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알면 괴롭지 않다
『법구경(法句經)』
시로 쓴 이야기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녹아 없어졌다. 자신으로부터 세계가 떠나가 버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그런 외로운 냉기와 절망의 순간에서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키며 싯다르타는 일어섰다. 싯다르타는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진통이구나.” 이윽고 싯다르타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가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최종적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순간을 이렇게 썼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에 대해 쓴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느낌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익숙했던 세계가 없어져 버린다. 새로운 탄생이다. 그래서 이제 되돌아갈 곳은 없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그러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6년 동안 곡기조차 끊고 하루에 쌀 한 톨로 연명하면서 극도의 고행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행을 포기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명상에 잠긴지 7일째 되는 날에 드디어 고타마 싯다르타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는 과거와 완전 단절되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전혀 다른 인간, 부처로 재탄생하였다.
깨달음을 얻은 뒤 부처는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며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의 내용을 가르쳤다. 부처가 45년 동안 가르친 내용을 기록한 것이 불경이다. 부처가 열반한 후 제자들이 세 차례에 걸쳐 모여 대규모 집회를 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부처가 열반한 뒤 3개월이 지나서 1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부처 열반 100년 후에 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3차 결집은 기원전 250년 경 아소카 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부처가 4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인도 전역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가르침의 전모를 알려면 각 지역의 제자들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었다. 제자들은 모여서 각각의 지역에서 구전되던 내용을 모았고, 그 내용을 함께 공유하였다.
기원전 94~80년 경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하여 불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부처는 자기 고장의 언어인 팔리어를 사용하여 가르쳤다. 스리랑카에서는 팔리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불경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후 당시 인도의 공식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도 불경이 간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불경은 산크리스트어 불경을 한자로 번역한 한자 불경이다.
불경은 수백 년에 걸쳐 계속 간행되었는데 그 권수가 무려 8만 권이 넘는다. 장기간에 걸쳐 간행되다보니 무엇이 진짜 부처의 가르침인가 하는 논란이 일어났다. 종파에 따라 앞세우는 불경도 달랐다. 그래서 초기에 간행된 불경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 간행된 불경의 하나가 바로 『법구경(法句經)』이다. 『법구경』은 스리랑카에서 처음 팔리어로 불경을 간행할 때 간행된 불경이다. ‘법구(法句)’라는 말은 ‘다르마 파다’라는 팔리어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진리를 말한다. ‘파다’는 ‘말, 시, 길’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다르마 파다’는 ‘진리의 말, 진리의 시, 진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법구경』은 305개의 이야기를 423개의 시로 적은 불경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렀을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났고, 세월이 흐르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했다. 왕궁 밖 백성의 삶을 목격한 뒤였다. 백성들의 삶은 말 그대로 비참했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민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저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인도를 지배한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는 모든 사물에 신이 있다는 종교이다. 죽음에는 죽음의 신이 있고, 병에는 병의 신이 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지 않고 죽지 않으려면 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내야 한다. 백성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비참한 생활이 이어질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브라만교는 답이 아니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고통스런 삶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을 나와 고행을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간의 괴로움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자체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을 겪지 않으려면 태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인도에는 윤회라는 독특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세상에서 죽더라도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더 높은 지위로 태어날 수도 있고, 더 낮은 지위로 태어날 수도 있다. 심지어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어쨌든 윤회가 계속되는 한 태어나지 않을 수 없고, 태어나는 한 괴로움이 계속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태어나지 않기 위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해탈이다. 해탈이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말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 가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니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뒤따른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뒤따른다.”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욕망, 성냄,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욕망,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 집착이 생긴다. 그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법구경』에서 다시 말한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마음을 온전히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청정한 삶이 결실을 얻는다.”
