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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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유성룡 징비록

 

요직을 두루 거친 정치가

 

이순신의 자는 여해이며 본관은 덕수이다……..이순신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문관이었는데, 이순신은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원봉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출인 자기 딸을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거절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지하여 승진하기를 원하겠는가?”…….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몸과 마음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이순신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이력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순신이 가진 백 가지 경륜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죽어 몹시 애석하다고 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돈독한 관계였다. 임진왜란 중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유성룡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여러 차례 기록하여 놓았다.

유성룡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 서적을 가까이 하였고 21살 때에는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25살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요직을 거쳤다. 그리고 경상감사, 예조판서, 형조판서,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시절에는 인재를 천거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따라 정읍 현감이던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형조 정랑이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당파 싸움에 휩싸여 파란 많은 관직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로서 동인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당파 싸움의 향방에 따라 유성룡의 관직이 부침하기도 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은 선조 임금과 함께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명나라에서 구원병이 왔을 때는 명나라 장군 접대와 군량 조달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과 함께 전략을 숙의하여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은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유성룡은 주로 군부대의 정비 및 연습 등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하는 일을 하였다. 일본이 재차 침략하자 유성룡은 도체찰사가 되어 수도 방위를 위하여 경기지방을 순회하면서 군대를 독려했고, 울산 전투에 출정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유성룡은 당쟁에 휘말려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갔다. 복권이 되었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저술 활동과 인재 양성에 몰두하였다. 이때 쓴 책이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죽은 후인 1633년에 아들 진이 『서애집』을 발간할 때 그 속에 포함시켜 간행하였다.

 

임진, 정유왜란 7년을 기록하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연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쟁 문학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성룡이 이 책을 지은 이유는 ‘자서(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간혹 임진란 이전의 일까지 섞여 있는 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면 임진왜란이야말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0여 일 동안에 세 도읍(한양, 개성, 평양)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이로 인해 임금은 마침내 파천까지 해야 했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임진왜란을 극복한 일은 조종의 어지신 은덕이 넓게 우리들 백성에게 미쳤던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또 임금의 사대하는 마음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중국은 몇 번이나 구원군을 보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필경 나라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이것이 내가 이 『징비록』을 쓴 이유라 하겠다.

– 유성룡 『징비록』

 

『징비록』은 크게 1권과 2권 그리고 잡기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는 임진왜란의 배경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지,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신의 보고, 이순신의 수군절도사 발탁, 임진왜란의 발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임금과 쉽게 함락된 한양, 포로가 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 명나라 구원병, 이순신의 거북선과 승전보, 의병 권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2권에는 평양성 탈환, 한양 수복과 진주성 함락, 정유재란, 모함 받은 이순신과 패전한 원균,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등이 실려 있다.

『징비록』의 몇 대목을 살펴보자.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로부터 17일 만에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의 상황을 유성룡은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4월 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신립이 충주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곧 성 안이 떠들썩하였다. 조정에서도 초저녁에 재상들을 불러 피란을 의논하였다…….대신들이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잠시 평양으로 가시도록 하옵소서. 그런 다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그때 권협이 임급 뵙기를 청하더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말했다. “바라옵건대 한양을 반드시 지키십시오.” 말이 끝났을 때 내가 말했다. “아무리 위급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군신간의 예의를 지키시오. 할 말이 있으면 물러가 장계를 올리시오.” 그러나 권협은 막무가내였다. “좌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습니다. 한양을 버리는 일이 정녕 옳은 일입니까?”…….대신들은 궐문 밖에 나와 임금의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명령이 떨어졌다…….조영선과 신덕린을 포함한 10여 명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한양을 버려서는 아니되옵니다.”…….임금의 가마가 대궐을 빠져나갔다. 궁중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느라고 어둠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혔다……경복궁 앞을 지나갈 무렵 길 양 쪽에서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요란했다…….돈의문을 지나 사현 고개에 닿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의 커다란 창고에 불이 나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마산역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일행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했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1597년 2월 26일, 정유재란이 한참일 무렵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유성룡은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켰다.

