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SKY)대’와 ‘인(IN)서울대’에
숨어 있는 배타적 욕망 :
[권력은 위]와 [평안은 안] 은유
나익주 (한겨레말글연구소)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처절한 입시 경쟁에서 어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이 시대의 학생들과 부모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던 JTBC의 주말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지난 2월 초 2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의 높은 인기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최상류층 가정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어떻게 대물림하려 하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은 우리들의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이따금씩 보면서 사교육을 받지 않은 채 대학입시를 치렀던 내 아이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경제적 능력은 애초에 없었는데도 ‘아버지로서 자식을 맨몸으로 전장에 내몰았다’는 자책과 ‘사교육을 받았더라면 결과가 더 좋았을까’라는 후회가 뒤섞인 심사였다.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의 내면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승자가 되고픈 욕망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드라마의 제목을 ‘스카이 캐슬’이라 정한 작가의 의도를 시청자들은 어떻게 그리 쉽게 파악하고 주제와 내용에 공감하며 몰입했을까 살펴보고 싶었다. 언어학자로서 느끼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고나 할까.
‘스카이대’: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함] 환유
자녀들이 유아기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들―특히 부유한 부모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는 입시 경쟁의 정점에 있는 고려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는 언제부터인가 ‘스카이’(SKY) 대학이라 뭉뚱그려 불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낱말이 사교육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통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 입시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학생들과 교사들,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학입시의 치열함이나 대학 서열화와 관련해 일상적으로 ‘스카이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물론 ‘스카이대’는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의 영문 표기인 Seoul National University와 Yonsei University, Korea University에서 각각 첫 글자인 S와 Y, K를 따서 만든 두문자어 SKY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스카이’에 ‘대학교(大學校)’를 약칭하는 ‘대(大)’를 결합한 낱말이다. 따라서 두문자어 SKY는 ‘부분 표현’(SKY)으로 ‘전체 표현’(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University, and Yonsei University)을 대신하는 ‘환유’의 사례에 해당한다.*
여기서 나는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입시 경쟁의 정점에 있는 세 대학을 통칭하기 위해 S와 K, Y를 조합할 때, 한국 사람들은 왜 두문자어 SYK(시크), KYS(키스), KSY(크사이), YKS(이크스), YSK(이스크)가 아니라 SKY(스카이)를 선택했을까? 단지 영어에 이미 존재하는 어휘이고 발음하기 가장 편하다는 이유에서 그랬을까? 물론 이것도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를 향한 끝없는 욕망의 표상 ‘스카이대’: [권력은 위], [부유함은 위]
글자 그대로 ‘밖에 서서 위를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광활한 공간’을 지칭하는 영어 낱말 sky와 한국어 대응어인 ‘하늘’에 대한 은유적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라고 본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하늘에 초자연적인 절대자인 신이 살고 있으며 선한 사람들이 죽으면 가고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한 세계인 천국(heaven)이 있다고 믿는다.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엄청난 권력과 물질적 풍요, 절대적 지위, 신체적 건강의 영원함을 지금 여기에서도 누리고 싶은 우리들의 열망에서 ‘스카이(SKY)대’는 주조되었고 이 시대의 화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낱말 ‘스카이대’의 생명력은 하늘에 대한 우리의 마음속에 구조화되어 자리 잡은 지식 덕택이다.
공간적으로 ‘위’에 있는 하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지식은 행복이나 권력, 건강, 지위, 부유함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그대로 투영된다. 이것은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을 묘사하는 표현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대립하는 두 감정인 ‘행복’과 ‘슬픔’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행복하거나 기쁜 느낌을 묘사할 때는 ‘뜨다’ ‘들뜨다’ ‘오르다’ ‘끌어올리다’ 등이 사용되는 반면, 슬프거나 우울한 느낌을 묘사할 때는 ‘빠지다’나 ‘떨어지다’ ‘처지다’ ‘가라앉다’ ‘저하’ 등이 사용된다.
[행복은 위, 슬픔은 아래]
-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위에 뜬 기분이었어.
- ‘응답하라 1988’ 혜리, 수학여행 기분에 들뜨다 언니 류혜영한테 맞고 옷장에 갇혔다
- 햇볕 쬐는 시간이 점차 짧아질수록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 쉬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 비가 내리는 날에는 기분이 가라앉다 보니 몸까지 더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 날씨도 덥고 해서 이래저래 기분이 축 처진다.
- 관중들의 응원이 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 덩치가 작은 스타트업이 거액의 스톡옵션을 지급하는 것은 직원 사기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 집을 내놓았지만 3달 가까이 지나도 보러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자 상심에 빠진 상태였다.
- 그녀는 요즘 침체 상태이다.
- 버닝썬 압수수색, 경찰로서 부끄럽고 이번 일로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다.
