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의 교육수기] 교육의 미래를 그려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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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미래를 그려 보다

 

1.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

수진 : 알파고의 충격 이후로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에 휩싸인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현재 어린이와 청소년은 앞으로 삶의 대부분을 진화를 거듭하는 알파고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미지의 폭풍을 맞닥뜨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항로를 제시해야 하며, 그 폭풍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어떤 능력을 길러주어야 할지 교사로서 고민 된다.

광필 : 좀 뜬금없지만 영화 ‘매트릭스’ 이야기를 해 보자. 주인공 네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파란 알약을 먹고 사이버 세상에서 행복한 감정에 젖어 살 것인지, 빨간 알약을 먹고 불편한 현실을 마주할 것인지, 모피어스는 그에게 두 개의 알약을 내민다. 현재 우리도 네오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닐까?

2016년 3월에 있었던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사적 대국에서 알파고는 예측을 뒤엎고 이세돌 9단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알파고의 충격으로 우리나라는 미래 사회에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지난 2년 여 동안 미래 사회에 대한 온갖 예측이 쏟아졌다. 말씀하신 ‘폭풍’ 속에 우리나라가 들어온 것이다. 미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한 것은 미래학자와 과학자, 인문학자들이었다.

과학자 중 미래에 관해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구글의 기술이사이며 영생(永生)을 꿈꾸는 1948년생 레이 커즈와일(Ray Kuzweil)이다. 그는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2045년이 되면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가 인간이 되어 노화, 질병, 기아를 극복하는 특이점이 올 것이다. 특이점(Sigularity)이란 가속적으로 발전하던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의 단계로 도약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낳는 시점을 말한다. 특이점 이후에는 기술과 인간의 지능이 융합해 인간이 생물학적 몸과 뇌의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을 지배하며, 죽음까지도 제어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특이점 이후의 미래에는 자기 복제적 ‘나노 로봇’의 반란 위험이 있지만 방어 기술이 더욱 발달할 것이다.”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관점에서 보면 디스토피아와 다름없다.

“20~30년 내에 택시 운전사와 의사뿐 아니라 선진국의 모든 직업 중 약 50%가 AI로 대체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전례 없는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이 만들어질 것이며, 강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에게 부가 집중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류를 역사상 최초로 초인간과 평범한 인간으로 나뉘는 ‘생체 계급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은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바뀔 것이며,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차별화된 우수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인류가 21세기에 직면한 어려움은 지구온난화, 글로벌 불평등, AI 및 생물공학과 같은 파괴적인 기술의 부상 등 전 지구적 문제다.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한편 문명 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과 ‘한계비용 제로 사회’의 저자)은 새로운 문명이 도래할 것이라 예견한다.

“과도기가 지나면 급격한 일자리 감소는 불가피하다. 그때가 되면 해석적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매우 적은 숫자의 관리자와 근로자만 유지될 것이다. 다만 일자리 감소를 끔찍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트럭을 하루 10시간씩 50년 동안 운전해야 하고, 하루 8시간씩 40년 동안이나 공장의 좁은 방에서 조립라인의 제품을 지켜봐야 하는가?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자본주의 경제가 자연스럽게 ‘사회적 경제’로 변모할 것이다. 즉 힘들고 귀찮은 일들을 기계에게 맡겨놓고 사람은 건강관리, 복지, 교육, 스포츠, 문화 등의 영역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심오한 작업’이 아니라 ‘심오한 놀이’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떤 느낌으로 듣고 있는가? 알파고 충격 이후 우리 대부분은 미래학자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었다. 본인도 이 이야기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이야기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상당히 헷갈렸다. 그렇게 휘청대다가 문득, 그 이야기들 속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감탄사를 반복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 미래를 교육에서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수진 : 미래의 폭풍에 대한 다양한 기상관측 자료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자료를 판독하는데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지 힌트를 준 것 같다. 그런데 관측을 넘어 미래의 폭풍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 어떤 항로를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광필 : 그렇다. 일기예보를 오롯이 믿기엔 … 그리고 교육적 움직임이 어쩌면 기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제가 2016년 3월에 쓴 칼럼으로 항해를 시작해 보자.

인공지능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광필 전 이우학교 교장

2045년 3월23일, 광필씨는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인 4시에 일어나 호출한 무인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최신 장비를 마다하고 30년 전의 낚싯대로 월척을 잡기 위해 양수리로 향한다. 오전 10시, 물가에서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 프로젝트 회의를 진행한다. 안건은 60~90살 장년들의 재교육을 위한 연수기획안 검토. 8개 나라의 전문가들이 1시간 회의 끝에 이분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토대로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게 하고, 이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VR-2043’을 통해 전수하자고 합의한다. 딴짓을 하는 사이에 입질을 한 월척은 바늘털이를 하고 사라졌다. 몸보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을 주영씨가 떠올랐지만 내일은 저기압이 다가오니 다시 기회가 있겠지.

오후에는 중요한 토론과 투표가 있다. 2년째 격론이 벌어진 ‘강한 인공지능’의 허용 여부에 대해 각국의 패널들이 토론을 하고, 이를 지켜본 세계시민들이 그에 대해 투표를 할 예정이다. 이번에 기후변화, 소행성 충돌 등에 대비하기 위해 강한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한다는 글 등 글로벌기업의 논리를 설득력 있게 논박하는 게 중요하다. 귀갓길 무인자동차의 푹신한 소파에서 광필씨는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준비한 주영씨의 발표 자료를 꼼꼼히 읽으며 코멘트한다.

오후 5시, 70%의 반대표가 나왔다. 이로써 한동안은 잠잠해질 것 같다. 50대 중심의 마을 커뮤니티 멤버들이 환호를 하며 저녁에 잔치를 하잔다. 입체(3D) 프린터에서 찍어낸 고만고만한 메뉴에 지친 멤버들이 제각각 비장의 솜씨를 발휘한다. 식사 후 모두들 들뜬 분위기에서 광장으로 나선다. 그동안 갈고닦은 연주 실력을 발휘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축제판이 된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네트워크 멤버들도 자다 깨서 뒤늦게 축제를 벌인다.

