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매월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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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과 나는 모순되었다

김시습 매월당집(梅月堂集)

 

뜻은 괴롭고 마음은 비장하다

 

태어나면서 품성의 바탕이 달라서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치운(崔致雲)이 기특히 여겨 시습(時習)이라 이름 지었다. 시습은 말이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리하여, 글을 대하면 입으로는 읽지 못하였지만 뜻은 다 깨달았다. 3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고, 5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깨쳤다.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고, 유명한 재상 허조(許稠)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이이가 왕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 전하는 내용이다. 그 어려운 한자를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 한자로 시를 지은 건 3살 때였다고 한다. 허조는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사람이다.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사택에서 태어났다. 이름 ‘시습’은 『논어(論語)』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항상 익힌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김시습이 신동이라는 소문이 나자 세종대왕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승지(承旨) 박이창이 김시습을 궁궐로 불러 확인한 후 보고하자, 세종은 “시습의 학업이 성취되면 크게 쓸 것이다.”라며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김시습을 ‘오세(五歲, 다섯 살)’라고 불렀다. 5살 때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천재 소년 김시습은 “어진 군주 보좌하길 바라는”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런데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듣고 김시습이 보였던 모습을 보자.

 

경태(景泰, 명나라 대종의 연호)년간에 세종과 문종이 돌아가시고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물렸다. 이때 김시습은 21살이었다. 그는 삼각산 산중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듣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일 만에 밖으로 나와서는 대성통곡을 하고 책을 다 불살라 버렸다. 발광하며 뒷간에 빠졌다가 나와서는 달아났다.

– 이이, 「김시습전」

 

김시습은 일생일대의 절망감을 느꼈다. 왕위 찬탈은 유학의 근본도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유학 경전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온전한 승려가 되고자 한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고 여겨 세상을 떠나고자 했을 뿐이었다. 불법(佛法)을 지키지 않았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제 사람들은 김시습을 미친 중, 미친 사람, 괴물이라며 손가락질하였다.

400여 년이 흐른 뒤 한용운은 김시습의 일생을 “그 뜻은 괴로웠고, 그 마음은 비장하였다.”고 요약하였다. 김시습은 비판정신으로 시대를 읽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 읽기는 외면당했다. 그래서 ‘그의 뜻은 괴로웠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며 세상에 도전하였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비장하였다.’ 이런 괴롭고 비장한 마음으로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 『매월당집』이다. 『매월당집』은 중종의 명령으로 김시습이 지은 시와 논문 등을 모아 1520년경에 간행되었다.

 

나는 세상과 모순된 처지이다

 

김시습은 왜 떠돌아다녔을까?

 

선비는 세상과 모순된 처지가 되면 물러나 스스로 즐기면서 지내는 게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찌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며 세상에 머무르겠습니까.

– 김시습,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보낸 편지’

 

자신이 세상과 모순된 처지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自我)와 이 세상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관계라는 말이다. 김시습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처지였다. 출중한 재주를 가졌지만 집안은 보잘 것 없었다. 자신에게 기대를 보여주었던 임금과 신하들은 죽거나 쫓겨나 절망만이 남았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렇게 보았다면 단순한 불평불만자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세상의 문제와 연관시켰다. 김시습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삶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김시습이 목격한 삶의 한 현장을 보자.

 

농부는 땀 흘려 일하며 한 해를 끝내고

누에치는 아낙네는 쑥대머리가 되어 봄내 고생하는데,

취하고 배부르고 좋은 옷 입은 무리들이 성 안에 가득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편안하기만 하구나.

– 김시습 「영산가고(咏山家古)」

농촌에 사는 사람과 성 안에 사는 사람이 이렇게 달랐다. 김시습은 이런 세상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오호가(嗚呼歌)」에서는, “살갗을 벗기고 피를 빨고 이미 뼈를 부수어놓고도 / 사치스런 자들은 더 호사스런 것을 욕심내어 만족할 줄 모른다.”고 분노하고 규탄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김시습의 분노와 규탄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시습은 미치광이 떠돌이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세상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던 별난 책을 썼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이다. 『금오신화』 중 3편은 귀신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죽은 여자와 애절한 사랑을 한다. 이 세상을 용납할 수 없기에 다른 세상의 여자와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여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듯 자기의 뜻과 세상은 어긋난다. 『금오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 용납하지 않고 대립하고 있는 현실의 형상화이다. 그것이 김시습이 소설을 쓴 이유이다.

또한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를 통해 철학과 정치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남염부주지」는 철학소설이다. 주인공 박생(朴生)이 우연히 염라대왕을 만나 귀신에 대해 묻는다. 이에 염라대왕이 답한다.

