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켕 『자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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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살은 집단적 경향이다

뒤르켕 자살론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OECD 건강통계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9.1명으로 OECD 평균(12.1명)의 2.4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무려 10년째 OECD 34개 국가 중 1위인 상태이다.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 명으로 잡으면 한 해 자살 인구가 14,550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약 40명이 자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살률이 급증하기 시작한 건 1990년 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OECD 가입 초기인 1995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가 12.7명으로 OECD 평균(15.5명)을 밑돌았는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1998년에 21.7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해소된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계속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살자가 발생하면 자살의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대부분 자살의 이유를 개인적인 것으로 추측한다. ‘생계 비관’에서부터 ‘성적 비관’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이유에서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르켕(E. Durkheim, 1858~1917)은 자살을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뒤르켕은 자살이 사회적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고 단언했다.

뒤르켕은 프랑스 동북 국경 근처의 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로렌 지방은 프랑스에서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강한 곳으로 뒤르켕은 어려서부터 러시아와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뒤르켕은 파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에서 경제학, 민속학, 문화 인류학 등을 배웠다. 30살 때 보르도 대학의 교수가 되어 ‘교육학과 사회 과학’을 주제로 강의하면서부터 가족, 법, 도덕, 범죄, 교육 등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뒤르켕은 39살 때(1896년) <사회학 연보>를 발간하면서 뒤르켕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회학 연보>는 프랑스에서 주도적인 사회학 연구지가 되었다. 뒤르켕은 심리학적 사회학에 반대하고 실증주의에 입각한 객관적 사회학을 확립하였다. 뒤르켕의 사회학은 개인보다는 집단에서 사회적 실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했다.

뒤르켕은 1897년에 『자살론』을 발표하였다. 뒤르켕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자살자가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 결과 자살은 개인적 원인이 아닌 사회적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혔다.

 

사회학적으로 규명된 『자살론』

 

뒤르켕은 『자살론』에서 자살의 원인에 대해 알려진 모든 요인들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기상학적 요인을 비롯해 우주적 요인들, 종교, 결혼, 가족, 이혼, 원시적 관행, 사회적 상황, 경제적 위기, 범죄, 법, 역사, 교육, 직업 등 다양한 요인을 분석하였다. 뒤르켕은 자살의 원인과 관련한 요인의 분석을 위해 사회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뒤르켕은 자신이 사용한 사회학적 방법에 대해 『자살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학적 방법은 사실이 사물로서, 즉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와 같은 원리가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는 없다. 사회학이 존재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학이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회학은 다른 과학 영역에서 다루지 않는 실체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개인의 의식의 외부에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학은 연구 대상을 갖지 못한다. 개인의 의식의 외부에 아무런 실체가 없다면 개인의 정신 상태만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정신 상태를 관찰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 그러나 개인의 정신 상태를 연구하는 과제는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다.

– 뒤르켕, 『자살론』

 

뒤르켕은 먼저,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는 정신 질환, 인종의 특성, 유전, 기후, 기온, 모방 등 비사회적 요인을 검토하였다. 그런 비사회적 요인들이 자살의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없다. 뒤르켕은 자살률, 즉 사회의 자살의 양이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자살은 개인적인 형태로 설명될 수 없다. 자살은 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살의 경향과 동시에 발견되는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분석되어야 한다.

뒤르켕은 종교, 가족, 결혼, 정치적 공동체 등 자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 세밀한 분석을 하였다. 그리하여 뒤르켕은 사회적 통합과 사회적 규제가 자살과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예를 들어 정치적 위기 때 자살률이 감소하고, 경제적 위기 때 자살률이 증가하는 현상은 서로 다른 원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뒤르켕은 정치적 위기 때와 경제적 위기 때 자살률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사회적 통합 및 사회적 규제의 정도에서 찾았다.

 

왜 자살을 하는가

 