 

그 무렵 적장 고니시 유기나가는 수하 병사인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에 출입시키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때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공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시라는 몰래 김응서를 찾아왔다. “며칠 후 가토가 바다를 건너올 예정입니다. 수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서면 반드시 이를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도 이 내용을 믿었다. 윤근수는 기회가 왔다면서 계속 임금께 보고 드리고 이순신에게도 빨리 전진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면서 주저하였다. 그러자 요시다가 다시 찾아왔다. “가토가 이미 상륙했소이다. 왜 가토를 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모두 나서서 이순신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대간은 이순신을 잡아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현풍에 사는 박성이란 자는 이순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임금께서는 남이신을 한산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 땅에 닿자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나와 길을 막으며 이순신이 무고하게 잡혀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대신들이 그의 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탁이 홀로 이순신을 변호하였다……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사혀을 감형하고 삭탈관직만 시켰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아산을 지나는 길에 상복을 입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생각했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이후부터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세세히 기록하였다. 이순신이 적의 총탄을 맞자 주위 사람들이 이순신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다. 그때 이순신은 “지금 싸움이 급한 상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유명한 이순신의 마지막 한 마디는 유성룡의 기록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 가장 뜨거웠던 46년간의 기록

황현 매천야록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되도록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못 이루었구나

오늘은 참으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창공에 비치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의 별이 옮겨가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낮 시간도 더디구나

이제부터 어명조차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한 장의 어명을 적시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네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다만 어짊을 이룰 뿐이지 충성은 아니었구나

겨우 윤곡의 행적을 따르는 정도이지

진동의 행적을 따르지 못함이 부끄럽네

 

1910년 9월 10일 황현(黃玹, 1855 ~ 1910)은 4편의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한지 11일만이었다. 황현은 여러 차례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인간 세상에서 자신처럼 글 아는 사람의 역할이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윤곡은 송나라 사람으로 몽골군이 침략하자 항의하여 자결하였다. 진동은 송나라 사람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몰아내려 싸웠다. 황현은 두 송나라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행동이 윤곡의 행적을 따르는 것이지 진동의 행적을 따르는 것은 아니어서 부끄럽다고 했다. 이 ‘절명시’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황현의 숭고한 순국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황현은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20살 때 한양으로 올라와 평생의 친구가 되는 이건창, 김택영, 이기 등과 사귀게 되었다. 28살 때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는데, 당시의 정치현실을 통감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초시와 초장에서 황현의 답안이 장원으로 뽑혔지만 문벌이 없는 시골사람이라 2등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현은 출세를 포기하고 고향에 파묻혀 은둔생활을 하였다.

비록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나라의 운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황현은 40살 때인 1894년부터 『매천야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매천은 황현의 호이다. 황현은 나라의 운명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경계를 삼고자 했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이 지리산 자락 구례까지 전달되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황현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천야록』이 쓰여진 것은 1910년 이전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출판을 할 수 없었다. 해방 후인 1955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가장 뜨거운 46년의 기록

 

『매천야록』은 고종이 즉위한 1864년부터 1910년 8월까지 46년간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사이다. 황현은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외세의 침략이 나날이 거세지는 시기에 나타난 지배층의 행태, 사회의 실상 그리고 일본과 청나라와의 외교관계, 민족반역자들의 행태, 의병들의 구국항쟁 등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이다.

