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그들은 성자(聖者)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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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성자(聖者)를 보았다

*이 글은 월간 <시대> 68호(2019.05)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2012년 7월 26일 밤 8시, 금속노조 경기지부 성진지회 지회장 김영오는 긴급 전화를 받았다. 천막농성 중인 현장을 잠시 떠나 안산 시내에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발신자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에서 상근하는 여성 간부 이성자였다. 성진지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아, 이성자 동지! 일과도 끝난 밤중에 웬일입니까?”

약간 술기운이 올라있던 김영오가 웃으며 묻는데, 이성자는 다급한 음성이었다.

“지회장님! 급보예요. 지금 서울 상암동 운동장에 용역 깡패 이천 명이 집결했대요. 수도권 쟁의사업장으로 습격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성진지회를 칠 수도 있으니 대비를 하세요.”

성진지회는 회사와의 단체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공장 안에 농성 천막까지 쳤으나 파업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날도 현장에서는 오후조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성자 동지, 그걸 왜 우리한테 알립니까? 노동자가 삼백 명밖에 안 되는 중소기업이 무슨 용역 깡패까지 고용하겠습니까? 걔들 일당이 얼만데.”

친구들이 보고 있어 장난스레 답했으나 이성자의 음성은 심각했다.

“지회장님, 지금 농담할 때가 아녜요. 어디세요? 제가 바로 성진으로 갈게요.”

김영오의 얼굴도 굳어졌다.

“알았습니다. 천막농성장에서 봅시다.”

통화를 마친 김영오는 친구들과 헤어져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들어가며 선봉대 소집 문자를 돌렸다.

‘긴급 상황입니다. 오후 근무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선봉대원들은 작업 중단하고 천막 농성장으로 집결하십시오. 지회장’

공장에 들어가니 이성자는 벌써 와있었다. 오후반 선봉대원 십여 명도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 천막 앞에 모여 있었다. 다들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들이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한결 젊어 보이는 이성자는 선봉대원들에게 말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들이 성진을 침탈해올 할 가망이 아주 높아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준비한 대로만 하면 조합을 지킬 수 있어요. 흔들리지 말고, 겁먹지 말고, 그동안 훈련한 대로만 실천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동지여러분! 힘을 냅시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김영오는 선봉대원들을 씻고 오게 한 후 세 개 조로 나누어 영동고속도로 안산교차로와 서안산 교차로, 안산공단 입구로 내보냈다. 그동안에도 휴대전화에는 잇달아 문자가 찍히고 있었다.

‘아직 상암동. 버스 50대가 출발 대기 중.’

‘목적지를 안 알려 줌’

‘용역 일당 하루 34만원, 반나절은 17만원’

‘용역은 주로 20대 초반, 체육과 출신 덩치들이 다수임’

문자를 보내오는 이는 용역 한 명을 친구로 둔 금속노조 간부였다. 친구를 따라 상암동에 간 그는 용역들 속에 섞여 앉아서 안전모와 티셔츠까지 지급 받으며 몰래 문자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를 상암동까지 태워다 준 또 다른 금속노조 간부는 자신의 승용차에서 용역들의 행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가면서 문자는 다급해졌다.

‘버스들 출발하기 시작함. 아직도 목적지를 알 수 없음’

‘버스들 강변북로에 진입함’

‘올림픽대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오름’

밤 11시에 날라 온 문자는 용역 버스의 일부가 안산으로 향했음을 알려주었다.

‘버스 일부가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듦’

‘목적지는 인천 아니면 안산이 확실함’

‘안산 동지들, 용역 침탈에 대비하기 바람’

인천에는 장기간 쟁의 중인 사업장이 없었다. 안산으로 오는 것이 확실했다.

‘안산 행 용역 버스 8대, 용역 3백 명 예상됨’

비상이 걸렸다. 집행부는 조합원 전원에게 비상사태 소식을 알리기로 결정했다.

‘깡패들이 회사에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조합원들은 회사로 집결해 주십시오!’

밤이 늦어 전화기를 꺼놓았거나 문자를 열어보지 않는 조합원이 많았지만 늦어도 아침이면 다 확인할 것이었다. 김영오는 선봉대원들을 안산 시내 주요 길목에 추가로 배치하면서, 두려움으로 떨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혔다.

……

말 잘하고 대인관계가 넓어 몇 년 간 조합 사무실에서 상근하던 김영오가 임기를 마치고 현장에 복귀한 것은 5년 전인 2007년이었다.

성진은 자동차 엔진과 머플러 사이에 장착해 소음과 충격을 줄이는 벨로우즈를 생산했는데 오랜만에 작업장에 돌아가 보니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작업시간 중에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던 노동자들이 이제 아무 때나 쉬고 싶을 때 쉬고, 담배도 아무 때나 피웠다. 8시간 중에 4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관리자들도 일체 간섭을 않고 못 본 체 했다.

“좋은 현상 아닌가? 노동조합이 강해지니까 회사가 노동자를 존중하고 대우하는 거잖아? 이럴려고 노조 만든 거 아닌가?”

“벨로우즈 생산량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뭘. 생산량만 채우면 그만이지.”

사람들은 말했지만 김영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후임 집행부를 맡은 후배들에게 제안했다.