 

귀신의 귀(鬼)는 가장 신령스러운 음기(陰氣)를 말하고, 신(神)은 가장 신령스러운 양기(陽氣)를 말한다.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萬物)을 만든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 사람이다 사물이다 말하고 죽고 나면 귀신이라 한다.

– 김시습, 「남염부주지」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萬物)을 만든다고 했다. 김시습은 「태극설(太極說)」에서 구체화하여 “태극은 무극(無極)이다. 태극은 음기(陰氣)과 양기(陽氣)이다.”라고 했다. 태극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말한다. 우주만물의 근원인 태극은 기(氣)이다. 이는 우주만물의 근원을 이(理)로 보는 당대 성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었다.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모두 억울하게 죽은 원귀이다. 세상이 잘못 되었을 때 원귀가 존재한다. 김시습은 「애민의(愛民義)」에서 백성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이유는 왕이 현명하게 잘 다스려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믿음이 깨질 때 세상은 어지럽게 된다. 김시습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원귀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원귀가 나타나는 세상은 어찌될 것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폭력으로 백성을 눌러서는 안 된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두려워서 따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거역할 뜻을 품고 있어 세월이 지나면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나라는 백성의 것이고, 명령은 하늘이 내린다. 하늘의 명령이 왕에게서 떠나고 백성의 마음 또한 떠나가면 아무리 몸을 보전하려 한들 보전할 수 없다.

– 김시습, 「남염부주지」

 

김시습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시에서 자신의 소망을 썼다.

 

나와 세상은 심하게 어긋났고, / 세월은 차츰 차츰 흐르는구나.

하늘이 나를 가엽게 여긴다면, / 반드시 뒤바뀌는 날이 있으리라.

 

김시습이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뒤바뀌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시습의 애민정신(愛民情神)은 조선을 개혁하려는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1. 조선 실학의 커다란 호수

이익 성호사설

 

농민과 함께 살다

 

예로부터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중 홍길동은 시대가 멀어서 뭐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시정잡배들이 맹세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들먹인다. 명종 때는 임꺽정이 단연 최고였다. 임꺽정은 양주(楊洲)의 백성이었다. 경기도에서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그 일대의 아전들과 은밀히 내통하여 관가에서 잡으려할 때마다 번번이 정보가 누설되었다…….그후 숙종 때 장길산이 황해도에 출몰했다. 장길산은 원래 광대로 곤두박질을 잘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용맹하고 재빨랐기 때문에 도적떼의 괴수가 되었다…….여러 고을의 군사를 징발하여 각각 주요 도로를 지키다가 밤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적들이 미리 알고 더러운 욕살을 퍼부으며 흔적도 없이 도망쳤다. 그 후 병자년(1696년)에 역적을 잡아 조사하니 장길산의 이름이 나오기는 했지만 끝내 장길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익(李瀷, 1681 ~ 1763)은 「임거정(林巨正)」에서 조선의 3대 도둑에 대해 썼다. 물론 도둑들을 찬양하고자 한 건 아니다. 도둑들이 날뛸 정도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졌음을 한탄하며, 도둑들조차 잡지 못하는데 외적의 침입을 어떻게 막겠느냐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익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성리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학문을 하였다. 이익의 학문을 흔히 ‘실학’이라고 한다.

일찍이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안 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 학문이란 것은 평범한 것이지 이상스럽고 별다른 것이 아니다…….일상생활의 모든 일에서 그 일에 따라 각각 마땅한 바를 얻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일이든 하면서 깨우치는 이치가 학문이라는 말이다. 이이의 학문관은 실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뒤를 이어 이수광, 유형원 등이 실학을 하였다. 이 실학적 학풍이 이익에게 이어져, 이익은 그 이전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래서 이익의 학문에 대해 ‘실학의 넓은 바다’라고 부른다.

이익은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둘째 형에게 글을 배워 25살 때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이름을 서식에 맞지 않게 쓰는 바람에 낙방하고 말았다. 26살 때 형 이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을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익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익은 평생 농민 곁에서 살면서, 농민들이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조상들이 남겨준 토지와 노비로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에 항상 겸허하였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 이익으로 하여금 실학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성호사설』은 40년에 걸친 학문의 기록이다. 이익은 40살 때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 제자들과 주고받은 얘기, 흥미로운 얘기를 그때그때 기록하였다. 그 기록을 집안 조카들이 모아 제목을 『성호사설』이라 붙였다.

 

전혀 잡스럽지 않은 이야기

 

『성호사설』에서 ‘사설’이란 잡스러운 이야기 모음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익의 학문적 진수를 보여 주는 저서이다. 이 책은 일종의 백과전서적인 저술이다. 전체 내용을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등 5개의 문으로 나누어 총 3,700 여 개의 항목을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천문, 지리, 역사, 관제, 군사, 경제, 풍속, 문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내용이 포괄되어 있다.