『매천야록』은 6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보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으로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내용이 나뉜다. 특히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기록을 자세하게 하여 책 전체의 약 80%를 할애하였다. 1894년 이전에 일어난 일로는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 천주교도 학살, 병인양요, 신미양요, 민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알력,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의 발호와 어지러운 정치, 일본의 침략과 병자수호조약, 매관매직, 과거제도의 문란, 궁중의 타락한 생활, 임오군란과 외세의 간섭, 갑신정변과 청일 양국의 각축 등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이후에 일어난 일로는 동학농민혁명과 청군의 주둔, 청일전쟁, 일본의 승리와 갑오경장, 을미사변, 러시아 세력의 침투와 아관파천, 러일 전쟁, 독립협회와 일진회, 을사조약 체결과 그 이후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정책,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매국 행위, 이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과 의사들의 활동, 탐관오리의 비행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내용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황현은 의병들의 활동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는데, 황현의 사상적 관점을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외국에 개방한 이후 조선 내에는 조선의 현실과 미래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위정척사파는 정통 유학을 배경으로 하여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유인석,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일으켰다.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수입한 유럽 학문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하였다. 이후 개화파는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조선의 정체성은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파 등과 연합하여 갑오경장을 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최제우는 서학, 즉 기독교를 배척하고 민중의 요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종교, 즉 동학을 창시하였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동학에 참여하였다. 또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발전하면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이렇듯 강화도조약 이후의 시기는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실천하였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개화기’라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화를 내건 개화파는 여러 세력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황현은 정통 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황현은 기본적으로 위정척사파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개화파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황현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황현은 개화파가 외세를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추진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개화파 인사 상당수가 친일파로 변신했음을 매우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전통적 체제를 뒤흔드는 반체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황현은 동학농민혁명을 ‘동비들의 반란’이라 불렀다. 즉 동학 비적들의 반란이라는 말이다. 특히 동학 세력의 일부가 일진회 등을 만들어 매국 행위를 한 것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개혁적 유학자

 

그렇지만 황현의 입장이 위정척사파의 입장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황현은 일본보다 먼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 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화파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황현의 전통 유학자들에 대한 비판은 서원 철폐에 대한 기록에서 나타난다. 서원은 유학자들이 붕당을 맺는 터전이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은 서원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서원을 철폐하였다. 황현은 유학자이지만 서원 철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주도한 것을 비판하였다. 아울러 서원 철폐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대를 비판하였다.

 

서원의 책임을 맡은 자가 백성들을 잡아다 때리는 일이 많았다. 그 폐단이 많아서 사람들은 서원을 가리켜 가죽을 뚫고 골수를 빨아먹는 좀이라고까지 불렀다. 서원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수령들조차 두려워서 감히 죄책을 묻지 못하였다…….서원의 설치는 처음에는 좋은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서원에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물질적으로 풍부해지자 그 성격이 변하였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명령이 대원군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서원 철폐를 할 때 백성들은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서원 내의 유학자들이 상소를 올리고 미쳐 날뛰며 반대하니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 황현, 『매천야록』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당시의 사회상과 그 시대를 움직였던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 묘사함으로써 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치 인물사전과 같이 치밀하게 묘사한 인물평은 대단히 생동감이 있다.

황현은 당시 지배자인 고종, 순종, 대원군, 명성왕후를 둘러싼 다양한 야사와 일본을 중심으로 청나라, 러시아의 다양한 각축전 양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서술함으로써 그것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특히 황현은 민족반역자들의 태도와 그들을 부추기면서 교묘하게 침략해 오는 일본의 간교한 정책에 대해 탁월하게 묘사를 하였다. 그리고 황현은 의병운동의 역사와 흐름, 의병에 참가한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 격동의 시대를 주체적인 노력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현은 유학의 세계관을 옹호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황현은 내적 개혁을 통해 외적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 국혼(國魂)이 있으면 국백(國魄)은 회복된다

박은식 한국통사

 

나이 마흔에 개화 독립파가 되다

 

공자는 나이 사십에 ‘불혹(不惑)’하였다고 하였다. 나이 사십이 되면 학문과 경륜에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은 달랐다. 박은식은 사십의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자, 자신이 가져왔던 사상을 전환하여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40세 이후에 세계의 학설이 수입되고 언론 자유의 시기를 만나서, 나도 하나의 학설에 파묻혀 굳어 있었던 것을 알았다. 적이 변동함으로 우리 선배들이 금지하였던 노자와 장자의 사상, 양자와 묵자의 사상,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설은 물론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꿰뚫게 되었다. 지금은 과학의 실용이 인류에게 요구되는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박은식, 「학(學)의 진리는 의(疑)로서 쫓아 구(求)하라」

