이 영장도 없는 불법 연행이었음을 그때 우리는 몰랐습니다. 수없는 날과 밤, 우리가 당한 형사들의 린치가 모두 불법적인 인권 유린이었음을 그때 우리는 몰랐습니다. 17명의 학생들이 서광주 경찰서에서 불법 구금, 린치를 당했습니다만, 38년의 세월이 경찰서의 유치 기록을 증발시켜 버렸고 제출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기억과 당시 일간 신문의 기사밖에 없습니다.
주동자 최수일씨의 경우 이름모를 수사실에 끌려가 차마 입에 꺼낼 수도 없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우리는 그러한 고문이 정부의 당연한 권한인 줄 알았습니다. 어린 미성년자를 이렇게 가혹하게 처우한 것은 저 악랄한 일본제국주의 치하 말고는 세계사에서 기록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최수일씨가 당한 고문에 대해 우리들의 인우 보증말고는 제출할 수 있는 법적 자료가 없습니다. 최수일, 오순기, 황광우는 어이없게도 광주교도소 징벌방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악독한 행위를 증거할 법적 문서는 당시 검찰이 남긴 <보고사건>이라는 직인이 찍힌 한 쪽의 공소취하 결정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문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 행위가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만, 고문의 악랄함은 고문의 증거를 제시하기 힘들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악행을 입증할 법적 문서가 부족함을 저희도 인정합니다.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된 상황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과 서광주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이 명백합니다만, 이것이 본 건의 실체적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입증할 법적 서류가 미약함을 저희도 인정합니다. 지금 피고의 위치에 선 경찰당국은 모든 죄행의 입증 의무를 우리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강간자가 강간을 해놓고 강간을 당한 여성에게 강간의 증거를 대라고 도리어 겁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법무 당국은 우리가 겪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의 증거를 대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차분하게 당시의 사태를 법의 논리에 입각하여 해석하여 봅시다. 1975년 5월 1일을 기하여 광주일고 학생들은 시위를 감행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5월 1일 정작 광주일고 교정은 평온하였습니다. 아무런 집회도 없었고,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학생이 정치활동을 이유로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구금되었다면 그 모든 조치는 불법이었던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데 도둑질을 할 의사를 품었다고 절도죄를 적용하여 연행하고 구금한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불법적 조치인 것입니다. 경찰 당국이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법적 증거의 제출에 대해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법은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적용되는 것이지, 인간의 마음속 의사에까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지도 않은 집회와 시위>에 대해 서광주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16명의 학생들을 연행한 것, 이후 10일간 유치장에 구금한 것, 주동자 최수일을 비롯하여 많은 학생들을 고문한 것, 이후 3인의 주동자를 광주교도소의 징벌방에 투옥한 것, 그리고 16명의 학생을 집단 제적한 것 이 모든 조치는 긴급조치 하에서 가능했던, 가장 전형적인, 가장 악랄한, 독재정권의 탈법적 권력남용이었던 것입니다.
법무당국은 우리에게 소멸시효를 묻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지 7년의 세월이 지났으므로 피해당사자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법적으로 호소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소멸 시효 논리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현실의 비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대한민국의 법이 우리가 겪은 인권유린을 치유하고 배상해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인권유린을 당했으나, 자신의 피해를 법정에 호소하였을 경우 법정으로부터 위로와 배상을 받기는커녕 되지도 않을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눈총을 받기 십상인 상황에서 누가 국가권력을 상대로 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까요?
1994년도 광주일고 학교당국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거라도 감지덕지 고마운 일이 아닌가하여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인받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의 행위가 범죄 행위가 아니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공인받게 된 사실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국가 폭력을 당하고 38년 동안 우리는 침묵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국가의 폭력을, 참고 넘어가야 하는 개인의 불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던 중, 2012년 5월 보도된 긴급조치 1호 피해자의 배상 판결을 접하고 난 후, 우리도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2013년 3월에 결정된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을 대하면서 우리도 배상의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긴급조치에 의해 고등학교를 강제로 떠나야했던 17명의 소년들은 38년의 세월이 지난 2013년 4월에 다시 만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사법부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세월은 우리의 기억을 흐리게 하고, 진실마저 망각하게 만듭니다. 1975년 4월 8일 박정희 독재정권이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독재정권은 그 날 4월 8일 이수병 등 인혁당 관련자 8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며, 사형 선고 후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 이튿날 사형을 집행하여 버렸습니다. 1975년 4월 9일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가슴에 굵은 눈물을 뿌리게 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의 가슴에는 그 어떤 독재의 칼날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이 있었습니다. 4월 11일 자신의 배를 갈라 독재정권에 항거한 서울대학생 김상진의 할복이 바로 그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1975년은 공포정치가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여가고 있던 시기였으며, 동시에 한줄기 저항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던 시기였습니다. 이것이 본 사건의 배면에 깔린 실체적 진실입니다. 저희 16인의 광주일고생들이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감행하려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전에 연행, 구금, 구속, 제적되었던 것도 바로 이 독재와 저항의 역사 그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어린 소년들에게 자행된 인권유린은 은폐되어왔고, 세월은 너무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진실조차 녹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소년들은 자라 이제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지금도 우리들은 자다가 고등학생의 교복을 입고 광주일고의 그 교실에 앉아있는 꿈을 꿉니다. 이제라도 소년들이 사춘의 시기에 당한 인권유린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길 바라며, 압제의 장막에 가리어진 실체적 진실을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뒤늦게나마 법적 정의를 확고하게 세워줄 의무가 오늘의 사법부에 있음을 말씀드리면서 본 호소문을 맺고자 합니다.
2013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