이익은 당쟁의 희생자였다. 그래서 일찍이 당쟁을 일으키는 붕당 문제를 연구하였다. 이익은 붕당이 이해관계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 이익, 「붕당론」

 

이익의 주장은 당시 양반 정치의 모순성을 잘 드러낸다. 정치의 이해관계는 관직을 두고 생겨난다. 그런데 관직의 수는 정해져 있는 데 관직을 얻으려는 양반의 숫자는 많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익은 양반 세계의 모순성이 붕당과 당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익은 양반 생활의 모순성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래서 양반들은 무위도식하지 말고 농업에 종사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중농주의자였다. 농업이 발전하고 농민 생활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농민에게는 특히 토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익은 백성들이 토지를 골고루 점유할 수 있는 균전론(均田論)을 주장하였다. 균전론은 일정한 넓이의 땅을 영업전으로 정하고, 그 이상의 토지를 가진 농민에 한해 토지의 매매를 허락하고, 영업전에 미치지 못하는 농민에게는 토지 매매를 법으로 금하자는 것이다.

균전론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이익의 시대에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런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잃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먹고살기 어려운 농민들이 토지를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익은 균전제를 도입하여 농민들의 토지 상실을 막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발전이다. 아울러 이익은 화폐 유통에 반대하였다.

유럽에서도 자본주의 맹아가 발전하면서 중농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유럽의 중농주의는 농업이 국부(國富)의 근원이라는 사상으로 18세기 후반에 등장하였다. 그것보다 반세기 앞서 이익은 중농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익의 중농주의는 농업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사고에 농민에 대한 사랑이라는 애민정신이 결합한 것이었다. 이익의 애민정신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임금이 없어도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이 없으면 임금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백성의 은혜가 임금의 은혜보다 더 중한 것이다. 어찌 수많은 백성의 힘으로 한 사람의 임금을 받들어 항상 물자가 부족하게 하고 혜택이 고루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 이익, 『성호사설』

 

정약용의 할아버지 스승

 

이익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지배적인 역사관은 화이사상(華夷思想)이었다. 화이사상이란 중국 한족의 왕조를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의 민족을 오랑캐로 보는 한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말한다. 조선의 학자들도 화이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해서는 오랑캐의 나라라고 적대시하면서, 이미 멸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흠모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여기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이익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불신하고 언제나 중국의 역사에 의거해 기록했기 때문에 국토와 산수(山水)의 명칭이 어려워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거대한 대륙 안에 있는 하나의 지역에 지나지 않는다. 크게 보면 유럽도 하나의 나라이지만 적게 보면 초나라와 제나라도도 하나의 나라일 뿐이다.”라고 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익의 역사관은 제자인 안정복에게 이어졌다. 안정복은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를 기록한 『동사강목』을 지었다.

또한 이익은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 중국을 통해 유럽의 과학적 지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다음의 글은 이익이 자연과학에도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지구의 위아래에 사람이 산다는 학설은 유럽 사람들이 자세하게 논의하였다…….김시진은 지구 위아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설을 잘못된 것이라 여겼다. 이에 남극관이 글을 지어 이렇게 변론하였다. “여기에 달걀 하나가 있다고 하자. 개미가 달걀 껍데기를 따라 돌아다녀도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땅 표면에 사는 게 이것과 다르겠는가.” 내 생각에 남극관은 김시진의 잘못된 말을 잘못된 말로 공격한 것이다. 개미가 달걀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개미의 발이 물건에 잘 달라붙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마땅히 땅의 중심을 가지고 논해야 한다. 땅의 중심에서 보면 상하 사방이 모두 안으로 향해 있다. 그러므로 커다란 지구가 중앙에 달려 있는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이익, 「지구」

 

이익은 불필요한 비유를 배제하고 ‘땅의 중심’이란 개념을 이용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즉, 상하 사방이 땅의 중심을 향해 있기 때문에 지구가 둥글어도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의 중심’은 오늘날의 중력과 같은 개념이다.

이익은 흔히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있어 커다란 호수에 비유된다. 그 이전의 실학적 학문 전통이 이익이라는 호수에 합류되고, 이 호수로부터 다시 사학, 지리학, 산학 등 각 지류로 나뉘어 조선 후기 실학의 각 분야로 흘러갔다. 이익은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안정복, 신후담, 권철신 등이 모두 이익의 제자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의 문하에 정약용이 있었다. 이익은 정약용의 할아버지 스승이었다.

 

 

 

 

 

 

  1. 사는 마을을 가려야 한다

이중환 택리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어디일까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 살고 싶어 할까? 몇 가지 답변을 들어보자.

