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책임의 원리』

0
290
  1. 미래를 전망하지 마라

요나스 『책임의 원리』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

영화 <매트릭스>에는 두 개의 세계가 나온다. 한쪽에는 말끔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초현대식 집과 건물에서 살고 일하며 근사한 식사를 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세계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폐허더미와 같은 곳의 동굴에 숨어 살며 멀건 죽을 먹고 기계에 쫓겨 다니는 세계가 있다. 우리의 미래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우리의 미래세계를 놓고 유토피아가 될 것이냐,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냐 하는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요나스(H. Jonas, 1903~1993)는 1979년에 발표한 『책임의 원리』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요나스는 1903에 독일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히틀러가 집권하여 유대인을 탄압하자 영국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군대에 입대하여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가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6살 때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는 전쟁에 참여한 후 캐나다로 이주하여 캐나다와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7년 『책임의 원리』로 독일 서적판매조합이 주는 평화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독일로 돌아와 말년을 보냈다.

요나스는 현상학자인 후설,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에게 배우고 실존주의 신학자인 볼트만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요나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와 관련한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요나스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책임의 원리』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요나스는 윤리학이 ‘책임’의 개념을 소홀히 다루어왔음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특히 기술문명시대에 자연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책임의 원리』에는 ‘기술문명시대의 생태학적 윤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프로메테우스, 쇠사슬에서 풀려나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썼다. “프로메테우스는 과학을 통해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힘을 부여받고, 경제를 통해 끊임없는 동력을 부여받아 마침내 쇠사슬에서 풀려났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권력이 인간에게 불행이 되지 않도록 자발적인 통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이 책은 근대 기술의 약속이 위협으로 반전되거나 아니면 위협이 근대 기술의 약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프로메테우스란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달해줌으로써 인류 문명이 일어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코카서스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에는 간이 다시 회복되는 형벌을 받았다. 요나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에 비유하였다.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즉 자유로워진 인간에게 오히려 새로운 윤리학이 요구된다는 게 요나스의 주장이다.

왜 새로운 윤리학이 요구되는가?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꿈에 그리던 유토피아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빼앗고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가장 심각한 현상이라 얘기되는 지구온난화를 보자. 유엔 산하 기후변화위원회는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2080년에 지구의 평균 온도가 3도 이상 올라갈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지구상 생물을 대부분 멸종시켰던 빙하시대의 평균 온도가 지금보다 약 4도 정도 낮은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3도 이상 평균 기온이 올라간다는 것은 커다란 재앙의 예고이다. 바닷가 지역의 30% 이상이 바닷물에 잠기고, 한쪽 지역에서는 홍수로 다른 쪽 지역에서는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2050년에 평균 기온이 3도 이상 올라갈 것이라 예고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숭배하고 자연을 남용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그래서 요나스는 말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며, 이제까지의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

공포의 발견

요나스는 전통적인 윤리학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윤리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선(善)의 문제만 다루었다고 하였다. 요나스는 전통적인 윤리학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네 자녀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라. 네 존재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실현하라. 네 개인의 행복을 공공의 이익에 예속시켜라. 바르게 살지 않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거짓말을 하지마라,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 네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하라.”

요나스는 전통적인 윤리학을 ‘인간중심주의’라고 하였다. 즉, 전통적인 윤리학이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요나스는 이제 관심을 자연으로 확장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에 맞는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자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던 윤리학을 자연까지를 포함한 윤리학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요나스는 새로운 윤리학을 ‘생태 윤리학’이라 하였다. 생태 윤리학은 ‘지금 여기’에 사는 인간만을 초점으로 했던 전통적인 윤리학을 넘어 지금 여기의 인간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의 인간에게도 방향을 제시하는 윤리학이다. 요나스는 생태 윤리학의 핵심개념으로 ‘책임’을 내세웠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의 제목을 ‘책임의 원리’라 하였다.

요나스는 “왜 이제까지 책임의 개념이 윤리학의 중심에 서지 못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요나스가 말하는 ‘책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책임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요나스는 미래에 대한 책임까지 덧붙인다. 즉, 지금 자신이 한 행위로 인해 나타나게 될 미래의 결과까지도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요나스의 이런 주장은 미래세대에 대한 존중이다. 최근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미래세대에 맡기자.’는 주장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지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미래세대로 넘기자는 것은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미래세대에 대한 현세대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나스의 책임은 인간과 인간, 현세대와 미래세대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책임을 포괄한다. 그래서 요나스는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려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불행에 더 주의를 기울이자고 한다. 요나스는 ‘공포의 발견술’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공포의 발견술이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아 겸손해야 하고, 미래에 부닥칠 수 있는 불행을 예측하자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책임을

요나스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을 거부한다. 영국의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는 구호를 내세워 과학기술의 발전을 찬양한 이래 인류는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류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을 남용한 결과 심각한 생태적 위기에 처해있다. 요나스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과학기술에 대한 숭배를 더욱 조장하여 지구 생태가 파멸적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우려하였다. 유토피아적 전망에 대한 요나스의 비판은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지은 『희망의 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블로흐는 1949년에 출판된 『희망의 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서양의 철학이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혼란스럽게 되었다고 했다. 블로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블로흐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요나스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한 오히려 희망보다는 위협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오도하지 말고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게 더 낳다. 왜냐하면 새로운 윤리에 입각하여 미래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나스는 미래를 전망하지 말고 미래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책임을 나누자고 말한다. 그래서 새로운 윤리를 정립하자고 했다. 새로운 윤리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포함한다. 요나스의 생태 윤리학의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자연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물음에서 살아있는 것과 우리를 위해 어떤 생명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이 핵심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말할 때, 은하계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지구상의 사물들, 즉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것과 유기체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연은 살아있기 때문에 훼손될 수 있다……우리로 인해 실제적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자연이다. 살아있는 자연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자연, 우리의 존재 자체와 같은 자연, 정신을 보여주는 종류의 자연이 위협받고 있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의견을 남겨 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