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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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음을 집중하여 공손하게 배워라

이황 『성학십도聖學十圖』

짐승 우리에서 벗어나니 즐거움이 살아난다

나는 시골 사람이므로 산림을 돌아다니는 삶의 즐거움을 일찍 알았다. 나이 들어 망령되게 세상일에 나아가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나이가 더욱 들어 병이 깊어져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부득이 나는 세상을 버려야만 하였다. 비로소 짐승 우리와 새 장 같은 곳에서 벗어나 농촌에 돌아오니 산림의 즐거움이 다시 살아났다. 내가 묵은 병을 고치고 깊은 시름을 풀면서 궁색한 노년 생활을 편히 보낼 곳은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황(李滉, 1501~1570)은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을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썼다. 벼슬살이는 짐승 우리, 새 장과 같은 곳이고 벼슬살이 하다 거의 죽을 뻔했다고도 했다. 사실 이황은 벼슬을 하면서 심각한 시련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스스로 여러 차례 벼슬에서 사퇴했다. 임금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벼슬을 하다가도 곧 사표를 내곤 하였다. 이이(李珥)가 나서서 사퇴를 만류했던 일화가 전해온다. 이이가 말했다. “선생께서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에 계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벼슬이란 백성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말했다. “벼슬하는 사람은 원래 백성을 위해야 하는데, 백성에게 이익은 주지 못하고 그것을 걱정하다 자기를 해치게 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자 이이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생께서 조정에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임금께서 마음을 의지하셔서 든든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즐거이 따를 것입니다.” 아무 일 안 해도 좋으니 조정에 머물러 있기만 해달라고까지 간청했으나 이황은 끝내 사퇴하였다. 이황은 벼슬보다 학문을 즐긴 사람이었다. 훗날 이이는 이황에 대해 “학문에만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1568년, 이황이 68살 때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의 지침과 설계를 10개의 그림에 담은 것으로, 이황의 학문적 고뇌와 성취를 담고 있다.

말세의 세상을 바꾸려면

이황은 왜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이황의 시대인식과 관련이 있다. 이황은 자기 시대를 말세라고 보았다. 말세인 세상을 바꾸려면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게 이황의 생각이었다. 이황은 “말세에도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으로 세상은 말세가 되었지만 하늘의 뜻, 성인의 가르침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황이 개탄한 것은 학문이 처한 상황이었다. 이황은 앞 시대의 학자들에 대해 자주 논평했다. 이색, 정몽주, 권근, 김종직, 서경덕 등이 논평의 주 대상이었다. 이황의 논평에 따르면, 이색은 불교에 대해 많이 썼다. 정몽주는 충절을 지켰지만 저술이 없다. 권근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원리를 말했지만 논리적 결함이 많다. 김종직은 학문은 하지 않고 문장 다듬기만 했다. 서경덕은 셩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황의 인물 논평의 기준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고려 중후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정착되지 못했다. 신진사대부의 대부라는 이색은 여전히 불교와의 관계를 끊지 못했다. 유학의 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림파의 거두라는 김종직은 문장만 다듬을 뿐이었고, 서경덕은 아예 성리학과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말세의 시대를 극복하려면 성현의 가르침을 밝혀야 한다. 그래서 이황은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자 했다.

이황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황에 이르러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정착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학십도』는 「태극도설」로부터 시작한다. 「태극도설」은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가 그린 그림과 해설로서, 『주역』에서 ‘태극이 음과 양의 두 기(氣)를 낳고 두 기가 만물을 낳는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 그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기초이다. 이황은 이 그림을 첫머리에 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주희가 『근사록』에서 「태극도설」을 첫머리에 둔 의도와 같습니다. 성인의 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근본을 여기에 두고 추구해야 합니다.”

이황은 평생을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정착될 수 있도록 힘썼다.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그릇된 견해를 물리치며 자네들과 종일 강론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두고 한 일을 두 가지로 압축했다. 하나는 그릇된 견해를 물리치는 일이었다. 주희의 학설과 다른 학설에 맞서서 성리학을 제대로 세우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연구한 성리학을 교육을 통해 널리 확산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개척자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라 할 것이다.