뒤르켕은 자살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이 그것이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소속한 집단의 결속력이 약화될 때, 즉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낮을 때 주로 일어난다. 이때 지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은데, 개인의 자아가 사회의 자아보다 강력해지면서 이기주의적 상태로 인한 자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뒤르켕은 정치적 위기 때 자살률이 낮아지는 이유는 당파심, 애국심이 작동하여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종교에 따른 자살률의 차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뒤르켕은 프로테스탄트보다는 가톨릭, 기독교보다는 유대교가 통합성이 강하기 때문에 유대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의 순으로 자살방지 효과가 높다고 보았다. 또한 뒤르켕은 가족생활에의 통합도가 낮은 개인들일수록 이기적 자살을 더 많이 하고 있음을 통계적 자료로 입증을 하였다.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통합의 정도가 너무 강할 때 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종교적 이유로 자살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 경우가 개인이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희생하는 이타적 자살이다. 종교가 개인을 종교집단의 생활에 몰입하도록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살이다. 이 이외에도 뒤르켕은 유명인의 자살을 따라하는 모방자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자살 등이 모두 이타적 자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자살의 동기가 자아의 외부인 집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이 사회통합의 정도와 관계있다면,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약화될 때 일어나는 자살이다. 사회적 규제가 적절하지 못한 경우 개인은 일종의 무규율 상태, 즉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뒤르켕은 아노미적 자살이 주로 공업 및 상업의 세계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경제적 위기가 나타나면 개인들은 이전의 생활패턴에 따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어 자살이 늘어난다. 경제상황이 좋을 때에도 역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아노미적 자살이다. 또한 배우자를 잃은 위기에서 발생하는 자살 역시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한다. 결혼상태가 주는 규제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살에 대한 저항이 약해진 결과 일어난 자살이기 때문이다. 인기가 떨어져 자살하는 유명인의 경우 역시 자신에게 익숙한 지위 밑으로 갑자기 떨어져 아노미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살문제는 훈계로 해결할 수 없다

 

뒤르켕은 자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어떠한 사회에서든 일정한 자살의 경향이 있음을 밝혀 자살이 집단적 경향임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집단적 경향은 개인적 경향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회적 사실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살 경향은 집단 경향과 관련해서만 분석될 수 있다. 집단 경향은 개인들이 집단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회 구조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살률 증가와 같은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뒤르켕은 사회의 집단의식이 약화되고, 사회 조직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뒤르켕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에서 자살이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산업혁명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동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뒤르켕은 전통적인 사회관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관계가 정착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이기적, 아노미적 자살이 급증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살률 증가에 대한 대책이 단순한 교육이나 훈계 또는 억압일 수 없다. 뒤르켕은 개인을 새로운 사회관계에 통합시킬 수 있는 새로운 유대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유대의 통합은 직업 집단을 통하여, 즉 이해 의식에 기초한 자발적 결사를 통하여 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직업 집단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직업 집단은 개인들의 탐욕을 규제할 만큼 충분히 개인들을 지배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개인들의 욕구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개인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뒤르켕, 『자살론』

 

자살의 원인에 대한 해명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죽은 자가 자살 동기를 밝혀놓지 않는 한 자살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뒤르켕의 연구는 자살 현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업적이다. 자살의 원인에 대한 연구에서 보여 준 뒤르켕의 과학적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사회과학도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고 있다.

 

 

 

 

 

 

 

 

  1. 선생은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피아제 아동 지능의 기원

 

무척이나 조숙한 아이

 

왜 초등학교에는 8살이 되어야 갈 수 있을까?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895년에 근대적 교육기관인 소학교가 만들어지면서 8살 입학이 법으로 정해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굳이 8살부터 입학을 허용한 근거를 들라면 어린이의 신체발달 정도라고 할 수 있다. 8살이 되어야 어린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이들이 8살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건 아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린이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주장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이른바 조기교육 열풍이다.

특히 영어 교육에서 조기교육 열풍이 두드러진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가 영어책을 보고 있는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어차피 배울 영어라면 가능한 한 일찍부터 배우는 게 좋다는 것이다. 대학 총장 출신의 한 인사가 “미국 가서 ′오렌지′ 달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들어 ′아륀지′라 했더니 가져오더라.”라고 한 발언은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영어 조기교육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리말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어린이가 영어를 배우다보면 언어상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어 조기교육으로 어린이의 정체성이 뿌리 채 흔들린다고도 한다.

조기교육에 대한 찬반 토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조기교육 찬성을 하던 반대를 하던 양쪽의 공통점이 있다. 양쪽 모두 피아제의 이론을 주장의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아제의 이론이 무엇이기에 서로 다른 주장의 공통된 근거가 되고 있는가.

피아제(J. Piaget, 1896~1980)는 스위스의 뇌샤텔에서 태어났다. 피아제는 “무척이나 빨리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10살 때 공원에서 관찰한 백색종 참새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또한 연체동물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15살 때에는 이미 유럽의 동물학자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피아제는 동물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심리학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후 심리 검사의 표준화 작업에 종사하면서, 특히 심리 검사에 참여한 어린이들의 추리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피아제는 어린이의 사고 발달 과정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을 무려 50권이 넘는 책과 100편이 넘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 수많은 책과 논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서가 『아동 지능의 기원』이다. 『아동 지능의 기원』은 1925년에서 1931년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을 관찰함으로써 얻은 결론을 1948년에 발표한 것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

 