부처는 지혜를 강조한다. 욕망, 성냄, 집착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겨난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 위에 서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자식과 재산 그리고 왕국도 바라지 않는다. 진리가 아닌 것으로 자신이 영달을 바라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평온하여 증오가 없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예전에 ‘삐삐’라는 통신기계가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삐삐를 가지려 하였다. 그러나 삐삐가 나온 지 불과 몇 년이 안 되어 삐삐는 사라졌다. 삐삐를 대체하여 휴대폰이 등장했다. 이제는 스마트 폰 시대이다. 스마트 폰은 영원할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다. 지금 삐삐의 실체가 있는가? 삐삐를 사용했던 사람들 집에 삐삐가 굴러다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삐삐를 켜보라. 전혀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삐삐는 이미 실체가 없어진 물건이다. 이렇듯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따라서 실체를 가진 것도 없다. 일순간에 쓰임이 끝나면 사라지는 것들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해 집착을 한다. 삐삐를 갖고자 열망하고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스스로 화를 냈다. 그 열망과 성냄으로 괴로움만 쌓였다.
부처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실체가 있는 것 또한 없다는 사실을 알라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면 집착을 끊을 수 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할 수 있다.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그것을 부처는 지혜라고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흔히 부처의 가르침을 속세에서 벗어나자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부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부처는 현실의 삶을 소중히 여겼다. 『법구경』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법구경』에서 부처는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바른 길을 말했다. “말을 조심하고 마음을 절제하며 몸으로 악행을 짓지 마라. 이 세 가지의 길을 깨끗하게 하라.” 이 짧은 말속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다 들어있다. 우리는 말실수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마음을 절제 하지 못해 과소비도 하고 잘못된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처의 짧은 말은 오히려 수십, 수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
아울러 『법구경』을 시작하는 다음의 시구는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오늘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면
괴로움이 뒤따른다.
수레의 바퀴가 소를 따르듯이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오늘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순수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면
기쁨은 뒤따른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 단박에 깨달아 이타(利他)를 실천하라
보조국사 지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세상이 싫은 사람, 모두 모여라
항상 제멋대로 탐욕, 분노, 질투, 교만하고, 방만한 생활을 일삼으며 명예와 이익을 쫓으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 쓸데없는 말이나 하면서도 천하의 일을 의논한답시고 한다. 또 계율도 없으면서 함부로 신도들의 보시를 받아들인다. 공양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이렇게 허물이 많은 데,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지눌(知訥, 1158년 – 1210년)은 「권수정혜결사문(權修定慧結社文)」에서 당시 불교계에 대해 일갈했다. 고려 전기, 불교계는 사상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권력도 마음껏 누렸다. 속세와 인연을 끊으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속세의 이익을 마음껏 누렸다. 귀족층과 결탁하여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승병까지 두어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켰다. 불교 행사는 지나치게 호사스러워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 비용은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충당되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의 불만과 항거를 억누르는 역할을 하였다.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 전기 문벌귀족들이 일거에 몰락하고, 문벌귀족과 결탁했던 불교계의 세력들 역시 몰락했다. 이런 전환기에 불교계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 선봉장이 지눌이었다.
지눌은 결사(結社)를 하고자 하였다. 또 하나의 절[사(寺)]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사(社), 즉 단체를 만들자고 했다. 이 단체는 각계각층에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 지눌은 말했다. “도가나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세상을 싫어하고, 티끌과 같은 세상을 벗어나 세상 밖 높은 곳에서 마음을 닦는 데 전념하고자 하는 사람은 비록 지난날 서로 모였던 인연이 없더라도 결사문 뒤에 그 이름을 쓰기를 허락한다.” 이런 뜻에 동조하여 참여한 사람 중에 혜심(慧諶) 같은 사람도 있었다. 혜심은 유학자였지만, 지눌의 문하로 들어가 지눌의 뒤를 이었다. 지눌은 새로운 불교 종파 창설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눌의 뒤를 잇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가 창설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불교계의 대표격인 조계종이 되었다.
결사(結社)를 결의하다
지눌의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소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호는 지눌이 노동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게 해준다. 지눌은 승려가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해 사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스스로 노동하며 수행하자! 지눌이 불을 지핀 결사운동의 목표였다.
지눌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병이 잦았다. 아버지가 병만 나으면 부처께 자식을 바치겠다고 기도한 후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그래서 지눌은 8살 때 절에 맡겨졌다. 25살 때, 승과(僧科) 시험에 합격하여 개경(오늘날의 개성)의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였다. 담선법회는 참선을 하며 참선의 이치를 배우는 국가적 행사였다. 지눌은 이 법회에 참석한 10여 명의 승려들을 모아 이렇게 결의했다. “명예와 이익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지혜를 갈고닦는데 힘쓰자. 예불과 경(經) 읽기를 하고 육체노동을 함께 하자.”