“나는 조직된 노동자는 항상 옳고 정의로울 거라는 책 속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기본권 쟁취를 넘어 노동자 이기주의에 빠지다보면 우리 스스로 도덕성을 훼손하게 돼. 그리고 언젠가는 이런 노동자 이기주의가 역풍이 되어 노동운동을 파괴하게 될 거야. 노동자들이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게 될 거야. 우리 스스로 자정운동을 벌이자.”

집행부와 대의원들도 찬성했다. 조합에서 주관하는 자정운동이 시작되었다. 조합간부들은 교육시간마다 강조했다.

“밥 먹는 시간도 지키고 휴게시간도 지킵시다.”

“회사가 지적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서 스스로 규칙을 지킵시다.”

어느 정도는 설득이 먹혀 너무 일찍 퇴근하거나 아무 때나 담배를 피우는 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회사 관리자들이 여전히 방임해 버리니 한계가 있었다.

조합의 자정운동에도 일체 반응이 없던 회사 관리자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2011년 10월, 김영오가 지회장에 선출되어 다시 조합에 상근하면서였다. 믿기 어렵도록 현장을 방치하던 관리자들이 갑자기 살풍경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신, 어디서 담배를 피우는 거야? 징계!”

“안전모 왜 안 썼나? 징계!”

관리자가 손가락질로 지목하면 그대로 월급이 깎여나가고 시말서를 써야 했다. 노동자들은 금방 위축되었다. 쉬는 시간에도 안전모를 썼고, 휴식 시간이라도 눈치를 보느라 제자리에 서서 쉬었다.

회사의 목적은 신임 집행부를 무기력하게 만들려 함이 분명했다. 회사는 직영으로 운영하던 구내식당을 외부 업체에 넘겨 음식의 질을 떨어뜨려 버렸다. 유급으로 처리하던 일과 중의 조합원 교육도 임금에서 삭감했다. 전에는 조합 집행부가 아무 때나 회사 고위간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일체의 면담을 거부했다. 유일한 통로인 노무관리자는 집행부가 어떤 요청을 해도 협상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냉정히 거부해 버렸다. 김영오는 몇 번이나 면담을 신청해 어렵게 사장을 만나서 강경기조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으나 면전에서 냉랭히 거절당했다. 맨몸으로 딱딱한 벽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회사의 종잡을 수 없는 노무정책은 집행부를 고민에 빠뜨렸다. 본조인 금속노조도 이 상황을 주시했다. 경기지부 간부로 성진지회를 담당해온 이성자는 대책회의에서 말했다.

“이 모든 게 노조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용역회사인 창조컨설팅의 시나리오임이 분명해요. 노조를 자극해 파업을 유도한 다음 용역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에 저항하는 노조집행부를 폭력으로 구속시키고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손해배상을 청구해 이탈시키는 작전이죠. 아산의 금성기업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머지않아 창조컨설팅 용역 깡패들이 성진지회를 칠 게 분명합니다.”

이성자의 예고에도 김영오는 반신반의했다.

“회사의 태도가 이상하긴 하지만 설마 이 작은 회사에서 거액을 들여 용역을 동원할까요? 곧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노인인 우리 회장이 그렇게 폭력적인 분도 아니고요.”

이성자는 고개를 저었다.

“곧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다면서요? 골칫거리인 민주노조를 없애고 물려주려고 할지 모르죠. 설사 그게 아니라도 자본가 개인의 성품과 자본의 속성을 혼돈하면 안 되죠. 성진이 그동안은 비교적 평화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머지않아 일대 결전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몇 차례 대책회의 끝에 성진지회 집행부는 용역과의 충돌 경험이 있는 금성기업 노조를 찾아가기로 했다. 충남 아산까지 내려가 해고된 상태인 금성노조 간부들을 만나니 다들 같은 소리를 했다.

“용역 깡패들과 싸운 것 때문에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정 싸움을 하느라 괴롭습니다.”

금성노조는 조합원도 2천 명이 넘고 평균나이도 30대 전후라 물리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갑작스런 용역의 기습에 쫓겨났으나 이내 대열을 정비해 용역을 몰아내고 공장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양쪽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러자 경찰이 폭력사범을 잡는다며 공장에 진입해 조합간부들을 체포하고 조합원들을 쫓아냈다. 밖에는 용역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밀려나는 조합원을 공격해 무자비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해고된 금성노조 간부 하나는 여러 사람 앞으로 나온, 한 뭉치나 되는 경찰서의 소환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난투극은 한 달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마치 활극 영화 같았지요. 쇠파이프와 쇳조각이 날아다니면서 양쪽에 수도 없이 부상자가 생겼는데 경찰은 용역은 손도 안대고 오직 우리만 잡아갔습니다. 한 달을 그렇게 처절히 싸우다보니 조합원 대다수가 공포에 질려 이탈하고 말았지요. 결국 노조가 먼저 투쟁을 포기하고 복귀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렇게 끝도 없는 고소고발과 거액의 손해배상뿐이었습니다. 폭력으로 구속된 사람은 당연히 해고를 당하고요. 놈들에게 철저히 당한 거죠.”

