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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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생적 한계를 가진 실증주의

콩트 실증 철학 강의

 

생시몽의 비서

 

노동자 계급은 사회에서 으뜸가는 계급에 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은 여러 계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계급이든지 노동자 계급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노동자 계급은 다른 어떠한 계급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은 자기 자신의 능력과 노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을 위하여 일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 덕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생시몽은 「산업자의 정치적 교리문답」에서 노동자 계급이 여타 다른 계급보다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생시몽은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청년 시절에 계몽주의자 달랑베르로부터 배웠고, 귀족의 지위를 던져버리고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 때에는 자코뱅파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생시몽은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생시몽은 평등과 협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생시몽의 학설은 사회주의 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협동조합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콩트(A. Comte, 1798 ~ 1857)는 청년 시절 생시몽의 비서이자 제자였다. 그러나 생시몽과 콩트는 의견이 갈라졌다. 사회 개혁을 위한 행동을 중시하는 생시몽과 달리 콩트는 사회 안정을 중시하였다. 결국 콩트는 생시몽과 결별하고 나와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콩트는 생시몽으로부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콩트는 ‘사랑을 원리로, 질서를 기초로, 진보를 목표로’를 자신의 모토로 내세웠다. 이중에서 사랑은 타인을 위해 사는 도덕적,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시몽의 박애정신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콩트는 질서와 진보를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해명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생시몽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다. 생시몽은 “인간과학과 사회과학이 관찰된 사실을 기초로 하는 실증과학으로서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콩트는 이 말에서 실증과학을 따와 ‘실증주의’와 ‘사회학’을 제시하였다.

콩트는 프랑스 남부의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콩트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계속되어 안정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했던 시기였다. 자연히 사회의 안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꼴 폴리테크니크를 다녔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만두고, 생시몽의 비서로 들어갔다.

콩트는 생시몽과 결별한 이후 가정교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는 데 집중하였다. 『실증철학강의』가 처음 발간된 것은 콩트의 나이 33살 때인 1830년이었다. 이때 1권이 나온 이후에 콩트는 연구를 계속하여 후속편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1권이 나온 지 12년 후인 1842년에 이르러 6권의 발간이 완료되었다.

 

형이상학의 거부

 

그러면 콩트가 주장하는 실증주의란 무엇인가? 실증주의는 한 마디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의 경향을 말한다. 형이상학이란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 성리학의 ‘이(理)’, 신의 존재증명 등 이러한 것들을 밝히고자 하는 게 형이상학이다.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실증주의의 근본정신은 주어져 있는 것 혹은 실재하는 것, 즉 실증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모든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증주의 정신의 이면에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있다. 콩트가 살았을 당시 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과학적 방법을 모든 학문에 적용해야 한다는 사고가 생겨났다. 실증주의는 그런 사고의 표현이었다.

콩트는 실재하는 경험적 사실을 벗어난 영역에서 행해지는 학문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실증적인 사실이란 오직 현상계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콩트는 철학과 모든 학문을 현상계에만 국한시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현상계를 통하여 주어진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둘째, 이 주어진 사실들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리하며, 셋째, 여기에서 인식된 법칙을 토대로 앞으로 현상계에서 나타날 여러 가지 사실을 예견하여 그에 대처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 콩트, 『실증 철학 강의』

 

이것이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원리이다. 주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법칙으로 정리한 다음 그 법칙으로 미래의 세계를 예견하자!

콩트는 인간 사유의 발전 과정에 3단계 법칙이 있다고 하였다. 신학적이며 가정적인 단계,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인 단계,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단계가 그것이다. 신학적 단계에서 인간은 사물의 제1원인, 즉 사물의 궁극 목적을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힘 대신에 추상적인 힘, 개념, 실체 등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증적 단계에 이르러 인간은 신학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어떠한 종류의 절대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주의 기원과 궁극 목적, 모든 우주적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오직 경험적인 관찰과 이성을 활용하여 주어진 사실에 나타나는 유사성과 연속성의 법칙만을 파악하려고 하게 된다.

