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이 회고하는 윤상원

2
38
This post is last updated 117 days ago.

“윤상원은 탁월한 소리 광대였다!”

[삶이 아름다운 당신 2] ‘판소리 윤상원’ 창작 중인 임진택 명창

 

살자, 그래 살아보자! 그래, 다시 일어서자!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인생에 지친 이웃에게 용기를 나눠준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은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등불을 켠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공동체를 가꾼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을 위로하며 사랑을 베푼다. 이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은 월 1회 연재한다. [편집자말]

▲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윤상원기념사업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임진택(67) 명창의 창작판소리 ‘오월 광주’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시대에 앞서 나갔던 벗 윤상원(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을 잊지 않았다. 벗이 떠난 지 10년이 되던 1990년, 윤상원을 기리며 ‘오월 광주’를 만들었다. “이 땅의 민중이여/ 오월의 넋이, 광주의 죽음이/ 부활하는 그날까지/ 일어서라! 투쟁하라! 쟁취하라!/ 산자여 따르라!”라고 외쳤다.

광산구청(구청장 민형배)과 ‘윤상원기념사업회'(이사장 김상윤)가 윤상원 열사를 창작판소리로 되살리기 위해 협약을 추진 중인 가운데 임진택 명창이 윤상원 열사에게 바치는 두 번째 창작판소리 ‘판소리 윤상원’을 준비 중이다. 윤상원 열사는 들불야학 창립 멤버 그리고, 노동운동가와 시민군 대변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전남대 연극반 배우 출신으로 탁월한 소리꾼이자 광대였다. 임진택 명창이 시민군 대변인이 아닌 소리꾼 윤상원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오월 광주’에 이어 ‘판소리 윤상원’ 창작 중인 임진택

▲ ‘오월 광주’에 이어 ‘판소리 윤상원’을 창작 중인 임진택 명창 ⓒ 조호진

  • 윤상원을 기리는 창작 판소리를 계획 중이다.

“윤상원기념사업회와 ‘판소리 윤상원’을 만들기로 하고 논의 중인데 거의 마무리 단계다. 벗 상원을 그리며 만든 첫 번째 창작판소리로는 ‘오월 광주’가 있다. ‘오월 광주’는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90년, 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한 상원을 그리며 만든 작품이다. ‘오월 광주’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시민군이 사수하던 전남도청에 공수부대가 투입된 5월 27일까지 열흘간을 판소리로 풀어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상원이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없는 사건 중심의 서사이다.

‘판소리 윤상원’에서는 상원이가 주인공이다. 윤상원의 마지막 결단과 죽음, 도청의 마지막 밤의 윤상원을 이야기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는 무엇이고 무엇이 패배인가에 대한 윤상원의 고뇌와 생각을 담아내려고 한다. ‘판소리 윤상원’은 판소리 굿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만만치 않은 작업일 것 같다. 젊은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파격적이면서 초현실적인 제의적 판소리로 만들 계획이다.”

  • 윤상원 열사를 벗이라고 했는데 언제 처음 만났나.

“상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위치한 YMCA 강당 무진관에서였다. 그 무렵 서울을 떠나 광주에 살던 소설가 황석영 선배가 광주 민족민주진영 송년행사에 불러주어서 탈춤의 채희완과 노래꾼 김민기와 함께 내려갔다. 나는 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蜚語) 중 한 편에 창을 붙인 ‘소리 내력’을 공연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서 “성님, 나도 ‘소리 내력’을 좀 할 줄 아는디….”라고 해서 내가 ‘어찌 소리 내력을 헐 줄 아냐?’고 물었고 그는 ‘성님의 소리 내력을 듣고 따라 했지라!’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상원이었다.