꿈은 깨어나면 허망하지만 멋진 상상은 인간의 의지를 북돋운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3월은 온통 충격과 우려의 분위기다. 언론은 대체로 거대 자본들이 경쟁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을 발달시켜 급기야 주인과 노예가 역전되는 상황을 걱정한다. 하지만 정부는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은 채 인공지능 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뿐이다. 일부 정당과 시민단체에서는 기본소득제를 주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향후 전개될 난국을 타개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무력하게 지내다 보면 생계는 보장받지만 무엇을 할지 몰라 술과 도박에 찌든 보호구역의 인디언이 30년 후 우리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멋진 상상이 필요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시민의 각성이 필요하다. 기술은 현 인류의 종언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정치인들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다. 과거 아테네 시민들이 폴리스의 현안에 대해 오랜 시간 토의하고 결정했던 것처럼, 우리도 시민이자 인류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주요 정책을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한다. 발달된 정보통신(IT) 기술은 세계 모든 시민의 정치 참여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중요하다. 그동안 학교가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일할 사람을 길러왔다면, 이제는 민주주의 훈련과 문·예·체 활동을 통해 시민의식을 갖추고, 놀 줄 아는 인간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을 통해 인공지능시대 진정한 인간다움은 무엇인지, 인간과 인공지능은 각각 무엇을 하고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광필씨의 어설픈 상상보다는 젊은이들의 발칙한 상상이 더 많은 이들의 상상과 실천을 자극하리라. 우선은 코앞에 닥친 총선부터.

(한겨레 2016. 3. 22 세상읽기 칼럼)

 

수진 : 칼럼에서는 보호구역의 인디언과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 앞에 상반된 미래가 놓여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런 예시를 통해 전망한 미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광필 : 먼저 인디언 보호구역부터 이야기를 꺼내 보자. 미국에서 서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인 인디언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살육을 당했다. 남아있는 인디언들을 모조리 없애기 힘드니까, 19세기 중반 경부터는 미국 정부가 인디언보호구역을 설정하여 인디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넉넉하게 챙겨주고 학교를 비롯한 편의시설과 함께 생활비도 지원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은 어떻게 됐을까? 세월이 지난 후 인디언의 다수는 술, 도박, 마약에 찌들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각박한 경쟁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그러나 인디언 보호구역의 역사를 보면 먹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의 10대 청소년들이 40대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활동하는 30년 후,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30년 후 미래를 예측해 보면 대다수 인류는 노동에서 밀려나 있을 것이다. 로봇이나 A.I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실업자’는 아닐 것이다. 로봇과 A.I를 소유한 자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생산력으로 쏟아내는 상품을 구매할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도 의미가 없다. 결국 지금 논란이 되는 ‘기본소득제’와 같은 복지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최근 실리콘밸리의 CEO들이 로봇세나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기본소득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상당히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게 해결된다고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이 더욱 더 중요해진다.

수진 : 사실 아직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꿈꾸기 어려운 인구가 지구상에 상당히 존재한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이 더 중요해진다는 말씀을 들으니,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이 떠오른다.

광필 : 사실 정치적 상황이나 자본 간의 극한 경쟁이라는 요인을 빼고 보면 21세기 현재의 생산력 수준으로도 인류는 기아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류는 더 이상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니,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먹고 사는 것 이상의 것들은 실리콘 밸리의 엘리트에 의해 좌지우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지금 구글에서 X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가운데 바이오와 관련된 사업들이 많다. 이 X프로젝트가 현실화되면 경제적 불평등이 생체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조합한다거나 부모로부터 수정란을 여러 개 만든 후 가장 우수한 유전자가 조합된 배아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100만 달러를 지불하면 A등급, 10만 달러를 지불하면 B등급, 나머지는 C등급,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아기의 생체 등급이 정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인디언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이 술과 마약에 찌들어 허송세월하듯, 우리도 어느새 소수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생체 불평등 사회를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 이런 상상은 굉장히 음울하지만 안타깝게도 학자들이 실제 우려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수진 : 돈이 많은 사람들만 더 ‘특출나게’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는 ‘생체불평등 사회’라니… SF 영화에서 생체불평등으로 직업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달라지는 걸 봤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또 다른 미래로 나아가는 항로도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광필 : 그런 항로,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오력해야겠지만. 2500년 전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노예들이 노동을 대신한 덕분에 시민들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시민들은 낮에는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국가의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한 마디로 직접 정치를 한 것이다. 저녁에는 극장에서 비극을 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적’ 성취를 이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노예를 소유한 남자 시민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지만 말이다. 그런데 미래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통해 노예가 없어도 먹고 사는 일이 해결 되니, 모든 사람이 이런 성취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보호구역의 인디언의 삶과 고대 아테네 시민들의 삶, 이 두 가지가 모두 우리의 미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어떻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그래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논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미래 학교의 5가지 접근법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다.

 

2. 모범생 만들기가 아니라 ‘내면의 힘’ 야성을 가진 아이로 키우기?

 

수진 : ‘야성’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강해서 그런지 다소 마초적 성향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광필 :  앞의 수채화 사진을 한 번 보자. 소위 말하는 ‘좀 노는’ 중3 아이들이 청소년학교에서 저녁을 먹기 전에 쉬고 있는 장면이다. 그 무리 중 한 아이가 자신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뒤에는 이런 해설을 적었다. 읽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나는 내 이런 모습이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지금 보다 좋은 상황을 만들어가는 중인 것 같다.

두 번째 그림의 뒷면에는 이런 해설이 적혀 있다.