콩트는 인간 사유의 3단계 발전이 인류 전체의 정신적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체적 발달 과정에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콩트는 “유년기에는 신학자, 청년기에는 형이상학자, 성년기에는 물리학자로 바뀌지 않는 인간이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콩트는 이 3단계 법칙이 개별 과학의 모든 분야에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즉, 모든 학문은 처음에는 신학적 개념이 지배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형이상학적 경험을 방편으로 삼으며, 마지막 성숙기에 도달하여 실증적 지식을 획득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보수적 학문의 보루

 

콩트는 학문을 취급하는 대상이나 현상의 영역을 중심으로 구분한다. 모든 현상은 무기계와 유기계로 구분된다. 무기계를 다루는 학문은 두 부분으로 구별된다. 즉, 전반적인 우주 현상을 고찰하는 천문학과 지구상의 무기적 현상을 고찰하는 물리학, 화학이 그것이다.

유기계를 다루는 이론도 두 가지로 구분된다. 생명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생물학과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콩트는 ‘사회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학(Sociology)이란 사회를 의미하는 라틴어 소시에타스(Societas)와, 이성 혹은 학문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를 혼합하여 만든 개념이다.

그리고 수학이 있다. 데카르트와 뉴턴은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말한 바 있다. 콩트는 모든 학문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해 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낮은 단계의 학문이 그 다음 단계의 학문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콩트의 분류법에 따르면, 모든 학문은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사회학의 순으로 상향선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콩트는 가장 높은 단계의 학문인 사회학에 대한 분석에 역점을 두었다. 콩트는 『실증 철학 강의』 총 6권 중 3권에서 사회학 분야를 다루었다. 콩트가 이 분야에서 밝혀 놓은 것은 이후 사회학의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 그 중요한 지침 중 하나가 사회학의 내용을 사회 정태론(공동체의 자연적 질서론)과 사회 동태론(발전론)으로 구분한 것이다.

또한 콩트는 자신의 3단계 사회 발전 법칙을 적용하여 역사의 발전 과정을 서술한다. 사회 발전의 신학적 단계는 신의 권위에 사로잡혀 있는 단계이다. 이 시대의 통치 형태는 봉건주의이다. 다음으로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종교적 확신이 붕괴되어 신학적 원리가 타파되고 형이상학적 관념이 승리를 거둔다. 형이상학적 단계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혁명적 시대의 막이 오른다.

마지막으로 실증적 단계에 이르면 혁명적 붕괴를 대신하여 새로운 질서가 뿌리를 내린다. 이 단계에 이르면, 초자연적 존재나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오직 직업인과 전문가에 의한 과학적 통찰만이 사회생활 전반을 좌우하는 결정 요인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실증적인 생활 태도를 지닌 철학자와 사회학자만이 정신생활의 기본 방향을 주도하는 최고의 결정권자가 된다. 이 단계에서 통치 행위는 은행가, 상인, 공장 경영자, 농장 소유자와 같은 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기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학적 시대에 상응하여 봉건주의 사회 체제가 등장하였듯이, 콩트는 실증적 시대에는 산업 기구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콩트는 학문과 경제가 미래 사회의 존재 형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콩트의 역사 인식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가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봉건적 속박이 남아 있었다. 이런 시기에 자본주의 옹호는 진보적 측면을 갖는다. 콩트는 자본주의를 인류가 이룩한 최고의 사회 발전 단계라고 하며 강력히 옹호를 하였다.

자본주의가 결정적 승리를 한 후인 20세기에 들어 콩트의 실증주의는 보수적 학문의 보루가 되었다. 단지 시대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콩트의 실증주의는 생시몽의 철학에서 박애정신과 노동자에 대한 사랑을 거세하면서 생겨난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1. 언어와 세계에 구조의 골격을 세우다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15세에 선생을 놀라게 하다

 

20세기 중 후반의 지성사는 구조주의의 쓰나미에 휩쓸린다. 인문, 사회, 과학 등 전 분야는 구조주의에 열광했다. 구조주의는 하나의 철학이나 이론의 유파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의 관계를 규명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현대 언어학의 시작점이라고 불리는 소쉬르(F. Saussure, 1857 ~ 1913), 그는 동시에 구조주의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

스펙을 쌓기 위해 외국어를 배운다. 그러나 단어만 외운다고 외국어를 배울 수 없다. 언어가 조합되는 체계와 문법을 알지 못하면 언어를 배울 수 없다. 체계와 문법은 일종의 구조다. 또한 구조를 안다는 것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구조를 모르고서는 나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선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어디로 갈 지를 알 수 있을까?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세상을 원망할 수 있을까?

