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크 『예종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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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일 사상이 위험하다

하예크 예종에의 길

 

나의 책은 정치서적이다

수년 동안 나는 개인주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 시대의 지배적 사고인 집단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탐문해왔다. 수년 동안 가장 자주 접한 대답은 지금 서문을 쓰는 영광을 얻게 된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하예크 교수의 뛰어나고도 힘이 넘치는 이 글은 특히 전쟁 중에 군대에 있었던 청춘남녀들에게 계시를 주는 것이었다. 직접 겪은 최근의 경험으로 개인의 자유가 지니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주의 조직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집단주의에 대한 하예크의 예언은 단순히 가상적 가능성이 아니라 군대에서 그들이 직접 경험한 눈에 보이는 현실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예종에의 길』 출판 50주년을 기념하는 서문에서 하예크(F. Hayek, 1899~1992)를 찬양했다. 전쟁을 언급한 이유는 이 책이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4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은 이 책이 있어 집단주의를 이길 수 있었다고 했다. 집단주의에는 사회주의는 물론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하여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모든 이념을 포함한다. 하예크의 집단주의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실제로는 서유럽에서 등장하고 있던 복지국가 이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복지국가는 결국 국민을 노예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게 하예크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예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공부한 후 영국과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예크는 영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예종에의 길』을 발표하였다. 하예크는 서문에서 이 책이 정치서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한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다

 

하예크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하예크가 『예종에의 길』를 집필할 당시까지 역사를 보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각국의 독점자본이 식민지 쟁탈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참화였다. 19세기 말에 산업과 금융을 장악한 독점자본은 값싼 원료와 노동력, 그리고 광대한 시장을 찾았고, 유럽 각국은 자국 독점자본의 이해에 따라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세계대전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일어났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하며 성장하여,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조직이 각국에서 생겨났다.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대전으로 형성된 정세를 활용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주축으로 한 무장봉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였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독일,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도 무장봉기가 일어났지만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독점자본의 탐욕에 의한 참화를 겪은 유럽 각국의 국민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독일에서 1918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게 된 것 역시 독일 국민들의 사회주의적 요구의 표현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운명이 끝나는 것으로 비쳐졌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경제는 파멸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대다수 국민들은 실직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엄청난 예산을 퍼부으며 경기회복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자생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또 한 차례의 대 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공황 당시 가장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의무를 지고 있던 상황에서 대공황이 밀어닥쳤다. 국민은 절망 상태에 빠졌는데 정치집단들은 무기력하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를 내걸고 집권에 성공하였다. 히틀러 정권은 일체의 배상의무를 거절하여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대공황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정권교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처칠의 보수당 정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쟁 직후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복지국가를 내건 정당들이 속속 정권을 잡았다.

하예크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를 구출하고자 하였다. 하예크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만 의미하지 않는다. 하예크는 경제적 자유 없이 정치적 자유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예크의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였다. 하예크는 당시의 이념적 상황을 영국의 사상인 자유주의가 쇠퇴하고 독일에서 나온 사회주의가 유럽으로 전파되고 있다고 보았다.

 

사상의 조류에 나타난 변화가 사상이 전파되었던 공간의 궤적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백 년 넘게 영국의 사상이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영국에서 성취된 ‘자유의 지배’가 전 세계로 전파될 것처럼 보였다. 1870년 무렵 이 사상이 가장 동쪽까지 전파되었던 것 같다. 그후 자유주의 사상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여러 다른 사상들이 동쪽으로부터 전진해오기 시작하여, 영국은 사상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사상의 수입자가 되었다. 그 다음 60년간은 독일이 중심지가 되어 20세기에 세상을 지배하게 될 사상들이 동서로 퍼져나갔다.

– 하예크, 『예종에의 길』

 

국가의 개입은 억압이다

 

하예크는 영국과 독일을 대비하였다. 당시 독일은 독재국가였고 전쟁을 일으킨 국가이기 때문에, 영국과 독일을 선과 악으로 대비함으로써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예크는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것은 사회주의자의 지원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독재로 귀결된다는 지론을 입증하기 위해 그런 논리를 폈다.

 

국가사회주의의 교리는 사상의 오랜 진화과정, 즉 독일을 넘어선 곳까지 큰 영향을 미쳤던 사상가들이 참여했던 과정의 절정이다……그렇다면 반동적 소수가 지녔던 이 사상이 독일인 대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의 진전에 대한 자본가의 반동이 그 원인이라고 믿기 바라지만, 이것은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 이와 반대로 이 사상이 권력을 잡도록 한 지지는 정확하게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나왔다. 이 사상이 권력을 얻도록 도움을 준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반대로 강력한 부르주아지의 부재였다.

– 하예크, 『예종에의 길』

 

하예크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헤겔, 피히테, 마르크스, 로트베르투스, 라살, 좀바르트, 플렝게, 렌슈, 슈펭글러, 브루크 등 독일의 저명한 사상가들을 거론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와 관련 없는 학자는 민족주의자이므로 그들로부터 국가사회주의의 사상적 원천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예크는 자기주장의 가장 중요한 논거, 즉 당대의 사회주의 세력이 히틀러 정권을 지원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하예크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다. 『예종에의 길』에서도 자유주의보다 개인주의가 보다 빈번하게 등장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예크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 혹은 자기중심주의로 오해를 받아왔다며 개인주의의 기본 원칙을 밝힌다.

 

개인주의는 논쟁의 여지도 없는 기본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가치 척도 속에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것의 일부분만 포함할 수 있다. 또 엄격하게 말하면 가치의 척도는 각 개인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들마다 서로 다르고, 또 불가피하게 서로 상충될 때가 많다. 이 사실로부터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개인의 가치나 선호의 영역 안에서는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며, 다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고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 개인주의의 입장의 본질이다……우리는 합의가 존재하는 영역에 한정하여 자발적 합의가 국가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분야에서도 직접적 통제를 행사하게 되면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공동행위의 영역을 무한정 확장하게 되면 개인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도 자유롭게 남겨질 수 없다.

– 하예크, 『예종에의 길』

 

하예크는 국가의 개입 혹은 간섭에 반대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일 뿐이고, 개인을 국가에 예속시켜 개인을 노예의 길로 가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예크는 개인의 자유, 시장경제, 사적 소유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되풀이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 밀 등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중세의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를 이룩하려는 진보적 방향에서 자유주의를 주장했다면, 하예크는 공공의 이익과 복지라는 시대적 흐름을 저지하려는 보수주의적 자유주의를 주장했을 뿐이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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