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데 『성(聖)과 속(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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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속됨 속에 성스러움이 있다

엘리아데 『성(聖)과 속(俗)』

종교는 인민의 아편일까

교회나 사찰에 가면 무언가 다른 곳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신성한 공간이라 생각하며 옷매무시도 고치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조심하려고 한다. 왜 우리는 교회나 사찰에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까? 교회나 사찰은 무언가 다른 장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느낌상의 문제일까? 엘리아데(M. Eliade, 1907~1986)는 1957년에 발표한 『성과 속』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엘리아데는 1907년에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인도의 캘커타 대학으로 가서 인도 철학과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는 한편, 6개월 동안 히말라야에서 살며 요가를 수련했다. 귀국 후 요가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엘리아데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루마니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엘리아데는 귀국을 포기하고 프랑스, 미국 등에서 가르쳤다. 1961년에 <<종교들의 역사>>라는 국제 간행물을 창간했다. 이 잡지에 실린 논문에서 엘리아데는 이렇게 썼다. “이 학술지 <<종교들의 역사>>는 오늘날 문화적인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종교들에 대한 이해가 그 종교들을 드러내주는 현상들에 대해 문화적 접근을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미 때문이 아니다. 그 종교들에 대한 앎에 기초해서 새로운 휴머니즘이 범세계적인 규모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알아서 휴머니즘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발언은 그 이전에 있었던 종교에 대한 이해와 다르다. 종교는 인간의 개성, 자유로움을 억압하고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서양의 중세시대에 종교는 인간의 개성에 대해 억압했고, 이에 반발해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며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불렀다. 그러면 왜 엘리아데는 종교의 이해가 새로운 휴머니즘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했을까?

두 개의 공간

‘성과 속’이란 제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과 속, 즉 성스러움과 속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란 속됨의 반대라고 했다. 속됨은 우리가 항상 겪는 경험, 즉 일상이고, 성스러움은 독특한 경험, 즉 일상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성스러움과 속됨을 분리하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특별한 경험이라고 느낀다. 성스러움과 속됨은 그런 관계에 있다. 성스러움과 속됨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엘리아데는 같은 현상에 대해 종교적 인간들이 느끼는 것과 비종교적 인간들이 느끼는 것을 비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펴나간다.

엘리아데는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체험을 신빙성 있는 현상으로 간주한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을 성현(聖顯)이라고 했다. 『성과 속』을 쓴 이유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다음의 주제를 밝히는 일이다. 종교적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성스러운 곳에 머무르려고 하는가. 종교적 인간의 총체적 경험이, 종교적 감정을 갖지 않은 인간 혹은 탈 신성화된 세계에서 사는 혹은 살기를 바라는 인간의 경험과 비교해서 어떤 성격을 지니게 되는가.”

먼저,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들이 어떻게 성스러운 공간을 발견하는가, 어떻게 자신이 사는 곳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기게 되는가, 그리고 종교적 인간들의 공간 경험과 비종교적 인간들의 공간 경험은 어떻게 다른가 등을 다룬다. 종교적 인간들은 공간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종교적 인간들에게 공간은 균질하지 않다. 어떤 공간은 다른 공간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낀다. 종교적 인간들이 느끼는 두 개의 공간이란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럽지 않은 공간이다. 종교적 인간들이 느끼는 이런 공간 구분은 원초적이며, 어느 종교에서나 공통적이다.

종교적 인간들이 성스러운 공간을 발견하려는 태도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성스러운 공간의 발견이 종교적 인간들에게 얼마나 깊은 실존적 가치를 가지는가는 명백하다. 미리 존재하는 방향성이 없으면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고 또 성취할 수 없다. 방향성이란 하나의 고정점에 대한 요구이다. 종교적 인간들이 언제나 자신의 거주지를 ‘세계의 중심’으로 고정시키고자 애쓰는 이유이다.”

종교적 인간들은 교회, 성당, 수도원, 사원은 물론 심지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까지도 성스러운 곳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종교적 인간들은 자신과 관계된 모든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이라 생각한다. 엘리아데는 비종교적인 인간들도 공간이 균질하지 않음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곳, 첫사랑의 장소, 처음으로 방문했던 외국의 도시 등을 다른 공간과 다른 특별한 곳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세례식 때 물을 붓는 이유

엘리아데는 다음으로 두 가지 시간에 대해 다룬다. 성스러운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 일상적인 시간이다. 성스러운 시간이란 태초의 창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혹은 부처님의 득도 등등 어떤 종교의 처음이 생겨나는 시간이다. 성스러운 시간은 세속적인 시간과 달리 흘러가지 않고,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축제, 예배, 기도 등을 통해 항시 재현되고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성스러운 시간은 기독교가 생겨난 이후로 달라졌다. 기독교가 생겨나기 이전에 성스러운 시간은 역사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 시간, 즉 신화적 시간이었다. 어떤 시간도 신화 속의 실재가 출현하는 것보다 먼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갑자기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스러운 시간은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성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적 인간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데, 성스러운 시간은 순환적이고 회복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제의(祭儀)라는 수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영원한 신화적 현재이다. 종교적 인간은 역사적 현재라고 불리는 시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원과 동일시할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엘리아데는 비종교적인 인간도 시간에 있어서 단절성과 비 균질성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단조로운 시간과 축제와 놀이의 시간의 구분이 일어난다. 비종교적인 인간도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애인을 만날 때와 노동하거나 권태에 빠져 있을 때 분명히 다른 시간적 리듬을 체험하게 된다.

엘리아데는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도 다룬다. 종교적 인간들에게 자연과 우주는 종교적 가치로 가득 찬 성스러운 공간이다. 우주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은 초자연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종교적 인간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은 언제나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스러운 돌은 그것이 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성스럽기 때문에 숭배된다.”

세례식 때 물을 붓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 인간들은 물을 생명을 가진 것을 최초로 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들은 물이 생명을 부여하였다고 생각한다. 세례식 때 물을 뿌려 줌으로써 성령이 물을 통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은 비종교적인 사람들에게도 신비하고 매력적인 것이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집 안에 정원을 만들고 그것에 감탄한다. 산에 오르다 마주치는 돌탑에 돌을 하나 얹어 놓는다. 이런 것을 엘리아데는 종교적 경험의 퇴화된 기억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를 다룬다. 종교적인 인간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며, 이 세계를 성스럽게 하고, 또 성스러운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절대적 실재인 성스러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종교적 인간은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믿으며, 그 존재에 의해 이 세계가 생겨났음을 믿는다. 그러면서 이 세계 속에서 거룩한 역사를 재현함으로써, 즉 신들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인간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적 인간이 실제 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종교적 인간은 단순한 믿음, 기도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태도는 오랜 옛날부터 지속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엘리아데는 비종교적 인간도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종교적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엘리아데는 비종교적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종교와 신화는 자기가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의 무의식에 ‘은폐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이 근대인들의 삶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속됨 속에 성스러움이 있다고 보았고, 종교를 이해함으로써 근대인들의 삶 속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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