피아제의 이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피아제의 철학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피아제는 자신을 칸트의 제자라고 하였다. 칸트는 경험론 철학과 합리론 철학을 비판하여 인식론적 전회를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피아제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고찰하여 비판하고, 지식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경험론자들은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다. 즉,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론은 논리적 필연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2 + 2 = 4’를 보자. 돌멩이 2개에 다른 돌멩이 2개를 합하면 4개의 돌멩이가 된다. 그렇지만 물방울을 이용하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2개의 물방울에 2개의 물방울을 합하면 2개의 물방울이 될 뿐이다. 따라서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는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2 + 2 = 4’라는 명제가 항상 참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경험론과 달리 합리론자들은 인간이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이때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지식을 ‘선천적인 관념’ 혹은 ‘본유 관념’이라고 한다. 합리론의 입장에서는 ‘2 + 2 = 4’라는 명제가 항상 참이라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 명제가 항상 참이라는 지식을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론은 어린이들은 왜 고등수학을 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합리론자들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태어난 고등수학의 관념을 활성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어린이들이 고등수학을 하려면 학습을 해야 한다. 그것도 오랫동안 학습을 해야 한다.

피아제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자 하였다. 피아제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을 강조한다. 인간은 경험론이 말하는 것처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고 경험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능동적 존재이다. 즉, 인간은 경험을 해석, 구성하는 사고력을 타고난다. 그리고 피아제는 경험을 중시한다. 선천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사실이 없다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즉, 지식의 원천은 경험이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피아제의 철학이 칸트의 철학과 다른 점은 선천적인 사고력이 발달의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 점이다. 칸트는 경험을 구성할 수 있는 선천적인 사고력, 즉 공간, 시간, 정체성, 인과성 등과 같은 형식과 범주가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주어진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피아제는 그런 형식과 범주가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어린이들이 가진 선천적인 사고력은 원시적인 초기 상태이다.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환경과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그 과정에서 선천적인 사고력이 발달한다. 피아제는 그 발달과정을 밝히기 위해 『아동 지능의 기원』을 썼다.

 

선천적 사고력 발달론

 

피아제는 어린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사고력 발달의 시간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이 시간표를 4단계로 구분한다. 감각 운동 단계, 전 조작적 단계, 구체적 조작적 단계, 형식적 조작 단계가 그것이다.

피아제는 어린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정신 활동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아가 어른들과 같은 정신 활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 운동을 통해 뒷날의 인지 발달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아제는 이 시기를 감각 운동 단계라고 불렀는데, 이런 시기는 2살 때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에 지능의 구조가 진화하기 시작한다. 갓 태어나서는 단순한 반사 행동만을 하지만, 생후 2개월이 되면 사물을 빨기 시작하며 이 과정에서 원시적이나마 사물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4~8개월 사이에 보기와 만지기를 하는데,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잡으려고 한다. 1년이 지나면 말하기를 시작하며 지적 조작의 진화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 2살이 될 무렵이면 사물을 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전 조작 단계는 2살부터 7살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어린이들은 감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개념과 상징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상태로 진화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언어의 발달이다. 2살이 되면 어린이들은 사물을 직접 가리키는 것에서 사물을 상징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4살이 되면 언어 사용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언어의 사용은 지적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는 지적 발달에서 세 가지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다른 사람과 언어로 소통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관계를 알게 해준다. 둘째, 언어와 기호 체계로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활동을 내면화한다. 이때까지의 지각적이고 운동적이었던 수준이 아니라, 영상과 정신적 실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표상할 수 있게 된다.

– 피아제, 『아동 지능의 발달』

 

구체적 조작 단계는 7살에서 11살까지의 시기로, 이 단계에서 어린이들의 추리 과정이 논리적으로 발전한다.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가 발달하고, 사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과 수의 개념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단계의 어린이는 아직 높은 수준의 논리적 조작을 하지 못한다. 어린이들이 발달시킨 논리적 조작은 구체적인 문제에만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설적이거나 순수 언어적인 문제에는 어린이들의 논리를 적용시킬 수 없다. 순수 언어 문제를 제시하면 어린이들은 그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 문제를 실제의 사물로서 제시하면 해결해 낸다.

형식적 조작 단계는 11살에서 15살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어린이들이 논리적 조작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발전한다. 피아제는 이 기간 동안 아동의 인지적 구조는 성숙의 수준에 이른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 이후로는 인지 구조의 구조적 개선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어린이는 어른과 같이 사고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렇다고 어른들과 똑같은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른들이 가지는 중요한 사고 능력인 형식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간이 지난 뒤에 일어나는 사고 능력의 변화는 논리적 조작과 구조에 있어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양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지능의 내용과 기능에서 개선이 일어난다. 즉, 이 시기가 지나면 사고방식은 개선이 되지 않지만, 사고의 내용과 기능은 끊임없이 개선된다.