 

햇볕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대도시에서는 햇볕을 온종일 받으며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쪽 지방의 드넓은 평야지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생각해본다. 북쪽으로 산이 있는 평야지에 살면 등산도 하고 온종일 햇볕을 누릴 수 있다. 자동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갯벌이 있으면 해산물도 캐면서 살 수 있어 더욱 좋을 것이다.

 

자그마한 집에 정다운 사람이 있고, 강아지가 뛰노는 앞뜰에는 시원한 물이 샘솟는 옹달샘이 있고 뒤뜰에는 해마다 담근 장을 담아 놓은 장독들이 있는 곳. 조금 멀지 않은 곳에 이웃들이 있고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곳. 지금은 도시에 살기에 갈 수 없지만 언젠간 꼭 가서 살고 싶은 곳이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이웃과 자연을 배려해 집의 안팎을 조금씩 비워둔 빈틈이 있는 집이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자식을 아낌없이 품어주는 엄마처럼 이웃과 자연을 위해 비워둔 빈틈은 서로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이타적인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다.

 

이 답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즉, 지금과 다른,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정반대인 곳을 살고 싶은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유치원에서 살고 싶은 곳을 그리라 하니 한 유치원생이 호텔을 그렸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호텔에는 수영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유치원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없는 것을 채워주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이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중환(李重煥, 1690 ~ 1752)의 생각은 다르다. 이중환은 지리(地理), 즉 환경을 보라고 말한다.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이 ‘나’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이다.

이중환은 참판 이진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대실학자 이익에게서 배웠다. 24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나 정쟁에 휘말렸다. 당시 경종이 병약하여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세제로 삼아 대리섭정을 하였다. 얼마 후 정인중과 백망 등이 왕세제를 등에 업고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고발로 정인중 등 16인이 투옥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고발사건에 이중환도 가담한 것으로 지목되었다. 곧 고발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중환도 함께 몰리게 된다.

영조가 즉위하자 이 모함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되던 이중환은 네 차례에 걸쳐 형을 받았다. 이중환은 자신의 가담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영조는 그를 멀리 절도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영조 3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사헌부의 상소로 다시 먼 지역으로 귀양을 가는 등 이중환은 정쟁에 휘말려 오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살기 좋은 곳에 대해 쓴 이중환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이중환은 “차령(車嶺)의 남쪽 금강(錦江) 가에 사송, 금벽, 독락이라는 정자가 있다. 사송이 곧 나의 집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일대이다.

 

조선조 인문지리서

 

『택리지』는 이중환이 말년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란 살기 좋은 마을을 선택하는 데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중환은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 지금의 낙동강) 가에 머무를 때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저술을 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교화의 연혁, 치란(治亂)의 득실(得失)을 차례로 엮어 기록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책이 인문지리서임을 말해준다.

동계기인(東溪畸人), 즉 동쪽 계곡에 있는 조그만 밭뙈기에 사는 사람이 썼다는 ‘발문’에는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농사지으며 살기를 원했지만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리지』를 짓게 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중환이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보고 들은 얘기를 『택리지』에 담았던 것이다.

『택리지』는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조선 팔도의 역사와 지리를 설명한 ‘팔도총론’과 사람이 살만한 곳의 조건을 설명한 ‘복거총론’이다.

지리서를 쓰면서 맨 앞에 ‘사민총론’을 서술한 것이 이채롭다. ‘사민총론’은 사대부의 신분이 농민, 장인, 상인과 달라진 원인과 내력을 서술한 것이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고 모두 백성이었다. 그런데 백성은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선비로서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을 못 한 자는 농민, 장인, 상인이 되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선비로서 벼슬을 하지 못한 자는 비록 부귀를 누리지 못했으나 옛 성인의 법도를 지켰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진실로 힘을 다하고 예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래서 벼슬을 하는 사람과 동등한 신분이었다. 『시경』과 『서경』을 공부하고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에 따라 행동하였다. 이리하여 사대부라는 명칭이 생겼났다. 명칭이 생기면서 지향하는 바가 달라졌다. 이런 까닭으로 농민, 장인, 상인은 천한 신분으로 되고 사대부라는 명칭은 더욱 높아졌다.

– 이중환, 『택리지』 ‘사민총론’

 

처음에는 계층적 구분이 없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사대부들이 높은 계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중환은 ‘팔도총론’에서 우리나라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서술한 다음, 당시의 행정 구역인 8도로 나누어서 그 지역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그 지역과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설명한다. 강원도 편을 예로 들어보자. 강원도의 위치, 자연환경을 설명하면서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된 단종, 고려 말 학자 원천석, 조선 중기의 정승 이항복, 후삼국시대 태봉의 왕이었던 궁예 등과 같이 강원도와 연관있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대부는 갈 곳이 없다

 

이중환은 ‘복거총론’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에 대해 여러 조건을 들어 설명한다. 이런 곳을 설명할 때는 인물보다 그 지역의 상업 및 경제 활동과 연관 지어 서술하였다. 이익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서의 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중환은 사람이 살만한 곳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살만한 집을 잡는 때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둘째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셋째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지리가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되고, 생리가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아도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가까운 곳에 소풍갈만한 산과 물이 없으면 정서상 좋지 못하다.

