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어찌 학문이랴
이이 성학집요聖學輯要
공자와 부처 중 누가 성인입니까
내가 금강산을 떠돌던 어느 날, 깊은 골짜기를 헤매는데 조그만 암자가 나타났다. 나이 든 승려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승려는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암자를 둘러보니 아무 것도 없고 아궁이에 불을 땐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노승은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 허기를 때우십니까?” 노승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 양식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대뜸 물었다. “공자와 부처 중에 누가 성인입니까?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어서 이곳에선 시행할 수 없습니다.” 노승이 말했다.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 출신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 출신인데, 그들도 오랑캐란 말이냐?” 내가 말했다. “불교의 핵심적 교리는 우리 유학을 벗어나지 않는데 굳이 유학을 버리고 불교에서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승이 말했다. “유학에도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느냐?” 나는 말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말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뜻은 같지만 우리 유학의 견해가 훨씬 낫습니다.” 노승은 수긍하지 않았다.
대뜸 무례한 질문을 한 사람은 19살의 소년 이이였다. 이이(李珥, 1536~1584)가 쓴 「풍악증소암노승(楓岳贈小菴老僧)」이란 글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스승이자 삶의 문제를 함께 의논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 어머니가 사라졌다. 이이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불교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승려가 되기 위해 금강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불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노승과의 대화는 이이가 다시 유학 쪽으로 기울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금강산에 올라간 지 1년 만에 하산을 하였다.
이후 이이는 “성인(聖人)을 모범으로 삼아, 터럭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라는 결심으로 학문과 정치를 병행하며 큰 뜻을 이루려 하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이이가 40살 때(1575년) 지어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이이는 이 책에서 유학사서(儒學四書)의 하나인 『대학』을 텍스트로 하여 옛 성현들의 글을 모으고 자신의 사상을 덧붙였다.
경장해야 한다
왜 이이는 『대학』을 텍스트로 하여 글을 모은 것일까? “옛 성현들이 『대학』을 지어 규모를 세움으로써 성현들의 모든 교훈이 이 책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야말로 요점을 잡는데 근본입니다.” 그리고 『대학』은 학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이의 관심은 학문에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서 다루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정치에 있었다. 이 점은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는 수신(修身)이 치국(治國)보다 앞선다는 말은 단지 그 순서가 그렇다는 말일 뿐이다. 만약에 수신이 지극해진 후에야 비로소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옛 성왕들의 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국가를 어디에 두어야겠는가?” 수신 후 치국이란 말의 순서가 그럴 뿐이지 현실에서는 당장의 정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정치의 요체는 무엇인가? 이이는 말한다. “기강이 해이해져서 선비의 기풍이 구차해지고, 재상과 벼슬아치들은 빈자리만 채우고 자기 일을 게을리 하며, 백성은 곤궁하고 고달프다면 이것은 나라가 망하려는 징조입니다. 이때에는 마땅히 서둘러서 개혁하여야 합니다.” 이이는 자기 시대를 이렇게 보았다. 『경연일기』에서는 더 구체화하였다. “우리 조선은 나라를 세운지 2백 년이 되어 중쇠기(中衰期)에 이르렀다. 앞서 권세부리는 간신들이 혼탁한 짓을 저지른 게 많아서, 오늘날에 이르러 마치 노인이 원기를 모두 소진하여 회복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상황이다…..지금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이는 시급히 오래된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했다. 이것을 『성학집요』에서 경장(更張)이라고 했다. 이이는 옛 것을 새롭게 하면 인심이 불안해져 혼란과 위험이 온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백성을 잃으면 나라가 의지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 폐단도 고치지 못하면서 말로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고 해보아야 백성의 원망이 더 높이질 뿐이다. 때가 바뀌면 그 때에 맞추어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한다. 이것을 이이는 ‘변통(變通)’이라 했다. 변통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 즉 시무책(時務策)이다.
