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베버_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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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의 종교적 베일을 벗기다
_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자본주의 ‘정신’

합리화 즉 합리적 자본주의는 왜 유독 서구에서 성립되었을까, 합리적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갖게 되었을까?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자본주의가 활성화된 근대 유럽에서 기업가, 자본가, 고급 숙련 노동자와 같은 핵심 멤버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미 16세기 초, 자본주의가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의 중심지에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비중이 높았다. 베버는 이러한 사실에서 출발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연결 관계를 밝힌다. 이 책은 1904년과 1905년에 발간된 논문이다. 1920년 베버의 사망 직후 재출간되어 서구 지성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은 먼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흔히 자본주의 정신을 개인의 영리 추구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베버가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는 도덕과 무관한 개인적 이득 추구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의무로서의 직업에 대한 엄격한 책임에 기초를 두었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정신을 정리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생각을 보라. 프랭클린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중심적 원리의 겉치레 따위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윤리’의 ‘최고선’은 모든 향락을 엄격히 배제하고 꾸준히 돈을 벌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노력은 행복주의나 쾌락주의 등의 관점과 전혀 상관없다. 이 노력은 순수한 자기목적이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이나 ‘이익’과 대립하여 완전히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영리는 인생의 목적으로 간주되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베버에 따르면, 정당한 경제적 활동을 통해 부를 획득하려는 헌신이 헌신을 통해 얻어진 소득을 개인적 향락에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된다.

 

하늘에서 받은 직업, 천직(天職)

직업이란 노동력을 팔아 소득을 얻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하의 개인은 자신의 직업 활동의 의무를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갑은 갑의 직업의무를, 을은 을의 직업의무를 갖는다. 이러한 의무는 우리의 삶을 어떠한 프레임 안에 짜 넣는다. 베버는 말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은 기성의 거대한 질서세계라 할 수 있다.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속한다. 따라서 사람은 사실상 변혁하기 어려운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의 철창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셈이다. 이러한 질서세계는 시장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의 경제행위에 대하여 일정한 규범을 강요한다. 오랫동안 이 규범을 거스르며 행동하는 제조업자는 반드시 경제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대규모 기업으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이른바 생산의 합리적 재조직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베버가 보기에 그러한 변화는 특정 기업에 갑자기 자본이 유입되었다는 사실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보다는 기업가적인 자본주의 정신이 새로 도입됨으로써 나타난 결과이다. 따라서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를 구별 짓는 지배적인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엄밀한 계수적 예측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경제적 성과를 목표 삼아 계획적으로 냉철하게 실행해 가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근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농민의 생활이나, 수공업자의 특권적인 낡은 관습이나, 정치상의 권리라든가 비합리적인 투기를 생명으로 여기던 ‘모험상인의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의무이자 미덕인 천직(天職)을 선택하여 천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버는 “이 특이한 형태의 합리적 사고는 어디에서 태어난 지적 산물인가? 천직과 헌신적 노동이라는 관념은 어디에서 도래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천직(calling)’의 개념은 루터의 종교 개혁 때 비로소 나타났다. 중세나 고대에 천직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직이란 일상생활에서 행위 규범을 통하여 신에 대한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직은 현세적인 것을 거부하는 중세의 은둔적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목적 추구를 강조하도록 해 주었다. 베버는 말했다.

우리가 생활상의 지위 및 일정한 노동 영역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천직’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데,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민족에는 반드시 그런 표현이 존재한다……말뜻과 마찬가지로 그 사상도 종교개혁의 새로운 산물이었다. 그렇지만 천직 관념에 포함되어 있는 세속적 일상노동의 존중이라는 사상의 싹이 중세에 이미, 아니 고대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세속적 직업 속에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가장 도덕적인 실천으로 인식되었다. 그에 따라 세속적 일상노동은 종교 의례와 같이 받아 들여졌다. 그렇게 노동은 천직이 되었던 것이다. 루터는 세속적 의무에 충실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루터의 입장은 자본주의와 항상 친화적인 것은 아니었다. 루터의 직업 개념은 종교 개혁 후기의 여러 종파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을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칼뱅주의가 있다.