지눌은 당대 불교계의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불교계는 경전 연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백성과 멀어졌다. 한자를 읽을 수 있고 지식을 가진 층만이 경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은 일갈했다. “진리를 깨우친 사람도 처음에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어느 경전에 중생이 깨달음의 도를 닦지 못하게 하고 있는가.” 불교가 경전 연구에 집중하면 백성은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지눌은 진리를 깨우친 모든 사람이 보통의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백성을 등한시 하는 불교계의 잘못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한 지눌은 당대의 승려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다. “말을 들어 헤아리고 글을 읽어 이해하며 교리를 좇지만, 마음이 흐려 손가락과 달을 구분하지 못한다.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서 설법을 하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더러운 달팽이가 스스로를 더럽히면서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글줄이나 읽을 줄 안다고 잰체하며 중생을 호도하고, 수행은 하지 않으면서 명예와 이익을 쫒는다고 당대 승려들을 비판하였다. 그런 승려들은 스스로 더러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럽힌다. 그래서 지눌은 수행을 하자고 했다. 함께 모여 노동을 하고 참선과 경전 읽기를 하자고 했다.
단박에 깨우쳐라
지눌은 전라남도 나주의 청량사(淸凉寺)에서 수행을 하던 중 중국 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이 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게 되었다. 그 책에서 “참다운 본성이 잠깐 사이에 생겨나면, 비록 여러 가지의 욕망을 보고 듣고, 그 욕망이 마음속에 나타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더럽히지 못한다. 본성은 항상 자유롭게 된다.”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진리는 한 순간에 깨우칠 수 있으며, 깨우치고 나면 자유롭게 되어 온갖 고민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지눌은 수행에 앞서 깨우침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무엇을 깨우쳐야 하는가? 지눌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 책은 지눌이 죽은 후 제자인 혜심이 발견하여 1215년에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 지눌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책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책 제목에서 ‘원돈(圓頓)’이란 단박에 깨우친다는 말이다. 따라서 ‘원돈성불’이란 단박에 깨우쳐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단박에 깨우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이렇게 썼다. “중생의 마음에 항상 부처의 바른 깨달음이 담겨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는 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 중생과 부처의 마음은 깨끗함이 다르지 않다. 알지 못하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있으나,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중생이 그 마음을 단박에 깨우치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썼다.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 하고 성(城) 밖에 진리가 있다고 고집하면서 진리를 얻고자 하면,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깎아 골수를 꺼내고, 피를 다 짜내어 경전을 베끼고, 언제나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대장경』 전부를 다 읽고 갖가지 고행을 하더라도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은 헛수고일 뿐이다.”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는 이치를 알지 못한 채, 아무리 어려운 고행을 하고 경전을 연구해봐야 시간낭비일 뿐이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알아야 단박에 깨우칠 수 있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알면 가을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며 깔깔대고 웃다가 문득 깨달을 수 있다. 원효는 한 밤중에 목이 말라 맛있게 마신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문득 깨달았다고 하지 않는가. 무지한 백성도 생활 속에서 어느 날 한 순간에 문득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단박에 깨우치는 것을 돈오(頓悟)라고 한다.
깨우쳤으면 이타(利他)를 실천하라
깨우치면 끝나는가? 지눌은 계속 수행하라고 하였다. 깨달았는데 왜 수행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지눌은 “미친 소리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계속 수행하는 것, 이것을 점수(漸修)라 한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점수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점수를 해야 하는 이유는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오랫동안의 고민과 욕망을 갑자기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되 점차로 하여 깨끗하게 씻어내고 오랫동안 성인의 소양을 쌓아가야 성인이 되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났을 때 이목구비는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아직 그 힘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여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다운 구실을 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
오랫동안 수행하여 온 몸에 배여 있는 악습을 씻어내야 한다. 수행은 반드시 절에 들어앉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눌은 일상생활 속의 활동,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타행(利他行),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실천을 하라고 했다. 지눌이 말하는 점수의 핵심은 바로 이타의 실천이었다.
