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된 사람,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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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사람, 이현상”_ 이현상평전 뒷이야기

 

‘이현상’이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아프다. 이현상만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쓴 이재유와 이관술, 그 뒤에 쓴 박헌영도 마찬가지다.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도 비참하게 죽은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저리다.

이현상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운동권 일부에게나마 항미 빨치산의 영웅으로 신화화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지리산에 들어가 1953년 9월 누군가에 의해 사살되기까지 5년 간, 그 춥고 배고픈 산중에서 빨치산을 이끈 이현상의 의지력은 대단한 게 사실이다.

원래 내가 이현상을 쓰기로 한 것은 빨치산 활동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서울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12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전력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료를 모으고 생존인물들을 취재하다보니 책의 절반이 빨치산 이야기로 차게 되었다.

안재성이 <이현상평전>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여기저기서 호의적인 정보들을 제공해 왔다. 소년 빨치산이었다는 김 모 선생, 백아산에서 활동했던 정 모 선생, 괴산에 사는 김모 선생, 산중의 여성가수였던 최 모 선생 등등을 만나보라는 제안이었다.

소개한 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분이야말로 이현상과 직접 같이 살았으며 대단히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보니 성악가 최 선생이 딱 한 번 스쳤을뿐, 다른 이들은 단 한 번도 이현상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현상이 수염을 하얗게 기르고 흰 도포를 입고 다녔다”는 성균관대 모 교수의 글도 있었는데 황당무계한 허위 정보였다.

특히 괴산의 김모 선생은 이현상과는 일면식도 없고 빨치산으로 체포된 후 십여 년이나 경찰 생활을 한 사람인데, 운동권에는 이현상과 절친한 고급간부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 “엄청 대단한 분”이라며 연락처를 알려준 이는 현재 정부부처의 장관으로 있는 저명한 시인이었다.

존경하던 선배 시인의 말이니 굳게 믿고 서둘러 괴산에 내려가 만나본 김 선생은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고 30분도 안 되어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때쯤엔 나도 빨치산 역사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보니 그분이 이현상의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다는 것, 체포 후 십 년 넘게 경찰생활을 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버린 때문이었다.

김 선생이 먼저 거짓말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찾아온 운동권들이 “이현상과 함께 했다”는 말을 “이현상과 각별한 고위급 간부였다”는 말로 확대해석한 것이고, 경찰로 장기복무 했다는 이야기는 본인도 안 했고 묻는 이도 없었을 뿐이었다.

상당기간 이현상의 본부대에서 정치위원을 했던 이는 구례에 사는 여성 이모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내가 만나본 남녀 빨치산 중에 가장 이성적인 분이었다. 대개의 생존 빨치산들이 반미주의자들의 받들어 모시기에 도취되어 남의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처럼 인용하기도 하고 자신의 추측을 현실로 만들기도 하는데 반해, 이 선생의 증언의 신뢰성은 높았다.

하지만 이런 냉정함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초고를 써서 이 선생에게 보여드렸더니 아주 잘 썼다고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도 단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현상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이현상은 아끼던 부하를 잃을 때마다 엉엉 통곡을 한다. 그런데 이 선생은 단호히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엉엉 울리가 없어! 우리 선생님을 울보로 만들면 어떻게 해? 우는 장면은 싹 지워!”

어찌나 강하게 요구하는지 다섯 군데인가 중 두 군데만 남기고 다 지워야 했다. 누가 울지도 않은 사람을 통곡했다고 증언하겠는가? 이현상을 지나치게 존경한 나머지 영구히 신화로 남기를 바라는 이 선생의 마음을 받아준 것이다.

이 선생을 통해 이현상의 ‘산중 처’라 불리던 하모 씨와 연락할 기회도 있었다.