 

박은식은 명망 있는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 양자와 묵자의 사상, 신불해와 한비자의 사상,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모두 이단이라 하여 금지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특히 적이 변함에 따라 이들 사상에 대해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박은식은 의(疑), 즉 알고 있는 진리를 의심하여 학문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동양의 학설은 물론 인류의 요구가 과학의 실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린 자세로 박은식은 철저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의 아픔을 담아내는 역사가의 삶을 살았다.

박은식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박은식은 조선 시대 말기의 유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생인 박문일, 박문오 형제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박은식은 자신의 방에 주자의 초상을 갖다놓고 매일 아침에 절을 올릴 정도로 주자의 학문, 즉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23살 때에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설렵하여 그 내용을 성리학의 체계 내로 편입해냈다. 그래서 박은식은 서도(西道, 황해도와 평안남북도를 지칭함) 제일의 유학자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던 시기, 박은식은 위정척사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자 하였다. 박은식의 할아버지 스승이 되는 이항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이었다. 박은식은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정신을 올바르게 세워 이단의 학설을 배격하고, 오랑캐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은식은 36살 때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은식은 동학농민혁명을 동학 비적들의 반란, 갑오경장을 이단적 학설에 따른 정책이라고 배척하였다. 이 무렵 박은식은 한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사건에 크게 실망하여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세상과 담을 쌓고자 하였다. 40살 때인 1898년에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무너지자 박은식은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다. 위정척사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은식은 한양에서 독립협회 운동을 접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경험하였다.

박은식은 자신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동안 세계 각국의 사상들이 우리나라로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박은식은 새롭게 접한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학문의 진리는 의심으로 추구하라!’ 박은식은 자신의 과거 사상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였다. 그래서 개화 독립파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바꾸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박은식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민에게 세계 정세와 신지식을 가르치는 신교육의 보급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 설립을 지원하면서 한성 사범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자 박은식은 53살의 나이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67살이 되던 1925년에 상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고령의 나이에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박은식은 중국에 망명하면서부터 『한국통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한국통사』를 쓴 이유는 ‘나라는 없어질 수 있지만 역사는 없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역사를 기록해두고자 한 것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롯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술하는 이유이다. 정신이 없어지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갑자년(1864년) 이후 50년사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우리 4천 년 역사 전부의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조상을 잊지 않는데 있을 것이다…….오늘날 우리 민족은 우리 조상의 피로써 뼈와 살로 삼고, 우리 조상의 혼으로써 영혼을 삼고 있다. 우리 조상은 신성한 가르침을 갖고 있고, 신성한 정치와 도리를 가졌으며, 신성한 학문과 무공(武功)을 가졌으니, 우리 민족이 어찌 다른 것에서 구해야 옳겠는가.

– 박은식, 『한국통사』

 

『한국통사』는 1915년에 완성되어 발간되었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고종이 즉위한 해인 1864년부터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이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쇠퇴하여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때이다. 그래서 박은식은 이 시기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통사(痛史)’, 즉 비통한 역사라고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한국통사』는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은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는 지리를, 2장에는 단군신화에서부터 고종의 즉위 때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종의 즉위 때부터 1898년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하기 직전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명성왕후 정권의 문호 개방 정책, 임오군란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청일 전쟁, 갑오경장, 명성왕후 시해 사건, 의병 운동, 아관파천과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 등이 서술되어 있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98년 아관파천으로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대한제국의 성립, 독립협회의 활동, 일본의 경제적 침략, 러일 전쟁, 을사조약, 애국 매국 인물들에 대한 서술, 동양척식회사 설립,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의 퇴위, 군대 해산과 의병 운동, 안중근 의거, 한일 강제 합병 이후의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통사』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다루면서 일본의 침략사와 이에 맞선 저항과 독립의 운동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박은식은 시종일관 일본 침략의 간교함과 잔학상을 세밀하게 폭로 규탄함으로써 반 일본 제국주의 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저항과 국권회복운동을 서술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주체적 의식과 노력을 고양하고자 하였다.