구조란 무엇일까? 왜 언어학에서 구조주의가 시작되었을까? 20세기 지성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여기에 한 사람을 더 꼽으라면 당연히 소쉬르일 것이다. 그런 소쉬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언어는 자의적 변별적 기호체계다.

 

이 하나의 명제가 모든 의문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다.

소쉬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소쉬르는 조숙한 천재였다. 중학생 시절인 15살 때 「언어의 일반 체계」라는 논문을 집필하여 교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 중이던 21살 때에는 「인도 유럽어의 원시 모음 체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언어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소쉬르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는 물론 독일어, 영어 등의 현대 언어뿐만 아니라 학생 시절부터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 고대 독일어에 능통했다. 소쉬르는 「산스크리트어의 절대 속격 용법」이란 제목의 학위 논문으로 라이프치히 대학을 졸업하고, 제네바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 비교 문법, 일반 언어학을 강의했다.

그중에서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행한 ‘일반 언어학 강의’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강의는 그때까지 언어학을 지배하고 있던 낭만주의, 역사주의, 실증주의를 극복하고 언어학에 구조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이 강의에 의해 언어학의 역사주의, 실증주의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소쉬르의 제자들인 알베르 세쉬에와 샤를 발리는 스승이 죽은 후 이 세 차례의 강의 내용을 모아 『일반 언어학 강의』를 출판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소쉬르의 근본정신은 『일반 언어학 강의』의 맨 마지막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언어학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상은 언어인데, 언어는 그 자체로서, 그것만을 위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너무나 유명한 이 문장은 당시 언어학계에서 혁명이었다. 당시 언어학계는 역사주의의 지배 하 있었다. 역사주의는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것이었다. 즉, 언어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화, 제도 등을 주로 연구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자들은 언어학을 언어사로 환원시켜 버렸다.

소쉬르는 역사주의적 방법을 비판하고 언어를 그 자체로서, 즉 언어가 내적으로 갖고 있는 고유한 질서와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쉬르는 언어 외적인 현상을 연구하지 않고도 언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를 통해서 뒷날 과학적 언어학의 방법론적 기점이 된 대립 쌍들의 개념을 확립한다. 랑그와 파롤, 기표와 기의, 공시적과 통시적 등이 그것이다. 사실 소쉬르의 개념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념들은 서로를 보완해주고 지탱해준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넘어야 할 개념이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다. 랑그는 언어 체계를 의미하며, 파롤은 그 체계 속의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 소쉬르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랑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뇌 속에 자리 잡게 된” 집단적인 형태이며, 파롤은 “개인적이며 순간적인” “개별적 경우의 총합”(『일반 언어학 강의』)이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는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이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축구’로 바꾸면 그 뜻이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말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어순을 갖는다. 이 어순을 언어의 규칙이라고 한다.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의 규칙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언어의 규칙은 개인이 임의적으로 변경하거나 설정할 수 없는 사회적 규약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규칙의 총체가 ‘랑그’이고, 그 규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행위가 ‘파롤’이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랑그는 언어활동 현상의 잡다한 총체 속에 분명히 정의된 하나의 대상이다. 랑그는 청각 영상이 개념과 결합하는 순환의 특정 부위에 위치할 수 있다. 랑그는 언어활동의 사회적 부분이며, 개인의 외부에 있으므로 개인 혼자서는 창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랑그는 파롤과 뚜렷이 구별되는바, 떼어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다. 우리는 이미 죽은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나, 그 언어 구조는 아주 잘 습득할 수 있다. 언어학은 언어활동의 기타 요소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기타 요소들과 섞이지 않아야 존재할 수 있다.

–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이게 왜 이런 의미지?