– 이중환, 『택리지』 ‘복거총론’

 

첫째 조건으로 꼽은 지리는 풍수학적인 지리를 말한다. 그래서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물의 입구를 보고, 다음에 들판의 형세를, 다음에 산 모양을, 다음에 흙빛을, 다음에 물이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다음에 앞산과 앞 물을 본다.”라고 했다. 덧붙여 “물의 입구가 엉성하면 아무리 많은 살림이 있어도 여러 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저절로 없어진다.”거나 “물은 재물을 관장하는 것이므로 물가에 부자가 많다.”라고 했다.

두 번째 조건으로 든 생리란 그 땅의 생산물에서 나오는 이익을 말한다. 이중환은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에 몰려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중환이 살았을 당시 이 생각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따라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로 옮겨 살라는 이중환의 사고는 시대를 앞지른 것이었다.

세 번째 조건인 인심에 대해 “풍속이 좋지 않으면 자손에게도 해가 미친다.”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이것은 백성의 풍속을 논하는 것이고 사대부의 풍속은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소상하게 기록하면서, “사대부가 없는 곳을 택하여 살며 교제를 끊고 제 몸이나 착하게 하면 즐거움이 있다.”라고 말한다.

살기 좋은 곳의 마지막 조건인 산과 물에 대해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땅이 기름진 곳을 가려 살면서 십리 거리 혹은 반나절 거리에 산수 좋은 곳이 있으면 가서 시름을 풀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풍경도 좋지만 먹고사는 생리가 먼저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중환은 마지막 ‘총론’에서 사대부로서 살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당쟁으로 인해 산림에 은거하고 있는 사대부라도 언제든지 큰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높은 신분이지만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이중환은 한탄한다.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사대부가 된 것을 후회하고, 도리어 농민, 장인, 상인의 신분을 부러워한다.

– 이중환, 『택리지』 ‘총론’

 

 

 

 

  1. 임금이 하루하루 반성하다

정조 일성록: 24.8

 

 

 

이익을 입에 담지 마시옵소서

 

의(義)를 뒤로 하고 이(利)를 앞세우는 것은 의를 앞세우고 이를 뒤로 하는 것의 반대이다. 참으로 의를 뒤로 하고 이를 앞세우면 착하고 나쁜 것이 뒤섞이고, 도덕과 욕망이 뒤집혀 진실로 재앙이 한꺼번에 닥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를 앞세우고 이를 뒤로 한다면 선후를 지키는 와중에 경중의 구분이 차츰 생기고 본말의 순서를 얻게 될 듯하다. 이러한 자는 비록 성인이 보더라도 참으로 깊이 물리치지는 않을 것이다.

 

정조(正祖, 1752 ~ 1800)가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말했다. 이에 대해 정만석이 대답했다.

 

의와 이는 향초와 악취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얼음과 숯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의를 뒤로 하고 이를 앞세우거나, 의를 앞세우고 이를 뒤로 하거나를 막론하고 이에 관련되기만 하면 곧 의리의 올바름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양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이시여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방책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맹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임금께서는 하필 이(利)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진정한 가치는 인의(仁義)에 있습니다.” 의를 말해야지 이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마도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이 대목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조의 질문을 이러하다. 비록 의를 앞세워야 하지만 의와 이를 함께 할 수 없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정만석이 딱 자른다. 이를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고.

이(利)이란 무엇인가? 이익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익 추구를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과 같다. 유럽의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자기 이익 추구가 사회적 발전을 가져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유학은 인간의 이익 추구를 부정한다. 이익 추구는 소인(小人)이나 하는 것이지 군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

정조는 이런 생각에 도전하였다. 신하들과 함께 『맹자』를 공부하면서 이익에 대한 질문을 거듭한다. “모든 것이 이익에 기반 하지 않는가. 이익을 존중하는 대신 이익을 조정하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이익 자체를 부정하거나 말살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러나 신하들의 답변은 요지부동이었다. “전하, 이익이란 말조차를 입에 담지 마시옵소서!”

