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조사보고서_ 헤로도토스 『역사』
흙과 물을 바칠 수 없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략하였다.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역사』에서 크세르크세스가 동원한 군대의 규모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헤로도토스는 그 증거로 세 가지 자료를 제시한다. 첫째 자료는 육군만 총 170만 명이었다는 것이다. 1만 명의 군대를 빈틈없이 밀집시킨 다음, 그 주위에 원을 그리고 원을 따라 배꼽 높이의 담을 쌓아 전체 군대의 수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둘째 자료는 동원된 배의 숫자가 총 3000척이었다는 것이다. 삼단노선의 수는 1207척, 그 외 삼십노선, 오십노선, 소형 선박, 군마 운반선들이 총 3000척이었다는 것이다. 삼단노선 한 척당 평균 200명의 인원이 탑승하고, 일반 배 한 척당 100명의 인원이 탑승했다고 가정할 경우 54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육군과 해군을 합하여 230만 명이 동원되었고, 여기에 종군한 하인들과 군량 수송선 선원을 다 합하면 528만 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앞서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 다리우스1세가 시도한 두 차례의 그리스 침략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는 이번에 결판을 내고자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한 이유가 흙과 물 때문이라고 하였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주변 약소국가들에게 복속을 요구하면서 흙과 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보낸 사절에게 흙과 물을 바친 나라는 페르시아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나라들이 페르시아의 위세에 눌려 흙과 물을 바쳤지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만이 거절하였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왕의 사절을 구덩이 속에, 스파르타인들은 우물 속에 던지며 거기서 왕에게 줄 흙과 물을 가져가라고 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자 그리스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과연 이 거대한 규모의 병력 앞에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는 이 유례없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전쟁의 결과를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하였을까? 아테네에서 살면서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아테네인들의 자랑을 듣고 이 전쟁을 기록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본고향은 소아시아 서남부의 도시인 할리카르낫소스였다. 그곳에서 기원전 485년경에 태어나 아테네에서 살면서 정치가 페리클레스, 비극시인 소포클레스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전쟁의 기록은 쉽지 않았다. 헤로도토스가 살았던 시기가 전쟁의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10살 무렵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수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자료를 모았다.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은 물론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을 방문하였다. 이렇게 모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역사』를 썼다. 『역사』는 기원전 425년경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냐 노예냐의 전쟁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연합부대가 절대적 열세임에도 막강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헤로도토스가 전쟁의 경과를 보면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알 수 있다.
전쟁 준비를 완료한 크세르크세스는 데마라토스를 불러 물었다. “그리스인들이 과연 나에게 대항할 것인가?” 데마라토스는 다리우시1세의 그리스 원정에 참여한 적이 있는 그리스인이었다. 데마라토스가 대답했다.
“전하께서 진실만을 말하라고 명령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는 원래 가난한 나라이지만 지혜와 엄격한 법 덕분에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기 덕분에 가난과 독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그리스를 노예로 만들게 될 전하의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데마라토스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왕이 반문하였다. 1000대 1의 싸움인데 어떻게 무모한 싸움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마라토스가 말했다.
“그들의 주인은 법입니다. 그들은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법을 두려워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법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법의 명령이란 언제나 같습니다. 즉 아무리 많은 적군을 만나더라도 싸움터에서 도망치지 말고 대열을 지키며 버티고 서서 이기든 죽든 하라는 것입니다.”
– 헤로도토스, 『역사』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시민들의 합의에 의해 성립되고 운영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리스의 법은 시민들의 합의였다. 합의를 위반한 자는 엄한 벌을 받게 된다. 데마라토스는 이런 사정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노예로 사느니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다음의 사례는 그리스인들이 무엇을 열망했는지 보여준다. 그 당시에 먹고 살기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페르시아로 이주하는 그리스인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을 크세르크세스 앞으로 끌고 가서 심문하였다. “그리스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스인들이 대답했다. “올림피아 축제를 개최하여 육상경기와 경마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물었다. “어떤 상을 타려고 경기를 하느냐?” 그리스인들이 다시 대답했다. “올리브 가지로 엮은 관(冠)을 타기 위해서 경기를 합니다.” 그때 페르시아의 장군 트리탄타이크메스가 큰 소리를 질렀다. 트리탄타이크메스는 그리스인들이 돈이 아니라 관을 걸고 경기를 한다는 말을 듣자 침묵할 수 없었다. “아아, 왕이시여! 어찌하여 돈이 아니라 명예를 위해 경기를 하는 이런 종류의 인간들과 싸우자고 우리를 이끌고 왔습니까!”
그리스인들은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였다. 올림피아 축제를 즐기며 자유롭게 사는 삶을 원했다. 그리스인들이 진실로 두려워한 것은 페르시아의 대규모 군대가 아니라 자유의 상실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큰 소리를 지른 트리탄타이크메스를 겁쟁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물론 페르시안인들은 자유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강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썼다.
아테네는 그렇게 점점 강성해졌다. 그리고 법 앞의 평등이 어느 면에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밝혀졌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이 참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전쟁에서 어느 나라도 능가할 수 없었지만, 참주들에게서 벗어나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압제 하에서는 주인을 위해 일하기에 일부러 게으름을 부린 반면 자유민이 된 지금은 각자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헤로도토스 『역사』
헤로도토스가 볼 때 페르시아 전쟁은 자유냐, 노예냐를 가르는 전쟁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 앞에 페르시아의 군대는 무너졌다는 것이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조사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쓴 이유는 인간들의 행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것을 막고, 그리스인과 비(非) 그리스인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리스인과 비 그리스인이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 헤로도토스, 『역사』
『역사』에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이집트인, 바빌론인, 스키타이족, 맛사케타이족에 관한 지리학적, 인종학적, 민속학적,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그렇지만 그리스를 일방적으로 찬양하지 않았다. 비 그리스인들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서술에서도 그리스인의 결점, 예를 들면 의견의 불일치, 상호간의 경쟁과 반목, 많은 도시들의 페르시아 편들기, 그리스인들의 능력부족 역시 가감 없이 서술하였다.
헤로도토스는 “나는 들은 대로 전할 의무는 있지만, 그것을 다 믿을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보고 들은 내용에서 취사선택하기보다 보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역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한편으로 헤로도토스는 숙명론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왕 퀴로스에게 한 크로이소스의 말을 들어보자. “전하 자신과 전하의 신하들이 한갓 인간임을 아신다면, 전하께서 아셔야 할 것은 인간사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같은 사람이 늘 행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늘 행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헤로도토스는 인생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으로 인간은 신이 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이 『역사』의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가 없었다면 기원전 550년에서 479년에 이르는 그리스와 서아시아 및 이집트 역사를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가리켜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