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노자_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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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것 없으니 자연에서 배워라_ 노자 『도덕경道德經』

공자, 노자를 만나다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 없어졌습니다.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떠돌아다닙니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숨겨둡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당신의 교만과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야심을 버리십시오. 그러한 것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마천이 『사기』 「노자 한비 열전」에서 전하는 이야기이다. 훈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노자(老子)이다. 그리고 훈계를 받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공자(孔子)이다.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추앙받는 공자가 노자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훈계를 들어야 했다.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는 잘 날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치고 짐승은 잘 달린다. 나는 새는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하여 낚을 수 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타서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다.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공자에게 훈계를 한 사람, 공자가 용과 같다고 한 사람, 노자는 누구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천이 몇 줄의 일화를 기록하여 놓았을 뿐이다.

그런 노자가 오늘날까지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중국 주나라에 살다가 주나라가 몰락해가는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함곡관(函谷關)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 관리인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선생님께서 지금 은둔하려 하시는 것 같은데,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한 편 써 주십시오.” 노자는 단숨에 그 자리에서 5천여 자의 글을 써주고 떠났다. 그것이 노자가 속세와 맺은 마지막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 인연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맺어져서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때 단숨에 썼다는 책이 바로 『도덕경(道德經)』이다. 훌륭한 상인처럼 깊이 감추어두었던 생각을, 속세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가까스로 우리들에게 공개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발끝으로 서있는 자 오래 설 수 없다

『도덕경』은 제목에 나온 것처럼 도(道)와 덕(德)에 관해 쓴 책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도덕경』은 일관되게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자연의 순리를 이야기한다. “발끝으로 서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황새처럼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순리를 거스르는 것을 노자는 인위(人爲)라고 하였다. 인위란 인간의 의지와 욕심에 의해 하게 되는 일체의 것이다. “몸을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이길 수 있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추우면 화석연료를 태우고 더우면 에어컨을 튼다. 화석연료는 오염물질을 내뿜는다. 에어컨을 틀면 실내는 시원하지만 내뿜는 열기로 밖은 더워진다. 열대야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밤에도 에어컨을 튼다. 거스르고 거스르니 악순환이 계속된다.

 

고정관념을 버려라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는 데서 추함이 생긴다. 모두가 선(善)을 선하다고 여기는 데서 선하지 않음이 생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룬다. 길고 짧음은 서로를 만들고 높고 낮음은 서로를 의논한다.” 내가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없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있음과 없음의 관계를 보자. 우리는 형체가 있는 있음에 집착한다. 하지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을 위해 존재한다. 노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30개의 바퀴살이 바퀴축에 달린다. 수레바퀴의 쓰임은 빈 공간에 있다.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든다. 그릇의 쓰임은 빈 공간에 있다. 지게문과 창문을 뚫어 방을 만든다. 집의 쓰임은 빈 공간에 있다. 때문에 무엇인가 있는데서 이로움을 얻지만, 사실 쓰임의 근본은 빈 곳에 있다.”

컵을 만드는 이유는 빈 컵에 물을 채우기 위함이다. 집을 짓는 이유는 방이라는 빈 공간에서 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컵과 집이라는 형체에 더 집착한다. 컵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어떤 모양의 컵을 가질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어떤 모양의 집을 가질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노자는 말한다. “큰 도가 사라져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나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자애로움이니 하는 것이 생겨나고, 국가가 혼란에 빠지니 충신이 나오게 됐다.” 그래서 노자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자의 사상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한다. ‘자연’이란 ‘원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는 뜻이다. 노자는 ‘억지로 무엇을 하거나 만들지 말고 원래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살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자, 현실의 삶을 이야기하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노자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다투지 않고 허물없이 사는 실천의 덕목을 말한다.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있으니 도(道)에 가깝다.” 물은 좋은 곳이나 나쁜 곳을 가리지 않고 흘러 풀과 나무를 키우고 사람과 짐승의 목을 적셔준다. 그렇지만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다투지도 않는다. 물이 선한 이유는 그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더러운 곳을 회피하거나 좋은 곳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투지 않고 허물없이 살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노자는 자기과시 때문에 다툼이 있다고 말한다. “전사는 무예를 자랑하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화를 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더불어 하지 않고, 사람을 잘 쓰는 자는 몸을 낮춘다. 이를 다투지 않는 덕(德)이라 하고 사람을 쓰는 힘이라 한다.” 정말로 이기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사람이다. 나를 낮추면 상대는 나를 올려준다. 나를 낮추려면 나를 낮출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형체, 즉 있음에 대한 욕심이다. 그런 욕심은 물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릇이 쓰임이 음식을 담는 빈 공간에 있는 것처럼, 물질의 쓰임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노자는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명예와 몸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몸과 재물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무엇이 사람을 더 병들게 할까? 재물을 심하게 아끼면 크게 낭비하게 되고, 재물을 너무 많이 쌓아두면 잃게 된다. 만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오래 갈 것이다.” 하늘의 도, 자연의 순리는 차면 넘치고 모자라면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 모자란 자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곳간에 쌓는다. 그래서 노자는 하늘의 도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차근차근 이루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해야 한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미가 있고 조짐이 있다. 눈앞의 욕심으로 마음을 가려서는 안 된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편안할 때 위태함을 생각하면 지키기 쉽다. 조짐이 있기 전에 대비하면 도모하기 쉽다. 약한 것은 녹이기 쉽고 미세한 것은 흩뜨리기 쉽다. 아직 있지 않을 때 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아름드리 나무도 작은 싹에서 나오고, 구 층짜리 정자도 한 줌 흙을 쌓으며 시작한다. 천리 길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된다. 인위적으로 잡으려 하면 깨뜨리고 잡으려 하면 잃게 될 것이다.”

 

노자의 도道, 우리의 도道

인위와 가식을 배격하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 이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노자가 공자를 엄하게 꾸짖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자는 공자가 ‘예(禮)’를 내세우고 가르치며 순리에 따르지 않는 인위를 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노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도(道)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도라고 불리어지는 순간 도는 도가 아닌 것이 된다.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세상 만물에 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하나의 측면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무엇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 상태, 즉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한다. 거기에 진리가 있다. 그러면 근원은 무엇인가? 노자는 없음에서 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없음이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노자는 마음으로부터 보라고 말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없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 『도덕경』

이 책의 저자가 ‘노자'(老子,기원전 6세기 또는 4세기,異說양립)이므로, 『도덕경』은 보통 『노자』로 불린다. 유가 및 제자백가를 비판하고 있는 도가사상의 원전인 『도덕경』에는 우주 만상의 변화 발전의 총원리로서의 ‘도'(道)개념과 개개체의 원리인 ‘덕'(德)개념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서술방식이 대화체나 서술체인 일반적인 중국고전과는 달리, 『도덕경』은 5000여자로 된 짧은 철학 시집이고, [덕](德)편과 [도](道)편의 2부로 구성되었다. (송영배,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1개의 댓글

  1. 도는 겸손인데 무엇이 도라고 하면 그 겸손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것을 도하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이름을 이름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로지 겸손과 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실하게 알아 가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순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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