정조를 흔히 ‘개혁 군주’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공부를 많이 한 임금을 꼽으라면 단연 세종과 정조이다. 세종은 임금이 되기 전부터 하도 공부를 많이 하여 병이 났다. 병이 나 요양을 가면서도 가마 안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정조 역시 스스로,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취미는 없어서 오직 책을 읽으며 살았다. 책을 읽느라 심신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이다. 책으로 하여 생긴 병 때문에 늘 가슴이 답답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조가 진보적 사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성리학에 입각한 모범국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다만 형해화한 성리학이 아니라 생동하는 성리학을 세우기 위해 성리학의 여러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정의 일일 보고서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이다. 당파 싸움을 없애기 위한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농업 구조를 개선하며, 참혹한 형법을 폐지하고 사치를 금지해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전국의 인재를 뽑아다 학문 연구와 저작의 편찬에 힘쓰게 하였다.

정조는 증자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는 데 힘을 써서 반성한 내용을 그날그날 반드시 적어 두었다. 임금이 되기 전부터 시작한 일기 쓰기는 재임기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런 정조의 일기를 모아 규장각에서 편찬한 책이 『일성록』이다. ‘일성록’이란 매일매일 반성하는 일기라는 뜻이다. 정조에서 시작된 전통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이복원은 『일성록』을 편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임금이 하는 일을 차례로 그날그날 적어 가면 그 기록이 달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쌓이고 쌓인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다…….이 역사에는 치란의 자취가 있고 뒷날을 위한 거울과 경계가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엄정하게, 그리고 비밀리 기록된다. 그러므로 옛것을 거울삼는 것보다 지금을 잘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며, 남의 일을 살피는 것보다 내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일성록』을 만들게 되었다.

우리 임금(정조)께서 나이 어리실 때부터 임금 자리에 오르시기까지 그 동정과 언행을 하루도 빼지 않고 적어 두셨다. 날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이 기록들을 차례로 엮어 두시고 아침저녁으로 반성하시는 자료로 삼으셨다. 이 기록은 역사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되나 역사와 같이 비밀리에 간직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임금께서 직접 쓰셨으나, 뒤엔 규장각의 관원들에게 맡겨 쓰게 하고 임금께서는 결재만 하셨다.

– 이복원, 『일성록』 ‘서문’

 

『일성록』은 임금이 보기 위해 만든 책이다. 그래서 찾아보기 쉽도록 각 기사의 첫머리에 제목을 붙여놓았다. 임금은 『일성록』을 보며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을 다시 살피고 과연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를 반성하였다고 한다.

 

명쾌한 결론을 내리다

 

『일성록』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한 두 대목을 보자.

 

본관이 아뢰기를, “동맹휴학한 이유를 물었더니, 유생들이 글로 써서 진달하기를, ‘이혜조 부자가 송시열 선생을 모욕한 사실로 인하여 시험거부에 이르렀습니다…….이혜조가 지난 과거시험에 대해 비평을 해대자, 곁에 있던 한 유생이 그것은 송시열 선생의 『주자대전차의』에 관한 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이혜조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로 심한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 광경을 목격한 유생들이 이혜조의 자손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이러한 뜻을 대사성(大司成) 에게 알렸습니다…….이번 과거시험장에 이혜조의 아들 이한조가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나가게 하였으나, 이한조의 형제들이 화를 내면서 마구 욕설을 하였기에 과거시험장에 있던 유생들이 일제히 시험장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송시열 선생의 도학과 절의는 백세의 표준이 되며, 『주자대전차의』는 후학들에게 은혜를 준 것인데, 저 이혜조란 자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함부로 욕설을 하고, 그의 아들 이한조도 또 감히 명륜당 뜰에서 무함하고 헐뜯는 말을 하였으니…….마땅히 중벌을 내려 징계해야 합니다. 이한조에게는 약간의 처벌이 있었지만, 이혜조의 경우 높은 벼슬을 한 선비에게 벌을 내리는 문제는 조정의 금령이어서 죄를 성토할 수 없으니, 아, 통분할 일입니다. 이혜조의 죄를 묻지 못하였으니 송시열 선생이 당한 치욕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송시열 선생을 높이 추앙하고 송시열의 선생의 성심을 표준으로 삼고 있는데, 어찌 버젓이 학당(學堂)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여러 차례 들어가도록 권유하였으나 유생들이 끝내 말을 듣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임금님께서 하교하셨다. “이혜조의 일은 매우 놀랍고 망녕되구나.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유생들은 즉시 들어가도록 권유하라.”

 

송시열의 제자들인 노론파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였다. 송시열의 비판한 이혜조 부자를 처벌해달라고 유생들이 동맹휴학을 하였다. 동맹휴학에 대한 대처가 강제진압이 아니라 권유인 것이 놀랍다.

백성들의 폐단에 대한 대처의 사례도 보자.

 

금군 최덕우가 다음과 같이 의견을 아뢰었다.

