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의 인생낚시터] 베란다에서 낙마하다

0
18
This post is last updated 188 days ago.

[정광필의 인생낚시터] 베란다에서 낙마하다

[정광필 : 이우학교 설립, 현 50+인생학교 학장]

 

작년 봄부터 베란다 농사를 작게 시작했다. 베란다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자니, 조금 복잡하다. 대안학교에서 교장직을 역임했는데, 임기 4년을 두 번 완주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중도에 화병으로 후송을 가거나 내부의 분란을 감당하지 못해 하차하는 분들이 많았다.

돌아보면 내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낚시 덕이 컸다. 머리가 복잡할 때 물가에 나서면 낚시에 집중하게 되고, 돌아오면 맑은 머리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남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도 벌어준다.

그런데 재작년 말 그동안 낚시로 많은 살생을 했으니, 추운 겨울 밥 굶는 새들에게 밥이라도 챙겨주라고 아내가 조언을 했다. 은근히 찔려서 군말 없이 추운 날 베란다에 오래된 견과류와 마른 떡들을 잘게 부숴 놓기 시작했다. 첫날은 조용하다가 다음날부터는 호기심 많은 직박구리로 시작해서 새벽에는 박새와 참새까지 서로 눈치를 보며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사과나 귤 조각을 좋아해서 갖다 놓으면 바로 나타난다. 이제는 손바닥에 올려놓고 사진 찍을 정도는 아니어도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뒤창을 보니, ‘길냥이’가 어슬렁거린다. 회 뜨고 남은 감성돔 토막과 갈치 잔챙이들이 생각이 나서 그릇에 모아 놓았다. 다음날 아침 가보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렇게 작년 겨울 내내 베란다에서는 새들을 만나고, 뒤뜰에서는 길냥이들을 만났다. ‘집사’님들 입장에서는 소꿉놀이 같겠지만 얘들 식성과 주의할 점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게 봄이 되어 화초를 베란다로 내놓으면서 재미난 궁리를 하게 됐다. 상추와 겨자를 베란다에서 키워보자 싶었다. 휴일에 가까운 농원에서 모종과 퇴비, 연장을 사고, 넓은 화분을 구해서 베란다에 정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거실에서 나간 화분과 작은 텃밭, 그리고 새 모이통과 물그릇이 모이면서 그 작은 베란다가 작은 생태계를 이루고, 나는 그 생태계를 책임져야 할 ‘집사’가 되었다. 아침마다 쌀뜨물을 주니 5월까지 모두 잘 자랐다. 아침에 바로 딴 야채로 만든 샐러드의 맛과 분위기는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런데 6월 들어 진딧물이 등장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요구르트도 소용없고, 목초액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장마에 채소가 녹아내리면서 베란다 생태계는 무너졌다. 자칭 ‘베란다 집사’는 바깥일이 바빠졌다는 핑계로 화초에 물이나 주고, 새와 길냥이의 모이를 챙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올해 새봄을 맞으면서 준비를 조금 했다. 우선 채소를 다양화했다. 상추, 겨자와 함께 미나리, 딸기, 대파를 준비했다. 그리고 텃밭을 몇 년째 해온 선배들에게 진딧물 제거를 위한 비방을 전수받았다. 요구르트보다 강력한 친환경 난황유 희석액이다. 그리고 모이를 찾아 베란다에 들락거리는 새에게 파수꾼 역을 맡길 작정이다. 이제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잘나가고 있다.

베란다에서 하는 소꿉놀이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새삼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현역으로 바삐 뛰고 있다는 생각에 일상을 늘 뒷전으로 미뤘다. 해결하지 못한 현안과 글 빚에 시달리다가 어쩌다 짬이 나면 낚시 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베란다와 친해지면서 조금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에 물을 주러 나서고, 과일을 먹으면 새와 나눌 생각을 한다. 새로 돋는 겨자의 연둣빛 싹에 감격을 하고, 남은 생선을 챙겨서 길냥이에게 주며 흡족해한다.

그동안 거창한 말들을 내뱉으며 살아왔다. 4대강 수질을 걱정하고, 대기 오염을 걱정했다. 환경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이따금 행사에 참여하며 위안을 삼았지만 정작 내 일상과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당장은 39만㎞나 달린 오래된 경유차와 몇 십 년째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문제다. 그런데 베란다 집사 노릇을 하다 보니, 내가 뱉는 말들과 일상의 괴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분들은 어디서부터 무너졌을까?

 기사원문보기(클릭!)

 

정광필
대안학교 이우학교를 설립했고, 지금은 ‘50+인생 학교’를 이끌고 있다. 그를 만나면 ‘호연지기’의 뜻을 알게 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