천 가지 만 가지가 여기 있다
결사결의를 한지 8년만에 결사운동을 시작했다. 지눌의 나이 33살인 1190년이었다. 결의는 10여 명이 했지만 결사운동에 모인 사람은 불과 서너 명에 불과하였다. 지눌은 실망하지 않았다. 단체의 이름을 정혜사라 짓고 결사운동이 시작하자 참여자가 급증하여 7, 8년 만에 수백 명이 되었다. 불교도뿐만 아니라 유학, 도가를 공부하던 사람들도 모여 들었다. 함께 노동하고 참선과 경전 읽기를 하며 이타를 실천하였다. 지눌의 결사운동은 귀족 중심의 불교를 백성의 불교로 전환하고자 한 일생에 걸친 노력이었다.
임종을 앞 둔 지눌의 마지막 말이 전해온다. 지눌은 앞에 놓인 책상을 두 세 번 치며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고 했다. 책상이 아니라 책상을 칠 때 나오는 소리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 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 가르침은 백성들에게 전하는 복음이자, 불교가 항상 백성과 함께 해야 함을 일깨우는 계율이었다.
-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최제우 : 『동경대전(東經大全)』
최제우, 득도하다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오싹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팠지만 증세가 분명하지 않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신비스런 말이 문득 들려왔다. 깜짝 놀라 묻자,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 까닭을 묻자, “나도 역시 보람이 없었다. 그래서 너를 이 세상에 보내어 이 법(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서도(西道, 천주교)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영부(靈符, 영험한 부적)를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은 선약(僊藥, 신선의 약)이고, 그 모양은 태극(太極) 또는 궁궁(弓弓, 두 개의 활)과 같다. 이 부적을 받아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라. 주문(呪文)을 받아서 나를 대신하여 사람들을 가르쳐라. 그러면 너는 오래 살 것이고, 세상은 덕(德)이 널리 퍼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득도하는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1860년 4월 5일의 일이다. 상제로부터 부적과 주문을 받았다. 부적은 몸의 병을 고치는 수단이고, 주문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수단이다. 백성들의 피폐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을 득도를 통해 얻었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천대받으며 자랐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21살 때부터 처자를 돌보기 않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봇짐장수, 서당훈장, 약장사, 점쟁이 등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떠돌이 생활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조그만 철물점을 냈다. 그러나 도를 닦는답시고 이 산 저 산에 들어가 기도를 하며 세월을 축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를 깨치기 전에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본격적인 도 닦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기 6개월. 최제우는 마침내 득도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설명했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최제우의 득도를 인정하지 않고 이상한 말이나 한다며 비난하기 일쑤였다. 최제우는 다시 1년 가까이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되새기며 탐구를 하였다. 마침내 자신이 체득한 도(道)가 올바르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도를 전파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동학(東學)이 탄생하였다.
최제우는 포교활동을 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글을 썼다. 마치 기독교의 바오로가 선교활동을 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편지를 쓴 것과 같다. 최제우가 쓴 글을 모아 1880년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한 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 책이 『동경대전(東經大全)』이다.
최제우의 호소
역사적 전환기에 백성들 속을 파고드는 종교의 출현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이다. 새로운 종교는 백성의 열망을 담고 있어서 그 세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동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란이 빈발하고 서양의 동양 침략이 노골화하던 전환기에 새로운 종교로 탄생하였다. 최제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에는 나쁜 질병이 가득 차 있고, 백성들은 사시사철 편한 날이 없다. 이것 역시 크게 상처를 입을 운수이다.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으니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중국은 거의 멸망하였다. 우리나라는 입술이 없어 이가 시린 상황이 될 우려가 없지 않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안타깝도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시대의 운수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의 말을 들으면 집에 들어가서는 마음으로 비난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험담을 한다. 도덕에 따르지 않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백성은 편안한 날이 없고 서양의 기세는 드세며 중국은 거의 멸망하여 우리나라 역시 멸망할 가능성이 높은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를 비난하기만 하니 나라와 백성의 앞날이 매우 걱정된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최제우는 간곡히 호소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 그 중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미래가 대단히 개탄스럽다. 세상이 이러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기억나는 대로 간략히 써서 타이르면서 가르치고자 한다. 공손하게 이 글을 받고, 나의 말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기 바란다.”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최제우의 말을 외면했다. 그러나 백성은 달랐다. 공손하게 최제우의 글을 받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최제우의 말을 받들었다.
