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사마천_『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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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은 옳은가, 그른가_ 사마천 『사기史記』

 

『춘추』를 이어라!

태사공(太史公)은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 왕실의 태사로서 아주 먼 옛날 순(舜) 임금의 시대와 하대(夏代)로부터 천문을 관장하여 공명이 빛났다. 그 후 우리 집안이 기울었는데, 그 전통이 나에게서 끝날 것인가? 너는 다시 태사가 되어 우리 조상의 직분을 계승하여라. 주나라 유왕과 여왕 이후에 왕도가 무너지고 예악이 쇠퇴하자, 공자는 사라진 옛 전통을 다시 복구, 정리하여 『시경』과 『서경』을 편찬하고 『춘추』를 지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학자들이 본받고 있다. ‘기린을 얻었다’는 『춘추』의 마지막 기록 이래 400여 년이 흘렀지만, 그간 제후들은 서로 영토 합병에 몰두하여 사관의 기록이 방기, 폐절되었다. 이제 한(漢)나라가 일어나 천하가 통일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역사 기록이 폐기될 것 같아 심히 두렵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여라.”

사마천은 머리를 숙이고 울며 말하였다.

“소자가 영리하지 못하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옛 기록을 빠짐없이 정리하겠습니다. 어찌 방심하겠습니까?”

사마천(司馬遷, BC145? ~ BC-86?)은 ‘태사공자서’에서 『사기』를 짓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서를 쓰는 일은 집안의 가업을 잇는 일이자, 공자가 쓴 역사서인 『춘추』를 잇는 일이라고 했다. 『춘추』를 잇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공자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왕을 찾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끝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자 노나라로 돌아와 책을 쓰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데 전념했다. 그 책 중 하나가 『춘추』이다. 공자는 『춘추』에서 사악한 왕과 신하를 비판하고, 훌륭한 인물을 높이 평가하여 후세에 그 인물들의 이름을 남기려고 했다. 그래서 『춘추』가 나온 이후에 사악한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공자의 역사의식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한(漢)나라의 태사령으로 근무하면서 역사책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뜻을 계승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런 역사의식,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천은 『사기』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사기』를 쓰게 된 이유가 단지 『춘추』를 잇겠다는 역사의식과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이것뿐이었다면 『사기』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고 고결한 목적으로 승화시키려는 피나는 노력이 『사기』를 쓰게 한 원동력이었다.

 

궁형을 자청한 이유는?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사마천이 겪은 시련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이릉의 사건으로 고난을 겪는다. 이릉은 한 나라의 장군이었다. 같은 한 나라의 장군 이광리가 흉노족을 공격했을 때, 이릉은 배후에서 기습하여 흉노족을 크게 무찔렀다. 이릉이 흉노족과 싸워 승리하자 왕과 신하들이 잔치를 벌이며 축하했다. 그런데 이릉이 8만 명의 흉노족 군대에 포위되어 항복하자 왕과 신하들의 태도를 돌변하였다. 신하들은 이릉을 모함했다. 이릉은 무기와 식량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마천이 나서서 이릉을 변호하였다. 사마천은 이릉과 같이 공부한 사이이지만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 사마천은 이릉이 원래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다는 점, 이릉이 목숨을 걸고 한 나라와 임금을 위해 싸웠다는 점, 그리고 지금 항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러자 한 무제가 격노하여 사마천을 체포하였다. 감옥에 투옥된 사마천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사마천의 죄목은 임금을 속인 죄였다.

임금을 속인 죄는 허리를 잘라 죽이는 사형죄에 해당하였다. 사마천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50만 전 정도의 돈을 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형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돈이 없었다. 도와줄 친척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형을 면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궁형을 감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궁형은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가!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고 평민, 노예조차도 궁형을 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 자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살아남기 위해 궁형을 자청했다. 왜 그랬을까?

사마천은 절친한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썼다.

처벌을 받고 치욕스럽게 살아가겠다는 것이 나의 본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개똥밭 가시덤불에 묻혀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내 목숨을 쉽게 버리지 못한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던 일을 못 한 데 대한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이대로 묻혀 버린다면 나의 글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 이 저술을 완성시키기 전에 이릉의 화를 당했습니다. 이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채 중도에서 끝난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극형을 당하면서까지 분노의 기색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반고, 『한서漢書』 ‘사마열전司馬列傳’

사마천은 분명히 말했다. “궁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일지라도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 바로 “『사기』를 쓰기 위해서, 죽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궁형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사마천은 궁형을 받았다. 가슴에 한을 가득 안은 채.

 

하늘의 뜻은 존재하는가

궁형을 받은 후 사마천은 다시 복권되었다. 벼슬도 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임금의 총애도 받았다. 그러나 벼슬이 아무리 높고, 임금의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자신이 궁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생각을 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에 나서 옷이 젖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정신이 불안정했다. 밖에 나가면 어디를 갈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좌왕하였다. 사마천은 극도의 수치심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런 고통을 극복해야 했다. 고통을 극복하는 길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혼신의 노력을 다해 수행하는 것이었다. 『사기』는 사마천이 삶 속에서 느낀 고통을 승화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사마천은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 이릉을 비난하는 신하들의 치졸한 모습, 임금의 부당한 처우, 감옥에서 받았던 가혹한 고문, 궁형을 받아야 했던 비참한 신세, 궁형을 받고 난 후 느껴야 했던 수치심. 그래서 사마천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진리란 무엇인가?”, “진정한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였다.

『사기』는 130권으로 ‘기전체(紀傳體)’ 체재로 이루어져 있다. 『사기』를 구성하는 가장 대표적인 요소인 ‘본기’와 ‘열전’에서 ‘기’와 ‘전’을 합쳐 ‘기전체’라 부른다. 기전체는 동양에서 역사를 서술할 때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서술체재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가 기전체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천은 인간을 탐구하려는 목적에서 『사기』의 체계는 기전체로 하였다. 역사 서술 체재에는 기전체 이외에 어떤 사건의 전후 관계를 죽 써 내려가는 ‘기사본말체’와 연대순으로 일어난 사건과 인물을 엮어 나가는 ‘편년체’ 방식이 있다. 그런데 기사본말체나 편년체의 방식으로는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세상을 움직이는 제왕, 제왕을 정점으로 세상을 분할하여 운영하는 제후, 그리고 제왕과 제후들 사이에서 작은 일을 구체적으로 처리하는 영웅호걸들, 사마천은 이렇게 사람들을 분리시켜 놓고 그들의 활동을 분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사마천은 기전체라는 독특한 역사 서술 방법을 만들었다.

인간을 탐구하려는 사마천의 의도는 분량에서도 나타난다. 전체 130권 중 가장 많은 것이 70권으로 된 ‘열전’이고, 다음으로 30권의 ‘세가’, 그리고 10권의 ‘본기’이다.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이 세 가지가 『사기』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다양한 영웅호걸들을 다루는 ‘열전’이 전체 분량의 반을 넘는다.

사마천의 의도는 인간에 대한 탐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늘의 뜻이 공평무사하여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인덕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음에도 굶어서 죽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학문을 좋아하였던 안연은 항상 가난해서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상해 준다고 하면 이럴 수가 있는가? 춘추시대 도척 같은 큰 도적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포악무도한 짓을 함부로 하며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끝내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도척이 덕행을 쌓았기 때문인가? 근자에 이르러서도 품행이 정도를 벗어나 오로지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하는 일만 하면서도 안락하고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거망동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지 않은가? 만약 하늘의 뜻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하늘의 뜻은 옳은가 그른가?

– 사마천, 『사기』 ‘백이열전’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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