성진지회는 금성노조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 용역들이 공격해 오더라도 폭력을 쓰지 않고 비폭력으로 맞서자는 방침을 정했다. 회사와의 단체교섭에서도 법적으로 꼬투리 잡힐만한 과격행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조합이 이렇게 대책을 고민하는 동안에도 회사의 강경책은 계속되었다. 김영오가 지회장이 된 지 반 년만인 2012년 4월에는 조합과 상의도 없이 몇 명의 비정규직을 채용했다. 성진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한다는 게 노조의 입장이었다.

“단체협약 상 비정규직의 고용은 노동조합과 협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영오가 항의하니 노무담당자는 냉정히 답했다.

“자, 지금 협의했습니다. 됐죠?”

해외에서 제작된 벨로우즈 완제품이 안산 공장에서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성진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공장을 세웠는데 그곳에서 생산한 벨로우즈를 한국으로 반입한 것이다. 바이백이라 불리는, 완제품 역수입이었다.

“바이백이 늘어나면 국내 공장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도발한다면 전면 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집행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회사는 바이백은 없을 거라고 답했으나 믿을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 4월 말부터 시작된 노사교섭이 원만히 진행될 리 없었다. 회사는 사실상 처음부터 교섭을 거부했고, 노조는 작업은 계속하되 공장 마당에 천막농성장을 세워 장기전에 나섰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교섭이 3개월이 넘어가던 7월 26일, 마침내 회사에서 고용한 창조컨설팅 용역들이 공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성자의 예언대로였다.

……

2012년 7월 26일 밤 11시 50분, 오후반 근무를 마친 70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마당에 집결했다. 퇴근했다가 문자를 확인한 오전반 노동자들도 속속 들어와 인원은 120명이었다.

“조합원 여러분! 지금 깡패들이 우리 회사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회장 김영오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짧은 침묵을 깨고 50대 여성노동자가 고함을 질렀다.

“깡패 새끼들이 우리 회사에 쳐들어오는데 우리가 왜 나가요?”

성진에서 일한 지 20년이 넘은 박선임이었다. 다른 여성노동자들도 외쳤다.

“맞아! 평생 일해 온 회사에서 우리가 왜 쫓겨나야 해? 어떤 놈들인지 오기만 해봐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선택된 작전은 하나뿐이었다. 용역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 후문을 바리게이트로 막고 공장 안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었다. 먼저 지게차로 철 구조물이며 무거운 장비들을 날라 정문과 후문에 바리게이트도 설치하고 농성이 장기화 될 것에 대비해 매점의 빵과 음료수와 물을 이층 사무실로 옮겼다.

선봉대는 영동고속도로 안산교차로에서 성진까지 오는 주요 길목인 화랑유원지, 반월공단 입구, 부광약품 교차로, 회사 정문과 후문에 배치되어 있었다.

노동자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저녁에 술을 마시다가 취한 채 급히 들어온 오전반 노동자도 있고 시화공단의 제3공장에서 일하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동자들도 있었다. 퇴근을 못하고 눌러앉은 오후반 노동자들은 탈의실에 누워 잠을 청하거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새벽 3시, 화랑유원지를 담당하고 있던 선봉대원들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용역들 화랑유원지에서 작전 지시를 받고 있음’

‘용역들 이동 대기하며 담배 피우며 휴식 중’

‘용역 숫자 300명으로 파악됨’

모든 것은 확실해졌다. 선봉대원들이 소리쳤다.

“남자 조합원들은 전원 정문과 후문으로 집결하세요!”

몰려나온 남자들은 정문 안쪽과 후문 안쪽의 불 꺼진 마당에 몇 줄씩 나란히 앉았다. 비폭력 지침에 따라, 조합에서 나눠준 얇은 마스크와 면장갑이 보호 장비의 전부였다.

최초로 농성을 선동했던 여성조합원 박선임은 오후 근무자들과 함께 탈의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3시 30분, 화장실에 가려고 나와 보니 어두컴컴한 정문 안쪽 마당에 남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젊은 축이라 해도 마흔이 넘은 중년남자들이 막 훈련을 마치고 출병을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났다.

박선임은 탈의실로 돌아가 여자들을 깨웠다.

“어서들 일어나! 깡패들이 다 왔나봐.”

여자들이 마당에 몰려 나가니 선봉대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성화를 했다.

“아줌마, 빨리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기 있으면 다쳐요. 무서운 놈들이에요.”

어깨를 떠미는 선봉대원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공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숨길 뿐이었다.

김영오는 도열해 앉은 조합원들 앞에 서서 거듭 강조했다.

“경찰도 언론도 다 자본가 편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강성노조로 몰아 매장시키려는 게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저들에게 고소, 고발의 빌미를 주면 안 됩니다. 절대 폭력을 쓰지 말고 집행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새벽 3시 55분, 잠시 조용하던 문자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용역 버스들,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함’

용역 버스들이 화랑유원지를 나서면서 안산공단 입구와 부광약품 앞 교차로를 지키던 선봉대로부터도 차례로 소식이 전달되었다.

‘안산공단 교차로에서 공단으로 꺾었음.’

‘부광약품에서 방향을 틀었음. 현장까지 3분.’

감시 나갔던 선봉대원들의 마지막 문자는 이랬다.