- ‘뜬금포’ 넥슨 매각 소식: 임직원들 ‘사기저하’
- 번아웃 증후군에 걸리면 우선 의욕이 저하되고, 성취감이 안 느껴지고
공간적인 ‘위-아래’ 개념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권력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위계에 대한 이해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위-아래’ 개념을 묘사하는 낱말들이 비유적으로 사회적 권력이나 위계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명사 ‘위’나 ‘아래’ ‘상(上)’ ‘하(下)’는 문자적으로 물리적 공간 내 수직축 상의 위치를 지칭하고, 형용사 ‘높다’와 ‘낮다’는 물체와 수직축 사이의 위치 관계를 지칭하며, 동사 ‘오르다’와 ‘낮다’, ‘기울다’는 물체가 수직축 상에서 이동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물체의 위치 변화를 지칭하고, ‘억지로 내리누르다’의 줄임말에 해당하는 동사 ‘억누르다’도 자신의 의미에 수직축상의 이동을 내포하고 있다. 아래 예문에서 보듯이, ‘많은 권력’을 누리고 ‘엄청난 사회적 지위’를 향유하며 ‘명령’을 부과하고 ‘통제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권력이나 지위도 없고 통제를 받는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권력은 위, 권력 없음은 아래]
- 인류 역사에는 인민을 탄압하고 억누르던 잔인한 독재자를 반대해
- 기업은 다른 기업과의 항상적인 경쟁 때문에 내부를 지속적으로 통제한다. 기업조직은 상명하복의 비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된다. 상하간의 대화는 없고 윗사람 눈치 보기만 남는다.
- 국정농단의 핵심공범인 재벌들은 단죄를 피해 다시금 권력의 정점으로 돌아와 있다.
- 세조, 단종을 폐위하고 권좌에 오르다
-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권좌에서 내려온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파면된 사상 첫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 민심이반의 가속화로 권력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고
- 현재 경제적 지위가 높은 가구의 청년들은 경제적 지위가 낮은 가구의 청년들보다 계층 상승 가능성을 더 높게 점쳤다. 임대 주택 거주자보다 자가 거주자가 자신의 계층이 지금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인식했다.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사회 통념을 벗어나는 행동으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주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업무를 갑자기 바꾸는 경우와 일부러 일을 시키지 않는 경우도 직장 내 괴롭힘
감정이나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건강 상태’도 역시 우리는 공간적인 ‘위-아래’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아래 표현 참조). 이 경우에도 공간적 ‘위’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는 ‘솟다’나 ‘일어나다’ ‘최상(最上)’은 건강한 상태를 묘사하는 반면, 공간적 ‘아래’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는 ‘눕다’나 ‘빠지다’ ‘쓰러지다’ ‘굴복하다’는 허약하거나 병에 걸린 상태를 묘사한다.
[건강은 위, 병약함은 아래]
- 박카스를 한 병 따 마시면 왠지 머리가 잘 돌아가고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 들기 때문
- 박항서 감독이 최상(最上)의 건강을 유지하며 지도자 생활을 유지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또한 않겠다고
- 병석에 누운 그 순간부터 2년 동안 엄마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다만 스스로 일어나 딸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주는 것
-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고발된 CEO……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 5월 이후 병상에 누워있는지 4년6개월째
- 학창시절 심장병과 성대 결절을 앓았던 그녀는 가수로서의 생명을 끝날 수 있는 시련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가수의 꿈을 이어 갔다.
- ‘구해줘도 뺨 때리고’…소방관, 우울증에 빠지다
‘경제적 지위가 높다/낮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역시 흔히 공간적인 ‘위-아래’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
대개 가난한 사람들은 ‘판잣집’에 살고 부자들은 ‘고대광실’에 사는데 ‘고대광실’이 ‘판잣집’보다 지면으로부터 더 위에 있다. 이러한 대조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근거해 ‘부유함’을 은유적으로 공간적 ‘위’라고 이해하고 ‘가난함’을 공간적 ‘아래’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오르다’나 높다’ ‘치솟다’ ‘최고(最高)’를 사용해 ‘부유함’을 묘사하고 ‘추락하다’나 ‘나앉다’ ‘고개 숙이다’를 사용해 가난함을 묘사하지 그 역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부유함은 위/ 가난함은 아래]
- 아역배우 출신 사업가, 암호화폐 부자 반열에 오르다
- 긴급지원제도는 위기상황으로 생계가 곤란한 주민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 높게 치솟은 ‘타워팰리스’와 고개 숙인 판자촌
- 부자는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잠을 잤고
- 부산역에서 만난 노숙자(52)는 1997년 IMF 당시 파산하고 이혼한 뒤 혼자 노숙생활을 하게 됐다
- 퇴직금으로 차린 치킨집이 망해 길바닥에 나앉은 유명 신문사 부장
-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이 시점 최고의 부촌은 압구정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 빚을 감당 못해 계층사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좌절하는 ‘위기의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행복과 권력, 부유함, 건강함을 공간적 ‘위’ 개념을 통해 은유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은유가 우리의 사고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신조어 ‘스카이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스카이대’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는 이러한 은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더욱이 ‘스카이대’를 통해 권력과 부, 지위, 건강, 행복, 성공을 거머쥐려는 무한경쟁의 한국사회 현실에 대해 이 공간화 은유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책임은 ‘위’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이 욕망을 실현하고자 배제와 차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우리의 행태에 있다.