“제가 강가의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민들의 폐단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강가에는 아주 나쁜 세 가지 폐단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빙어선(氷漁船)을 한곳에 머무르게 하는 데서 오는 싸움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많은 백성을 위하는 일입니다…….다음의 한 가지는 얼음계가 얼음을 독차지하여 판매하는 일입니다. 얼음 창고가 많으면 얼음 값이 떨어지고 적으면 얼음 값이 오르게 마련입니다. 지난날에는 한강의 위쪽과 아래쪽에 30개 가까운 얼음 창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얼음계에서 독차지 하여 8개의 얼음 창고만을 두고 있습니다…….셋째 폐단은 어민이 송사를 좋아하는 일입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함부로 재판을 걸어 일을 까다롭게 만듦으로써 단정하고 성실한 풍속을 무너뜨립니다.”

임금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빙어선 문제는 한성 판윤이 맡아서 처리하고, 얼음계에 관한 문제는 빙고에서 맡아 처리하라. 어민들의 소송 문제는 형조와 한성부의 5부에서 어민들의 소란스러운 소송 싸움을 엄하게 금지하도록 하라.”

 

『일성록』은 정조 이후에도 계속 편찬되어 1910년까지 간행되었다. 따라서 『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0년간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실들을 그날그날 기록한 종합적 사료라 할 것이다.

 

  1. 시대를 앞선 진보적 사상

박제가 『북학의(北學議)』

 

북벌이 아니라 북학이다

 

지금 사람들은 아교와 옻칠의 껍질에 가려 꿰뚫어 헤쳐보지 못하고 학문도 속된 껍질에 갇혀 있으며 문장 또한 속된 껍질에 갇혀 있다…….나와 친하다 하는 사람도 나를 미더워하지 않고 제 것을 믿으며, 스스로 나를 미더워하던 사람도 이상한 뜬 말을 듣고 평생 크게 믿는 것을 의심하고 나를 비방하는 자의 말을 믿는다. 나는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지금 사람은 호(胡)자 하나만으로 중국을 말살하려 한다. 내가 중국의 풍속이 이처럼 훌륭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 크게 다르다…….사람들에게 시험 삼아 “만주 사람들은 말소리가 개 짖는 것 같고 음식은 역한 냄새 때문에 옆에 갈 수가 없으며 뱀을 시루에 쩌 먹고 황제의 누이는 음탕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하여 그 말을 전하기에 바쁘다.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북학변(北學辨)」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 사람들은 저 무식한 오랑캐 만주족이 한족의 명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을 차지한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가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말한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진보가 시작된다.

박제가는 자신의 대의를 ‘북학(北學)’으로 표현한다. 당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북벌(北伐)’이었다. 효종이 임금에 오른 직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인조가 무릎 꿇고 항복한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에 복수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처하면서 청나라를 오랑캐라 폄하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할 실력도 의지도 없었다. 지배층이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내세웠을 뿐이다. 유럽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이 시작되고 새로운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에, 조선은 당대의 선진국인 청나라와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시대적 흐름에 뒤처지기 시작하였다.

북학, 즉 북쪽의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주장은 조선에서 대단히 불온한 말이었다. 그러나 박제가는 북학을 통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자고 하였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허울뿐인 북벌의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북학은 당시 최고의 개혁적 사상이었다.

박제가는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 출신으로서 당해야 했던 수모는 사회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 주었다. 18살 때 평생의 친구인 이덕무, 박지원, 유득공, 이희경과 교유 관계를 맺는다. 그들과 함께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 하며 공동으로 학문 연구를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북학파’라고 부른다.

29살이 되던 1778년에 박제가는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자신의 연행길에 박제가를 동행케 하였다. 박제가는 연경(당시 청나라의 수도, 오늘날의 북경)에 30일간 머물렀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연경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북학의』를 탈고했다.

 

생활과 직결된 조선의 진보

 

박제가는 북학을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학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제안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수레와 벽돌의 사용이다. 고구려 때에는 많이 사용되던 수레가 조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조선에는 산길과 고개 길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박제가는 수레를 이용한 새로운 사회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수레를 운행하면 길은 저절로 닦여질 것이다. 동쪽으로 대관령, 남쪽으로 세재, 북쪽으로 철령과 령, 서쪽으로 동선령으로 길이 트이면 통하지 않을 곳이 없다…….우리나라는 수레가 쓰이지 않아 기계를 만드는 관직이 마침내 폐지되었고 기술도 퇴보하였다. 길과 집은 규격이 없어 고통스럽고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게 된 것이 대개 이로 인한다…….까닭에 영동에서 꿀이 생산되나 소금이 없고, 관서에는 철이 생산되나 감귤이 없으며, 북도에서는 삼이 잘되어도 면포는 귀하다. 산골에는 붉은 팥이 흔하고 해변에는 창난젓과 메기가 많다.