‘우리도 현장에 들어갈 것임.’

부광약품이 있는 큰길에서 성진기공으로 들어오자면 먼저 후문이 나왔다. 버스들은 후문 앞에 멈추고, 3백여 명의 용역이 쏟아져 내렸다.

용역의 복장은 경찰 마크만 달지 않았을 뿐, 시위 진압 전문인 전투경찰과 거의 똑같았다. 대개 이십대 초반이었는데 곱상하니 앳된 얼굴도 눈에 띄었다. 안전모를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했는데 마스크는 거의 하지 않았다.

후문 바리게이트를 가운데 두고 대치가 시작되었다. 선봉대장은 정문과 후문의 노동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일체 폭력을 쓰지 말고 맨손으로 저항하다가 용역들이 밀고 들어오면 이 층 사무실로 올라가세요. 그곳도 침탈되면 외부 계단을 통해 회사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언제든 뒤로 빠져도 좋다고 했지만, 이탈하는 조합원은 없었다. 평생 누구하고 주먹 싸움 한 번 안 해본 이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공포로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목이 떨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자리를 뜨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노동자의 숫자는 늘어났다.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문자를 확인하고 달려오는 이들이었다. 용역들은 바깥의 노동자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나오는 것도 막지 않았겠지만 밖으로 나오는 노동자는 없었다.

조동우도 뒤늦게 달려온 한 명이었다. 전투경찰 복장을 한 용역들이 떼 지어 서있는 걸 보니 무서워서 발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성진에서 욕을 제일 잘하기로 이름난 그였다. 바깥의 용역들이 듣도록, 쪽문을 열어준 상황실장 정용길에게 일부러 큰소리로 물었다.

“용길아, 밖에 보니까 저 씨발놈들이 몽둥이 다 들고 있더라. 준비됐더라, 개새끼들! 우리는 준비 됐냐?”

“그럼요! 우리도 준비됐지요! 각목과 쇠파이프 잔뜩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준비한 각목 같은 건 없었다. 두려움을 숨기려는 농담일 뿐이었지만 농담도 힘이 되었다. 조동우는 바깥의 용역들을 향해 고함쳤다.

“야, 이 씨부랄놈들아! 들어오기만 해봐라, 개박살을 내버린다!”

긴장 속에 한 시간이 흘러가고 새벽 5시가 되자 용역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후문 바리게이트 너머의 용역 대장이 시위 진압하러 온 경찰대장이라도 되는 듯, 스피커의 음량을 최대로 높이고 방송을 시작했다.

“일차 경고 한다! 회사에서 나와라!”

바리게이트 바로 앞에 서있던 이성자가 휴대용 확성기로 맞섰다.

“용역 여러분! 여러분은 일당 받고 여기 왔지만 우리는 여기가 생계의 터전입니다. 당신들의 몽둥이는 우리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자본가를 향해야 합니다.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상, 먹고 살기 힘들지요? 우리도 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궁하다고 이런 나쁜 짓을 해서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용역 여러분, 몽둥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정의의 편이 되어주세요.”

이성자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용역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넘어!”

한 마디 명령어에 따라 용역들은 일제히 후문으로 돌진했다. 용역들은 준비한 소화기를 뿌리고 곤봉을 휘두르며 바리게이트를 넘으려 했다. 조합원들은 맨손으로 용역들을 밀어내거나 검정색 레커를 뿌리며 방어했다. 그렇게 2분이나 지났을까, 용역대장의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후문 놔두고 정문으로!”

용역들은 일제히 정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문과 후문 사이는 쉽게 타고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한 담장으로 이어져서 용역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다 보였다. 노동자들도 그들과 나란히 정문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갔다.

정문은 후문보다 진입로가 넓어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노동자들은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용역을 막으려고 호스를 연결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용역들은 정문 바리게이트를 무너뜨리려 시도하는 한편으로, 나직한 담장을 타고 넘어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공장 안으로 후퇴하세요!”

“철수해요, 철수!”

집행부의 고함에 따라 조합원들은 공장 안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정문 공격이 시작되고 불과 5분 만이었다.

한정옥은 조합원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온 후 자동문을 잠그려 했는데 소방호수가 걸려 잠기지를 않았다. 서둘러 소방호스를 당기려는 순간, 용역이 던진 소화기가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 한가운데가 깊이 찢어져 선지처럼 뭉클거리는 덩어리 피가 솟구쳤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서 부축해요! 이층으로 데리고 가요!”

조합원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그에게 달려들어 등에 업고 부축해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정옥만 아니라 두 명의 노동자가 얼굴과 머리에 쇳덩이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지휘도 없이 서로 나서서 다친 노동자들을 돌보았다. 벌어진 상처를 눌러 지혈하고 물을 떠와서 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일부 선봉대원만 남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간 조합원들은 계단에 의자와 책상을 밀어내려 바리게이트를 설치했다. 하나뿐인 좁은 계단이 막히자 잠시 소강상태가 왔다.

사무실에 오르지 않고 1층을 지키던 욕쟁이 조동우는 기계를 바리게이트 삼아 서서 밀려오는 용역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우리가 이겼어, 이 씹새끼들아! 좀 이따가 경찰 오면 너희 씨발놈들 싹 잡아갈 거다!”