조선의 성리학을 세우다
이이는 공자와 주희를 비교하며 이렇게 썼다. “공자는 여러 성인들의 언행을 모아서 집대성했고, 주희는 모든 현인들의 언행을 모아 집대성했습니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리를 알고 행하여 아무 자취도 없기 때문에 성인의 언행은 갑자기 배울 수 없습니다. 주희는 오랫동안 공부를 해서 쌓아나갔기 때문에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희를 먼저 배워야만 공자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이는 성리학을 연구했고, 조선을 성리학의 이상이 실현된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이이는 이황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조선을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이황과 달랐다. 이이는 이황의 철학을 비판했다. 친구인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황은) 환하게 꿰뚫어 이치를 깨닫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본 것을 다 밝혀내지 못하였고, 주장에도 잘못된 점이 있다. ‘이(理)도 발동하고 기(氣)도 발동한다.’고 하거나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른다.’고 하는 주장은 아는 게 병이 된 주장들이다.” 이이가 볼 때 발동하는 건 오로지 기(氣)뿐이다.
‘이의 발동’이냐 ‘기의 발동이냐’ 하는 이기논쟁은 현실인식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둘러싼 논쟁이다. 기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 즉 우리가 사는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순수한 마음, 사회와 자연의 이상적 질서를 말한다. 이황은 현실이 말세이지만 현실과 구분되는 이상적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밝혀내어 사람들을 교화한다면 이상적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이는 이상적 질서가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이상적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이가 경장론과 변통론을 내세워 줄기차게 개혁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이는 자신의 철학을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정식화했다. 성혼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가 기를 타고 만물을 생성하므로 만물이 천차만별해도 그 본연의 오묘한 이가 없는 곳이 없다……맑은 곳과 혼탁한 곳, 순수한 곳과 얼룩진 곳, 찌꺼기와 재와 거름, 더러운 곳에도 이가 있어 그 본성이 된다……이것을 이통(理通)이라 한다. 기는 형체를 가지고 있어서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다. 기는 쉬지 않고 운동하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변화가 일어난다. 기가 만물을 생성할 때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은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다……이것을 기국이라 한다.” 이는 기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기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습, 즉 기가 아무리 다양해도 그 안에는 변함없는 이(理)가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개혁하여 이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이는 ‘이통기국’을 자신의 발견이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아무리 주희가 말한다 해도 그것과 다르게 주장한다면 틀린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이는 성리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정하여 자신의 철학을 세웠던 것이다.
3년간만 시행해보자
이이는 22살 때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을 한 이후, 29살 때 생원시(生員試)와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장원을 할 때까지 아홉 차례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다. 2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르는 공백이 있었음에도 이이는 모든 시험에 거뜬히 장원을 했다. 이런 기록을 두고 사람들은 이이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이의 관직생활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이이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싸웠다. 임금이 잘못한 일에는 “거칠고 음란하여 법도가 없는 임금과 같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길로 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임금은 이이를 가리켜 “과격하다.”며 배척하였다. 이이는 두 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1572년 이이의 나이 37살 때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면서, 이이에 대한 견제는 더욱 심해졌다. 이이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양쪽을 타협시키려 애썼다. “선비가 분열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선비가 패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붕당정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이이를 서인의 우두머리로 지목했다. 심지어 이이가 소년시절 승려가 되기 위해 금강산에 갔다 온 사실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이이는 수차례 개혁안을 상소하였고, 자신이 건의한 개혁안을 3년간 시행해보고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임금을 속인 죄로 자신을 처벌하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이의 충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는 안타까움 속에 49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박순은 이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누가 이이를 보고 뜻만 컸지 꼼꼼하지 못하다고 했는가. 그 재주를 써보지도 않고 어떻게 함부로 평가를 하는가. 이이가 시행하고 조처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어려운 난제라도 조용히 밀고나가는 게 구름이 허공을 건너가듯 흔적이 없구나. 참으로 희귀한 인재이다.”
이이, 『성학집요』 李 珥, 『聖學輯要』
퇴계의 『성학십도』에 대응되는 율곡의 저작으로 성리학의 과제와 얼개를 밝힌 후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기의 방법에서부터 위정자의 자세까지 조목조목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 자체로도 성리학의 대강과 한국성리학의 특징을 잘 볼 수 있지만 퇴계의 『성학십도』와 비교하면서 보면 주리(主理),주기(主氣)라는 한국성리학의 두 흐름이 지닌 미묘한 차이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허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