배제와 차별의 표상 ‘인서울대’: [평안은 안, 불안은 밖]
‘스카이대’와 함께 입시 경쟁의 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또 하나의 낱말은 ‘인서울대’이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리키기 위해 ‘서울 지역 대학’이나 ‘서울 소재 대학’이라는 어구 대신에 ‘인서울대’라는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입시경쟁과 관련해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낱말을 언급해서 어떤 어린 학생들은 실제로 우리나라에 ‘인서울대’와 ‘스카이대’가 있는 줄 안다고 한다.
- ○대부고 학교설명회 자료집 및 설명회, ‘인서울 대학’ 합격자 수만 392명
- 하지만 인서울대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수시에서 결판을 내어야
-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는 고3 학생의 10% 내외만이 인서울대 진학이 가능하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중고교 학부모들은 입시의 높은 문턱을 실감하고
- 학교마다 인서울대 몇 명, 스카이대 몇 명하는 식으로 실적 경쟁에 나서고 그에 따라 고교 서열이 매겨지다보니
‘인서울대’는 대한민국의 수도 지역을 뜻하는 고유명사 ‘서울’의 앞과 뒤에 영어 전치사 in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인’과 대학교를 약칭한 ‘대(大)’가 덧붙은 복합어이다.*
영어 전치사 in의 의미는 ‘안’과 ‘밖’, ‘경계’로 구성되는 영상도식 ‘그릇’을 참조하여 ‘대상(들)이 그릇 도식의 경계 안쪽에 있는 비시간적 관계’를 나타낸다. 낱말 ‘인서울대’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전치사 in(‘인’)이 내포하고 있는 ‘배제’와 ‘차별’의 의미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그릇’ 영상도식과 관련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다. 예를 들면, 자궁, 어머니 품, 집, 방, 침대, 교실, 건물 등 수많은 그릇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기도 하고 그 안에 갇히거나 밖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활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영상도식적인 구조는 ‘포함’(안에 있음)과 ‘배제’(밖에 있음), ‘경계성’의 경험이다. ‘포함’의 경험은 주로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는 평안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배제’의 경험은 위협으로부터 보호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불안이나 공포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가령 혹한의 어느 겨울날 밤에 따뜻한 방안에 있으면 당신은 안전하지만 길거리―방의 밖―에 있다면 얼어 죽을 위험에 처한다.
이러한 공간적인 영역의 ‘안-밖’과 관련해 느끼는 평안과 보호, 불안과 공포에 대한 경험은 사회생활이나 정치 활동, 경제 활동과 같은 비공간적인 영역의 경험에도 그대로 전이된다. 현재 한국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의료, 예술 등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상당히 많은 서울 ‘밖’의 사람들이 서울 ‘안’의 사람들에 비해 더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차별과 소외가 점점 더 심화될 것으로 느낀다. 대학입시를 통해 자녀들만은 서울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서울 ‘밖’ 부모들의 절박한 욕망과 자녀들이 서울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서울의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서울 ‘안’ 부모들의 여전한 욕망에서 ‘인서울대’의 빈번한 사용이 나왔다고 말하면, 나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하지만 더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향한 우리들의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사람들에 대해 경계를 부과하여 ‘안’과 ‘밖’으로 나누어 ‘안’의 사람들끼리는 결속하고 ‘밖’의 사람들은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배타성이다. 그러면 이 배타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부분적으로는 우리들 개인의 본성에서 나오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재화를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경쟁은 절대 선]이고 [경쟁의 승자는 선한 사람]이라는 은유에 따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 배타성을 부추긴다. 무한경쟁 체제에서는 경쟁에서 밀리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공포에 사로 잡혀 ‘중심’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중심에 더 가까이 경계를 부과해 ‘안’의 범위를 좁혀야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러한 배타성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들’과 ‘그들’로 나누는 이러한 배타성의 강화는 우리를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뜨리며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더 나아가 차별과 소외에 그치지 않고 ‘밖’의 수많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실제로 우리는 기업이 직접적인 책임을 피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위험한 일을 ‘밖’의 사람들―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맡기는 ‘위험의 외주화(外注化)’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을 일상으로 목격하고 있다.
[삶은 전쟁]이 아니라 [삶은 모두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모두가 연대할 때야만 깨뜨릴 수 있는 이 배타성은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긴급한 과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안’의 ‘우리들’에서 ‘밖’으로 밀려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카이대’나 ‘인서울대’라는 신조어가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은 꿈속에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