전투경찰 수백 명이 출동한 것은 그로부터 20분이 지난 5시 30분경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한 명도 회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용역을 철수시키거나 잡아가지도 않고, 공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도 확인하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경찰은 공장을 등지고 도열해 도로 쪽만 감시했다.

김영오는 번호를 알고 있던 기자들에 급히 전화와 문자를 했다. 받는 이도 없고 답문을 보내오는 이도 없었다. 그가 보낸 문자에 반응하는 이는 조합원들뿐이었다.

‘용역들이 공장 안까지 침탈했으니 지금 회사로 오고 있는 조합원들은 안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대기하십시오.’

안전을 생각해 들어오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음에도 계속 한두 명씩 달려온 조합원들이 옆 회사를 통해 담을 넘어 왔다.

김영오는 비로소 비폭력 대응 방침을 후회했다. 조합원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데 저항할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아직 시화공단의 제3공장 조합원에게 전화해 있는대로 쇠파이프를 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제3공장도 이미 용역에 점거당해 들어갈 수도 없다는 답변이었다.

소강상태가 30분을 넘겨 6시 10분이 되자 다시 용역대장의 고함소리가 터졌다.

“공격해라! 다 죽여 버려!”

명령과 동시에 용역들은 줄지어 서있는 팔레트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팔레트들이 넘어지면서 그 안에 적재되었던 팔뚝만한 벨로우즈들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바닥으로 굴렀다.

용역들은 벨로우즈를 집어 던지며 몰려왔다. 벨로우즈를 던지면 음산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벨로우즈만이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뾰족한 쇠꼬챙이며 쇳덩이를 무차별로 던져댔다. 빈 소화기 통도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1층을 지키던 선봉대원들은 이리저리 피하거나 정통으로 맞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몇 분 안 되어 1층을 장악한 용역들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막고 있던 책걸상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2층을 향해 벨로우즈와 쇳조각들을 던져대니 바리게이트를 보강할 수도 없었다. 몇 분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오는 고함쳤다.

“다들 후퇴하세요. 바깥 계단을 통해 회사를 빠져 나가세요!”

조합원들은 외부계단을 통해 빠져나가려고 몰려갔다. 그러나 계단 아래에는 이미 용역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달려 내려간 조합원들은 양쪽에서 쏟아지는 몽둥이와 주먹질, 발길질을 받으며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쇳덩이들이 날아오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등이나 가슴에 맞으면 멍만 들지만 머리에 맞으면 반드시 찢어져 금방 얼굴과 옷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끝까지 1층 작업장에서 버티던 조동우는 날아온 벨로우즈에 맞아 입술이 거의 둘로 갈라져 버렸다. 너덜너덜한 입술 사이로 쏟아지는 피가 상의를 물들이고 바지까지 떨어졌다.

“너희도 인간이냐? 인간답게 살아라!”

날아오는 벨로우즈를 피해가며 2층 계단 끝에서 소리를 지르던 이성자도 무언가 쇳조각에 이마를 맞고 주저앉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솟구친 핏물이 금방 얼굴을 적셨다.

동료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흥분한 조합원 중에는 비폭력 원칙을 잊은 이들도 있었다. 유순하기로 유명한 한 늙은 조합원은 큰소리로 자랑을 했다.

“내가 용역 깡패들 못 올라오게 의자 던졌어!”

젊은 조합원 하나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들어와 아직도 만취한 상태였는데 계속 용역들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비켜! 내가 나가서 저 새끼들 다 내쫓을게!”

조합원 몇이 둘러싸고 꼼짝 못하게 붙들어야 했다.

“안 돼! 지금 나갔다가는 저놈들에게 맞아 죽어!”

또 다른 조합원은 용역 쪽에서 날아온 소화기를 집어 들어 용역들에게 던지려 했다.

“아저씨, 던지면 안돼요. 던지지 마세요!”

“경찰에게 빌미를 주면 안돼요.”

여럿이 만류했지만 울분에 사로잡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기어이 용역들에게 소화기를 던져 버렸다. 노동자 쪽에서도 이렇게 간간이 쇳덩이가 날아가면서 용역도 여럿 다쳤다.

용역들이 던진 벨로우즈며 쇳덩이를 챙기는 노동자도 있었다. 피와 머리칼이 엉겨 붙은 벨로우즈를 뭐 하러 수집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이게 증거야. 앞으로 이 폭력사태를 세상에 알리고 재판을 할 때 꼭 필요할 거야.”

상황실장 정용길은 이 모든 상황을 분 단위로 기록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받침대에 받친 종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모나미 볼펜을 들고 8시부터 벌어진 모든 상황을 기록했다. 기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던 그는 용역들이 2층으로 올라오기 전에 바리게이트를 뛰어 넘어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몸이 붕 떠 있을 때 용역의 몽둥이가 다리를 후려쳤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허리와 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정용길은 양손에 종이와 볼펜을 움켜쥔 채 용역들 사이로 돌진해 공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리게이트를 걷어내고 2층으로 올라온 용역들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노동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용역들이 벨로우즈를 던지며 몰려오자 조합원들은 사무실 안으로 달아나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이제는 끝난 상황이었다. 박선심은 용역들을 향해 소리쳤다.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말아요!”

