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칸트 『형이상학 서설』
대중성이 없다고?
칸트(I. Kant, 1724~1804)가 쓴 『순수이성비판』은 세 가지 점에서 대단하다고 한다. 하나는 그런 어려운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고, 다른 하나는 그 어려운 책을 출판하였다는 게 대단하며, 마지막으로 그 어려운 책이 팔렸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했다. 물론 독일이 문화적 자부심을 자랑하기 위해 퍼뜨린 얘기지만, 『순수이성비판』이 대단히 어려운 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칸트가 이 책의 원고를 친구인 헤르츠에게 보여 주었을 때, 헤르츠는 반쯤 읽고 계속 읽으면 미칠 것 같다고 말하며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한 학생이 친구에게 “이 책은 너무 어려워 네가 이해하려면 30년은 걸릴 거야.”라고 하자, 그 친구는 모욕을 참지 못하여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칸트도 이 책의 난해성을 인식했는지 2판을 발행할 때는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였다. 그럼에도 난해성 문제가 해소된 건 아니었다. 결국 칸트는 보다 쉬운 해설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해설서가 바로 『형이상학서설』이다. 『형이상학서설』은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지 2년 후인 1783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해설서까지 써야만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 데 대해 불만이 있었다. 『형이상학서설』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동안 칭송을 받아온 인류의 인식과 지식이 존립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마당에, 어느 철학자로부터 대중성이 없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술술 읽히지 않는다느니 하는 불평을 듣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대중성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지 결코 처음부터 대중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형이상학서설』이 “이러한 불평을 해소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책의 제목은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이다.
칸트를 떨게한 흄
칸트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영국의 철학자 흄의 경험론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흄의 회의주의 덕택에 칸트는 합리론이 근거 없는 독단에 빠져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칸트는 말했다. “흄은 나를 독단의 선잠에서 처음으로 깨어나도록 한 사람이었다. 흄은 사변철학의 영역에서 나의 탐구를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형이상학의 역사 이래 흄의 공격보다 더 치명적인 공격은 없을 것이다.”
칸트는 철학의 두 극단을 거부했다. 합리론은 독단적 철학이었고, 경험론은 회의주의 철학이었다. 합리론은 본유관념과 같은 입증되지 않은 불변의 개념을 전제하였다. 반면 흄의 경험론은 인과율과 같은 자연과학의 근본원리마저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나아갔다. 정반대의 두 철학은 모두 과학에 위배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가 도전한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흄의 공격이었다. 누구도 굳이 회의주의자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누구도 인간 정신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흄은 경험하는 기초한 인식은 한낱 정신의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과율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구름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한다. 즉, 구름이 원인이 되어 비라는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오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름을 볼 때마다 비가 올 것이라 연상을 하게 되었다. 흄은 구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비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기억 속에 내장된 정신의 습관, 이것이 비의 인과율이라는 것이다. 인과율이 하나의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흄의 비판 앞에서 칸트는 전율했다.
형이상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아무 과학적 근거가 없는 개념들이라는 흄의 비판 앞에, 모든 것을 의심하여 자명한 진리만으로 사유하겠다고 다짐했던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무너져 내렸다. 흄은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도 사망확인서를 발부하였다. 모든 인식은 원인과 결과에 기초한다. 그런데 인과율은 객관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법칙에 불과하다. 만일 흄이 옳다면 뉴턴의 과학마저 공상이 된다. 이 무서운 선언 앞에서 칸트는 떨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칸트는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론과 흄과 같은 경험론이 공통적으로 범한 인식상의 오류를 찾아냈다. 칸트의 발견은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어서 ‘철학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린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재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우리의 인식이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범위를 넓히려는 모든 시도가 도리어 이 가정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과 일치해야 한다고 가정하여 보자.”
지금껏 철학자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그 사물에 따라야만 한다고 가정했는데, 칸트는 이런 가정을 뒤집어 보자고 했다. 붕어빵 굽는 것을 보자. 붕어빵 아주머니는 준비해온 반죽을 붕어빵 굽는 기계의 틀 속에 주입한 후 열을 가한다. 한 바퀴 돌리고 나면 반죽은 빵으로 변신해 나온다. 아무런 형체가 없던 반죽이 붕어빵의 모습이 되어 나오는 이유는 붕어빵 기계의 틀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어떤 질서를 갖도록 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은 대상을 수용하고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형상을 부여하고 구성한다. 이것이 칸트 철학의 요점이고, 철학에서 이룬 칸트의 혁명적 전환이다. 코페르니쿠스가 “회전(revolution)하는 건 태양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외침으로 과학사를 뒤엎었듯이, 칸트는 “질서는 대상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여한 것”이라는 전복을 통해 철학사에 혁명(revolution)을 가져왔다.
물자체의 효용
칸트는 욕심 많은 철학자였다. 근대과학의 성과를 옹호하면서 인간의 숭고한 종교적 감정도 옹호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모두 옹호하려면 모순이 생겨난다. 근대과학에 따르면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이 원인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신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신체는 기계처럼 엄격한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만일 인간의 신체를 하나의 기계로 파악하면 도덕성의 토대가 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를 잃는다. 칸트가 일생을 두고 형이상학과 씨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과학의 성과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할 수 있는 철학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형이상학은 모든 학문들의 여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칸트의 시대에 이르러 형이상학은 온갖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칸트는 형이상학의 불우한 처지를 헥토르의 어머니 헤쿠바에 비유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물 중의 최고였고, 수많은 자식을 가진 권력자였건만, 이제 내몰리어 의지할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었구나.”
형이상학이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된 이유는 합리론 철학자들의 독단과 경험론 철학자들의 회의주의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시정하려면 이성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하나의 재판소를 설립해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이 재판소에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은 보호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에겐 응징을 가해야 한다. 칸트가 세운 이성에 대한 재판소가 다름 아닌 ‘순수이성의 비판’이다. 그러면 칸트가 세운 재판소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리는가? 이성의 권한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판결한다.
바로 여기에서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가 위력을 발휘된다. 칸트는 모든 사물에는 인식의 대상으로 드러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인식에 의해 포착할 수 없는 물자체의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눈송이를 예로 들어보자. 눈송이는 하얗고 차갑다. 우리는 감각을 이용하여 눈송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눈송이의 배후에 있는 ‘물자체’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은 신체의 감각을 이용해서 사물과 만나기 때문에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물자체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물자체의 개념을 인간의 영혼에도 적용한다.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는 물자체이고 인과율을 넘어선다. 이런 칸트의 사유에 따라 근대과학의 인과율도 살고, 인간의 자유의지도 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칸트는 형이상학이 근대과학과 나란히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고 본다.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 속에 있지 않다. 신은 우리의 인식 너머, 물자체 속에 있다. 이성은 신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경험적 인식으로 신을 사유하려는 것은 모순이다. 신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사물들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즉 물자체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래서 신이 나의 사유와 무관하게 정신 밖에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 도 없다. 오직 신을 믿을 따름이다.
뉴턴은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마치 시계태엽이 톱니바퀴들의 맞물림에 의해 운동하듯, 한 번 창조된 우주 안의 행성들은 우주의 운동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푸는 뉴턴식 타협안이었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끝없는 유혹에 부딪힌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종교를 이성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냈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종교를 신앙의 영역에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푸는 칸트식 타협안이었다. 그리고 근대과학과 종교적 감정을 동시에 옹호하려한 칸트의 고민의 결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