피아제의 아동 지능 발전 4단계론은 어린이들의 학습과 교육에 관한 이전의 견해들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이들의 지능이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발달하는 것이라면, 교육을 많이 한다고 어른들이 바라는 것을 조기에 익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아제 이론에 따르면, 선생은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어린이가 스스로 세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1. 종교 심리학의 기초를 닦다

심리학과 종교

 

콤플렉스의 유래

 

테베의 라이오스 왕은 자식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신은 아들이 태어나면 아버지를 몰락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얼마 후 이오카스테 왕비가 아들을 낳자 라이오스 왕은 걱정을 하여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양치기에게 아들을 산에 갖다 버리라고 했지만, 양치기는 아이를 이웃 나라인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넘겨주었다. 코린토스의 양치기가 그 아이를 왕에게 갖다 바치자 코린토스의 왕은 그 아이를 양자로 키웠다. 아이의 발이 부어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라고 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신전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코린토스의 왕을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향하였다. 도중에 테베의 라이오스 왕 일행을 만나 시비가 붙고,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 일행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테베에서 오이디푸스는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왕이 되었다. 이오카스테 왕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자 테베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번졌다. 오이디푸스가 신에게 도움을 청하자 신은 라이오스 왕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라고 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진상조사를 하던 중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되었다. 이오카스테 왕비를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프로이드는 이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남성이 아버지에 대해 증오하고 어머니에 대해 품는 성적 애착을 가리킨다. 프로이드는 유아기에 나타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성인의 정상적인 성애가 발전한다고 하였다. 프로이드 이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콤플렉스’라는 말은 주요한 학문적 용어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상 언어가 되었다.

콤플렉스가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데에는 프로이드의 제자 융(C. Jung, 1875~1961)의 역할이 컸다. 프로이드는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마음의 복합체를 콤플렉스라 하고, 콤플렉스를 성적 충동과 연결 지었다. 반면에 융은 콤플렉스를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융은 모든 사람이 한두 가지씩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에게 있어 콤플렉스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속마음이다. 따라서 콤플렉스에는 열등감도 있고 우월감도 있다. 콤플렉스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융과 프로이드의 심리학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성적 충동에만 관련시키는 프로이드에 반대하여 자기 나름의 분석심리학을 창시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은 가지고 태어난다

 

융은 스위스 캐스빌에서 태어났다. 집안에 성직자가 많았지만 10대 때 읽은 다양한 서적의 영향을 받아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33살 때인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융은 프로이드와 공동 연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융은 프로이드와 의견이 갈려 헤어진 후 독자적인 심리학을 개척하였다. 융은 히틀러의 집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여 나치의 지지자로 몰리기도 하였다. 『심리학과 종교』는 융이 1937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한 강연 내용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융은 꿈의 해석을 중요시 한 점에서 프로이드와 다르지 않다. 또한 꿈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난다고 한 점에서도 프로이드와 같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가 성적 충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본 프로이드와 달리, 융은 무의식의 세계가 모든 지각, 감각, 충동, 사고의 복합체라고 하였다. 융은 그 복합체를 콤플렉스라고 하였다. 지각, 감각, 충동, 사고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신적 기능이다. 따라서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융은 프로이드와 헤어진 후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연구하였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비정상적인 꿈을 많이 꾸고, 여러 차례 환상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융은 자신의 기묘한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과학적으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이런 경험들이 정신의 영역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융은 그 정신의 영역을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집단적 무의식은 융의 분석심리학의 중심개념이다. 융은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개인적 무의식이란 개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으로 개인에 따라 각기 다르다. 반면 집단적 무의식이란 개인적 무의식보다 더 깊은 영역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무의식이다. 즉, 집단, 민족, 인류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공통된 심리이다. 따라서 집단적 무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것이다. 집단적 무의식은 오랜 옛날부터 집단, 민족, 인류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잠재해 온 것으로 신화적 체험의 토대이자 의식 생활의 뿌리인 동시에 원천이다.