1978년 4월 성공회 서울대교구 강당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백범사상연구소 공동으로 ‘제1회 민족문학의 밤’이라는 판이 만들어졌는데 고은 시인과 백기완 선생이 포효하며 시를 낭송했다. 당시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극도의 탄압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벌어진 그 판에서 나는 ‘소리 내력’을 강창 했는데 소설가 박태순 선배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전국에 보급했는데 상원이가 그 녹음테이프를 듣고 따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원이가 ‘내 소리 내력 한 번 들어볼라요?’라고 하기에 ‘그럼, 뒤풀이에서는 자네가 한 번 해보소!’라고 말했다.”

 

“상원이는 나 말고 ‘소리 내력’을 공연한 또 한 사람의 소리꾼”

▲ 창작판소리 ‘오월 광주’를 공연하고 있는 임진택 명창 ⓒ 임진택

1972년 발표된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에 소리꾼 임진택이 창을 붙인 현대적 창작판소리 ‘소리 내력’은 세 부분으로 된 담시 ‘비어'(蜚語)의 첫째 대목이다. 줄거리는 시골에서 상경한 돈도, 학벌도, 빽(배경)도 없는 안도(安道)라는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먹고살기 힘든 암담한 현실에 절망해 ‘에잇 개 같은 세상’하고 욕을 했다가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돼 500년간의 금고형에 처해진 뒤 목과 팔다리가 모두 잘린 채 독방에 갇힌다.

지배계층의 혹독한 탄압으로 표현의 자유마저 빼앗긴 안도는 몸뚱이를 벽에 던지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전한다. 원한에 사무친 안도가 밤마다 ‘쿵~쿵’ 소리를 울리자 겁에 질린 지배계층이 안도를 사형시킨다. 그런데 안도의 원한 맺힌 소리가 중단되기는커녕 서울 장안에 밤낮으로 들리면서 돈과 힘 있는 지배계층들이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게 ‘소리 내력’의 줄거리다.

임진택의 첫 공연 장소는 서대문 구치소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유인태(전 국회의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받음.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냄)를 큰누나 집에 숨겨주었다가 범인 은닉죄로 구속된 임진택은 서대문구치소 7사7방에서 간수들 몰래 진행한 오락시간에 10여명의 잡범들을 청중으로 삼아 ‘소리 내력’을 강창 하였는데 이것이 임진택의 첫 창작판소리 공연이 되었다.

  • 윤상원 열사가 소리꾼이었나.

“상원이와 나는 여러 면에서 같았다. 나는 서울대 외교학과(현재는 정치외교학부로 통합) 69학번이고 상원이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으로 전공이 같았다. 게다가 대학에서 똑같이 연극반과 탈춤반 활동을 했다. 상원이의 판소리에 대한 재능과 관심은 그저 따라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날 뒤풀이에서 상원이가 ‘소리 내력’을 20분가량 했는데 나보다 잘했다.

내가 민족문학의 밤에서 했던 ‘소리 내력’은 작창(作唱)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강창(講唱)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상원이는 나보다 더 걸걸한 목성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상원이의 목소리는 광주 토종으로 서울 물을 먹은 내 목소리보다 판소리에 더 잘 어울렸다. 상원이는 나 말고 ‘소리 내력’이라고 하는 창작판소리를 공연한 또 한 사람의 소리꾼이었다.”

 

“광대 기질 넘친 상원이는 진정한 열사였다”

▲ 광주시 광산구에 조성된 윤상원 열사 생가를 찾은 임진택 명창. ⓒ 임진택

  • 윤상원 열사도 광대 기질이 있었나.

“상원이는 전남대 1학년 연극반 때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왕’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역할을 맡고, 나 역시 서울대 1학년 연극반 때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이란 작품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역할을 했다. 상원이와 내가 대학 1학년 때 똑같이 ‘테이레시아스’라는 노인 역을 맡은 것은 우리 목소리가 양성이 아닌 탁성 곧, 판소리에 적합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 의기투합한 상원이와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새며 이야기하며 논 뒤에 1980년 1월 1일 새벽 무등산을 올라가서 새해를 맞이했다. 상원이는 광대 기질이 넘친 친구였지만 그 어두운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오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진정한 열사였다.”

  • 그 뒤에 다시 만났나.