최제우를 체포하기 위해 경주에 갔던 선전관 정운구(鄭雲龜)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조령에서 경주까지 400여리가 되고 도읍이 스무 개 가깝습니다.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심해져서 주막집 여인과 산골짜기 아이들까지 동학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백성들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왜 동학인가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을 말하고, 동학에서도 상제, 즉 하느님을 말하니 그 둘의 차이를 알기 어려웠다. 특히 서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동학이 서학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다. 최제우는 한 선비와 대화형식을 빌어 동학과 서학의 차이를 밝혔다. 한 선비가 물었다. “지금 하늘의 신령스런 기운이 선생님께 내렸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최제우가 대답했다. “가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다는 이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비가 재차 물었다. “서양의 도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최제우가 대답했다. “내가 받은 도는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을 지키고 기(氣)를 바르게 하고, 본성에 따르고, 가르침을 받으면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서양인들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옳고 그름이 없다.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 없이 엎드리기만 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다. 그 본체는 기(氣)가 변화하는 신(神)이 아니고, 그 학은 천주의 가르침이 아니다. 형식은 있으나 하느님의 자취는 없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같으나 빌지도 않는다. 도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고, 학은 천주의 학이 아닌데 어찌 다르지 않다고 하겠는가.”
가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다. 하느님께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오는 게 있다. 따라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본성에 따르며 가르침을 제대로 받으면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자신의 수양이 먼저이지 무언가를 바꾸어 달라고 하느님에게 빌 필요가 없다. 이것이 최제우가 깨우친 이치이다. 그런데 서학은 그 반대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해달라고 하느님께 빈다. 따라서 서학은 하느님이 중심이 아니다. 형식만 하느님을 따를 뿐 서학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없다. 이렇게 내용이 다르니 이름 역시 달라야 한다. 최제우는 동쪽에 있는 조선 땅에서 도를 받았으므로 이름을 동학이라 했다. 최제우가 서학에 맞서 동학을 창설한 건 민족적 각성의 반영이었다.
오만 년 만에 기회가 왔다
최제우는 세상 개벽의 때가 왔다고 했다. 개벽된 세상이 되면 지금의 부귀한 사람은 빈천하게 되고, 지금 빈천한 백성들은 부귀하게 된다. 백성이 주인 되는 시절이 온다는 말이다. 이렇듯 최제우의 사상에는 백성의 열망을 담는 민중적 각성이 들어있다. 그러면 앉아서 개벽을 기다리면 되는가? 최제우는 이렇게 노래했다.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 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 일신(一身)으로 비켜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 시호 불러내니
‘시호 시호’. 때가 왔다, 때가 왔다. ‘부재래지 시호로다.’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가 왔다. 오만 년 만에 한 번 찾아온 이 기회에 용천검을 아니 쓰면 언제 쓸 것인가. 용천검뿐만 아니라 이 칼 저 칼 넌지시 들고 때가 왔다 때가 왔다고 노래하자고 했다.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일에 백성들이 함께 일어나자고 했다.
동학이 확산되자 조정에서는 혹세무민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여 효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최제우는 갔지만 그의 뜻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제우의 처형은 오히려 동학교도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포위망이 좁혀오던 때 최제우는 시를 한 편 지었다.
다 함께 그 운세를 밝혀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모두 함께 배움의 맛을 얻으니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구나.
만년이나 된 나뭇가지에 천 송이 꽃이 피고,
온 세상에 구름이 껴도 한 줄기 달 빛 빛나는구나.
누각에 오르니 사람이 학을 탄 신선과 같고,
배를 띄우니 말이 하늘을 나는 용과 같구나.
사람은 공자가 아니어도 그 뜻은 똑같고,
만 권의 글을 못 쓰더라도 그 뜻은 능히 웅대하도다.
공자가 아니어도 글을 못 쓴다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뜻이 똑같고 웅대하다. 그 뜻들이 모이고 모여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는 장 자크 루소가 있었듯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는 최제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