 

다음으로 넘어야 할 개념은 ‘기표’(시니피앙, signifie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r)이다. 소쉬르는 언어 현상 해명에 기호학적 관점을 도입한다. 사실 우리는 기호 속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적색등, 녹색등과 같은 신호등이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호에 해당한다. 그 기호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보고 듣는 층위와 뜻을 이해하는 층위다. 녹색등이 켜지면 건너가고, 적색등이 커지면 정지한다. 이때 우리 눈에 보이는 녹색과 적색이 ‘기표’이고, 그 색깔이 나타내는 의미, 즉 건너가라는 의미와 정지하라는 의미가 ‘기의’이다.

그러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는 사회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최고를 표시할 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그러나 다른 사회에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행위가 욕이 될 수도 있다. 사회마다 기표(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행위)에 대한 기의(최고의 의미 혹은 욕설)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최고라는 의미를 표현할 때, 꼭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여야 할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 볼 수도 있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울 수도 있다.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 혹은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는 행위가 그 사회에서 최고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행위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사회마다 다르다.

행위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언어에도 해당된다. 나무를 나타내기 위해 한국 사람은 ‘나무’라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ree’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내적 필연성을 갖지 않는다. 즉, 나무라는 말이나 ‘tree’라는 말이나 나무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기로 사회적으로 약속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소쉬르는 이를 가리켜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원칙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실상 한 사회에 채택된 표현 수단 전반은 원칙적으로 집단적 습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같은 말이 되겠지만 일종의 규약에 의존한다. 가령 일종의 자연적인 표현성을 흔히 가진 예절 기호들(황제에게 아홉 법 땅에 무릎을 꿇는 중국인들처럼) 역시 어떤 규칙에 의해 정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들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그 규칙이지, 기호들에 내재하는 가치가 아니다.

–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소쉬르 언어학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공시와 통시이다. 공시와 통시는 시간의 흐름과 연관된다. 소쉬르에 의하면, 일정 시기에 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 그 구성원 사이에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언어 현상은 ‘공시적’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시간의 축을 따라 변화하는 현상은 ‘통시적’이다. 그러므로 공시적이란 일정 시점에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키고, 통시적이란 언어의 변천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공시와 통시의 구분을 통해 당시 풍미하고 있던 역사주의적 방법을 비판하고, 공시적 관점의 우위성을 갈파함으로써 언어 체계의 분석으로서 언어학의 기초를 놓았다. 소쉬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사정을 보여 준다.

 

통시적 차원과 공시적 차원의 대립은 모든 점에 있어서 현저히 드러난다. 가령 공시와 통시는 그 중요성이 같지 않다. 공시적인 면이 통시적인 면보다 우월한데, 그 까닭은 말하는 대중에 있어 공시적 면이야말로 진정으로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언어학자가 통시적 관점에 서게 되면, 그 언어학자가 보는 것은 이미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변경시키는 일련의 사건이다.

–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 기표와 기의, 공시와 통시 등의 개념으로 언어의 내적 구조를 파악하였다. 소쉬르가 보여준 내적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어학을 넘어 인문 사회과학의 전 분야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인문 사회과학 전 분야를 관통하는 구조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1.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

샤르뎅 인간 현상

 

들 것 운반병이 된 신부

 

1929년 12월 2일, 중국 베이징 외곽 저우커우뎬의 용골산 산림. 어디선가 큰 외침이 들여왔다.

“찾았다!”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중국의 고고학자 배문중이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고생인류로 알려진 베이징 원인(猿人)의 두개골 화석을 발견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베이징 원인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한지 10년 만의 쾌거였다. 베이징 원인 유적지 발굴 작업은 1918년에 당시 베이징 대학의 교수였던 스웨덴의 지질학자 안데르센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의 학자들이 참여하면서 고생인류의 치아 화석, 수많은 포유류의 화석 등을 발견하는 성과를 냈지만, 고생인류의 두개골 화석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베이징 원인 유적지 발굴 현장에는 신부가 한 사람 끼어 있었다. 바로 프랑스인 신부 샤르뎅(T. Chardin, 1881 ~ 1955)이었다. 샤르뎅은 1923년부터 발굴 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 왜 신부인 샤르뎅이 고고학적 발굴 현장에 참여했던 것일까?