 

개인화된 인간의 출현

칼뱅주의는 천직의 개념을 보다 세련되게 승화시킨다. 칼뱅주의는 16-17세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격렬한 정치적, 문화적 투쟁을 수행하고 탄압받았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순수성에 있어서도 남다른 종파라 할 수 있다. 칼뱅주의의 교리적 특성은 예정설과 금욕주의다. 예정설은 개인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의 운명은 하나님의 의지로 미리 정해져 있다. 즉, 이 세계의 일과 인간 생활의 모든 일이 신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이다. 신의 영역에 대한 불가지성과 개인의 무기력함 속에서 종교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그간 숭배되어 온 설교자, 성례, 교회에 대한 의존정도가 낮아진다. 그래서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고립된 개인, 종교의 신비감이 사라져 개인화된 사람이 드러나게 된다. 베버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의 결단은 절대불변이므로 신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는 그것을 잃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교설이, 그 장대한 귀결에 몸을 의지한 후세의 마음에 필연적으로 심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으로 개인의 유례없는 내면적 고독감이었다. 종교개혁 시대 사람들에게 인생의 결정적인 문제였던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 인간은 태곳적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을 향해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결론이 난 것이다.
–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칼뱅주의자들은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나의 운명은 저주받은 것인지 구원받은 것인지 불확실성에 방황할 것이다. 칼뱅교도들은 이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현세적 삶의 영광을 추구한다. 신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현실의 삶을 추구한다. 신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유효한 삶이고 그러한 신앙이 유효한 신앙인 것이다. 죽은 후의 구원을 목표로 살지만 살아서는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성과 속이 뒤엉킨 삶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신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든 시간과 행위를 조직적으로 합리화하고자 했다. 끊임없는 자기억제와 도덕적 반성은 “금욕주의”로 귀결된다. 베버는 이렇게 설명했다. “칼뱅주의에서는 ‘복음적 권고’가 사라진 결과 금욕이 순수하게 세속적인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발생했다……칼뱅주의는 발전 과정에 어떤 적극적인 요소를 첨가했다. 바로 세속적인 직업생활에서 신앙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종교적인 삶을 원하는,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금욕을 추구할 적극적인 동인을 제공했다.”

금욕주의에 따르면 시간의 낭비는 가장 큰 죄가 된다. 또한 노동은 금욕의 수단이자, 삶의 자기 목적이 된다. 부의 축적은 그것이 나태한 사치의 유혹이 되는 한 도덕적으로 비난받게 된다. 그러나 물질적 이윤이 자기 천직을 금욕적으로 추구한 결과라면, 그것은 용인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권장되기까지 한다. 기업가의 활동은 정당화되고 부를 추구하는 것은 신의 섭리이자 명령이 되는 것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영주들의 귀족적인 도덕적 해이나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금욕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둘 다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반대로 각성한 시민적인 ‘자립형 인간’은 대단한 윤리적 칭송을 받았다. ‘신은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는 말이 신의 인도에 따라 성공한 성도들에게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말이었다.
–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향락에 반대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죄악시 되었던 재화획득에 날개를 달아준다. 이제 이익추구는 합법화되고 신의 축복이 된다. 과시적 사치는 배척된다. 바야흐로 합리적 소비의 시대가 된 것이다. 합리적으로 계획된 생활은 과시적 허세를 배제하고 재투자하도록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회조직을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재조직하였다. 정부, 학교, 군대, 병원, 회사, 교회 등은 합리적 질서에 입각하여 운영된다. 합리적 시스템이란 결국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이다. 여기에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와 가치가 채색되어 사고를 지배하고 작동시킨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베버는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불합리한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 베버는 이곳에 드리워진 종교적, 윤리적 베일을 벗어내고 그야말로 불합리한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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