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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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천해야 앎이 있다

모택동「실천론」

중국을 알려면 마오 쩌 뚱의 사상을 알라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여러 민족의 대가정의 일원이 되어, 용감하고 근면하게 스스로의 문명과 행복을 창조함과 동시에,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촉진하기 위하여 일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모욕당하는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선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 한 건장한 사람의 우렁찬 목소리, 가끔은 약간 떨리는 듯 했지만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오 쩌 뚱(1893~1976)은 3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렇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했음을 선포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불과 12명이 모여 만든 작은 정당이었지만, 28년 만에 8억 명(당시)의 인구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는 정당이 되었다. 중국공산당 28년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고난의 정점에 대장정이 있다. 공산당은 당시 패권을 다투고 있던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을 하였다. 1934년에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시작된 대장정은 1935년 북쪽 연안지방에 도착하여 끝이 났다.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km를 걸었다.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였다. 그 과정에서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이렇듯 공산당은 열세였다. 이 대장정 기간에 마오 쩌 뚱은 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 마오 쩌 뚱의 지도 아래 공산당은 열세를 만회했고, 마침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의 제1당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 2대 강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든 중국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의 다수는 중국인이다. 이제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지하철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중국을 알기 위한 학습 열풍은 이제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수많은 학생, 직장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닌다. 자칭 중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쓴 책이 넘쳐난다. 그런데 중국을 알고자 한다면서 빠뜨리는 게 있다. 바로 마오 쩌 뚱의 사상에 대한 학습이다.

중국을 알려면 우선 마오 쩌 뚱의 사상을 알아야 한다. 중국은 마오 쩌 뚱의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하고 있다. 마오 쩌 뚱의 사상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마오 쩌 뚱의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중국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기대하기 어렵다. 마오 쩌 뚱의 사상을 대표하는 책이 『실천론(實踐論)』이다. 1937년 7월에 쓰여진 『실천론』은 분량도 내용도 평이하다. 중국어 원문으로는 15쪽, 우리말로 번역하면 약 30쪽 정도의 분량이다.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어서 까다롭지 않다.

중국식 마르크스주의

마오 쩌 뚱은 공부만 한 학자가 아니라 실천가, 혁명가였다. 따라서 마오 쩌 뚱의 사상은 실천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마오 쩌 뚱은 당대 중국의 현실을 바꾸고자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이해하고, 그 시대의 문제와 싸웠던 마오 쩌 뚱의 실천을 알아야 마오 쩌 뚱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마오 쩌 뚱은 후난 성의 작은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8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읽기와 쓰기를 배웠는데, 특히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의 소설을 좋아했다. 마오 쩌 뚱의 아버지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가 돈벌이에 쓸모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오 쩌 뚱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사범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사범학교를 마친 후 베이징으로 갔다. 마오 쩌 뚱의 나이 26살이었다. 마오 쩌 뚱은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의 조수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베이징 대학교는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였다. 교수와 학생들은 중국 근대화에 저해가 되는 전통문화와 풍습을 바꾸려 하였다. 마오 쩌 뚱이 베이징으로 간 그 다음해에는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5.4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오 쩌 뚱은 중국의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서양의 온갖 사상을 섭렵하고 마르크스가 지은 「공산당선언」 등을 읽으며 중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사상을 모색하였다. 마오 쩌 뚱의 결론은 분명하였다. 중국을 바꾸기 위해서는 혁명을 해야 한다.

베이징 대학의 몇몇 교수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라는 동아리를 결성하자, 마오 쩌 뚱은 거기에 가입하였다. 이 동아리를 중심으로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마오 쩌 뚱은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고향인 후난 성에 내려가 공산당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24년에 쑨원이 주도하는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군벌에 맞서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였다. 그러나 쑨원이 죽고 난 후 지도자가 된 장쩨스는 1927년에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에 대해 전면적인 탄압을 하였다. 이에 맞서 공산당은 농촌과 도시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오 쩌 뚱은 농촌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활동 거점을 만들고, 그것을 ‘농촌해방구’라 하였다.

마오 쩌 뚱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글을 뒤적이며 문구나 되새기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가 그러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그 다음에는 소련에서 파견된 인사들이 지도부가 되면서 교조적인 이론으로 공산당을 지도하였다. 그들은 도시 노동자 중심의 봉기를 통한 혁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선은 수많은 공산당원을 잃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오 쩌 뚱은 농촌 출신으로 중국에서 농민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었고, 억압과 수탈을 가장 심하게 받던 층도 농민이었다. 농민을 장악하지 않고는 중국 혁명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오 쩌 뚱은 농촌으로 들어가 농촌해방구를 만들었고, 농민들을 모아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마오 쩌 뚱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중국식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였다.

배는 먹어봐야 맛을 안다

『실천론』의 부제는 ‘인식과 실천의 관계, 지(知)와 행(行)의 관계에 대하여’이다. 인식과 실천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올바르게 인식해야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비가 오고 있는데 눈이 오는 것으로 인식하고 나가면 비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천을 해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특히 마오 쩌 뚱은 이것을 강조하였다. 마오 쩌 뚱은 말한다. “배의 맛을 알려면 배를 먹어봐야 한다.” 또한 마오 쩌 뚱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을 ‘지(知)’와 ‘행(行)’이라는 중국 전통철학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마오 쩌 뚱은 말한다. “천재는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다 알 수 있다는 말은 한갓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란 실천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실천하는 가운데 지(知)를 얻고, 그것이 문자와 기술을 통해 천재의 손에 이르게 될 때 천재는 간접적으로 세상만사를 알게 된다.” 마오 쩌 뚱은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을 ‘지행통일관’이라고 규정하였다. 마오 쩌 뚱은 결코 중국의 현실과 전통을 잊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마오 쩌 뚱은 『실천론』에서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감성적 인식의 단계’와 ‘이성적 인식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감성적 인식 단계에서 인간은 주로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연필이 하나 있다. 만져 보니 끝이 뾰족하다. 냄새를 맡으니 향나무 향기가 난다. 여기에서 ‘뾰족하다’, ‘향나무 향기가 난다’는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이다. 그 두 가지 인식을 합하여 “끝이 뾰족하고 향나무 향기가 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연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성적 인식의 단계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그 여성을 보고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이나 ‘아가씨’라는 말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말이다. 이 말들은 사람들이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서로 약속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고, ‘아가씨’라 하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있는 여성을 보고 두 말을 합하여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인식을 한다.

마오 쩌 뚱은 인간의 인식이 감성적 인식의 단계에서 이성적 인식의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감성적 인식의 단계는 연필을 만져보고 연필 냄새를 맡는 경험의 단계이다. 여기에 머무르게 되면 경험한 것밖에 알 수 없다. 이 단계에 머무르면 중국의 농민은 삶이 고달프다는 경험적 인식밖에 하지 못한다. 이성적 인식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중국의 농민은 자신의 삶이 왜 고달픈지를 알게 되고, 고달픈 삶을 끝내기 위해 혁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험과 이론, 인식과 실천은 분리되지 않는다. 경험이 없으면 현실을 알지 못하고, 이론이 없으면 그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오 쩌 뚱은 ‘지’와 ‘행’이 통일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마오 쩌 뚱 사상의 핵심이다. 오늘날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분석할 때 이 지행통일관을 놓치면 한쪽 면만을 보게 될 뿐이다.

마오 쩌 뚱은 말년에 자신도 과오를 많이 범했으므로 인민들로부터 3할의 비판과 7할의 평가를 받으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중국 내에서조차 마오 쩌 뚱의 공과 과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마오 쩌 뚱은 자신이 기대한 7할의 평가를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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