가로등은 나랑 비슷하다. 낮에는 사람들이 쓸모없게 여겨 그냥 배경밖에 되질 않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밤에는 길을 밝혀 도움을 주는 것이 학교와 함청에서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

 

‘함청’은 함께여는 청소년학교의 준말이다. 좀 길지만 저 그림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이우학교는 2003년에 개교했다. 원래는 2002년에 개교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교육청에서 재정 지원을 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이 문제로 한 1년을 뛰어다니다 보니 이대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겠다 싶은 판단이 섰다. 안타깝지만 재정결함 지원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개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등록금이 일반 학교의 1.7배에서 3배까지 올라갔다(물론 2010년부터는 재정지원을 받게 되어 중학교는 무상이고, 고등학교는 일반학교와 똑 같아졌다). 이런 조건에서 분당이나 수지 지역에 사는 중산층 정도는 되어야 들어올 수 있는 학교가 되고 말았다. 제일 듣기 싫은 ‘귀족학교’ 소리까지 들었다.
이렇게 한 5년 학교 운영을 하다 보니, 선생님들도 복잡한 마음이 풀리질 않았다. 새로운 교육을 해 보자고 야심차게 시작했건만 결과적으로 있는 집 자녀들의 뒷감당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갈등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이우학교를 운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성남시의 모란역 부근에 방과후 학교를 만들었다(방과후 학교의 상근 교사들을 따로 모셨지만 일부 이우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이 자원봉사자로 결합했다). 그리고 인근 중학교에 재학하는 1학년 학생 중 환경이나 정서면에서 가장 어려운 아이들 5명씩을 추천 받아 평일 오후 4~9시까지 함께 했다.
남학생 여학생을 막론하고 모두 만만치 않았고, 상처 또한 많은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 군데서 도움을 받아 왔다. 문제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꼭 생색을 낸다는 점이다. 평상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다가 행사 때가 되면 꼭 나타난다거나, 평소엔 아무렇게나 대하다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긋한 표정을 짓는 등 아이들 눈으로 봐도 속보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이런 경험을 한 아이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사람이 도움을 빙자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열심인지, 어떤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다가오는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혹독한 환경을 견뎌왔거나 자기 방어와 반항이 강한 아이들일수록 동물적 본능이 더 발달돼 있다. 저 사람이 날 정말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척 하는 건지, 정말로 도와주는지, 도와주는 척 하는 건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그러다보니, 몇 년쯤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아이들은 두어 달 만에 선생님들의 진심을 알아차렸다. 물론 자존심 때문에 바로 싹싹해지지는 않았지만, 한 학기도 지내기 전에 아이들은 선생님들과 마음이 통했다. 그 다음부터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우학교의 교육적 경험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우학교를 운영하면서 최대한 좋은 교육환경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학교 시설을 비롯해서 선생님들이 준비하는 교육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런데 함청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좋은 교육 환경이 꼭 교육적이지 않다’는 점을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8년간의 교장을 마치고 퇴임하면서 했던 강연 제목이 “이우학교라는 온실을 부수자”였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아이들을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챙겨주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무기력하거나 뺀질이가 된다. 무엇인가 도전할 만한 일이 없고 넘어지거나 깨질 곳이 없는 학교에서는 오히려 대충 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함청의 부모님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렸다. “미래에 정말 우리 사회를 바꿀 인재로 성장할 아이들이 누구인가? 아마 여기 있는 아이들처럼 상처가 깊고 삐딱선을 타본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스스로 마음먹을 때 그런 인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3월에는 함청이 어느새 1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했다. 앞에 언급한 그림은 이 행사에 전시된 것이다. 이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2년차에 들어온 선배 학생 덕분이었다. 그는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고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에 있는 미대에 갔다. 합격을 한 후 후배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며 바로 함청을 찾아왔다. 후배들이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그 선배는 겨울방학 한 달 동안 중3 아이들한테 수채화를 가르쳤다.
어느 날 오일화 함청 센터장이 앞의 그림을 들고 와서 내게 한 번 보라고 했다. “어이구, 잘 그렸네””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그림을 뒤집어서 뒷면에 적힌 해설을 보여주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2015년, SBS와 함께 ‘바람의 학교’라는 좀 특별한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여러 면에서 가장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고1 아이들을 전국에서 모아 한 달간 함께 지내며 변화를 일궈보자는 시도였다. 이런 일을 해봤기에 어려운 아이들을 깨우는 데 누구보다 자신감 있던 나도 깜짝 놀랐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을 땀 흘려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한 달 만에, 한두 명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저렇게 깨운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사회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제일 중요한 답은 아이들 내면의 힘, 야성을 깨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으로 밀고 나가게 하는 것이 미래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그림 이야기로 시작한 건 이런 맥락이었다.

수진 : 교사로서 아이들이 한 달 만에 저런 변화를 이뤄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야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도대체 야성의 의미가 뭔지 좀 명확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

광필 : ‘야성’의 의미를 거듭 질문하시니… 굳이 말로 풀어 보자면 ‘길들여지지 않은 본연의 생명력’ 정도라고 할까? 직관적으로 와 닿는 느낌이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교육과 관련된 모든 철학과 방법론, 교육 행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야성이란 키워드로 모든 것이 연결된다는 맥락에서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아내와 동네 산책을 할 때면 보통 여섯 개 정도의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돈다. 그러면 여섯 개 이상의 놀이터를 지나가게 되는데, 저는 항상 놀이터를 유심히 본다. 미끄럼틀, 시소, 그네가 반드시 있고, 놀이터의 크기에 따라 다른 놀이기구가 몇 개 더 추가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모든 놀이터가 디자인과 배치가 아주 조금씩 다를 뿐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우리나라(동네) 놀이터
독일의 놀이터

조금 다른 놀이터를 보자.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독일의 놀이터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교육청의 간부 연수에서 이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간부들의 첫 반응은 “민원이 쏟아지겠다.”였다. 발판이 작아서 아이들이 넘어지기 딱 좋고, 손잡이나 난간이 없어서 위험하다고 난리가 날 것 같다, 게다가 바닥이 모래이니 동물 똥에다가 세균들이 득실거릴 텐데 어쩌려고 그러냐? 등등 거의 비슷한 걱정들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놀이터는 너무 안전한 것이 문제다. 그리고 아이들 근처에는 꼭 엄마가 있다. 어떻게 놀아도 전혀 다치지 않도록 설계된 놀이터에서 마구 뛰어노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놀이터를 벗어나면, 바깥에서는 수많은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놀이터는 놀이터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어느 정도 다치는 것은 회복이 가능하다. 독일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처음에는 조금 다칠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터득하지 않겠는가? 교육은 어릴 때가 중요하다.