민족의식을 예로 들어보자. 민족의식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성장하면서 가지게 되는 것일까? 융에 따르면 민족의식은 타고나는 집단적 무의식이다. 민족의식은 조상들의 경험과 의식이 응축한 것으로 마음속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민족의식은 우리가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할 때 행동과 생각의 원천이 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길거리 응원은 융의 시각에서 볼 때 집단적 무의식의 표출이다. 그 경우 집단적 무의식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즉, 집단적 무의식은 집단의 에너지를 승화하여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집단적 무의식의 표출은 부정적 의미 또한 가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히틀러 정권의 반유대주의이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선민의식을 내세워 유대인을 탄압하였다. 그런 점에서 융의 집단적 무의식 이론은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새로운 신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융은 성직자 가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따라서 융이 종교와 자신이 연구한 심리학을 연결시키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관심에서 『심리학과 종교』를 발표하였다. 융은 이 책에서 자신의 집단적 무의식 이론을 적용하여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융은 자신의 책이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심리학에 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종교현상은 매우 중요한 심리학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만큼 나는 이 주제를 순전히 경험론적 관점에서 다룬다……나는 의사이며 신경질환 전문의이다. 따라서 나의 출발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종교적 인간의 심리학이다. 즉, 자신과 자신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인간들의 심리학이다.

– 융, 『심리학과 종교』

 

융은 자신의 환자가 꾼 꿈에 대해 해석하였다. 환자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지식인이었는데 신경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하루는 환자가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환자는 극장 같은 곳에 갔다. 극장 벽에는 버나드의 쇼가 공연될 것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 무대 벽에는 ‘이것은 가톨릭교회다. 주님의 도구라고 느끼는 사람은 들어와도 좋다.’고 쓰여 있었다. 개신교 신자인 친구와 얘기를 하는데, 교회 벽에는 ‘주님은 언어를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다.’라고 쓰인 교황 명의의 격문이 붙어 있었다. 교회에 들어가니 내부는 이슬람교의 교당과 비슷했다. 그때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이젠 아무 방도가 없네요.”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합창이 나오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한 사제가 말했다. “부차적인 유흥이 공식적으로 인정됩니다. 우리는 금욕주의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융은 환자의 꿈을 해석하면서 당대의 종교적 현실과 연관 지어 설명하였다. 교회는 극장과 같은 곳이 되었다. 대중가요가 나오고 축제가 벌어진다. 사제는 금욕주의에 반대한다고 한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의 상황이 마찬가지이다. 환자는 이런 종교적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꿈속에 한 여인이 나타나 “이제 아무 방도가 없네요.”라고 외친 것이다. 환자는 지식인이지만 자신의 철학으로는 이런 상황을 이겨나갈 수 없다. 그래서 신경증이 생긴 것이다. 융은 이 환자의 고통이 당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융은 종교가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으로서 인간의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종교가 세속화하면서 종교에서 제시하는 신의 이미지는 인간이 무의식에서 추구하는 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게 되었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모든 분열적인 것을 통합시켜 주는 신의 이미지를 요청한다. 그런데 교회는 인간의 요청에 맞는 신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내적 분열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융은 신의 이미지를 당대 사회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융은 연금술의 전통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융이 보기에 연금술은 단지 물질적인 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고 인간 정신의 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즉, 융은 연금술이 종교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신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운동으로 보았다. 융이 연금술에 주목한 이유는 새로운 신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종교적 믿음을 회복하면 인간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이 치료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의 이론은 종교 심리학의 기초를 놓았고, 정신 의학은 물론 종교와 문학 관련 분야의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1. 미술작품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라

파노프스키 시각예술에서의 의미

 

아이콘 해석가

 

미술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술시간 숙제라서 마지못해 보고 있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림에 대해 안다며 원근법 운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흉내 내어 “저 사람이 예수님의 애인이야.”라며 소곤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원시부족 주민이 그 그림을 봤다면? 아마도 그 부족민은 신나게 먹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최후의 만찬>의 주제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성서를 공부한 사람이 있다면 「요한복음」 13장 21절 이하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은 성서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최후의 만찬>은 성서의 내용을 재현하였기 때문에 칭송을 받는 것도 아니다.

파노프스키(E. Panofsky, 1892~1968)는 하나의 그림의 주제 혹은 의미를 알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최후의 만찬>처럼 ‘역사적 사건’이라 불릴만한 그림의 주제에는 철학, 역사학, 문학, 미학, 고고학, 문화학 등 다방면의 인문학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파노프스키는 미술작품을 선, 면, 원근법 등과 같은 형식이 아니라 그 미술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인문학적 내용을 보라고 말한다.

파노프스키는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중세 역사 연구자인 빌헬름 푀게의 강의를 듣고 전공을 미술사학으로 바꾸었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 함부르크 대학에서 강의하다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파노프스키는 미술사학을 뿌리내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도상해석학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도상해석학이란 아이콘(icon)과 로지(logy)를 합성하여 만든 개념이다.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그림을 뜻하는 에이콘(eikon)에서 유래한 말이다. 로지는 이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에서 온 말로 해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도상해석학이란 미술작품을 해석하는 학문을 말한다.

