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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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스키를 잘 타는 철학자

죽음! 아, 죽음!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여유롭게 자신들의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판사로서 잘 나가는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자신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했고, 이반 일리치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 사람의 삶에서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잘 묘사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일상적인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 선 인간이 어떠한 변화를 하는지에 대해 탐구했다. 그 탐구의 결과를 1927년에 발표한 책이 『존재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1930년대를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1930년대 이전에, 하이데거는 평온한 삶을 살았다. 소년시절에는 스키에 열광하여 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젊은 시절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하이데거의 강의는 대단히 따분했다고 한다. 목소리의 높낮이 없이 일체의 위트나 농담, 잡소리를 하지 않으면서 문장을 끊듯이 발음하며 강의했다고 하니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 없는 강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제자들과 관계를 매우 원만하였다. 하이데거는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수없이 많은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하이데거의 삶은 달라졌다. 하이데거는 히틀러 정권에 협력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교수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 생활을 포기하고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탐구했듯이 일상적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면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다시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자.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상류층이다. 훌륭한 가문의 예쁜 여자를 만나 결혼하였고, 하인과 하녀를 두어 잡일을 하게 함으로써 불편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이반 일리치의 관심은 온통 고관대작을 받아 승진하는 것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반 일리치의 삶은 행복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삶을 원한다.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는 성공적인 삶,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여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삶. 예전에 어떤 가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이런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하이데거는 질문을 던진다. 학벌, 직장, 배우자가 행복의 요소라 하는데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 빠져있지 않느냐! 아무리 좋은 학벌, 직장, 배우자를 가졌더라도 사람들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때는 따분하고 또 어떤 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런 따분함과 불안감은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경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경고를 무시한다. 일시적인 기분 문제일 뿐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이라는 문제에 부닥친다. 이 문제에 부닥쳐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삶이 과연 행복했던 삶인지를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을 문제 삼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존재를 ‘현존재’라고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현존재일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현존재로서의 삶을 ‘본래적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람들은 ‘비 본래적 삶’을 살아간다. 비 본래적 삶이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비 본래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즐거워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고 판단하는 대로 문학과 예술을 읽고 보고 판단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에 분노한다.”

세계-내-존재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집에서 밥을 먹고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간다. 밖에 나가서는 친구를 만나고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며 살아간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고 때문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말한다. ‘세계-내-존재’란 단순히 세계 안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존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함께 행복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내-존재’의 의미이다.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그 이전의 철학과 갈라선다. 그 이전의 철학은 어떤 존재에 대해 우리가 지각하거나 인식함으로써 알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철학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분리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인식 대상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수많은 가설을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어떤 존재를 지각하거나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일상의 삶에서 서로 관계한다고 말한다. 여기 컵이 있다고 해보자. 근대철학은 컵의 재질은 무엇이고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지에 알려고 하였다. 컵이 재질과 모양을 정확히 알아야 컵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의 생각은 다르다. 컵을 들고 물을 마실 때, 즉 컵과 관계하며 온 몸으로 부딪힐 때 이미 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주체와 대상은 이미 일상의 삶 속에서 서로 부딪혀 관계하고 있다.

그러면 존재 혹은 사물들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을까? 망치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못을 박을 필요가 있을 때 망치를 찾는다. 망치는 못을 박을 목적에 필요한 도구이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승진이라는 목적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가려서 관계를 맺는다.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런 도구적 관계가 일상세계에서 존재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도구적 관계맺음을 비 본래적 삶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세계와 근원적인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두 세계가 분리된 것은 아니다. 일상의 세계에서 망치는 근원적인 세계에서도 망치이다. 그러나 그 망치를 어떻게 대하느냐, 즉 그 망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진다. 망치를 못 박을 때나 쓰는 일회용 도구로 생각하면 함부로 쓰다 버려버릴 것이다. 반면에 망치를 나의 몸의 일부로 생각하면 항상 소중히 다루고 절대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도구적 관계맺음이 일상의 세계이고 내 몸과 같이 관계맺음이 근원적 세계이다.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므로 세계-내-존재인 인간 역시 달라진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세계를 넘어 근원적인 세계로 가자고 한다. 그것은 비 본래적인 삶을 넘어 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

그러면 어떻게 비 본래적인 삶과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결단으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 온갖 유혹을 뿌리치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한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한 생각을 갖는다.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자연적인 사건’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에 직면하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절박한데 주변에서는 ‘자연적 사건’의 하나로 바라본다. 주변의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자기 혼자 죽음이라는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개인을 하이데거는 ‘고독자’라고 하였다. 고독한 개인은 자기를 되돌아보고 세속적 욕망이 아닌 자기가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다. 이제까지 추구해왔던 삶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의 진정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면 본래의 자기를 일깨워주는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하였다. 일상적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일상세계를 넘어서려는 사람만이 양심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양심의 소리란 사회가 제시하는 도덕법칙이 아니다. 그런 도덕법칙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태도는 오히려 일상세계에 매몰된 삶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양심의 소리는 본래의 자기를 일깨워주는 소리이다. 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인간은 내적인 변혁을 이루게 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듣게 되는 양심의 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듣게 되는 양심의 소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든 인간이 본래적 삶을 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현존재’로서의 삶, 즉 자기 본래적인 삶을 살라고 권유한다. 죽음과 같은 절망의 상황에 닥쳐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시 자기를 되돌아보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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