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의 힘”_ 이관술 평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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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의 힘이관술 평전 이야기

 

잘 팔리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소위 노동소설을 쓰던 내가 그보다 더 안 팔리는 사회주의자들의 평전을 쓰게 된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쯤, <경성트로이카>를 쓰고 난 후였다.

말이 소설이지, 실제 사건의 줄거리와 시간 그대로, 실명 그대로 썼더니 여기저기서 등장인물의 후손들이나, 간접 증언들이 들어왔다.

이관술의 후손도 그중 하나였다. 이관술은 1928년 항일운동을 시작해 식민지 말기까지 경성트로이카, 경성콤그룹을 이끌던 국내 항일운동의 핵심이었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핵심 간부로, 박헌영에 이어 부당수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해방 후 불과 8개월 만에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 6.25 개전직후 총살되고 만다.

파렴치한 위조지폐 범으로 처형된 이의 후손들의 삶은 신산했다. 이관술의 남동생과 사위도 개전 직후 끌려가 총살되었고, 두 명이던 아내와 네 딸도 전쟁 중 행불되었다. 마산으로 시집 가 있던 큰딸과 고향 울산 집을 지키던 막내딸만 생존했는데, 누구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우연히 <경성트로이카>를 읽고 출판사에 문의해 나를 찾아온 이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딸 이경환 씨와 그 자손들이었다. ‘광복20년’이니 하는 옛 방송극에 사악한 빨갱이 범죄자로만 등장하던 이관술을 좋게 그려준 데 대한 감사로, 멀리 경상도에서 올라온 것이다.

만남은 인천 부평의 은하수연립에서 이뤄졌다. 경성트로이카의 등장인물 중 단 두 명의 생존자였던 이효정 선생 댁이었는데, 좌파 독립운동의 서러움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몹시도 비좁고 낡은 연립이었다.

이효정은 여고 교사였던 이관술의 제자로, 식민지 경성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했고 해방 후에도 여성동맹 활동을 하다가 경찰의 구타와 고문으로 팔이 부러진 이다. 이관술의 중매로 결혼한 남편이 월북하는 바람에 평생 요주의인물로 치욕과 수난을 겪어온 이다. 그토록 존경하던 은사이자 동지인 이관술의 직계후손을 만난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이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나는 유족들의 도움을 받아 울산 이관술의 생가도 가고 친족들도 만나면서 이관술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관술>을 쓰게 되었다.

 

이관술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해방직후의 인물 취재 전문가이던 신문기자 김오성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리 잘 봐줘도 시골 훈장에나 어울리는 초라하고 옹졸한 외모’에 명연설도, 명문장도 남기지 않은 조용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식민지 말기 그 엄혹한 전시체제 속에서도 북으로는 함흥에서 남으로는 마산까지, 넝마주이 엿장사로 위장해 짐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조직을 했던 사람이다. 동생 이순금의 수기를 보면 자전거를 끌고 나가 한두 달 만에 돌아올 때면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썼다고 한다.

해방 후 주위의 강권으로 여러 요직을 맡지만, 김오성에 의하면 이관술은 자기 명패가 놓인 회의장에 한 번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 시간에 공산당 인쇄소에서 기관지며 전단을 만드느라 손과 옷이 까맣게 일을 하고 있던 것이다.

식민지 때나 해방 후나 고향의 농토를 아낌없이 팔아서 운동자금으로 쓰던, 사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좌익소아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 후 고향 울산을 방문했을 때는 공산당의 기세를 등에 업고 부자와 우익들을 공격하고 다니던 지방당원들에게 맹동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야단쳤다는 증언도 있다.

이관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훗날에 발견된 미국무성 자료까지 아무리 검토해 봐도 미국에 의한 철저한 조작, 누명이었다. 실제로, 스스로 떳떳했던 이관술은 월북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진실을 밝히려 싸우다가 두 달 만에 두 번째 부인의 집에서 체포된다.

지금까지 쓴 인물 중 제일로 뽑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단연 이관술과 윤한봉이라고 답한다. 두 사람은 45살 차이지만 생김새도 비슷하고 무욕의 헌신성도 꼭 닮았다. 이관술이 그랬듯이, 윤한봉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재산이던 집을 팔아 운동에 바친다. 이관술이 여러 명예로운 직위를 거부하고 ‘인쇄공’으로 살았던 것처럼, 윤한봉도 자기가 만든 조직에서조차 대표를 맡지 않고 ‘소사’로 산다.

아무튼,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게 된 한 권의 책 <이관술>은 유족들의 삶에도, 나의 삶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나는 이 책에 이후로 잇달아 <이현상평전>, <박헌영평전>을 쓰면서 평전 전문 작가처럼 되었다. 또한 직계유족은 이관술이 결코 비난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고 명예회복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유족들은 먼저 무기수로 수감되어 있던 이관술을 총살시킨 것은 부당하다는 재판을 걸어 승소함으로서 조금이나마 한을 풀었다. 그러나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사위에 대한 재판은 신청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또한 불법으로 친척에게 넘어가 버린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재판도 벌였으나 그 사실을 수십 년이나 알면서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한다.

두 재판 모두 오래전부터 부당함을 알면서도 제소하지 않아 패했지만 재판 사실이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학성 이씨 문중과 향토사학자들 사이에 이관술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들이 가시화 된다. 여기에 우연히 <이관술>을 읽어본 외국어대 한국어 강사 임성옥 씨가 정판사 사건을 박사논문으로 써서 이관술이 무고임을 입증함으로서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런 노력에 따라 이관술과 여동생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수차례 지역 방송과 신문에 나가고, 이관술 생가 방문 모임도 잇달았다. 나도 수없이 울산에 내려가 재판도 참관하고, 운동단체에게 생가를 안내하고, 방송 출연도 했다.

이 오래된 활동들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2017년부터다. 울산시장과 언양군수에 민주당이 당선되면서, 올해 2019년 4월에 마침내 이관술 추모사업회가 결성되고 울산시청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잇달아 학술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내 책 이전에도 그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리려는 노력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울산의 향토학자 장성운 씨가 이관술의 젊은 시절을 중심으로 얇은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가까운 친족들이 이관술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는데, 참전전우회 등 우익단체들의 항의에 부딪자 땅을 파서 묻어 버리고 말았다.

비석은 아직도 땅 속에 묻힌 상태다. 추모사업회는 남의 집이 되어 버린 생가를 찾아 박물관으로 만드는 일과 함께 땅 속의 비석을 캐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또한 여동생 이순금과 함께 이관술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준비 중이다.

요즘도 유족들은 통화를 할 때마다, 이 모든 일들이 한 권의 책, <이관술>로부터 비롯되었다며 감사를 전해온다. 이 책을 써서 원고료로 번 돈은 2백만이나 될까, 오히려 울산에 수없이 오가느라 큰 적자를 보았지만, 책 한 권에서 끝나지 않고 이관술과 후손들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기에, 나도 행복하다. ( 2019년 4월 22일)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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