샤르뎅 프랑스 오르베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살 때 엑상프로방스에서 예수회 수련 수사가 되고, 22살 때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예수회 콜레주에서 3년간 교수 생활을 한 후, 30살 때 신부 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들것 운반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전투 훈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샤르뎅은 어렸을 때부터 지질학과 고생물학에 관심을 가졌다. 10살 때부터 예수회의 몽그레 콜레주에서 공부하면서 정규 과목 이외에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에 몰두하여 몇 차례 현장 답사를 하기도 하였다. 파리 박물관의 고생물학 연구실에서 선사학(先史學)의 권위자인 마르셀 랑불루의 지도를 받았고, 40살 때인 1920년부터 파리의 가톨릭 학원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1922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샤르뎅은 가톨릭 학원 교수 시절인 1923년에 중국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중국과 몽골에서 고고학적 발굴 작업에 참여한 이후, 고비사막, 중앙아시아, 인도, 미얀마, 자바,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돌며 고고학적 발굴 작업에 참여하였다. 만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남아프리카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등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샤르뎅은 오랫동안의 탐사 성과를 토대로 논문과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는데, 특히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와 지질을 유럽에 소개하는데 기여하였다. 1915년에는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추대되었다.

『인간 현상』은 1938년에 원고가 완성되었지만 출판된 것은 샤르뎅이 죽은 직후인 1955년이었다. 출판이 지연된 이유는 기독교 교리와 충돌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62년에 로마 교황청은 『인간 현상』에 대해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다

 

왜 로마 교황청은 『인간 현상』에 대해 경고를 한 것일까? 샤르뎅은 신부이자 과학자이다. 이 두 직업은 종종 충돌을 일으킨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진화론이다. 기독교는 창조론을 내세우며 진화론을 배격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계의 일부가 교과서에 실린 시조새와 말발굽 화석 사진의 삭제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두 사진은 진화의 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진화론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론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부인 샤르뎅은 진화론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샤르뎅은 수많은 현장에서 수많은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보며 샤르뎅은 자연스럽게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진화에 대해 ‘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샤르뎅은 다윈의 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샤르뎅은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의 선택이라는 임의의 메카니즘을 주장한다고 보았다. 샤르뎅은 진화가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향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특히 샤르뎅은 진화론의 목표가 ‘사유하는 존재’, 즉 인간의 출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현상』은 샤르뎅 나름의 진화론이 담겨 있는 책이다. 따라서 로마 교황청은 신부가 쓴 이 책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샤르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의 핵심이 이렇게 밝혔다.

 

해부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유인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형태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출현은 아주 작은 비약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출현으로 생명의 영역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과학은 우주의 기본 요소, 아니 더 적합하게 말하면 우주 전체를 잊고 있음이 분명하다.

– 샤르뎅, 『인간 현상』

 

과학이 잊고 있다는 우주 전체는 바로 인간을 가리킨다. 샤르뎅이 볼 때 인간은 우주의 기본 요소이자 우주의 중심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기존의 과학은 인간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생물학이 물리학의 분자이론의 도움을 받아 인간에 대한 탐구를 했지만 인간의 육체적 구조를 밝힌 정도에 불과하다. 인간을 해부해서 살펴보아도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과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의 출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는 다윈의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출현은 유인원으로부터 약간의 비약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샤르뎅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서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진화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샤르뎅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완전히 다른 이유를 ‘생각하는 존재’에서 찾았다. 그래서 샤르뎅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진화하였는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샤르뎅은 물질과 정신을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두 극점으로 보았다. 샤르뎅이 볼 때 정신은 물질에서 발전해온 것이다. 이런 독특한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샤르뎅은 우주 전체의 진화과정이란 개념을 내세웠다. 즉, 인간의 정신은 우주의 구조적 요소로서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샤르뎅은 인간을 ‘우주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책 제목이 ‘인간 현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화의 목적지는 오메가 포인트

 

샤르뎅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그의 물질관을 알아야 한다. 물질은 우주의 최소 단위이다. 샤르뎅에 따르면, 물질에는 내면과 외면이 있다. 물질의 내면은 극미하지만 존재하는 정신이다. 물질의 외면은 그 정신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껍질이다. 예를 들어 돌은 딱딱한 껍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샤르뎅이 물질 속에 극미하지만 정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화의 시발점인 물질에 정신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이 출현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물질의 극미한 정신에서 발전해온 것이다.

