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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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 품게 되는 기초적 질문이다. 모든 철학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생겨났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유일절대의 답변은 없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름에 따라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생각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제5부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5편의 글을 해설하였다. 장자의 『장자』, 대표적인 초기 불경인 『법구경』, 지눌의 『원돈성불론』, 최제우의 『동경대전』, 마오 쩌 뚱의 『실천론』이 그것이다.

장자는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고 다른 시각을 가져보라고 말한다. 『법구경』에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지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실천인 ‘이타행(利他行)’이 참된 수양이라고 한다. 최제우는 삶이 어려울수록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마오 쩌 뚱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삶을 살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이외에도 삶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교훈 혹은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다섯 가지를 지침으로 하여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최소한 잘못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이 다섯 가지의 지침을 지키는 일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다섯 편의 글들은 누구나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뜻을 크게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 최제우가 남긴 시의 한 구절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공자가 아니어도 그 뜻은 똑같고, 만 권의 글을 못 쓰더라도 그 뜻은 능히 웅대하도다.”

  1. 쓸모없음의 큰 쓰임!

장자 『장자莊子』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장자(莊子, BC 369?~BC 289?)는 부인이 죽었을 때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친구가 나무라자 장자는 아내가 본래 형체도 기도 없었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세상을 다르게 본다. 유명한 ‘장자의 나비꿈’을 보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 나비였다. 스스로 뜻에 맞아 내가 장자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깨어나 보니 내가 확실히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우리는 꿈과 현실, 나와 나비를 구분한다. 그러나 장자는 옳음과 그름, 길고 짧음, 아름다움과 추함을 대립된 관계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하나다. 꿈이 현실이 되고 내가 나비가 된다. 장자는 우리가 지금껏 참이라고 여겼던 규정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장자의 삶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작은 지방에서 벼슬을 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장자의 사상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장자(莊子)』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장자』는 대부분 우화로 구성되어 있어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 우화들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장자』를 재미있게 읽으며 사색을 해야 한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c theory)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다. 사람들은 태양을 비롯한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지구중심설(Geo-centric theory)을 믿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태양중심설이 정설이다.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언한 카톨릭마저 교황청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자인하였다. 세상엔 많은 상반된 주장들이 공존한다. 우리는 과학을 맹목하고 숫자를 맹신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도 성(聖)과 속(俗)이 함께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했다고 믿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창조론을 믿는다. 지금 우리가 믿는 것은 그저 유효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규정하는 인식의 체계이다. 패러다임은 영구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증거가 쌓이면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이전까지 진리로 여겨졌던 패러다임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게 시대를 규정하는 권리를 넘겨준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모든 진리는 특정의 조건 안에서 유효한 상대적 진리이다. 장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길 요구한다. 자기중심의 편견에서 생각하고 행할 때, 다툼이 생긴다. 우리는 항상 열려 있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마음은 닫혀 있다. 객관적 기준에 의거하여 관계를 규정하고 세상을 판단하지 않고 주관적 기준에 의거하여 관계를 규정하고 세상을 판단한다.

장자는 원숭이의 비유를 들었다.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래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원숭이들이 받는 도토리의 수는 변하지 않는다. 변한 것은 도토리의 개수가 아니라 원숭이들의 마음이다. 변하지 않는 도토리의 수가 도(道)라면 그 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성내고 화내는 원숭이의 모습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발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미인이라고?

장자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길 요청한다. “사람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면 허리 병이 생겨 죽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이 높은 나무 위에 오르면 두렵고 떨리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과 미꾸라지와 원숭이가 사는 세 자리 중 어느 것이 바른 자리인지 누가 알 수 있는가? 사람은 채소와 육류를 먹고, 사슴과 노루는 풀을 뜯어 먹으며, 지네는 실뱀을 먹고, 독수리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데, 이 네 가지 먹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맛인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지만 물고기가 이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이들을 보면 높이 날며, 사슴은 이들을 보고 자신들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무엇이 진정 아름다운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는가?”