이황이 싸워야 했던 첫 번째 ‘그릇된 견해’는 서경덕의 학설이었다. 서경덕은 존재하는 건 기(氣)뿐이고 이(理)는 기의 운동원리일 뿐이라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서경덕의 주장은 주희의 학설과 달랐다. 주희는 이와 기가 모두 존재한다고 했다. 특히 이를 중시하였다. 기가 인간과 사회와 자연, 즉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이는 인간의 순수한 마음, 사회와 자연의 이상적 질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세인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이황은 생각했다. 이황은 반박하였다. “이(理)는 기와 별도의 존재이고, 이가 기를 낳는다.” 이황의 철학은 그의 이상주의를 반영한다. 말세인 세상에도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듯이, 세상은 어지럽고 혼탁해도 이상(理想)은 엄연히 존재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이상은 세상과 별도로 존재하므로 결코 다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이상이 존재하므로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이황 철학의 탁월함

이황은 뜻밖에도 제자와 논쟁을 하여야 했다. 문제의 발단은 사소했다. 정지운이 쓴 『천명도설』을 이황이 극히 일부 수정해주었다. 수정한 내용은 이렇다. “사단은 이(理)의 발동(發動)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리키는 말로, 맹자는 사단을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황은 사단이 이의 발동, 즉 이가 움직이고 작용하여 생겨난다고 보았다.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가리킨다.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 어느 날 제자인 기대승이 우연히 이 문구를 보고 스승인 이황에게 물었다. “이가 발동할 수 있습니까?” 1558년, 이황이 58살 되던 해의 일이다.

기대승은 이(理)가 움직이거나 작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가 움직여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황은 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황은 제자를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제자 기대승과의 논쟁은 무려 8년간 계속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논쟁이다. 이 논쟁이 왜 중요했을까? 이황은 『성학십도』 「심통성정도설」에서 이렇게 썼다. “사단은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르는 것으로 순수한 착함이지 악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가 발동하여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려진 뒤에는 착하지 않음으로 흘러갑니다. 칠정은 기가 발동하면서 이가 올라탄 것입니다. 이것도 착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기가 발동하여 중화(中和)를 이루지 못하고, 이(理)를 어그러뜨리면 악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다. 순수한 마음은 오직 이가 발동해서 생긴다. 이런 순수한 마음조차 기에 의해 흐려질 수 있다. 그런데 이가 발동하지 않는다면 순수한 마음의 근원이 없어진다. 기만 발동한다면 이를 어그러뜨리고 악함만이 존재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이황의 우려였다.

이황은 ‘이의 발동’이 주희의 학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승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주희의 글을 샅샅이 뒤져 ‘이의 발동’을 주장하는 문구를 찾아냈다. 그러나 사실 주희는 이가 발동한다는 데 부정적이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순수한 마음, 이상적 질서처럼 형체가 없는 것이 움직이고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면 이상적인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주희는 똑 부러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황은 ‘이의 발동’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황이 구상한 철학의 탁월함이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넘어섰다. 성리학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 스스로를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학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수기가 중요할까? 기에 가려지고 기에 의해 어그러진 이를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방법

『성학십도』의 결론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경(敬)’이다. 경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자신을 닦는 방법이다. 주희는 수기의 방법으로 ‘경(敬)’과 ‘격물치지’를 말했는데, 비율로 나타내면 경에 70%, 격물치지에 30%의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황은 경에 방점을 찍었다. 경은 ‘존경’, ‘공경’의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공경해 따르는 일이다.

경은 오늘날 우리가 공부할 때 지침으로 삼을 만한 것이기도 하다. 이황은 말한다. “이것을 하는 방법은 엄숙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이(理)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남이 보고 듣지 않는 곳에서는 경계하고, 혼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는 성찰함이 더욱 정밀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그림(『성학십도』의 한 그림)을 두고 생각할 때에는 오로지 이 그림에만 마음을 쏟아 다른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배울 때에도 오로지 이 일에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황, 『성학십도』 李 滉, 『聖學十圖』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퇴계가 만년에 쓴 글로 수신이 정치의 근본이 됨과 수신의 방법,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당부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개의 도식으로 나타낸 다음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성리학적 사유의 핵심과 도덕적 명분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하는 퇴계의 진지한 태도를 아울러 볼 수 있을 것이다.(허남진)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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