근대화와 함께 학교 교육이 성실한 노동자를 기르겠다는 목표 하에 아이들을 ‘길들이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거기다 우리나라는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하여 선진국을 추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길들이기, 정답 찾기 교육은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 물론 그런 교육 덕분에 여기까지 발전해 왔겠지만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준비하기에 더 이상 유효한 교육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제는 성실한 노동자를 길러내야 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어떤 능력을 길러내야 할까? 요즘 ‘역량’이라는 개념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실 역량이라는 개념도 성실한 노동자 양성이라는 맥락을 조금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아이들 내면의 힘, 야성이 아닐까?

수진 : 세월호 세대란 말이 나올 정도로 세월호 참사 이후로 안전에 대해 매우 예민해졌다. 그래선지 위험 강박에 사로잡혀 더욱 통제된 상황에 아이들을 ‘가둬’두려는 경향마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환경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야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뜻인가? 사실 아직도 야성이 뭔지 모르겠다. 뭔가 거칠고 날 것의 파닥이는 힘이라는 느낌마저 드는데…

광필 : 그동안 강의를 할 때에도 야성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만큼 야성이란 말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지 못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사실 야성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직관적으로 느꼈던 부분들이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이들 만나면서 내가 직관적으로 느꼈던 부분들을 최근 뇌 과학자들이 설명했다. 인간의 뇌는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존과 본능을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뇌간과 소뇌), 감정을 관장하는 포유류의 뇌(대뇌변연계), 그리고 논리와 이성을 관장하는 영장류의 뇌(대뇌피질)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뇌의 발달 과정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파충류의 뇌가 발달한 만큼 포유류의 뇌가 발달하고, 또 포유류의 뇌가 발달한 만큼 영장류의 뇌가 발달한다고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조기교육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대뇌피질을 자극하는 한글과 숫자 교육에 시달린다. 타고난 야성과 엄청난 호기심으로 손과 발을 움직여 새로운 세상을 탐색하고, 그 만큼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를 발달시켜야 할 아이들은 이런 자극에 어떻게 대응 할까? 부모의 세련된 길들이기에 잘 적응한 듯이 보이는 일부 아이들은 ‘착실하게’ 모범생이 되어 대학을 가겠지만, 정작 열정과 힘을 쏟아야 할 때에 뒷심이 부족해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다수의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와 학습지에 시달리면서 저항을 꿈꾼다. 개기는 것이 막히면 뺀질거리거나 무기력으로 대응한다.
이우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입학할 때부터 고3까지 6년 동안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다. 1기 졸업생은 31살이 되었다. 또, 이우학교에서는 부모 상담이 활발한 만큼 어린 시절 양육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러다보니 전 생애에 걸쳐 긴 호흡으로 소위 ‘종단연구’를 할 수 있다.
사례분석의 결과는 대부분 일치한다. 어린 시절 조기 교육에 시달린 아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을 하거나 지체 현상을 보인다. 그런데 부모와 교사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함께 공을 들이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그러나 서로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르고 해결하려는 방향이 엇갈릴 때는 아이는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모든 아이들이 성실하면 안 된다?

수진 : 지금 가정과 학교 모두 아이들의 야성을 갉아먹는다는 말이 공감이 되어 가슴이 아프다. 동시에 이미 야성이 상실된 아이들이 어떻게 야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한 번 30cm의 병에 갇힌 벼룩은 병뚜껑이 사라진 후에도 더 이상 30cm 이상 뛰어 오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또 야성이 사라진, 소위 길들여진 아이들이 수업하기는 얼마나 편한가? 대부분의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을 더 좋아한다.

광필 : 그렇다. 매년 2월 초 반 편성을 할 때쯤 되면 학교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공식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혹여나 저 놈이 우리 반에 오면 안 되는데…’ ‘쟤까지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만 00는 감당하기 힘들겠는데…’ 이런 생각들이 교사들 마음속에 번뇌처럼 들락거린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듣는 아이들, 소위 야성이 넘치는 아이들이 중요하다.
그 녀석들만 없으면 학급에 평화가 실현되고, 덩달아 물드는 다른 녀석들도 줄어들 것 같다. 그래서 사건 사고가 생기면 교육적 대응보다는 출석 정지나 전학을 통해 순진한 대다수의 아이들과 분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요점을 다시 정리해 보자. 아이들 중에 야성이 넘치는 아이가 있는 반면 부족한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아이들은 야성을 타고 난다. 사회가, 학교가, 가정이, 어른들이 그 내면의 힘을 억누르거나 일그러뜨리면서 아이들을 길들여 왔다. 야성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축되거나 잠재돼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사고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사고치는 아이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깨갱하고 있는 다수의 아이들이 문제다. 겉보기에 얌전하고, 성실해서 당장은 좋지만 10~20년 후 불확실한 앞날을 어찌 살아갈지 걱정이다. 이런 아이들을 깨워내기 위해서는 우선, 소뇌와 대뇌변연계의 기능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전두엽을 너무 혹사시키지 말아야 한다. 정규 일과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탐색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내적 동기가 형성되고 자존감도 고양되지 않을까?