시골병원의 평범한 간호사로 일하던 중 공격 나온 빨치산에 의해 ‘초모’되어 산에 따라온 하 씨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미인이었다. 하 씨는 산에 와서도 간호병이었는데 이현상의 참모들이 사령관을 간호하라는 명목으로 자꾸만 이현상의 산중아지트에 하 씨를 집어넣는다. 하 씨는 싫다고 항명하며 정치위원이던 이 선생에게 두 번이나 전투부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끝내 이 요청은 받아들어지지 않고, 하 씨는 26살 차이가 나는 이현상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된다. 아이는 그녀가 체포된 후 감옥에서 태어나는데, 초모의 ‘반강제성’이 인정되었는지 곧 석방되어 경남 진주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해 평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이 선생은 두 차례나 하 씨에게 전화해 좋은 작가가 이현상을 쓰려 하니 취재에 응하라고 했다. 그러나 하 씨는 그런 일로 연락을 하면 이 선생과도 인연을 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취재를 포기했다. 그리고 산중 연애 부분을 반 쪽 정도로만 짧게 쓰고 말았다. 하 씨와 이현상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매체에 실려 있었거니와 특히 옛날 황색잡지 <선데이서울>에 두 사람의 아들이 자세히 증언한 적이 있어서 따로 취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책이 나온 후 이 선생에게 놀러 갔을 때였다. 마침 이전에 취재도 했던 소년빨치산 출신 김 모 선생도 놀러와 있었다. 김 선생이 내게 왜 이현상 선생의 치부를 드러냈냐며 강력히 항의하는 것이었다.

김 선생의 주장은 이현상이 우는 장면을 빼달라는 부탁과는 달랐다. 김 선생은 철두철미 북한이 자신의 조국이요, 남한은 미제의 괴뢰라고 믿던 이였다. 따라서 이현상을 박헌영 일파 종파주의자로 멸시하고 있었다. 연애 이야기를 빼라는 것은 이현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미 빨치산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사실 박영발, 김선우 등 빨치산의 도당 위원장급은 모두 산중 애인을 갖고 있었다. 남원 출신의 어떤 교수는 당시 체포되어 시신들과 함께 남원 방공호 위에 전시되던 일반 여자 빨치산 중에도 배가 부른 이가 여럿이었다고 내게 직접 증언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명백한 사실을 숨기라니, 스탈린의 사진조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치지 않았다.

그밖에도 <이현상평전>과 관련되어 생긴 이야기가 많은데, 생존해 있던 이현상의 사촌동생을 만난 적도 있었다. 책이 나온 후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다보니 이현상의 생애에 대해서 나보다도 아는 게 없었지만 어려서 보았던 온후한 인상의 사촌형에 대한 존경심이 큰 분이었다. 대전의 큰 호텔에서 비싼 음식을 사주며 책을 써준 데 대해 거듭 감사를 하는 것이었다.

책이 나온 후 가끔 독자 모임을 이끌고 이현상의 고향 마을에 들리다보니 이현상의 생가를 인수해 살고 있는 또 다른 친척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분 역시 이현상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였다.

친척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살아생전 이현상의 부친과 형제들이 그만큼 잘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가뭄이 들자 이현상의 아버지가 세금을 전부 대신 내준 적도 있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줬는데, 이현상이 빨치산 대장으로 공적 1호가 되었음에도 아무도 공덕비를 건드리지 않아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다.

그것이 바로 이현상의 힘이기도 했다. 이현상을 사살한 부대로 알려진 토벌대 연대장이던 차일혁은 수기에서 ‘이현상의 직할부대는 다른 도당 빨치산 부대들과 달리 대민 정책이 대단히 엄격해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지지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쓴다.

<이현상평전>을 읽고 연락을 해온 차일혁 연대장의 유일한 후손 차길진 법사와의 사연, 그리고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잇도록 하자.

이현상을 취재하러 지리산을 누비고 다닐 때다. 특히 한겨울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산바람이 모질게 불때면, 정령치와 성삼재에서 일부러 차에서 내려 한참 서 있곤 했다. 지구온난화가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두텁고 좋은 옷을 입었어도 10분만 서있으면 매서운 바람에 뼛속까지 시렸다. 그때마다 5년이나 이 살벌하고 끔찍한 산중을 헤매고 다닌 이현상의 고통이 내게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평전을 쓰고 난 후 거의 십년 간, 지리산에 갈 때마다 저절로 마음이 우울해지고 어두워지던 이유일 것이다. 이현상, 그 이름만 생각해도 지금도 마음이 저리다.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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