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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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가 신을 죽였는가?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은 죽었다

니체(F.W. Nietzsche, 1844~1900)가 신을 죽였을까?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맨 먼저 신의 죽음을 말한 사람은 니체가 아니라 헤겔이었다. ‘플라톤은 죽었다.’는 주장이야말로 가장 니체적인 선언이 아니었을까? 26살에 집필한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그리스의 비극이 사라지게 된 문명사적 책임을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의 탓으로 돌리면서 이후 일관된 반소크라테스주의, 반플라톤주의 투쟁에 나섰다. 기독교는 대중화된 플라톤주의이다. 유럽의 정신을 노쇠하게 만든 두 주범은 플라톤 이래의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노예 도덕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있어서 ‘신은 죽어야했다.’ 신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신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건 40살이 되던 1883년이었다. 니체는 병을 달고 살았다. 1879년 빈사 상태에서 회복된 후 대학에서 제공한 연금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때 루 살로메에게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보냈다. 그러나 루 살로메는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낙담한 니체는 알프스 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니체는 아무도 없는 고독한 생활을 하며 일생일대의 영감을 떠올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탄생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이라는 독특한 부제가 달려 있다.

신은 어떻게 죽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30살에 산속으로 들어가 십 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마침내 자신의 지혜를 세상에 전파하고자 산을 내려오기로 결심한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한 백발의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에 대해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노인과 헤어진 다음,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구나!”

‘신은 죽었다.’ 이 말은 니체의 가장 유명한 명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은 누구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와 같은 신인가? 아니다. 그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화내고 싸우고 질투하고 탐욕스럽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그보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다. 신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에 살지 않는다. 신은 현실계가 아닌 초월적 이상의 세계에 있다. 그렇지만 신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구현해야 할 세계이며, 신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이고, 신의 가치는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절대적 준거가 된다. 신은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절대가치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절대 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즉, 니체는 영원한 진리,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가 사라졌음을 말하고자 했다. 그런 가치가 사라졌으니 현실에 눈을 돌리자!

신을 죽인 것은 인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을 다시 만들어낸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추악함을 드러내어 신을 죽인다. 인간을 사랑했던 신은 인간의 추악함을 견딜 수 없어 죽는다. 인간은 자신의 추악함을 드러냄으로써 신을 죽이고 또 다른 신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신이라는 권위를 빌려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가진 한계에 신의 권위를 덮어씌워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인다. 신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인간이 위대해졌음을 의미한다.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신을 찾지 않을 정도로 위대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초인(超人)은 어디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원 회귀이다. 산에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먼저 한 설교의 주제는 초인이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초극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이제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다. 너희는 그 위대한 조수의 썰물이 되길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기보다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에게 원숭이란 어떤 것인가? 하나의 웃음거리 혹은 괴로운 수치이다. 초인에겐 인간 또한 바로 그럴 것이다. 하나의 웃음거리 혹은 괴로운 수치인 것이다. 너희는 벌레로부터 인간으로 이르는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너희 내부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이다. 예전에 너희는 원숭이였고 지금도 너희는 여전히 어느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이다. 너희 중 가장 현명한 자도 역시 식물과 유령의 분열이며 잡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너희들에게 실물과 유령으로 되라고 명하겠는가?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너희의 의지는 말해야만 한다. 초인이란 대지의 의미여야 한다고!”

초인(超人)이란 누구인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영화 속 초능력자 슈퍼맨이 아니다. 슈퍼맨은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자이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자신을 초월한 자,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지 않고 자신의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다. 자신은 자신 안에서 자신의 한계와 무게를 알 수 없다. 책의 무게를 달고자 할 때, 책 자신은 자신의 무게를 달 수 없다. 책의 바깥에서 책을 저울에 올려놓아야 책의 무게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볼 때 자신의 한계가 보인다. 초인은 이처럼 자신을 초월한 사람이다. 때문에 초인은 자신의 무게와 한계를 알고, 알기 때문에 자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권력에의 의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보며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보았다. 그리하여 수많은 민족들의 선악을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지상에서 선과 악보다 더 큰 힘을 찾지 못했다. 우선 먼저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도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 존속하기를 원한다면, 이웃 민족이 하듯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한 민족에게 선(善)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한 민족에게는 조롱거리, 치욕으로 불리었다. 나는 많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악이라 불리고 저곳에서는 화려한 영광으로 장식되는 것을 발견했다. 각 민족의 머리 위에 선악의 팻말이 세워져 있다. 보라, 그 팻말은 각 민족들이 초극해 온 것들의 팻말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의 의지의 목소리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이 세계의 근본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개인에게 적용한다. “나는 생명 있는 자를 따라갔고, 나는 가장 큰 길과 가장 작은 길을 갔다. 살아 있는 자들의 본성을 알아내기 위하여. 나는 생명 있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 또한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자가 강자에게 봉사하도록 약자의 의지가 약자를 설득함은, 약자의 의지가 그보다 한층 더 약한 약자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작은 자가 가장 작은 자를 지배하는 기쁨과 권력을 얻기 위하여 더 큰 자에게 헌신하는 것만큼, 가장 큰 자도 역시 헌신하며 권력을 위해 거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의지 앞에서 이성도 도덕도 무력하다. 권력에의 의지는 세계의 근본적 본질이며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는 근본이다.

영원히 회전한다

니체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피어 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계속된다.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로이 짜 맞춰진다. 동일한 존재의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이 헤어지고 모든 것이 다시 만나 인사한다. 존재의 고리는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어느 찰나에나 존재는 시작된다. 모두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로 공은 굴러간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세계는 일직선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나아갔다 되돌아오고, 되돌아왔다 다시 나아간다.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다. 이런 니체의 운동관은 세계가 앞으로 진보할 뿐이라는 낙관적 합리주의, 과학의 발전으로 세계는 계속 발전한다는 과학주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니체는 3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초인과 권력에의 의지와 영원 회귀. 차라투스트라는 어느덧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초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가슴속에 초인이 있음을 깨닫는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원전 700년경 고대 페르시아에 살았던 예언자이다. 미신을 타파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려 했던 종교 개혁가이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초인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니체는 자신을 차라투스트라와 동일시하여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초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체는 현실과 자아의 가치를 발견하라고 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삶은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의미한 현실에서 유의미한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시도는 사랑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사랑의 정의내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현실과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발견하고 얻는 것이다. 그 삶을 알기 위해 자신을 초월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니체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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