둘째, 몸의 감각과 리듬감을 일깨우고, 감수성을 기를 수 있도록 문예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축제나 체육대회, 예술제 등 다양한 행사를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기획력, 갈등해결능력, 다양한 실무능력도 기르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기회를 준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셋째, 농사, 원예, 캠핑, 등산, 낚시 등 자연의 정기를 받고 몸의 감각을 일깨울 기회를 줘야 한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소뇌와 대뇌변연계의 기능이 회복될 수 있다.

넷째, 모든 아이들을 교사가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무기력한 아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아이일수록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면밀히 살피고 그것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며 긍정적 피드백을 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아이 내면의 억눌려 있는 에너지가 밖으로 뿜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학교가 이런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아이들을 전환 학교에 보내는 것도 한 방안이다. 전환학교로는 오디세이학교(서울), 꿈틀리인생학교(강화도), 열일곱 인생학교(용인과 일산) 등이 있다.

한편 야성이 넘치는 아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야성이 넘치는 아이들에는 두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내적 동기와 풍부한 에너지, 감수성, 공감능력을 갖추고 인간에 대한 원초적 신뢰가 있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나 건강한 학생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파트너다. 다른 하나는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로 인해 발생한 갈등과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그 주변의 아이들을 함께 성장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다. 물론 여기서 예외로 해야 할 경우가 있다. 워낙 상처가 깊거나 심리적 장애로 인해 병원에 가야할 아이들이 있다. 그 경우도 의학적 처방으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근래 학교의 생활지도를 치안적 접근으로 대체하는 것도 문제지만 병원과 상담실로 그 역할을 넘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금보다는 ‘교육적’ 접근으로 중심을 잡고 그 역할도 강화해야 한다.
일단 교사가 머리로 위와 같은 접근을 이해했다고 치자. 교사는 야성 넘치는 아이를 대할 때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고 친절하게 대화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이 아이가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떨쳐내기가 어렵다. 문제는 이런 상태를 그 아이는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파충류의 뇌가 발달해서 본능적으로 상대의 호감과 적의를 구별할 줄 안다. 여전히 꼰대기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으로만 아이들을 평가하는 교사들도 있지만 많은 교사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이 단계를 넘는 데에 5~10년이 걸린다. 나 역시 그 아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깨우쳤다.
혹시 사건, 사고의 주역들 부모는 가해자의 부모로서 눈치만 볼 것이 아니다. 내 아이의 일그러진 인정 욕구를 헤아리고, 이번 기회에 아이가 어떻게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피해자 부모들은 ‘저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가 깨어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놀랍게도 아이들의 역동적인 변화를 보게 된다. 부모들 문화도 덩달아 바뀌기 마련이다.

 

3. 아이의 야성을 장기 기획으로 성장시키려면

수진 : 아이들 내면의 야성을 키워야 한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꼰대’의 단계를 넘어서는 일 또한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말씀을 들을 때만 잠시 혹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광필 : 그래서는 안 된다. 말이 말로만 끝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사례를 또 하나 들어보겠다. 어느 여고에서 있었던 일인데 저의 관점에 맞춰 조금 각색을 해서 말씀드리겠다.

알다시피 여학생이라고 모두 양순하거나 모범생은 아니다. 그들 중에도 소위 ‘껌 좀 씹는 애들’이 꽤 있다. 이 학교에서 연이어 문제를 일으킨 ‘선수’들이 학생부에 또 끌려오자 학생부장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정학 이상이 나올 사안인데, 그래봐야 쉬는 동안 밖에서 더 사고를 칠 것이고, 반성문은 몇 번을 써도 변화가 없을 것이 뻔하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학생부장은 다른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제안 하는 걸 잘 수행하면 그것으로 징계를 대신하도록 하마.”

그러자 아이들은 눈빛이 달라지며 일단 무조건 좋다고 한다.
“너희들 힘으로 학교 앞에 있는 어려운 가게들 중 하나를 보름 내에 살려내는 미션인데, 할 수 있겠니?”

이럴 때 아이들의 머리는 굉장히 빨리 돈다. ‘보름 동안은 학교 수업을 안 해도 되겠구나, 반성문도 안 써도 될 것이고, 엄마가 불려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판단이 순식간에 선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당장 오늘부터 하겠습니다.” 그래야 오늘부터 수업을 안 들어도 되니까. 아이들이 학교 앞으로 나선다. 아이들이 가고 싶은 곳은 깨끗하고 세련된 화장품 가게나 핸드폰 대리점 같은 곳인데, 그런 곳을 보름 만에 바꿔 낼 궁리가 쉽지 않다. 보름 내에 반전이 있으려면 어쩔 수 없이 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곳을 찾아야 한다.
고심 끝에 고른 곳이 할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떡볶이 집이다.
아이들은 징계 대신이라는 궁색한 스토리는 빼고, 할머니의 떡볶이집을 살려내는 좋은 일을 해보겠다고 그럴싸하게 호언을 했다. 아이들의 말이 그리 신뢰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가게를 접을지 말지 망설이던 할머니 입장에서는 마다할 처지가 아니다. 아이들은 청소부터 시작했다. 고리짝 물건을 비롯해 할머니가 버리지 않고 쌓아 둔 온갖 잡동사니를 버리는 것이 제일 큰일이었다. 여학생 힘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물건을 들어낼 때는 덩치 큰 남학생을 불러 오기도 했다. 청소를 해 놓고 보니 삭아 내린 간판이 눈에 걸린다.
최대한 돈을 아끼느라 현수막에 감각을 살려 <썸씽 떡볶이>라는 상호를 써 넣었다. 메뉴도 문제다. 몇 십 년 묵은 메뉴를 고집하는 할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학교 친구들에게 설문을 돌려 떡볶이집 최악의 메뉴와 먹고 싶은 메뉴를 각각 조사했다. 그리고는 교실을 찾아다니며 홍보를 했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라도 할 아이들이 아닌가? 선생님까지 회유해서 고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보름이 지나서 떡볶이집 매출은 껑충 뛰었다. 당사자인 문제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도 이 결과에 놀라고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편 이 결과에 대해 일부 상인들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학교는 뜻밖의 불만에 당황했지만 이런 좋은 일을 대학 수시 전형과 연결시키면 좋겠다는 궁리를 해 냄으로써 기회로 삼았다. 학교는 소위 ‘노는 아이들’을 깨웠던 동네가게 살리기 프로젝트를 전교생에게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학생들이 직접 안을 내고 스스로 팀을 모아 방과 후에 활동을 하도록 했다. 소도시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수능으로 대학을 가기 보다는 수시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특히 정보나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해 활동 내용도 부실할 수밖에 없던 소도시 학교에서 이 일은 여러모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에게 방과 후 시간은 제한적이라 이 프로젝트가 그다지 확대되지 못했다. 최근에는 정규 교과 수업에서 이런 프로젝트 활동을 시도하게 되었다. 실제로 예전에 비해 교과 운영의 융통성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행에 매여서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사실 많은 고등학교에서 일부 상위권을 제외하고는 입시 중심의 수업이 학생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다.

