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2)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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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빛낸 의인들(2) 윤상원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 남기고 불꽃이 되다.
뉴턴을 꿈꾸며 60년대 농촌서 순박한 소년시절
초등학교 일기장엔 생명·자연·인간 사랑 가득
5·18때 목숨 바친 항거…’사태’를 ‘항쟁’으로 완성

 

 

 

윤상원 ‘열사’라고 부른다. 나는 좀 낯설다. 어려서 안중근 의사는 존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또 윤상원을 오월의 전사라고도 부른다. 좀 무섭다.

내가 만나본 윤상원은 부드러운 분이었다. 전사가 아니었다. 내가 만나본 윤상원은 정이 많은 분이었다. 투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윤상원하면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릴 것이나 내가 만나본 윤상원은 조각상을 착각하게 하는 꽃미남이었다.

이번에 나는 윤상원의 일기를 읽었다. 김구의 파란만장한 삶은, 만일 <백범일지>가 아니었다면 그 감동을 후대에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역시 그의 일기가 감동적이었다. 윤상원은 1960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상원의 진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1월 16일: 일어나 보니 눈이 함빡 쌓였다. 나는 기뻐서 스케이트를 타고 다녔다. 1월 20일: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나는 꼬리 연을 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연은 하늘 높이 올랐다. 정말 기뻤다. 개도 좋아하며 뛰어다녔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2월 7일: 뉴턴은 능금이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물리학상의 인력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이다.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들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보겠다며 고사리 손을 꼬옥 쥔 소년이었다.

“2월 19일: 할머니께서 새끼 돼지를 사오셨다. 돼지는 꿀꿀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4월 30일: 지금은 못자리 철, 쟁기로 논을 갈고 못자리에 씨를 뿌리느라 온 들녘이 바쁘다.” 이곳은 임곡이다. 마을 앞으로 황룡강이 흐른다. ‘개골개골’ 개구리가 소년의 동무였고, ‘꿀꿀꿀’ 돼지 새끼가 소년의 친구였다. 1960년대 한국 농촌에서 자란 순박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5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좀 더 대견스러워진다. 그런데 이 일기는 무엇인가?

“1961년 5학년 1월 3일: 집에서 동생과 놀았다. 나는 동생에게 맞고 울었다. 울고 나서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고 어이가 없었다.” 천성이 순한 양이었던가?

“8월 5일: 닭과 벗을 삼아 먹이를 주니 나를 따르게 되었다. 가축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닭이라 해서 천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같이 대우하고 친절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닭도 생명체이기에 사람처럼 친절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말씀을 설파하고 있는 이 분은 성철 스님이 아니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뛰어넘어 감정을 갖는 유정동물들과 공생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는 이 분은 피터 싱어가 아니었다. 열두 살 먹은 소년이었다.

“3월 22일: 나는 책값을 일찍 내서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책값을 못내서 울상을 하고 있었다. 돈이 없어 책을 못사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소년의 연민은 현실의 불평등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이웃의 불우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어진 마음이었다.

“4월 19일:4.19 데모 사건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유에 몸 바친 세월이다. 어린 학도들의 혁명으로 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79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윤상원과 함께 고 박기순 누이의 무덤에 갔다. 망월동에 갔다. 그때 상원은 1년 후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있었다. 자유를 위한 항거에서 자신이 목숨을 바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 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의 행동에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눈길은 부드러웠다.”

1980년 5월 26일 윤상원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고교생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역사의 증인이 되라.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은 자칫 북괴의 사주극으로 내몰릴 수도 있었던 ‘사태’를 ‘항쟁’으로 완성시켜가고 있었다.

전남대 윤상원기념홀 내부

오월이 오면 우리는 죄인이 된다.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시달렸다. “너, 목숨을 내놓을 수가 있어?”

지난 5월 2일 윤상원을 기리는 홀이 전남대에 들어섰다. 보기에 좋았다. 나의 눈에 꽂히는 글귀가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 윤상원이 우리에게 준 물음은 “너, 죽을 수 있어?”가 아니었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겉으로는 맨날 자유여, 평등이여 외치면서 속으로는 제 잇속이나 챙기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요즈음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황광우 (합수 윤한봉 기념 사업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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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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