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후 허슬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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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후 허슬_1

 

그 거지는 자식들의 앞날만 예언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앞날도 얘기해 주었다.
가능한 빨리 큰 도시로 가시오.
도시 안에 앉지 말고 변두리에 서향집을 찾으시오. (서향집: 서쪽을 보는 집)
태성이는 금전운이 없으니 돈을 맡기지 마시오.
태성이 남은 운은 40대 말에 찾아오는 한번 뿐이오.
그때 가진 것을 모두 거기 쓰시오.
부족하면 빚을 내시오.

어머니: 그 운을 어떻게 안다요?
거지: 그 운을 아는 것이 제수씨의 복이요.

아버지는 어머니 말을 듣고 제대하자 마자 이사할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광주시 변두리에서 적당한 서향집을 발견하고 그곳을 이사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3년이 흘렀고 나는 이사하기 몇달전 농약을 마시고 말았다.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천행으로 살아남아 나는 광주에서 살게 되었다.
치평동 264-6호 (훗날 동네의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지게 되었음)
우리집은 정서향이며 광주시에 속하는 곳인데 약 8m 폭의 길을 사이에 둔 맞은편 집은 광산군이었다. (지금은 모두 광주시로 편입)

문제는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까이에 상무대라는 큰 군부대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모든 장교는 모두 이곳을 거쳐가게 되어 수 천명의 군인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500 m 쯤 떨어진 곳에는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약 2000명 정도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는 약 500 가구의 민간인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군부대와 관련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구조였다.

당시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사회가 정비되지 않았고 특히 한국군 미국군 할 것 없이 군부대 근처에는 매춘이 성행하였다. 우리 동네는 1/5 정도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춘과 관련된 사람들이 었다.
예를 들면, 매춘부들의 기둥서방들도 많았는데 모두 깡패들이었다. 매일 어딘가에서 싸움판이 벌어지는데 여자들은 머리칼 잡아뜯기, 남자들은 주먹질이 엄청났고 한달이 멀다하고 칼부림도 있었다.

부부싸움도 상상을 초월하였다.
왼쪽 옆집은 음식점이었는데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두들겨 패는 소리, 이어지는 비명소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렸다. 어느날 아주머니가 아저씨 사타구니를 걷어차서 아저씨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집 벽에 사람 모양으로 구멍이 난 적도 있었다. 그날 아저씨의 소중한 알 두개중 한개가 깨졌다고 한다.

앞집은 아이스케키 만드는 집이었는데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2층에서 밖으로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아저씨는 매번 어딘가로 도망갔는데 결국 잡혀와서 얻어맞고 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오른쪽 옆집은 양복점 이었는데 아저씨가 전직 권투선수였다. 길가에 샌드백을 걸어놓고 매일 아침 권투 연습을 하였다. 아주머니의 눈은 한쪽 또는 두쪽이 항상 퍼렇게 멍이들어 있었다.

영화 주성치의 쿵후허슬을 보면 돼지촌이 좀 험하게 나오는데 우리 동네에 비하면 그건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동네의 최고 학벌은 국졸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천하의 흉물들이 다 모이는 바닥 중 바닥 동네였다.
이 동네에서 싸움이 없는 집은 오직 우리집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7년의 군대 생활에서 막 제대했던 때라 아는게 군부대 뿐이고 마침 자리도 거지가 알려준 곳과 잘 맞아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철물점과 지물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철물/지물 가게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중요한 것을 하나 놓쳤는데 그것은 2-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오는 홍수였다. 그곳은 지대가 낮아 조금만 비가 많이 오면 윗동네에 있는 저수지가 범람하여 방안에 물이 60cm 정도 높이까지 차오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 곳이니 철물점과 지물포가 없었던 것이다(철물은 물이 묻으면 녹이 슬고 종이는 녹아버리지 않는가!).
게다가 모든 화장실이 재래식이니 홍수가 나면 어찌 될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또 하나 문제는 이 집은 가건물이고 지붕이 기름종이라는 것이다. 지붕이 종이이니 태풍이 불면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어쨌든 우리는 방 한칸이 딸린 가게에 정착하였고 지금도 그 집에 92세의 우리 어머니가 살고 있다 (그동안 몇 번의 보수, 개축을 거쳤음).