 

독립 운동의 교과서

 

『한국통사』는 발간되자마자 중국과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순 한글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또한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일본 경찰은 『한국통사』를 금서로 지정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억압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통사』의 영향력에 당황하였다. 그래서 조선 총독부는 『한국통사』가 발간된 이듬해인 1916년에 긴급히 어용 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따르면 『한국통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 반개(半開)의 민족과 달리 옛날부터 역사서가 많고 또 새로운 저작들이 적지 않다. 이중에서 전자는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 관계가 없는데도 헛되이 독립국의 꿈을 꾸게 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설명하고, 혹은 『한국통사』라 칭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일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함부로 망설을 지어낸다. 이들 역사책들이 인심을 좀 먹고 유혹하는 해로움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박은식은 독특한 입장에서 역사 서술을 하였다. 즉, 국혼(國魂, 민족정신)과 국백(國魄, 나라의 형태)을 구별하고, 국혼의 유지 강화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국백을 빼앗겼어도 국혼을 가지고 있다면 능히 국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은식은 국혼 또는 민족혼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한국통사』는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동 시대사를 연구한 책이다. 『한국통사』는 최초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체계화하여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고전이다. 『한국통사』는 일제 강점기에 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조국의 독립 의식을 드높인 교과서였다.

 

 

 

 

 

 

 

  1. 역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로마제국의 집정관

 

375년, 유럽의 역사를 바꾼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이 동쪽의 훈족의 침입에 밀려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게르만족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로 몰려들었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 사실상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어 있었다. 동로마는 아시아 나라들과 교역을 하며 경제적으로 번영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마는 인구가 감소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여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냈지만, 서로마 제국은 이미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낼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476년, 게르만족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그와 함께 고대 시대가 막을 내렸다.

사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실질적 위협 세력이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부가 로마를 침략해왔다. 로마의 마리우스 장군이 가까스로 침략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을 대단히 위험한 종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기원전 58년에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원정하여 게르만족을 소탕했지만, 곧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로마의 내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게르만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게르만족 소탕 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로마 제국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타키투스(P. C. Tacitus, 55? ~ 117?)가 태어날 무렵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의 상황은 소강상태였다. 타키투스는 아버지가 재무관으로 근무하던 지금의 벨기에(혹은 북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네로 황제가 폐위되고 자살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혈통이 끊기자, 장군들끼리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그래서 68~69년 사이에 황제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이때 소년 타키투스는 최악의 공화정이 최선의 제정보다 낫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타키투스는 공직에 진출하였다. 타키투스는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80년대 초에 재정관이 되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른 지 8년 후인 88년에 법정관과 15인의 사제단 일원이 되었다. 타키투스는 89~93년 사이에 작은 속주의 총독으로 근무했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공포정치를 자행하여 원로원의 귀족 다수를 제거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자 네르바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네르바는 트라이야누스를 양자 겸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이후 로마는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五賢帝,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대가 열렸다. 이때 타키투스는 네르바와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그 뒤 타키투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여러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말년의 타키투스는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역사 서술로 여생을 마쳤다.

타키투스는 5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게르마니아』이다.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의 기원과 주거지에 관한 일종의 전공논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게르만족에는 오늘날의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네덜란드인,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이 포함된다.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다

 

『게르마니아』는 아주 짧은 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200자 원고지 300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다. 구성도 단순하다. 총 4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7장에서는 게르만족의 나라, 제도, 관습, 사생활 등을 다룬다. 그리고 28~46장에서는 게르만족의 개별 부족들에 대해 기술하였다. 즉,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의 민속지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에 대한 정보를 주로 게르만족에 관한 글과 북유럽을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는 플리니우스가 쓴 전쟁사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등이 있다.