다른 여성조합원들도 때리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용역들은 엄마뻘 되는 여자들의 절규에도 몽둥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용역인지 감독인지 모를 누군가 소리쳤다.

“아줌마들은 이리 나오세요! 아줌마들은 때리지 마세요!”

박선임이 제일 먼저 밖으로 나오고 다른 여자들도 따랐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도 몽둥이에 맞으면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남자들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그녀들의 등 뒤에서 처참하게 울렸다.

조합원 김진년이 맨 마지막으로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나오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조합원 전원이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아침 6시 43분, 공격이 재개되고 꼭 30분만이었다.

날은 훤히 밝아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아침햇살이 노동자들이 흘린 핏자국과 소화기 분말로 어지러운 공장 마당에 쏟아졌다. 날아온 흉기에 맞아 손가락이 잘리거나 피를 흘리는 노동자만 20여 명, 멍들고 내상을 입은 숫자는 집계할 수도 없었다. 본인은 다치지 않은 이들도 부상자를 간호하느라 손과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날, 상암동을 출발한 용역의 주력은 만도기계의 3개 공장이 목적지였다. 경기도 평택 공장에 600명, 강원도 문막 공장에 500명, 전북 익산 공장에 300명이었다. 그런데 만도노조는 이날 일일파업 겸 하계휴가에 들어가 버려 공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충돌이 일어난 곳은 안산의 성진뿐이었다. 충돌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

용역의 첫 번째 공격 때는 나타나지도 않았던 경찰은 용역의 두 번째 공격을 보면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0분 간 공장 안에서 비명과 고함이 계속되고 다친 노동자들이 피를 뒤집어 쓴 채 뛰어나왔지만, 부상당한 노동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관 여러분! 사람이 다쳤으니 도와 줘요!”

노동자들이 외쳤지만 경찰 간부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딴청만 피웠다. 전투경찰들은 국방색 무거운 방패를 땅에 짚고 서서 눈길을 피하려는 듯, 먼 곳만 바라보았다.

오전 6시 47분, 이리저리 공장에서 탈출해 흩어져 있던 노동자들이 정문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지쳐 있었다. 밤을 꼬박 지센 데다, 피는 흘리지 않아도 몸 여기저기 피멍이 들어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머리나 손을 꿰매야 할 사람들은 병원으로 보내고, 뒤늦게 출근하러 오는 노동자들이 합류해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오전 8시 30분, 병원 간 조합원 외에 대부분이 모였음을 확인하고 약식 집회를 열었다. 지친 조합원들 앞에 선 김영오 지회장은 침착했다. 그는 흥분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무실 쪽을 향해 딱 한 번 고함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도 인간이냐?”

욕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상황실장 정용길도 차분했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조분, 조분 설명했다. 뒤따라 앞에 나선 오십대 여성노동자도 흥분을 억누르며 회장을 성토했다.

“회장님, 이건 아니지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말 우리는 다 오래 일하고 양심껏 일했잖습니까? 예전에는 세 명이 하루에 벨로우즈를 840개 생산했는데 회사에서 자동화 기계를 만든 뒤로는 하루 1760개를 만들고 있어요. 이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일합니까? 작년도 회사 매출이 1천억 원이 넘고 순이익도 160억 원입니다. 우리, 진짜 열심히 일했다고요. 그런데 회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제3공장에서 일하는, 정년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남성노동자도 떨리는 음성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는 배신감으로 치가 떨립니다. 우리 회장이 행사 때마다 뭐라고 했습니까? 성진 식구는 모두 한 가족이라고, 돈 많이 벌어 성진타워 아파트 크게 지어가지고 다 같이 살자고 수백 번도 더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힘든 때도 바람막이 하나 없는 추운 현장에서 벌벌 떨어가며 죽어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집에도 안가고. 그래서 회장은 돈을 억수로 벌고 공장은 아프리카까지 뻗어갔는데, 우리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고생했는데, 이게 뭡니까? 회사가 돈 많이 번다고 우리에게 뭐 해준 거 있습니까? 돈 많이 벌 때는 남이고, 힘들 때만 가족입니까? 우리한테 뭐 더 준 거 있습니까? 회사 어려울 때만 는 왜 우리에게 허리띠를 조이라고 하나요?”

두서없이 떠드는 사이 격해진 감정은 그의 목청을 점점 높아지게 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강성노조라지만 우리 노조가 파업을 해도 진짜 바쁜 라인은 안 죽이려고 꼭 부분파업만 했습니다. 완전 파업은 안했어요. 우리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회사 같이 살리려고 평생을 일했어요. 이 회사가 어찌 회장님 한 사람의 회사입니까? 평생 일해 온 우리 모두의 회사 아닙니까? 근데 이게 뭡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고요? 저 마당 바닥에 깔린 피를 봐요! 우리들이 흘린 피를 봐요! 저 검붉은 피를 보란 말야, 이놈들아! 회장이고 지랄이고 이게 인간이 할 짓이냐?”