파노프스키는 1955년에 대표작 『시각예술에서의 의미』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한 권의 단행본을 염두에 두고 쓰여 진 책이 아니다. 1921년부터 1953년까지 발표한 주요 논문 10편을 개정하여 모아놓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파노프스키의 30년 연구의 성과가 담겨 있다. 파노프스키는 이 책의 발간 목적을 ‘일관성보다는 다양성’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 책에서 문화학, 미학, 고고학, 문학 등에 관한 파노프스키의 해박한 식견을 알 수 있다.

 

도자기는 술병이다

 

그러면 파노프스키가 주장하는 미술사학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미술사 서적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미술사 서적은 ‘전공서적’으로 분류되고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읽기가 쉽지 않다. 미술사에서 소개하는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을 예로 들어보자. ‘바로크 양식은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양식의 형식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벽 외면에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장식을 붙인 화려한 예술양식이다.’라고 설명하며 대표적인 건축물 사진을 실어놓는다. 그리고 로코코 양식에 대해서는 ‘바로크 양식보다 우아하고 경쾌하며 아라베스크 양식과 결합 등 이국적 풍취가 두드러졌다’며 대표적 건축물의 사진을 실어놓는다. 웬만한 미술-건축적 지식이 없으면 설명을 이해할 수 없고, 두 양식의 건축물 사진을 비교해 보아도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없다.

파노프스키는 형식과 양식 중심의 미술사를 거부하고 인문학으로서 미술사학을 하자고 주장한다. 파노프스키는 책 제목에서 미술이라 하지 않고 ‘시각예술’이라고 한데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작품의 정의를 넓힌다. 미술작품에 대한 파노프스키의 설명을 들어보자.

 

미술작품이 언제나 즐거움을 목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미적인 경험을 목적으로 창작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목적은 쾌락이다.”라는 푸생의 말은 가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초기의 문필가들은 예술이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유용한 쓰임새도 있다고 항상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작품에는 언제나 미적 의미가 담겨 있다. 미술작품은 실제적인 목적에 기여하든 그렇지 않든, 또한 그 미술작품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미적으로 체험될 것을 요구받는다.

– 파노프스키, 『시각예술에서의 의미』

 

그래서 파노프스키는 미술작품을 ‘미적으로 경험될 것을 요구받는 인조물’이라고 정의한다. 인조물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편지를 예로 들어보자. 편지는 의사전달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한 것이지만, 형식만 조금 갖추면 서예작품이 될 수도 있고 문학이나 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어디까지 실용영역이고 어디부터 예술영역일까? 오늘날 국보로 대접받으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는 실용적 목적의 술병이었다.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가져다놓고 <샘>이란 미술작품이라며 전시하였다. 파노프스키는 실용영역이 어디에서 끝나고 예술영역이 어디부터 시작되는지는 오직 창작자의 ‘지향’, 즉 의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파노프스키는 창작자들의 ‘지향’이 시대와 환경의 기준에 제약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미술작품을 이해하려면 창작자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를 알아야 한다. 한 시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역사학, 문학, 고고학 등 인문학에 의해 이루어진다. 파노프스키는 인문학의 성과를 가져다 창작자의 지향을 연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노프스키는 미술사학이 인문학적 조사와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파노프스키에게 미술사학은 인문학이다. 미술사학의 연구대상은 다른 인문학의 연구대상을 다르다. 파노프스키는 1471년의 제단화를 예로 든다. 제단화와 함께 그 그림을 거래한 계약서가 발견되었다. 미술사학의 입장에서는 제단화가 연구의 대상, 즉 1차 자료이고, 계약서는 연구의 수단, 즉 2차 자료이다. 그러나 고문헌학자나 법률사학자에게는 계약서가 1차 자료, 그림이 2차 자료가 된다.

 

미술사가는 감정사가 아니다

 