떡볶이집 프로젝트를 다시 보자.
문제의 학생 K는 프로젝트가 끝난 뒤 할머니 눈에 들어 떡볶이집 알바를 시작했다. 할머니를 졸라 떡볶이 요리법을 배우다 보니, 친구들 취향에 맞춘 새 메뉴도 개발하게 되었다. 방학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방 일에 뛰어들었는데, 할머니가 넌지시 운을 뗀다.
“사실 가게를 접으려 했는데 너희 덕에 되살아났단다. 올해까지 나랑 동업하다가 아예 네가 맡지 않으련?”
K의 삶에서 이런 뿌듯함은 처음 느껴보는 일이었다. 너무 좋았다. 내친 김에 서울의 소문난 떡볶이집을 찾아다니며 레시피 개발에도 열성을 내었다. 다음 해에는 학교 추천으로 창업 경진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다. 그런데 막상 가게를 인수받아 운영하려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상업 시간에 잠만 잔 것이 후회가 된다. 때 늦게 부기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하다가 선생님을 찾는다. 어디 상업시간 뿐이랴, 지나간 영어시간, 국어시간이 새삼 아쉽다.

K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 과정에서 학교는, 선생님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K는 그동안 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술주정 부리는 아빠와 생활고에 지친 엄마, 밤마다 되풀이되는 부모의 싸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밤늦게 배회하다 보니 그 세계에 물든 선배들과 어울리며 달리 돌파구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안에서 부글거리는 것이 많으니, 겁이 없어졌다. 선배나 친구들도 알아주는 ‘깡다구’가 되었다. K가 떡볶이집 프로젝트에 참여하기까지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처음엔 정학이나 면해볼 생각이었는데, 갈수록 요리가 재미있고 장사에 소질 있다는 소리도 들으며 할머니가 가게를 믿고 맡기기까지 한다.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반기면서 진로상담을 하고, 요리 선배들은 제 일처럼 꼼꼼하게 챙겨준다. 마음속에서 늘 꿈틀대던 분노가 어느새 가라앉은 것 같다.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친구나 후배를 만나면 정말 내가 아는 것을 다 챙겨주고 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달라졌다고 한다. 내가 왜 이렇지?

이런 K의 변화 뒤에는 늘 그렇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학생부장은 겉으로 드러난 아이들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아이들 내면의 힘, 야성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과정은 긴 시간의 기다림과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을 만나서 가능했다.
학교에서는 입시에 맞추어 상투적인 교과 시간표를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감하게 교과의 벽을 뛰어넘고, 학교 울타리를 벗어났다. 그렇다면 야성을 길러주는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학생이 자기 혼자 다 한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하면서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사의 변화, 학교의 변화 또한 어마어마하다. 아이가 깨어나기 시작하면 그것이 지속되고 발전되도록 돕고 자극하기는 쉽다. 이제는 전통적인 교육과정에 아이들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학교의 교육과정이 아이들 내면의 힘, 야성을 키우는 데 봉사해야 한다. 그들의 성장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단계에 맞게 기획을 하고, 자극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미래,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장기적 기획’의 다른 측면이 있다.
교사나 학부모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게 잘하는 것이 쌓여 결국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한다. 이런 기대는 ‘성실한 직장인’, ‘성실한 노동자’를 기대하는 시대에 어울린다. 앞의 경우는 뒤집어 보면 철저히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고, 매사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10대들이 살아갈 시대는 내면의 힘, 야성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실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에 도전하여 겪게 되는 시행착오가 중요하다.
아이들의 도전을 가로막는 큰 장벽은 교사나 학부모가 평가자로서,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려 덤비는 것이다. 오히려 버팀목, 디딤돌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10년, 20년의 긴 호흡으로 발달단계에 맞게 아이를 자극할 기획에 집중하는 것이다.

 

4. 학교가 핵심 질문과 개념을 중심으로 학생의 성장을 기획하려면

수진 : 교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좀 알 것 같다. 그런데 야성을 강조하다 보면 교육과정에서 활동만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든다. 그렇게 해서는 아이들의 잠재력 중 일부만 계발되는 것이 아닐까?