그러면 타키투스는 왜 『게르마니아』를 지었을까? 타키투스가 직접 저술의 동기를 밝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을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글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게르만족에 대한 단순 소개이기 때문에 게르만족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타키투스의 서술 의도는 당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로마인을 보면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건전한 원시부족의 생활방식과 관습을 소개함으로써 로마인들의 경계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타키투스는 황제들의 절대 권력이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모두 타락하게 마련이다. 황제는 잔인해지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며, 신하들은 위선적이고 사리사욕만 꾀하게 된다. 지배자들이 타락하면 피지배자들 역시 타락한다. 로마의 시민들 역시 향락에 물들어 타락하였다고 타키투스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타키투스는 절대 권력에 따른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건전한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 타키투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경계를 삼고자 글을 썼다.

이제 타키투스가 소개하는 게르만족의 기원을 들어보자.

 

게르만족은 유일한 역사 기록인 옛날부터 전해오는 서사시에서 투이스토 신이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서사시에 따르면, 투이스토 신에게서 게르만족의 시조인 만누스가 태어났다. 만누스는 세 명을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을 따서 대양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자들을 잉가이보네스족, 중앙에 사는 자들을 헤르미오네스족, 나머지를 이스타이보네스족이라 불렀다…….하지만 게르만이라는 이름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와서 사용되었다. 맨 먼저 네누스 강을 건너 갈리족을 내쫓은 지금의 퉁그리족을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종족이 아니라 부족의 이름으로 차츰 통용되었으니, 처음에는 갈리족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퉁그리족만이 자신들을 게르만족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이 이름이 통용되자 종족 전체가 스스로 자신들을 게르만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게르만족의 신화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 특기할만한 것은 게르만족이라는 이름이 다양한 종족을 아우르는 이름이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가장 강한 종족만을 게르만족이라고 하였는데, 점차 여러 종족들이 모두 스스로를 게르만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게르만족은 다양한 혈통의 부족을 포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원주민이며 이주나 교류를 통해 이민족들과 거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타키투스의 이 주장은 훗날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정치적으로 악용되다

 

『게르마니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5세기 때였다. 1455년에 원본이 발견되고 1470년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게르마니아』 초판이 발행되었다. 3년 뒤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간행되었는데, 무려 50쇄가 발행되었다.

『게르마니아』가 알려지면서 이 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게르마니아』의 제4장의 내용이 주로 정치적 이용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게르마니아 주민들은 다른 종족과 혼인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으며, 유례없이 순수한 특별한 종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구가 많음에도 매섭게 쏘아보는 푸른 눈, 붉은 머리털, 순간적으로 힘을 쓸 때에만 효과적인 큰 체구 등 모두 생김새가 비슷하다. 외모와 달리 그들에게는 힘들고 지속적인 노력을 견뎌낼 만한 참을성이 없으며, 갈증과 더위는 전혀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와 토양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에 익숙하다.

–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게르만족의 순수 혈통을 강조한다. 초기에는 순수 혈통을 내세워 게르만족은 갈리아와 달리 로마에 정복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독일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일어나면서 공격적 주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게르만족의 특질은 로마 시대부터 변한 것이 없으므로 민족성을 견지하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피히테는 게르만족이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종족이라는 논리를 펼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나치 정권의 이론가들은 게르만족의 혈통적 순수성, 자유에 대한 사랑, 도덕적 올바름, 충성심, 용기 등 타키투스가 제시한 여러 가지 자질을 부각시키면서 게르만족의 인종적 우수성을 내세웠다. 나치 정권은 인종적 우수성 주장을 가지고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살하였다.

타키투스는 고대 로마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기 위해 『게르마니아』를 썼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인종적 우수성이 아니라 순수한 도덕을 소개하였다. 타키투스를 악용한 자들은 오히려 게르만족의 도덕심을 타락시켰을 뿐이다.

