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억을 걷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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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기억을 걷다』는
천년 역사 고도,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는 오늘의 책이다.
광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며……

 

서문: 왜 광주인이고 광주 정신인가?

『남도의 기억을 걷다』가 세상에 나온 지 꼭 2년이 지났다. 출판 전 필자는 1년 반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전남일보』에 남도 역사기행을 연재하면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푹 쉬고 싶었다. 그런데 몇 개월의 쉼도 없이 또 광주 역사기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도의 기억을 걷다』가 출판되자 필자가 근무하는 춘태학원의 최석태 이사장께 책을 보내드렸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되어 장문의 소감문을 보내왔다. 최이사장이야말로 『남도의 기억을 걷다』의 최고 독자인 셈이다.

최 이사장은 소감문에서 “의향이라는 정체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관통하는 선각자나 신념 있는 인물들이 실행한 삶의 신조이고 얼의 결집이었다는 근원적 인식을 가져다주었으며, 민주화의 성지 남도는 이에 따른 역사적 뿌리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었다.”면서 “남도인으로서의 정신의 재정립과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성찰하여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광주는 초기 마한시대의 영향이 크고 그 뒤 백제, 후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많은 6개 단위 국가적 역사와 문화적 흐름이 융합된 희귀한 천년의 역사 도시”라고 진단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광주가 천년 역사 도시에서 창조 도시로 재조명되어 역사의 빛 속으로 나와야 한다.”는 견해도 피력하였다. 최 이사장의 광주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견해가 매우 흥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개의 큰 역사적 물줄기가 융합된 희귀한 천년 역사 도시”라는 해석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탁견이었다.

편지 말미에 광주를 천년 역사와 창조 도시 광주로 재인식할 수 있도록 『광주의 기억을 걷다』라는 새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면서 골치아픈(?) 숙제마저 내주었다. 그러고는 꼼짝할 수 없게 광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필자의 시대적 소명이라는 말로 묶어버렸다. 지난 1년 동안 광주 역사기행을 또 연재하게 된 이유였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광주의 역사와 씨름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소명을 실천한다는 기쁨 또한 만만치 않았다.

 

광주가 남도의 중심 치소가 된 것은 신문왕 6년(686), 9주의 하나인 무진주가 되면서 지방장관인 도독이 파견되어 15개 군을 관할하면서부터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광주는 천년을 훨씬 뛰어넘는 고도인 셈이다. 그러나 중심 치소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광주는 하이테크 기술을 갖춘 사람들의 삶의 보금자리였다.

최초의 광주인이라 할 수 있는 12만 5,000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치평동에 살았으며, 청동기시대에는 용두동 송학산 기슭에 북방식 고인돌을 남기기도 했다. 철기시대 신창동 사람들의 기술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들이 남긴 155센티미터 두께의 벼 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확인된 세계 최대의 벼 생산 자료이며, 신을 만들 때 사용하던 틀인 신발골도 세계 최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비단과 현악기, 발화 도구, 수레바퀴는 한국 최고다.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무등산 자락과 광주천을 배경으로 살아온 광주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명화동·월계동 장고분도, 신라시대 축조된 무진고성도, 증심사·원효사 등 불교 자취도, 광주에서 거병하여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흔적도, 전국 최초인 향약 시행 장소도, 최고급 분청사기를 구워내던 가마터도 그 흔적들이다.

그러나 세월은, 인간은 무서운 파괴자였다. 남아 있는 흔적보다 훨씬 더 많은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은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지만, 더러는 광주읍성처럼 일제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는 개발에 눈이 뒤집힌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마지막 남은 광주의 옛 모습마저 깡그리 없애버리고 만다. 태봉산이 헐리고 경양방죽이 메워지고 유림수가 베어진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미래를 보지 못한 단견이 가져다주는 파괴는 아픔이다. 그러나 아픔도, 추억도, 흔적도 다 우리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역사요 문화이다.

천년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들을 낳았다. 견훤, 박상, 이선제, 박광옥, 고경명, 김덕령, 양진여·양상기, 최흥종, 전상의, 기대승, 정충신, 정율성, 임방울, 최병채, 박준, 박관현, 윤상원…… 양림산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들도, 뱃사공으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서창 면민들을 구제한 뱃사공 박호련도 무등산이 낳은 영웅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한말 어등산에서 목숨 걸고 싸운 의병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당시 선두에 선 학생도 시민들도 다 무등산이 품은 광주의 영웅들이다.

그 영웅들이 죽음으로 지켜낸 가치가 의로움이며, 그 의로움의 가치가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발현된 것이 민주·인권·평화의 광주 정신이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형상화된 기념탑이 내포한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축적된 광주 정신은 광주인의 자긍심이 되고 정체성이 된다.

필자는 광주 정신인 민주·인권·평화는 광주만의 정신이 아닌 한국인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정신이고 가치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 전 세계인의 정신이고 가치여야 한다. 그 정신과 가치가 무등산 자락에서 잉태되었음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광주 정신은, 광주는 어딘지 허전하다. 광주를 벗어나지 못한 답답함도 있다. 어딘지 갇힌 느낌도 받는다. 이제 광주는 자랑스러운 광주 정신으로 한국민과 세계와 소통해야 하며, 창조의 도시로 다시 부활해야 한다.

광주는 빛고을이다. ‘빛’이 갖는 창조성은 이미 2,000년 전 신창동 유적지에서 확인된 바 있다. 자긍심이 된 광주 정신 위에 창조 도시 광주가 이젠 미래의 꿈이었으면 싶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책의 모태가 된 지난 1년여에 걸친 『전남일보』의 칼럼 ‘노성태의 광주 역사기행’은 즐거웠지만 고된 여정이었다. 지면을 할애해준 전남일보사와, 다듬어 예쁜 책으로 만들어준 도서출판 살림터에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늘 든든한 동반자 신봉수 선생의 꼼꼼한 교정과 지적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책으로 만들기 위해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면서 너무도 부족함을 절감하곤 했다. 그러나 격려해준 많은 독자들의 응원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광주의 역사와 정신을 사랑하는 분들이 가슴에 품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4월
심청원에서

 

노성태
'다시 독립의 기억을 걷다', '광주의 기억을 걷다' 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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