남성노동자는 기어이 설움의 울음을 터뜨렸다. 조합원들도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았다. 경찰과 용역들은 먼 곳만 바라보았다. 마치 먼 곳만 바라보도록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약식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안산지부로 이동했다. 공장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고 금속노조 안산지부 강당을 조합사무실로 삼아 싸우자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2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금속노조 안산지부 강당으로 출근했다. 통근차를 타고 다니던 조합원들을 위해 차 가진 조합원들이 카풀을 했다. 카드를 만들어 출근과 퇴근을 기록하고 지각이나 결근이 없도록 했다. 매일 아침에 출근하면 부서별로 점검회의를 하고 난 후 조합원 총회를 열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놀라고 불안했던 마음들도 안정되고 체계도 잡혔다. 조합원들은 ‘투쟁’, ‘희망’ 같은 제목으로 십여 명씩 조를 짜고 조별로 카톡방을 만들어 결속을 다졌다. 밥과 청소도 조별로 돌아가며 맡았다.

조합은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찾으면서 매일 아침 출근시간마다 공장 앞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김영오는 그때마다 강조했다.

“불법폭력행위를 저지른 회사가 우리에게 사과하고 들어와서 ‘다시 노동력을 제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노동자들이 쳐들어 올까봐 부심했다. 낮아서 넘기 쉬운 공장 담장에 길게 철조망을 쳤다. 정문은 철판으로 막고 안으로 대형 컨테이너 박스 2개를 이층으로 쌓아 철저히 차단했다. CCTV를 1백 개나 설치해 24시간 감시하고 용역들이 몇 명씩 짝지어 순회경비를 섰다.

노동조합도 회사의 컨테이너 장벽에 맞서 공장 앞에 아시바를 조립해 망루를 세웠다. 공장 내부 상황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망루 밑에는 천막도 설치해 교대로 쉴 수 있게 했다.

회사는 설비를 가동시키려 애썼다. 비조합원 50명을 출근시키고 남아공 공장에서 일하던 12명의 흑인 노동자를 불러들였다. 비행기만 23시간 넘게 타고 온 흑인 노동자들은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회사는 출근하는 비조합원들을 모아 새 노동조합도 만들었다. 사건 후 2주일 만이었다. 모든 것이 창조컨설팅의 프로그램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를 기업노조라 불렀다.

장마철에는 소낙비 한 번 없더니 뒤늦게 잦은 비가 내리던 이상한 여름이었다. 비오는 이른 아침, 정문과 후문으로 나뉘어 회장을 규탄하고 있으면 기업노조 노동자들이 출근을 했다. 비를 흠뻑 맞은 조합원들은 이들에게 어떤 욕도 하지 않고 V자로 벌려 길을 터주었다.

대개 출근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개구멍으로 들어갔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점심시간이나 오후 늦은 시간이면 보란 듯이 공장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어 소주파티를 벌이고, 족구를 하기도 했다.

농성자 중에도 출근을 하는 이가 생겼다. 일주일에 한 명 꼴로 슬그머니 회사에 복귀했다. 누구 한 사람이 복귀하면 그가 속했던 조는 한동안 공황상태가 되었다. 두 달 간의 농성기간 동안 복귀한 조합원은 9명이었다. 나머지 200여 명은 잘 버텼다. 이탈한 복귀자에게 욕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20년을 함께 일했던 동료의 배신은 서로에게 씻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

외부 지원은 엄청났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조합원들은 매일 40명씩 돌아가며 휴가를 내어 망루 아래 천막농성장에 와주었다. 경기도와 안산의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국회와 언론을 상대했다. 영화인들은 머리가 찢어지고 입술이 갈라져 선지피를 쏟는 사진들을 모아 <야만의 새벽>이란 제목의 영상을 만들어 여러 공장과 집회장에서 상영했다. 조합원 가족들은 가족대책위를 만들어 집회와 농성에 참가하고 음식을 지원했다. 조합원의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엄마들은 더위와 탈수에 시달리는 집회장에 미숫가루를 타왔다. 조합원이 속한 띠별 친목회며 향우회의 회원들, 이웃집 사람들까지 성금과 생수, 쌀 같은 물품을 보내왔다. 매주 금요일이면 노동쟁의 현장을 지원하는 ‘희망의 밥차’가 금속노조 안산지부 강당에 와서 뜨거운 밥과 국을 배식했다.

조합원들은 바빴다. 숫한 집회 사이사이, 조를 짜서 안산 시내에 나가 유인물을 배포하고 지지서명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말도 걸기 전에 피해 버리고, 어떤 사람은 투쟁이란 말에 얼굴을 찡그리며 유인물을 돌려주고 가버렸다. 하지만 격려의 말과 서명을 해주고 가는 이도 많았다.

8월 무더위에 온몸이 땀에 절어 가두서명을 마치고 돌아와 평가를 하는 자리에서 조합원들은 말했다.