다음으로 파노프스키가 주장하는 도상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외국에 갔을 때 공항에 그 나라 사람이 마중 나온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우리를 보자 손을 흔들었다. 그 동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이다. 우리는 그 동작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의미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손 흔드는 동작이 반가움의 표시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형식에서 직접 알 수 있는 의미를 파노프스키는 일차적 의미 혹은 자연적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일차적 의미를 해석하는 일을 전(前)-도상학 기술(記述)이라고 불렀다. 미술작품에 대한 전-도상학 기술은 미술양식의 역사에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손 흔드는 동작이 인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인사법은 머리를 숙이는 것이므로 손 흔드는 동작을 인사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손 흔드는 게 그 나라의 인사법이었다. 즉, 손 흔드는 동작의 또 다른 의미는 인사였다. 그 의미는 그 나라의 관습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따라서 직접적,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를 가리켜 파노프스키는 이차적 의미 혹은 관습적 의미라고 하였다. 이차적 의미를 알려면 그 나라의 관습과 문화적 전통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차적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경험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이다. 하다못해 관광안내책자라도 한 권 읽어보아야 한다. 파노프스키는 이차적 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도상학적 분석이라고 불렀다. 미술작품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은 관련된 문헌 자료의 조사와 연구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마중 나온 사람은 손 흔드는 동작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 동작에는 그 사람의 나이, 직업, 교육 정도 등이 담겨 있다. 우리가 그 동작에서 그 사람의 개성까지 읽어내려면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 나라의 사회문화적 배경부터 지적 전통까지 전반적인 정보를 알고 해석해야 한다. 파노프스키는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는 의미를 본질적 의미라고 불렀다. 이 본질적 의미를 발견해내는 학문이 도상해석학이다. 파노프스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예로 들어 도상해석학의 목적을 설명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찬 식탁 둘레에 열세 명의 사람들을 배치하고 그 모습이 ‘최후의 만찬’을 나타낸다고 언급한 것에 우리의 생각을 한정하면, 우리는 그 생각에 따라 그 작품을 다루고 구도를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품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개성 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기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무수히 많은 다양한 징후를 드러낸 작품으로 다루고, 그 작품의 구도 속에서 그 ‘어떤 것’에 대한 상징을 찾아내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징후와 상징의 발견과 해석이 도상해석학의 목적이다.

– 파노프스키, 『시각에술에서의 의미』

 

당연히 도상해석을 위해 광범위한 인물학적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미술사가는 미술작품의 감정사가 아니라 인문학자이다.

 

 

 

 

 

 

 

 

 

 

 

  1.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만든다

톰슨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

 

행동하는 지식인

 

저서의 내용만큼 삶 자체도 중요한 저자들이 많다. 톰슨(E. Thompson, 1924~1993)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톰슨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 톰슨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톰슨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톰슨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독일과 이탈이아에서 독재정권이 출현하였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케임브리지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던 톰슨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입대를 하였다. 톰슨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학업을 마친 후 자원봉사자로 유고슬라비아의 철도건설에 참여하였다. 그곳에서 톰슨은 인민 전선 운동에 동조하였지만 강경파 공산주의자들과 의견이 대립하였다. 유고에서의 경험은 톰슨이 사회운동을 하고 역사를 서술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톰슨은 요크셔의 리즈대학에서 성인교육 프로그램 강사직을 맡아 10년간 노동자 교육운동을 하였다.

톰슨은 대학에서 역사 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영국 공산당 역사가 모임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모임에는 모리스 돕, 홉스 봄, 로드니 힐튼, 크리스토퍼 힐 등 젊은 역사가들이 참여하였다. 이 모임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은 훗날 영국의 진보적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1956년 헝가리 사태가 일어나자 톰슨은 영국 공산당을 탈당하였다. 공산당이 헝가리 국민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헝가리 정부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톰슨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 1960년에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를 창간하였다. ‘비타협적 현실주의’를 내건 <뉴 레프트 리뷰>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잡지이다. <뉴 레프트 리뷰>는 자본주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유럽의 다양한 시민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진보적 운동의 새로운 노선을 소개하여 진보적 지식인의 각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대에 영국에서는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 심해졌다.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고, 이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취업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톰슨은 노동자 교육운동을 하며 노동 계급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 연구 성과를 모아 1963년에 발간한 책이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이다.

1970년대 들어 톰슨은 유럽 반핵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반핵 운동은 당대에 선구적인 것이었다. 당대에 냉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핵무기를 사용한 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었다. 톰슨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위한 운동을 제창하였다. 톰슨은 죽는 날까지 민주주의와 사회진보 그리고 평화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역사의 패배자들에 대한 찬가

 

톰슨의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을 이해하려면 ‘계급’이란 말을 알 필요가 있다. 계급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사회에서 신분, 재산, 직업 따위가 비슷한 사람들로 형성되는 집단 또는 그렇게 나뉜 사회적 지위’이다. 그러나 톰슨은 계급 개념을 정태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톰슨은 계급의식에 대해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하고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톰슨은 계급을 의식을 가진 집단으로 본다. 그래서 톰슨은 계급을 스스로 형성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은 노동 계급이 영국에서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 책이다. 톰슨은 이 책에서 다른 역사가와 다른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톰슨은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을 쓴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난한 양말 제조공, 러다이트 운동에 가담한 재단공, 시대에 뒤떨어진 수직공, ‘유토피아적’인 장인 등을 후손들의 지나친 멸시에서 구해내려고 한다……그들의 소망은 그들 자신의 경험에서 볼 때 타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았을 때 선고받았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희생자로 남아 있다.