진화의 시작은 우주의 물질의 자기 전개이다. 우주의 진화가 시작된지 수십 억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진화의 첫 번째 결정적 시점인 임계점에 다다른다. 그 임계점에 이르자 갑자기 생명이 출현하였다. 즉, 물질에서 생명으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샤르뎅은 이 변화를 물이 끓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물을 끓이면 어느 시점에서 수증기가 된다. 즉,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것이다. 이 바뀌는 시점이 임계점이고, 이 임계점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백만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생명의 진화가 또 한 차례의 임계점에 도달한다. 샤르뎅이 볼 때 이번의 임계점은 참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임계점에서 인간의 출현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부학과 동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출현은 진화의 역사에서 별로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물에서 살던 동물이 육지에서 살게 된 것이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샤르뎅은 인간의 출현을 근본적인 변화로 보았다. 인간의 출현은 ‘본능으로부터 정신으로 일순간의 도약’이었다.

샤르뎅이 볼 때 인간의 출현은 곧 자아의식의 출현이었다. 즉, 인간의 출현은 동물의 상태에서 자아의식으로 도약하는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샤르뎅은 그 변화를 가리켜 ‘영(제로)에서 전체로의 이동’이라 표현하였다. 샤르뎅은 인간이 우주 진화의 유일한 모델이자 목표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출현은 지구의 생성에서 생물의 발생을 거쳐 정신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진화 과정이 종착역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진화는 끝났는가? 샤르뎅은 앞으로는 동식물의 세계에서 다양한 종들이 출현한다 하여도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의미 있는 진화는 인간 정신의 발전에서만 일어난다. 즉, 더 복잡한 정신을 향한 진화만이 있을 뿐이다. 정신적 진화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샤르뎅은 그 정신적 진화의 최종 목표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하였다. 오메가 포인트란 인간이 신과 합일을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샤르뎅은 인간의 정신이 오메가 포인트로 진화해가도록 해주는 에너지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즉, 사랑을 통해 인류가 하나됨으로써 인간은 오메가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가 계속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오로지 인간이 사랑을 얼만큼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냐에 달려 있다.

샤르뎅은 진화의 최종 목적지를 신과의 합일로 설정함으로써 진화론과 기독교 교리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시대적으로 보면, 샤르뎅은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불안감을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됨으로써 넘어서자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1. 과학은 부분인가, 전체인가?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약관의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하다

 