광필 : 지난 10여 년 동안 학교에서 각종 체험활동이 확대되었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선 활동이 중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렇게 밖으로만 돌다보면 발심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결국 발심조차도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낚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사진은 2014년 첫장마, 댐 오름 수위 때 충주댐 서운리에서 청지렁이 미끼로 낚아 올린 43cm 토종붕어다. 때 마침 고생하신 분에게 보약으로 달여 드렸다. 나는 1990년에 처음 낚시를 시작했다. 당시 노동운동을 하다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지역조직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일을 하기에 낚시꾼만한 게 없다. 원주 저수지에 텐트를 치고 짬짬이 낚시를 하면서 태백팀, 춘천팀, 원주팀… 등 전국 조직을 만났다. 그러다보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낚시에 재미를 붙였다. 낚시꾼들은 허풍도 세지만 남 가르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낚시터에서 몇 십 년 된 고수들에게 배웠다. 그분들이 설명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비가 오기 전에는 고기가 물질 않아. 비가 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입질을 하지.” 그분은 몇 십 년에 걸친 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런 지식을 얻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등학교 물리, 지구과학, 생물 시간에 배운 개념으로 해석을 한다.
왜 붕어가 비 오기 전에 입질을 하지 않을까? 비가 오기 전은 저기압이고, 비가 오기 시작하면 기압이 조금씩 올라간다. 붕어는 기압 자체를 느끼지는 못한다. 오직 측선으로 기압이 더해진 수압을 느낀다. 붕어 입장에서는 수압이 낮아지면 물이 빠진다고 느껴 수심이 깊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가만히 머문다. 반대로 수압이 높아지면  물이 불어난다고 느껴 낮은 수심으로 나와 활발히 먹이를 먹는다. 이렇게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익힌 개념을 활용해서 짧은 시간에 노하우를 배우고, 이후 경험을 더해서 강우에 따른 붕어 포인트를 선정하는 데까지 응용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봄비와 가을비가 다르고, 보슬비와 폭우의 차이 등등 이야기 거리가 많지만 붕어학개론이 아니니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낚시를 좋아하고 열심히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몇 십 년을 경험해야만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활동과 발심이 중요하지만 그 활동의 경험을 해석하고, 사물과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남의 지시를 받는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혹은 함께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
지금 학교는 시시콜콜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한다. 입시를 위한 개념과 원리를 가르치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 본말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인에 있는 지식은 당장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면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 사회에서 맞닥뜨리게 될 낯선 상황과 조건을 뚫고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와 함께 수준 높은 능력을 요구 한다.

 

5. ‘성실한 직장인’이 아니라 ‘각성된 시민’으로 키우려면

지금까지 내면의 힘, 야성과 아이의 장기적 성장을 기획하고 자극하는 학교의 역할을 다루었다. 아이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야성과 함께 양대 축으로 고민하고 강조해야 할 것은 ‘각성된 시민’을 키우는 일이다.

수진 : 지금까지 각성된 시민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력만큼 잘 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2016년의 촛불 광장을 보면 청소년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성숙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미래사회에는 왜 더더욱 각성된 시민이 필요한 것일까?

광필 :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많은 학교들이 교문 앞에 멈춘 민주주의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교육청이 이를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학생 자치를 강화하고, ‘민주시민교육’이라는 교과서와 교육과정도 만들었다. 교사들 연수도 많이 했다. 그래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016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최씨와 박씨가 아이들을 한 방에 깨웠다. 그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자.

지금은 다들 세상이 바뀐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지만 적어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방향을 잡으면 여의도의 정치인들이 절묘하게 타협점을 만들어 수습하려 한다. 그러면 다시 토요일에 광장의 시민들이 제자리로 돌려놓고, 조금 더 밀고 간다. 그러면 또 다시 여의도에서 그 수준에 맞춘 수습책을 마련하여 타협하려 한다. 그러기를 몇 번 거듭했다. 결국 광장에 나온 각성된 시민의 힘으로 소수 정치인과 권력자들의 야합을 막고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너무 형편없는 수준의 최씨와 박씨였기에 그나마 시민들의 각성과 대응이 가능했다. 만약 그들이 터무니없는 짓도 하지 않고, 노련하게 대응했다면 참으로 우려스러운 상황을 맞을 수 있었다.
미래에는 일국에 머물지 않고, 전 지구적 고민과 대응을 해야 한다. 과학기술을 무기로 하여 자본과 권력이 실리콘밸리의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될 수 있다. 그에 맞서는 시민의 힘이 중요하다. 미래의 시민인 아이들을 학교에서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다. 그런 점에서 학교 교육의 한계를 절감한다.

수진 : 저도 지금까지의 학교 교육이 각성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왜 그런 한계를 느꼈는지 궁금하다.

광필 :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접근해 보자. 지난 100년 동안 학교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현란한 수사를 걷어내고 나면 학교의 역할은 ‘성실한 직장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기술과 사회구조의 발달에 따라 다양하고 질 높은 노동을 감당할 노동자가 요구된다. 최근에는 기술과 사회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학교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지만 오랫동안 학교는 그런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미래의 과제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학교에서 훈련된 아이들이 로봇과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고, 대다수가 실업 상태에 처한다. 구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과잉생산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니, 기본소득이 확대된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앞서 칼럼에서 다루었던 ‘강한 인공지능을 허용할 것인가?’ 또는 ‘경제적 불평등이 생체 불평등을 초래하는 유전자 조작을 허용할 것인가’ 등 소수의 기술 주도 엘리트가 던지는 많은 난제들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감당 못할 때의 아이들의 미래, 인류의 미래는 앞에서 언급한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술, 도박, 마약에 찌든 인디언의 모습일 수 있다.

수진 : 소수의 기술 주도 엘리트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각성된 시민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말이 공감된다. 그런데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광필 : 이우학교에서의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접근해 보자.

