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인일기념 121주년에 조명해 본 의암성사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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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_인일기념 121주년에 조명해 본 의암성사 손병희

이무성_광주교구(전 광주대 교수)

*이 글은 ​[천도교 신인간 2019년 2월호] 에 실린 글입니다.

 

일본의 조선총독부 마지막 총독 아베노부유기의 패망 후 조선을 떠나면서 모멸적이고 무례한 이야기를 오늘날의 슬픈 한국의 현실에서 공유하겠습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 장담하건대 조선국민이 제 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코 조선국민은 고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러나 나 아베노부유기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위 굴욕적이고 치역적인 전범 제국자의 오만함을 응징 할 수 없는 현실. 올해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마냥 얄밉게 떠올려집니다. 작년 광주교구에서 121주년 인일기념식 강연초청을 받고 의암 손병희 성사에 대한 자료를 강좌준비를 하면서 찾아보았습니다. 의암 성사에 대하여 인물사로 기록된 손병희 성사에 대한 기술된 내용들을 두 대목만 줄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손병희 / 민족대표 및 천도교 3대교주
3.1운동의 주역, 3.1운동 직전 <독립신문>과 <공약삼장>을 보성학원에내 보성사인쇄소에서 은밀하게 찍고 있었다. 이 일에 사장인 이종일, 담당기술자 그리고 사동 등 네 사람만 참여하여 밖에 커튼을 드리우고 극비로 작업을 진행하였다.-이이화, 『한국인물사』

​손병희 / 소소거사, 의암, 손응구, 손규동, 이상헌
동학 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 본관은 밀양, 초명은 손규동, 손응구. 일본 망명 때는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로부터 법통을 전수받아 제3대 교조로 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 인일기념일입니다. 인일기념일은 그냥 연례행사로서 형식적인 그 날을 단순히 기념하여서만은 아니 됩니다. 성사의 열정과 헌신으로 탄압받고 숨어서 활동하던 은도의 시대에서 천도교로 현도의 시대를 열고 이후 민족자주를 내세워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활발한 독립운동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펼친 의미로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의암성사의 동학, 천도교에서 행하졌던 발자취는 그 자체가 한국근대사에 뚜렷한 족적으로, 좌절과 낙담속의 민중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끊임없는 저항으로 이어지게 하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동학이라는 한 뿌리로서 천도교와 대종교 등 민족종교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자임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어 3.1 독립운동 100주년 행사내용에 이 부분이 우선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손병희 성사의 부인되시는 주옥경 선생님을 의암성사를 조명 할 때는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의암 손병희 부인인 수의당 주옥경(1894~1982)여사는 기녀신분에서 손병희선생님을 만나 여성운동가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71년 70을 넘긴 할머니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3.1절 행사에 박정희, 이효상, 민복기 등 당시의 행정, 입법, 사법의 3부 요인과 외교사절 그리고 독립유공자 등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에 그녀의 목소리는 장내를 숙연케 하였습니다.

주옥경 여사는 의암성사께서 환원하시어 28세에 홀로되어 죽을 때까지 의암을 지킨다는 수의당守義堂으로서 평생을 여성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그녀의 활동으로 한국여성운동은 천도교 여성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이의 없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일본 유학한 엘리트 여성으로서 수의당 주옥경여사는 방정환 선생님의 미망인 손용화님을 비롯 성사의 딸들도 잘 보살펴 주옥경여사를 어머님으로 극진히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링컨의 노예해방과 동학

성사는 수운대신사,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 전개하신 분입니다. 대신사께서는 링컨 노예해방 선언보다 3년 빠른 1860년에 두 여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받아들이었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로 자처하는 저의 관점에서는 링컨의 노예해방은 그 본질과 달리 상당히 미화된 것으로 평가를 내립니다. 링컨은 미국 남북한의 경제력인 이해에 대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인 북아메리카의 공업계급의 이익을 반영하였고 이를 다소 미화하여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으로 후세 사람들이 추앙한 것입니다.