1895년 11월 27일,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거부가 된 노벨은 자신의 재산 3,100만 크로나를 스웨덴 왕립아카데미에 기탁한다. 노벨은 자신의 유산을 ‘인류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노벨은 자신의 발명품이 참혹한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발명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 발명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전체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고민하며 삶의 균형을 찾고자 했던 과학자가 바로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1901 ~ 1976)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사람이 항상 커다란 드라마 속의 관객이면서도 공연자”라고 말한다. 공연자는 자신의 대사와 동작에 몰입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한 공연자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전체를 보는 사람은 관객이다. 공연자이면서 관객이어야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다른 저명한 학자들과 달리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 독일은 하이젠베르크가 있었기에 원자폭탄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자폭탄 개발을 막은 하이젠베르크가 있었기에 독일은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못했다. 과학의 발달이라는 ‘부분’만 생각했다면 원자폭탄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함께 ‘전체’를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처음에는 수학에 뜻을 두었으나, 수학 교수와 뜻이 맞지 않아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27살 때인 1927년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전자와 같이 미세한 입자의 경우 그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다 보면 그 속도를 측정할 수 없고 속도를 측정하다 보면 그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32살 때인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여 연구를 소규모 원자로에 국한시켰다. 또한 1957년 4월 12일에 독일 핵물리학자 18명이 서명, 발표한 핵병기보유 반대 선언인 ‘괴팅겐 선언’을 주도하였다. 이들 서명자들은 ‘누구도 원자력 무기의 제조, 실험, 배치에 어떤 방법으로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부분과 전체』는 1969년에 발간되었는데, 1920년대 초부터 1960년대 말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에 걸친 원자 물리학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용이 물리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물리학의 전문적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니라 학생, 동료 교수 등과의 대화나 토론 내용을 기술하여 물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를 쓴 의도에 대해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원자 물리학이 철학적이고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문제까지 새로운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점에 대해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가 밝힌 대로 『부분과 전체』에서 현대 물리학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는 물론 과학과 정치, 과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 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책의 앞부분에서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1922년 여름, 아인슈타인의 강연장에 들어서다가 빨간색 인쇄물을 받게 되었다. 그 인쇄물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유대인 신문에 의해 부당하게 과대평가된 아주 불확실한 사고에 불과하다고 쓰여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학회에 곧잘 나타나는 미치광이의 소행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름이 좀 알려진 학자의 소행이란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이 결코 정치적 싸움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정치에 의한 과학의 악용은 정권의 성격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1939년에 독일에 남아 있던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 클럽에 징집되었다. 이 클럽은 원자폭탄의 개발 가능성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1941년에 우라늄 클럽은 원자 폭탄의 제조가 가능하지만, 연구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물론 학자들은 연구 개발비를 이유로 독일 정부가 원자폭탄 개발을 포기할 것을 기대했다. 다행히도 정부는 비용 문제로 계획을 포기하였다. 만약 히틀러 정권이 이 계획을 그대로 밀고나가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은 재정적 문제로 원자폭탄 개발을 포기했지만, 미국은 개발에 성공하여 일본에 두 발의 원자 폭탄을 사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이젠베르크는 “나는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온 원자 물리학의 발전이 지금 10만 명을 훨씬 넘는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원자폭탄의 투하 사건을 두고 원자폭탄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었던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 과학자의 책임 등에 관한 논란이었다. 이에 대해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말한다.

 

우리는 확실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학적 기술적 진보에 기여할 것을 일생의 과제로 세운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과제만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기술적 진보 과정에 참여할 때에는 그 진보에 따른 문제에 대한 해결책까지도 진보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찾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개인은 정당한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의 말은 과학자 개인의 태도에 관한 것일 뿐이다. 여전히 과학과 정치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과학과 관련한 또 다른 논란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이다. 1927년 10월 24일에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이 벌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입버릇처럼 “사랑하는 하느님은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서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과학의 세계에 불확실성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회의에 참여한 젊은 학자들이 과학자가 종교적인 전통에 강한 유대를 갖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문제 제기를 했고, 토론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항상 인간의 공동체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삶,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생활과 연결되는 연관성을 기술할 수 있는 공통적인 언어를 발견해야만 한다. 역사 속에서 발전된 정신적인 형태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그 형태에 따라서 자기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커다란 설득력이 가질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쉽게 종교가 폐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의 말 속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과학은 객관적인 물질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과학은 합리적인 행동에 기반을 둔다. 반면에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루고, 선과 악이 문제가 되며, 윤리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이 종교에서 말하는 상징과 비유를 과학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려 할 때 생기는 오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단지 오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과 진화론의 충돌은 오해 때문이 아니라, 과학과 종교가 자신의 존립 근거를 놓고 다투면서 일어난 것이다. 창조론이 붕괴되면 신이 부정되고, 진화론이 붕괴되면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의미 없어진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어 왔고, 종교가 우세했던 시대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박해를 받고 심지어 종교 재판을 받아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과 철학의 관계와 관련하여 칸트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실었다. 칸트 철학은 인과율을 모든 경험의 전제라 하는데 반해 양자 역학은 인과율을 문제 삼는다. 예를 들어 라듐 B를 취급하는 경우 30분 후에는 대략 절반 정도가 변화를 일으키는데, 양자 역학은 그 변화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칸트주의자들은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원자 물리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부분과 전체』에서 과학과 정치, 과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관한 시원스런 답을 얻지는 못한다. 그런데 왜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었을까? 그것은 하이젠베르크가 책 제목을 ‘부분과 전체’라고 한 이유와 관련된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이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전공분야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물론 물리학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이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머물지 말고 다 함께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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