동물과 사람이 사는 곳은 다르다. 원숭이가 편한 공간이 사람에게는 불편한 공간이 되고 미꾸라지에게 편한 공간은 원숭이에게 불편한 공간이 된다. 우리는 우리 기준으로 편함과 불편함을 나눈다. 먹는 것도 그렇고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미인이다. 하지만 동물들에게도 모장과 여희가 아름답게 보였을까? 동물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다르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 미인의 기준을 가져왔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발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쳐진 가슴과 불룩한 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대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의 미인상은 지금 시대의 미인상과 또 다르다.

삶의 가치 역시 그 사회의 패러다임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쓰 베네딕트는 『문화의 패턴』에서 동부 뉴기니 남부 해안의 도부섬 사람들에 대해 썼다. 도부인들은 악의와 배반을 조장하고 그것을 사회의 용인된 미덕으로 생각한다. 도부인들에게 거짓말과 사기는 악이 아니라 선이다. 도부인들은 부부간의 정절을 기대하지 않는다. 성적 욕구가 있을 때 남녀가 같이 잠을 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옳음은 그저 우리의 옮음일 뿐이다.

장자의 말을 들어보자. “나와 당신이 논쟁을 했을 때,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을 이기지 못했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그른 것인가?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그른 것인가? 아니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인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인가? 나와 당신은 누가 옳은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본시 현명치 못하니, 나는 누구에게 판단토록 할 것인가? 당신과 같은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 판단케 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당신과 같은 견해이니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같은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 판단케 한다면 이미 나와 같은 견해이니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나 당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 판단케 하면 이미 그는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 어떻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나 타인이나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는데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가?”

장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주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문제는 옳고 그름에 있지 않다. 나아가 사람들은 옳고 그름보다 그 논쟁의 승부를 즐긴다. 편을 지어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과 같으면 그것이 옳음이요, 나와 같지 않으면 그름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보다 누구의 편이냐다. 옳고 그름이 모호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장자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각자의 주관을 초월하자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옳고 그름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발상의 전환, 그리고 현대적 변용

장자는 생각에 따라 바뀌는 사물의 쓰임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보면 먼저 일차적인 가치에 매몰된다. 박을 보면 바가지를 만들려 하고 나무를 보면 목재로 쓸 생각을 한다. 그러나 장자는 다르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이 빨래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빨래를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겨울날 수전(水戰)을 치를 때, 손이 트지 않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군사기밀일 것이다. 누구는 그 약을 빨래하고 손이 튼 데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 누구는 전쟁에 사용해서 제후가 된다.

이런 일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문구 회사인 3M의 한 연구원이 강력한 접착제를 개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접착제는 번번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 연구원이 실패한 접착제가 같은 회사의 다른 연구원 아트 플라이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잇’이다. 똑같은 사물을 어떻게 대하느냐, 어떤 쓰임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물은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다.

일차적인 가치와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장자는 말한다. “송나라 사람이 머리에 쓰는 모자를 팔러 월나라에 갔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문신을 해서 모자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에 진출한 한 한국백화점이 화장실에 좌변기를 설치했다가 좌변기에 익숙지 않은 중국인들 때문에 변기를 바닥식으로 교체한 일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에 진출한 돌침대 회사가 처음 고전을 면치 못한 것도 송나라 사람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죽은 자가 돌에 눕는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뒤집을 때, 중심은 내가 아니라 상대다. 상대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나와 마주한 모든 대상이 상대가 된다. 사물이거나 사회이거나 제도이거나 나와 마주한 대상이 모두 상대다. 그 상대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했을 때, 생각은 뒤집힌다. 장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전부로 안다. 그래서 갇힌다. 자신의 처지에 갇히고 자신의 생각에 갇힌다. 갇혀서는 밖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모르는 것인데, 모르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모르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만다. 장자가 지금의 우리에게 말한다. 틀을 깨라! 스스로 만든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한 단계 높은 세계로 나아가라!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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