당시 농업기반의 남부지역은 노예 없이는 자신들의 농장을 꾸려나가기 어려워 노예를 해방하는 것을 반대한 반면에 저임금의 풍부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업기반의 신흥계급으로서 북쪽지역은 노예를 자유스럽게 풀어 그들을 저임금 공장노동자로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된 상황이었습니다. 링컨은 결국 농업기반의 이해침탈 당한 세력에 의해 암살로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사의 신분해체는 링컨의 계급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남북전쟁과는 그 의미들이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계 역사는 천도교의 뿌리로서 동학의 신분철폐에 대하여 당연히 높은 평가로서 기록되어야 함에도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역사학자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의암성사의 끊임없는 실천 활동

동학 입도 전 청주에서 세금을 거두는 향리의 서자 출신으로서 의암성사는 신분의 차별에 대한 반항으로 일찍이 술, 도박 그리고 기방출입 등 다소 방탕한 생활을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신도로서 그는 일체의 과거 나쁜 관습을 단절하고 매일 3만 번 이상의 주문 암송 등 수련을 통하여 가난하고 천대받은 민중들을 위해 그리고 민족독립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어린이와 여성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라는 수운,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하시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수의당 주옥경 여사는 한국여성운동사의 선구자로서 그녀의 활동이 바로 한국여성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손병희 성사로부터 감화를 받고 그대로 현장에서 그의 뜻을 실행한 것입니다.

의암성사는 끊임없이 실천적인 활동을 하시었던 것이 저에게 진한 감흥을 주었습니다. 짚신 두 개를 매일 만들어 청주 5일장에 3년간 내다 팔아 생활 활동도 하시었습니다. 해월신사도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그냥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미 만들었던 짚신이라도 다시 풀어 새로 짚신을 짜시기도 하시면서 잠시라도 생산 등 창작활동을 멈추지는 않으시었던 것으로 의암성사도 스승의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신 것입니다.

 

사회적 경제와 동학

제가 광주대에서 해직되고 사회적경제의 학문에 대하여 더 연구, 집중을 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던 중 우연찮게 강훈 도정님을 모시고 진행되었던 동학공부 참여를 권유받으면서 1주일에 하루내지 이틀 동경대전 등 동학 천도교 관련 학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경제’ 학문은 그 창시자 격인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의 책자가 1944년 발행되면서 문화인류학으로부터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소수 몇 사람들에 의하여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으로서 토지, 노동 그리고 화폐의 시장거래로서 상품화는 인류를 큰 재앙으로 몰고 간다는 주창과 함께 사람들 간의 생존방식은 어느 사회에도 호혜거래 등 그 사회의 고유한 삶의 방식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러한 살림살이로서 경제를 경제사로서 삶의 구체적인 형태로 주로 서양 경제사를 중심으로 그 사례들이 연구되어졌던 것입니다. 필자도 상당부분 그 주장취지엔 동감하였지만 서양사례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상호부조방식인 두레, 향약 등을 통해 한국의 사례들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대학을 대학답게 특히 사학의 적폐청산을 통해 대학의 비판력회복이라는 사회적 책무 이행에도 참여하면서 제 전공인 재무관리에서 다소 이탈하여 사회적 경제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접한 동학 천도교 인물들의 활동들의 상당한 부분이 사회적경제의 영역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는 지적인 호기심이 강하게 발현되었습니다. 동학창시 전후의 역사적 상황, 최제우, 최시형 두 분의 어록이나 활동 등에도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토론하고 연구한 분들과는 발전적으로 ‘동학실천모임’으로 공부모임에서 현장 활동으로 변경하면서 남원 은적암 등 동학사적지도 1달 단위로 답사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신 광주 강훈 도정님의 자상한 해설 등은 참여자들의 동학 천도교에 대한 관심도 더 깊게 갖게 한 동기로 작동하였습니다. 동학과 관련된 책들도 1달에 1권선정하여 그 내용들을 공유하였습니다. 처음 동학공부모임엔 천주교 신부님, 교회 목사님 등 종교 성직자, 불교에서 무종교까지 그 구성원들이 다양하게 참여하였습니다. 그 다양성들이 동학에 대하여 그 내용으로서 넓이를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매월 1회는 천도교 광주교당에서 시일도 함께하고 식사도 나누면서 이야기도 나누기로 공유는 하였습니다.

 

지난 3년간의 소중한 성과

저는 해직 후 최소 경제력 확보를 위하여 여수와 광주를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지만 동학공부모임을 나름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의암 손병희 성사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의 활동을 단순히 평면적인 아닌 그 시대의 상황도 연계하여 연구자들의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역사전공도 종교학에 대한 연구자도 아니어서 그 분야에 대한 연구 몫은 제가 감당할 수 없어 주변 관심 있는 분들에게 연구하도록 권면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회적경제의 우리 사례에 대하여 집중하면서 동학 천도교내에 그 소재들이 많음을 공유한 것은 지난 3년간의 저에겐 소중한 성과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2018넌 인일기념식에 배종렬 선생님 등을 모시고 천도교 광주교당 동덕님들과 함께 의암성사의 동학 천도교에서의 두드러진 활동에 대하여 3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독립운동가와 교육가로서 그 분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무성
차를 몰지 않는다. 두 발로 도로를 달리는 이 시대의 부시맨. 뒤늦게 동학도가 되어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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