사회가 혼란하다 보니 온갖 불법이 난무하였다.
세무서에서 세무검사를 나오면 이 사람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 주어야 하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얼굴에 칼자국 난 사람들이 매월 텃세를 걷으러 다녔다. 한마디로 법이 없는 거의 무법천지였다. 아버지는 법대로 살면 된다고 하시며 절대로 여기든 저기든 돈을 주지 말라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돈을 집어 주었다.
그러니 살림이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저녁 아버지와 내가 장기를 두고 있는데 가끔 본적이 있는 칼자국 아저씨가 가게에 들어와 주인을 불렀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뭔가 큰 소리가 났다.
텃세를 받으러 온 것이고 아버지는 미친놈들 이라고 호통을 치셨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무나 무서워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들어오시고 두던 장기를 마저 두었다.
한시간 쯤 되었을까… 세 명의 험악하게 생긴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들이 집에 들이 닥쳤다.
그 중 한명이 군화를 신은채로 방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어머니는 “아니 돈을 줄 것이디 왜이러요.” 하시며 아저씨를 밀어내었다.
그 아저씨가 한팔로 밀자 어머니는 내 앞으로 사정없이 나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일어서려 하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돈으로 될 일을 왜이러요”

나는 두려움과 분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밀어내시고 가게로 나가셨다.

“나와서 얘기하세”, “따라오면 안되네”

아버지와 세 깡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어머니는 거의 통곡을 하였다.
수많은 주먹질, 칼부림을 거의 매일 보아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뻔하였다.

무한한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가 거짓말처럼 멀쩡히 돌아오셨다.

“한잔 하자네, 술상 한번 차려보소”
“석철아 가서 막걸리 한말 달라한다고 해라”

막걸리 파는 집은 가까운 아이스케키 옆집이다.
곧이어 아까 그 깡패 오야가다 (대장깡패)가 이번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게 아닌가!
나는 번개처럼 뛰어가 막걸리를 주문하였다.
술상은 차려졌지만 상위에 뭐가 있을 리 없다. 아마도 김치, 두부, 멸치 고추장 정도 아니었을까?
큰 주전자 두개에 막걸리가 담겨 배달 되었다.
별 얘기도 없이 큰 대접으로 주거니 받거니 술 대작이 시작되었다.
단간 집이라 나와 어머니는 달리 갈 곳이 없어 방 귀퉁이에 앉아있었다.

아버지: 이보게, 자네가 나랑 술로 한번 해보자는 건가?
오야가다: 아이고 형님, 형님이랑 한잔 허고 싶어서지라…
아버지: 허허, 내가 만주에서 빼갈로 술시합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잔이 이만 했지 (중국집 빼갈잔 (고량주잔)을 생각해 보시라).

한말의 막걸리가 다 떨어지자 오야가다는 큰 절을 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안다쳐서 다행이요” 하며 울먹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안다쳐서 다행이라는 말인 줄 만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사람들을 죽일까봐 걱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흥이 나셨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셨다.
싸울 것이 아니라 팔씨름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 팔씨름은 0.1초만에 끝났는데 얼마나 세게 내리 찍었는지 상대가 나뒹굴어졌다고 한다.

“그놈이 쌈을 좀 아는 놈이라 조용히 끝났네. 팔을 잡아보고도 몰랐으면 귀찮았을텐데.”

아버지는 그 한판에 혼신의 힘을 다 썼다고 한다.

“저런 놈들은 뼈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으면 다음에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동네가 워낙 험하여 아버지는 나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교육대학부속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버스로 40분 정도).
그 학교는 학군 제한을 받지 않는 특별한 학교였는데 학년당 정원이 남자 60명, 여자 60명으로 입학시험을 통과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학생들 대부분이 상당한 사회적 수준 집안의 자제들 이었다.
나이도 정확히 7살이 되지 않으면 입학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여 우리 동네 학교는 6살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동네에서 여러모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들이 자기들이 학년이 위라고 형이라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 중 대장격인 놈이 옆집 양복점집 아들 명수였다.
아버지를 따라 권투를 배워서 주먹이 돌처럼 단단하였는데 장난삼아 한번씩 치면 맞는 나는 뼈골이 저릴 정도였다.

아버지가 오야가다를 꺾은 날 나는 감동하여 아버지에게 나도 한수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흥이 오른 아버지는 내게 금라수 한수를 가르쳐 주셨다.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손의 손등을 감싸듯 잡고 약간 비틀어 힘을 쓸 수 없게 한 다음 오른손을 손 등에 얹고 밀면서 팔을 꺽고 마지막으로 체중을 실어 어깨를 탈골시키는 수법이었다.
이 수법은 좌우를 바꾸어 오른손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세 가지 동작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라야 하며 툭 소리가 나야 상황이 끝난 것이라고 하셨다.
일단 수법에 들어가면 절대로 자비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상대가 죽지 안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상대로 이 수를 5천번 넘게 연습하였다.
절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아버지 말을 뒤로하고 며칠 후 나는 명수의 손목을 잡고 말았다. 툭 소리와 함께 허공을 찢는 비명이 내 귀를 찔렀다.
얼마나 아팠는지 명수는 눈을 까 뒤집고 그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는 집으로 도망쳐 들어와 떨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동네에서 아무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분위기를 전하느라 글이 좀 길었습니다)

 

배석철
암 억제 유전인자에 관한 그의 연구가 Cell지에 수록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자이다. ‘동고송’은 배교수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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