앞의 사진은 이우학교에서 하는 ‘좋은 수업 만들기’ 장면이다. 2003년 개교 때부터  이우학교에서는 학기가 끝나면 아이들로부터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그런데 몇 년 후 학생회장 선거를 하는데, 한 당에서 이런 공약을 내걸었다. 참고로 얘기하면 이우학교는 후보가 정당을 토대로 선거를 준비한다.
“학기 끝나고 피드백 받아서 수업을 개선하면 어차피 우린 이미 수업 다 들은 것 아니냐? 그러니 학기 중간에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자!”
그런 공약을 내건 당이 선거에서 이겼다. 처음엔 선생님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학기말에 수업에 대한 평가를 학생들에게 받는데, 학기 중에 직접 학생들과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그렇지만 수업에서 아이들의 역할이 크고, 오히려 아이들의 책임을 높일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위 사진은 고1 영어 시간에 ‘좋은 수업 만들기'(이하 좋수만)를 위한 간담회 장면이다. 아이들끼리 먼저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이야기 된 것들을 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한다. 당연히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나올 수 있다. 과제가 너무 많다거나, 수업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끼리의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아이가 모둠과제를 하는 데 무임승차를 한다, 매너 없이 엎드려 잔다 ‥ 등등.
그래서 규칙을 아이들 스스로 정하게 된다. 선생님은 엄두도 못내는 무시무시한(?) 규칙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는 힘이 매우 강하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선생님이 하는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교사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수업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좋수만이 생긴 지 10년 가까이 되었다. 학생회에선 좋수만을 위해 집행위원회가 따로 있고, 그 위원회에서 매년 아주 구체적인 지침들을 만든다. 집행위원회 위원은 학생들에게 꽤 매력 있는 자리로 매년 경합이 치열하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이 각성된 시민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데만 익숙해지면 결국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수업을 타율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고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생에서 ‘각성된 시민’으로 성장하는 길은 학교 운영의 모든 부분에 걸쳐 확대되어야 한다. 학생자치의 힘이 학생회장 선거나 반장 선거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 이우학교의 경우, 다양한 학생 주도의 위원회가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역시 체육대회 준비위원회, 이어서 축제 준비위원회, 예술주간 준비위원회, 농촌봉사활동 준비위원회 등이 있다. 한 때는 과도한 위원회 홍수로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여전히 전통이 이어지고, 또 새로운 위원회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시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은 못 말리는 일이다.

수진 : 학교차원에서 각성된 시민을 길러내는 방법에 일정 부분 납득이 간다. 그런데 솔직히 그럴 때 있지 않나? ‘도대체 가정에서 어떻게 했길래…’ 학교에서의 노력만으로 각성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광필 : 그렇다. ‘민주주의가 학교 교문 앞에 멈춰 섰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분은 선생님보다는 부모님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가정집 현관문, 특히 안방 앞에서 멈춰 섰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옆집 아이에게는 멋진 조언을 하는 교육자지만 자기 자식에게는 온갖 지시를 내리기 바쁜 ‘꼰대’이기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아이 입장에서는 잔소리지만.
특히나 조기교육과 사교육으로 뺑뺑이를 돌면서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를 자극받지 못하고, 오히려 덜 자란 영장류의 뇌만 혹사당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 과정을 매니저가 되어 진두지휘하는 부모를 아이는 어떻게 이해할까? 교육 ‘당하는’ 아이는 저항을 꿈꾸지만 좌절하여 무기력해지거나 뺀질거리든지, 아예 개겨 버린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부모들이 ‘이웃집 아줌마’나 우리 사회 전반의 생태계를 탓하고 부모도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2~30 년 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인디언보호구역의 인디언이 아니라 각성된 시민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족의 일원으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그렇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 중학교 3학년이면 덩치는 다 컸다. 그런데 속이 비었다. 그 빈 속을 부모나 선생님이 채울 수는 없다. 그 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본인뿐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자기가 어른이 되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것이 많으니까 회피하려고 한다. 진로 문제만 놓고 봐도 뭘 하겠다고 정하게 되면 그걸 위해서 책임을 져야 하니, ‘아, 이건 아닌가봐’하면서 계속 회피한다. 그러니, 아이 취급하면서 감싸주고 채워주려 하면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어른처럼 대우하고, 집안일도 함께 의논하면 아이는 책임감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빈 속을 채우게 된다. 가정의 민주주의가 아이를 각성된 시민으로 키운다. 그렇게 우리 사회도 광장의 힘이 커진다.

학교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교육은 가정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6. 학교는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95% 학생을 중심으로

수진 : 미래에는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의 학교가 1~5% 학생들을 위해 돌아가고 있지 않나? 이런 학교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광필 :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는 상위 5%의 아이들을 위해 모든 학교운영이 맞춰져 있다. 학교 앞에 내거는 진학생 플랭카드만이 아니다. 1등급 인원수를 위해 다수의 아이들이 듣지도 않는 강의의 들러리를 서게 한다. 고등학교 체계는 지난 20년 동안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과학고, 외고, 영재고, 예술고, 자사고 등 누더기가 되었다. 입시제도는 더 심해서 상위 1%에 맞춰 돌아간다. 정보력과 문화자본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수시 제도가 경쟁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그 동안도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학자, 관료, 언론 등 빅마우스들이 그들과 그들의 부모를 대변한다. 사실 1~5%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다수 95%의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아닐까? 그렇다면 다수인 95%의 아이들에 맞춰서 학교가 운영되어야 한다.

95% 다수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학교가 지금처럼 ‘성실한 노동력’으로서 열심히 준비시켜 봐야 로봇이나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30년 후 지금의 십대가 40대가 된 미래에는 대부분의 인류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노동을 감당한다. 높은 생산력과 다수의 실업에 따른 소비의 급격한 위축, 양극화의 심화는 기본소득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다수 인류는 먹고 사는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다수 인류는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이 할 일은 Labor가 아닌 Work가 된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하고 싶은 동료들과 하면 된다.

오늘의 교육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모범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힘, 야성을 키워주는 것,
아이의 성장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발달단계에 맞게 기획하고 자극을 하는 것,  아이들의 발심과 활동이 중요하지만 그 활동의 경험을 해석하고,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성실한 직장인’이 아니라 ‘각성된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정광필
대안학교 이우학교를 설립했고, 지금은 ‘50+인생 학교’를 이끌고 있다. 그를 만나면 ‘호연지기’의 뜻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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