 

 

 

 

 

 

 

 

  1. 대하소설 같은 역사서

블로크 중세사회

 

레지스탕스 운동의 지도자

 

전투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식을 여섯 명이나 둔 56살의 한 가장이었지만 이 노령의 애국자는 기꺼이 조국에 몸 바칠 결심을 한다…….유대인 신분에 관한 법령이 발표되자 1941년 당시 클레르몽페랑으로 옮겨가 있던 스트라스부르 대학과 몽펠리에 대학에서 계속 가르칠 수 있는 특례 자격을 얻는다. 독일이 파리 서재의 책들을 모두 압수하고 프랑스 남부 지역을 완전 봉쇄하자…….블로크는 역사가라는 직업의 미래를 절실하게 고민한다. 도피하듯 미국 뉴욕의 뉴스쿨로 갈 수 있었던 기회도 포기한다. 독일군이 프랑스 남부 지역까지 들어오자 대학의 지위도 포기해야할 상황이 온다. 블로크는 마침내 오래전부터 결심해왔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조직력, 용기, 도덕적 엄격성 같은 브로크의 성격은 바로 레지스탕스 활동, 특히 리옹의 프랑티뢰르(의용유격대)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미 얼굴이 너무나 널리 알려진 블로크는 붙잡혀 1944년 6월 16일 생디디에드포르망에서 총살당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올리비에 뒤물랭은 『마르크 블로크』에서 블로크(M. Bloch, 1886 ~ 1944)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과 블로크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블로크는 역사학자로서 역사가의 소명 의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다간 것이다.

블로크는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귀스타브 블로크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파리 고등 사범학교를 졸업한 로마사가로서 아들이 출생할 무렵에는 리옹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블로크는 어릴 적부터 전문적 역사 연구의 실제를 접하면서 자라났다. 블로크는 19살에 루이대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하였다. 불과 4년 만에 역사학, 지리학 교수 자격을 획득한 후 독일로 유학하여 종교사를 배우고 돌아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블로크는 군에 입대하여 대위로 제대를 하였다. 제대 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뤼시엥 페브르 등과 함께 역사 전문지인 <아날>지를 발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자 자신의 고향인 리옹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다. 블로크는 리옹 일대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역사를 위한 변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중세사회』는 블로크가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사를 강의하던 시절, 앙리 페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보’ 총서의 일환으로 1939년에 저술한 것이다. 『중세사회』는 역사가로서 블로크의 명성과 지위를 확고하게 해준 책이었다. 블로크는 『중세사회』에서 중세사회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을 배격하고, 전체성 속에서 파악해야할 하나의 사회형으로 설정하였다.

 

중세사회 특징의 1번은 농민의 종속이다

 

블로크가 다룬 중세사회는 유럽의 중세사회,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의 중세사회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의 중세사회는 동양의 중세사회와 사회구조가 달랐다. 성유럽의 중세사회는 영주와 기사 등의 귀족층과 농민으로 구성된 평민층으로 이루어졌다. 영주는 기사에게 봉토를 주고 충성을 서약 받았다. 농민들은 영주와 기사의 토지를 경작하고 소작료를 지불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서유럽의 중세사회의 사회구조를 봉건제라고 한다.

블로크는 『중세사회』에서 사회사를 밑바탕에 깔면서 서유럽 중세사회의 종합적인 역사를 쓰려고 하였다. 『중세사회』는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에는 ‘인적 종속관계의 형성’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중세사회의 형성 및 작동의 원리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존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제2권에는 ‘계급과 통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중세사회의 정치 체제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중세사회에 대한 블로크의 관점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제2권의 ‘사회형으로서 봉건제’이다. 그곳에서 블로크는 서유럽 중세사회의 기본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썼다.