“상원이를 다시 만난 것은 1980년 3월 15일 광주YMCA 무진관에서 열린 극회 ‘광대’의 창립공연 행사에서였다. 그때 서울에서 가수 양희은과 국악인 김영동 그리고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노찾사의 전신)와 함께 내려가서 찬조 출연했다. 그날 창립행사에서 광주항쟁의 영원한 홍보부장 박효선이 연출한 마당극 ‘돼지풀이’가 공연됐는데 어쩐 일인지 상원이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원에게 ‘자네도 광대 패인데 왜 출연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상원이가 ‘나는 광대패 일보다는 야학과 노동운동 일이 바빠서 함께 못했구먼이라우’라고 말했다. 광대패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묵직한 말이 묘한 느낌으로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 느낌은 두 달 뒤인 1980년 5월 전남도청의 처절한 항쟁이 진압된 후에 확인되었다.”

  • 1980년 3월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었나.

“그날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그 무렵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형이 추진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광주지부 조직책이 된 상원이가 1980년 5월 1일부터 3일까지 2박3일간 경기도 부평에서 진행된 전민노련 창립워크숍에서 ‘소리 내력’ 공연을 했다고 하더라. 그것이 윤상원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이 사실은 노동운동가 유동우 형이 최근에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다.”

 

“상원이 나를 성님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벗이었다”

▲ 임진택 명창은 창작판소리 ‘오월 광주’는 광주에 대한 통곡이고, 상원에 대한 그리움이며, 분단독재 수구세력에 대한 울분이라고 말했다. ⓒ 임진택

  • 윤상원 열사와 임진택 명창 간의 관계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들었다.

“상원은 나를 성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아우라고 생각했는데 상원이 오히려 나보다 하루 먼저 태어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상원이 산화한 후였다. 그의 주검에 ‘윤상원 1950년 8월 19일(음력)생’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상원이보다 하루 늦은 1950년 8월 20일(음력)생이다. 학번만 같고 후배라고 생각해 말을 놨는데 실은 나이가 같았다. 우리는 형과 아우가 아니라 벗으로 지의(之義)을 맺었어야 옳았는데 학번만 보고 서로 실수했다.”

임진택은 대학 졸업 후 TBC-TV(동양방송·JTBC 전신) 프로듀서로 일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방송을 통폐합을 하면서 1981년 KBS-TV로 강제 이직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을 감추기 위한 일환으로 KBS에 ‘국풍81’이라는 관제 문화행사를 지시했는데 하필이면 임진택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청와대에 불려가 국풍81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임진택은 청와대를 나와서 방송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피신했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이 널리 불리면서 윤상원 열사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윤상원 열사에 대한 그리움도 더 커질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을 들려 달라.

“지난해 5월 광산문예회관에서 창작판소리 ‘오월 광주’를 공연하면서 상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상원이! 내가 방송국 PD를 그만 둘 때, 용기를 내 결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기는 상원이 자네에 대한 우정과 의리 때문이었네. 광주를 위해 싸우지는 못할망정 광주를 모욕하고 광주정신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서 나는 기득권 다 버리고 본격적인 광대의 길로 나섰네. 상원이! ‘오월 광주’라는 창작판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광주항쟁 10년이 되던 해에 자네를 생각하면서 내가 새로 짠 판소리라네.

나는 이 작품에서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과 새벽,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결단하는 자네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네. 마지막 장면은 판소리 ‘윤상원전(傳)’인 셈이지.  이 작품을 짜고 연습하면서 마지막 대목에 가면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하곤 했었네. 그 통곡은 80년 광주 상황에 대한 통곡이며 자네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일 테지만 그것은 동시에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분단독재 수구세력이 판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울분이 겹쳐 나온 통곡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네. 잊을 수 없는 나의 벗 상원이! 자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보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오마이뉴스(ohmynews)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2 댓글

  1. 오월광주 윤상원가

    이번주 일요일 5월26일 3시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공연한다고해요
    2시간 30분간의 소리판이라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