– 박제가, 「수레구칙(車九則)」

 

길이 없어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거꾸로 수레를 쓰지 않아서 잘 닦인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에 지거나 말에 메어 물건을 나른다. 시간은 늦어지고 물동량은 딸린다. 조선은 동맥경화에 걸린 것처럼 길이 막혀 있었다. 그 막힘을 뚫는 방법이 수레의 사용이다. 박제가는 물자 수송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 빈곤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박제가의 뛰어난 점은 하나의 사물을 하나로만 보지 않는데 있다. 박제가는 하나의 사물을 보며 다른 사물과의 연결점을 간파했다. 수레는 하나의 사물이지만 길과 물자의 수송과 연결된다.

박제가가 청나라에서 본 것 중 인상 깊었던 것이 벽돌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흙을 대충 발라 집을 지었다. 집은 견고하지 못하고 대단히 불편했다. 박제가가 벽돌을 이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단지 벽돌집에 한정되지 않는다. 박제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장의 벽돌이 아니라 벽돌의 사용을 통한 건축양식의 변화였다. 벽돌이 가져 올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매일 쓰는 것은 반드시 서로 도와 행하여야 한다. 지금 나라에 벽돌이 없어 나 혼자 만들려고 하면 벽돌을 굽는 가마도 내가 만들어야 하고, 거기에 바르는 회도 내가 만들어야 하며, 벽돌을 운반하는 수레도 내가 만들어야 한다. 여러 가지 공장의 일도 내가 해야 하니 이로움이 얼마이겠는가? 시골에 흙과 땔나무가 족할 것 같으면 흙벽돌을 만들어도 괜찮다. 벽돌을 만들 때, 반드시 관청에서 좋은 가격으로 백성에게서 벽돌을 산다면 10년 안에 나라는 모두 벽돌로 될 것이다. 나라 안이 모두 벽돌로 된다면 기필코 하려고 하지 않아도 흔해지고 흔해지면 다른 물건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 박제가, 「벽(甓)」

 

박제가는 벽돌을 통해 경제학의 한 면을 보여준다. 벽돌을 쓰기 위해서는 수요가 발생해야 한다. 수요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관은 벽돌을 사고 그 벽돌로 건축을 해야 한다. 벽돌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 당연히 벽돌을 만드는 공장도 많아질 것이다. 그럼 벽돌은 저렴한 일용재로 변할 것이다. 비록 지금 생각하면 간단한 것 같지만 당시 이런 생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양반을 상업에 종사하게 하자

 

박제가는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역시 그의 핵심사상은 상업관에 있다. 당시 지배층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실학자들도 중농주의를 주장한다. 즉, 그들은 농업과 상업의 관계를 대본과 말업의 관계로 보고, 화폐 유통과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상업의 의의와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상업의 바탕이 되는 생산의 진흥을 강조한다. “경제란 우물과 같아 이를 줄곧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쓸 줄을 모르면 만들 줄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은 날로 어려워진다.”는 말은 박제가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면 조선의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은 무엇인가? 박제가는 놀고먹는 양반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벼슬을 해야만 녹을 받을 수 있는데, 특권적 신분만 세습되고 벼슬을 하지 못하는 양반의 숫자가 많아졌다. 그 양반들이 생활 방편으로 백성에 대한 수탈을 일삼기 때문에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제가는 그런 양반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용하고, 국가가 점포 대여 등을 장려할 것을 주장한다. 박제가는 한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무릇 물과 육지의 교통을 통해 판매하고 무역하는 일을 모두 문벌 좋은 집안의 자손에게 허락하고 그들을 호적에 올릴 것을 청합니다. 재물을 빌려주거나 가게를 만들게 해서 업적이 드러나면 발탁하여 날로 이익을 추구하게 합니다. 문벌 좋은 집안의 자손들에게 점점 놀고먹는 추세를 없애서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열어주면 이는 또한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업의 장려에 대한 주장은 통상론으로 이어진다. 박제가는 중국과의 해로 통상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국력을 길러 더 많은 나라들과 통상할 것을 역설했다. 박제가의 통상론은 북학파 내에서조차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박지원은 물론 이덕무도 박제가의 주장에 반대했다. 박제가의 주장은 개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북학의』가 나온 지 약 100년 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것을 생각하면 박제가의 자주적 개방론은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박제가의 사상에는 다른 실학 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진보성이 있다. 특히 중상주의론은 조선 말기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었다. 유럽의 경우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전하고 있을 때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논쟁이 나타난다. 그리고 중상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 말기에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의 맹아적 요소들이 발전한다. 이런 시대에 박제가의 중상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유력한 정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제가가 진보적인 사상을 펼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사물을 유기적으로 바라보는 눈에 있다. 편견을 걷어내고 질투를 억제하면 상대가 보이기 마련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았고 그 사물들 간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해냈다. 박제가는 그 사물들 간의 유기성을 조선에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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