 

농민층의 종속,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던 봉급제 대신에 봉토 보유자가 널리 채택되고 있었던 점, 전문적 전사계급이 차지하고 있던 우월한 위치,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 주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권력의 세분화, 그리고 친족 집단과 국가의 존속. 국가는 계속 살아남아 중세 시대 제2기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 블로크, 『중세사회』

 

서유럽 중세사회의 특징을 집약하였다. 농민층은 영주에 종속되어 있었다. 영주의 토지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노예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중세사회의 농민을 농노라 부르기도 한다. 영주는 기사가 충성하는 대가로 봉급이 아니라 봉토를 주었다. 기사는 영주에 매여 있었지만 농민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며 귀족층의 일원이 되었다. 이렇듯 서유럽 중세사회는 영주, 기사, 농민이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래서 블로크는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 주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농민층의 종속을 중세사회의 첫 번째 특징으로 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블로크는 하나의 사회를 파악할 때 농민과 같은 직접적인 생산자층의 상태를 가장 우선시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서유럽의 중세 봉건제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게르만족에 의해 고대 로마가 붕괴하면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블로크는 고대 로마 사회구조와 게르만족의 사회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합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강제 결합한 결과 중세사회가 성립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강제 결합을 가져온 폭력을 블로크는 이슬람교도와 스칸디나비아인 및 헝가리인의 침입에서 찾았다. 그래서 블로크는 중세사회가 로마 제국의 붕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8, 9세기에 있었던 이민족의 침입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중세사회의 대하소설

 

블로크는 중세사회를 연구하면서 중세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중요시 하였다. 블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특정한 거주 형태의 분포와 특정한 형태의 법률과 같이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하는 현상들을 병렬하는 경우에 원인과 결과라는 미묘한 문제가 제기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다른 두 계열의 현상을 수 세기에 걸친 발전 과정에 비추어 비교해보면 ‘한쪽에는 모든 원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모든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이분법도 없을 것이다. 정신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조직이다.

– 블로크, 『중세사회』

 

블로크는 전체적인 인간관계의 망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점이 블로크가 중세사회를 파악하는데 있어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이다. 블로크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계약의 상호성을 매우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블로크는 기사의 영주에 대한 충성, 그리고 영주의 국왕에 대한 충성이 봉건제 후기에 국가의 재건과 왕권의 강화하는데 강력한 이념적 도구로 작용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블로크는 봉건적 계약이 국왕이나 영주에게도 백성의 복지 도모라는 의무를 부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의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때 백성은 국왕이나 영주에게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물론 이러한 블로크의 주장은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세사회』의 뛰어난 점은 블로크가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중세사회 사람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블로크는 서사시, 벽화, 기도문 등 중세시대의 정신적 소산들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예를 들면 귀족층의 생활세계와 감정 그리고 사고방식 등을 롤랑의 노래나 시드의 노래와 같은 정통적인 무훈 서사시를 이용하여 보여주었다. 정통 무훈 서사시만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반역자 무훈 서사시도 많이 활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블로크는 무훈 서사시, 기사 이야기, 기사도의 전범 등의 문학 작품과 역사적 자료를 활용하여 영주와 기사의 관계 및 봉토 수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알려준다. 이를 위해 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당대인들의 의식구조 자체를 알려 주는 자료로서 한다. 블로크는 문학 작품이 영주와 기사들의 사고방식, 행동거지를 규제하는 일종의 모범으로 작용함으로써 영주와 기사들의 집단적 자의식을 형성하는데 크게 한 몫 하였다고 보았다.

중세사회 사람들의 독특한 의식구조에 대한 블로크의 설명 역시 흥미롭다. 예를 들면 숫자 개념의 결여, 이로부터 야기되는 시간 개념의 결여,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서술한 부분은 『중세사회』의 백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중세사회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근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중세인을 바라본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사회』는 마치 중세 서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한 편의 빼어난 대하소설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역사서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 불쑥 들이미는 예화 하나하나는 중세 시대 인물들의 삶의 갖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중세사회』는 중세사회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총체성을 드러내 주는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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