– 톰슨,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노동 계급의 역사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사로 그려낸다. 그러나 톰슨은 노동 계급 형성에서 몰락하는 수공노동자의 역할에 주목한다.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대 역행적인 운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톰슨은 러다이트 운동이 노동 계급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톰슨은 1790년대에 생겨난 ‘런던교신협회’로부터 시작했다. 런던교신협회는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장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회원으로 하는 단체였다. 런던교신협회의 목적은 보통선거권 운동이었다. 협회는 가입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이성을 가지고 있고 범죄로 자격을 상실하지 않은 모든 성인이 의원선출을 위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까?”

1794년 5월 영국 정부는 런던교신협회에 대해 전격적인 탄압을 하였다. 협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고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보통선거권 운동은 17세기 영국 혁명기에 이미 제기된 것으로 런던교신협회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부가 탄압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톰슨은 정부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불안해하며 수공장인들의 세계에 불온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에도 런던교신협회를 비롯한 수공장인들의 단체들은 활동을 계속했다. 톰슨은 이들 단체들이 꺾이지 않고 활동한 이유를 반 국교도 전통, 민중 항의의 전통, 오랜 투쟁을 통해 획득한 자유의 전통에서 찾았다. 그리고 톰슨은 토마스 페인이 지은 『인간의 권리』가 수공장인들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고 보았다. 민중을 위한 대의제 정부의 가능성을 주장한 이 책은 1792년에 출판된 이후 불과 2년 만에 20만 부 이상이 팔렸다.

 

러다이트 운동은 분수령이다

 

톰슨은 영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수공장인의 전통이 직조공들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직조공들은 모임에서 지방뉴스와 가십거리를 소재로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일상적인 것을 두고 무엇이 옳은지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독학으로 교양을 쌓고, 생물학과 수학, 음악과 지질학에 관한 소양을 기르기도 하였다. 또한 직조공들은 기하학을 가르치고 미적분학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직조공들의 의식과 교양은 이후 러다이트 운동, 차티스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1803년 2월 데스파드 육군 대령과 그 동료 6명이 국가반란죄로 사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반정부적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톰슨은 이들 반정부적 단체들이 산발적으로 집단항의를 하다가 러다이트 운동으로 폭발하였다고 보았다, 톰슨이 볼 때 러다이트 운동을 주도한 조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집단적 항의가 공존하였다. 하나는 평화적으로 의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톰슨은 1811년 3월부터 그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된 노팅엄의 편물공들의 러다이트 운동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편물공들은 처음에 양말 제조업자들의 사취와 협박을 근절하는 법안을 만들기 위한 청원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법 제정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기계 파괴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네드 러드’의 명의로 기계 파괴를 요구하는 협박장이 공장주에게 날아갔다. 공장주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예고된 날에 공장을 습격하여 기계를 파괴하였다. 협박장의 명의가 네드 러드였기 때문에 기계 파괴 운동은 러다이트 운동이라 불렸다. 러다이트 운동은 노팅엄과 그 인근 지역으로 삽시간에 번져갔다. 요크셔의 재단공, 랭거셔의 방적공들도 러다이트 운동에 가담하였다. 노팅엄에서만 한 해에 1,000대가 넘는 기계가 파괴되었다. 의회는 서둘러 기계 파괴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수많은 러다이트 운동의 지도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면 러다이트 운동은 시대 역행적인 면만 있는가? 톰슨은 시대 역행적인 면뿐만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면도 있다고 하였다. 즉, 톰슨은 러다이트 운동이 “온정주의적 공동체에서 민주적 공동체로 이행”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톰슨은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리는 이 시기를 하나의 분수령으로 보아야 한다. 그 한 물줄기는 튜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른 한 물줄기는 이후 100년 동안 공장법 제정을 향해 흘러갔다. 러다이트 운동은 최후의 길드조합원의 면모를 가짐과 동시에 10시간 노동시간 운동에 이르는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방향 모두에는 자유방임의 정치경제와 도덕에 대항하는 대안적 정치경제와 도덕이 있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된 수십 년 동안 노동자들은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비열한 도그마, 즉 무책임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이라는 도그마의 공격을 받았다. 수세대에 걸쳐 선대제 노동자들은 그런 공격을 받아 죽어갔다.

– 톰슨,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

 

톰슨의 이런 평가 속에는 이윤추구가 인간적인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러다이트 운동 이후 1820년대에 결사를 금지한 법안이 폐지되면서 무수히 많은 단체, 노동조합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동 계급이 형성되었다. 톰슨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1790년에는 노동자가 존재했고, 1832년에는 노동자 계급이 존재했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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