“오늘 다녀보니 모르는 사람에게 거절도 당하고 호응도 얻으면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세상은 사실 내 일과 관계없으면 신경 안 쓴다는 것, 그런 세상의 차가움도 느꼈고, 한편으로는 내 일이 아닌데도 신경을 써주는 사람들에 대해 고마움도 느꼈습니다. 인간사회의 차가움과 따뜻한 인정을 동시에 느껴봤다고 할까요?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격려해주는 게 제일 고마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여학생들의 서명을 받으면서, 저도 굉장히 고마웠는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노동운동이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노동조합도 젊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원래 이익집단이기는 하지만 이익집단을 넘어서 정의에 앞장설 수 있는 집단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을 위해 노동조합이 뭔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리가 깊게 찢어져 입원까지 했다가 나온 조합원 한정옥은 실밥도 뽑지 않았을 때부터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그는 말했다.

“내 머리를 거울에 비춰보고 있으면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큽니다. 항상 한 가족이라고 외치던 회사가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가장이 자식들을 폭행한 거랑 똑같은 거니까 충격이 더 큽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것은 언론과 정치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 용역이랑 고의적으로 수수방관한 경찰에 대한 지적만 합니다. 이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게끔 돈을 지불한 성진그룹 회장에 대해서는 정말로 한 마디도 않더군요. 돈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까? 자본이 그렇게 무섭기에 자본주의라고 하는 겁니까? 저는 이번 폭력을 지시한 회장이 구속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겁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가수 김성만이 낡은 봉고차에 음향시설을 잔뜩 싣고 와 문화제를 열어주었다. 문화제 날이면 조합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투쟁사업장에서 연대를 와서 김성만과 찬조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며 흥겨워했다.

문화제 날은 연대 발언의 날이기도 했다. 연대 투쟁을 온 노동자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했다. 매 주마다 참석하는 서울 구로동의 노동상담소장은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시계의 시침만 봅니다. 밖에서는 시침이 굴러가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계 안의 기어가 굴러가는 것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시계 바늘 이면의 기아를 안 보듯이, 화려한 기업의 뒤에서 고생하는 우리 노동자를 보지 못합니다. 시계 부품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우리 노동자들을 보지 못합니다.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싸워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다 함께 외칩시다, 투쟁!”

“투쟁!”

여성노동자들의 발언은 언제나 감동을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평생 공장에서 일해 온 한 여성노동자는 말했다.

“내가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노동조합이 없는 공장에 다닐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고 남자 반장들이 마구 쌍욕을 하고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만지며 성희롱을 해도 아무 저항도 못했어요. 그런데 성진에 들어오니 귀마개도 주고 마스크도 주고 작업복도 회사에 빨아주는 거예요. 와 이렇게 좋은 회사도 있나 했더니 알고 보니 노동조합 때문이었어요. 감동했죠. 귀마개니 마스크가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되겠어요? 돈보다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던 거예요. 노동조합이 있는 공장은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아마 그래서 사장들이 노조를 없애려는 것 같아요. 노예로 부려야할 노동자가 자기랑 동등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게 싫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인간이 되고 말 겁니다. 우리 다 함께 외쳐요. 노동자도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대우하라! 단결, 투쟁!”

“노동자도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대우하라! 단결, 투쟁!”

공동대책위원회의 활동으로 여러 방송사에서 취재도 나왔다. 특별취재반을 꾸려 노동조합 파괴를 전문으로 해온 ‘창조컨설팅’을 폭로한 방송사도 있었다. 야당의원 8명도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언론과 국회를 상대로 한 활동에는 그날 새벽 한 조합원이 모아 놓은 피 묻은 벨로우즈와 상황실장 정용길이 기록해 놓은 상황일지가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었다. 벨로우즈에 엉겨 붙은 피와 머리칼을 보고 이게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 국회의원은 없었다.

금속노조 본부는 남아공 금속노조에 메일을 보내 남아공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에서 일하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공 금속노조로부터 성명서가 왔다.

‘남아공의 그 어떤 자동차 운전자들도 노동자의 피로 만들어진 차를 운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이윤만을 목적으로 삼으면서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폭행하는 기업을 용납할 수 없다. 남아공에는 현재 3개의 완성차 기업이 성진으로부터 납품을 받는다. 현대, 지엠, 포드가 그들이다. 남아공 금속노조는 남아공 성진에게 한국으로부터 남아공 대체 노동자들을 즉각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남아공 성진은 어떻게 해서 남아공 노동자들이 한국에 발령돼 노동권을 훼손시키게 만드는 결정을 내렸는지 우리에게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남아공 공장까지 파업으로 마비될까 우려한 회사는 12명의 남아공 노동자들을 남아공으로 돌려보냈다. 노조는 남아공 금속노조로부터 온 카톡 메시지를 번역해 농성장에 붙여 놓았다.

‘피 묻은 자동차는 안타겠다.’

……

“자기 집에도 왔어? 이게 뭐야? 오늘 월급명세서가 날아왔는데 0만 잔뜩 찍혀 왔어.”

조합원들의 집으로 월급명세서가 배달된 날이었다.

“자기도 그거 받았어? 회사에서 우리를 약 올리려고 일부러 0원짜리 통지를 보낸 거야!”

전화기를 붙잡고 흥분하던 부인들이 농성장으로 달려왔다. 긴급회의가 열렸다. 김영오 지회장이 말했다.

“우리 노조는 애초에 파업을 할 의사도 없었고, 조합원이 적어서 파업기금도 축적한 게 없습니다. 이제 파업 아닌 파업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각 가정마다 생계 문제가 심각합니다. 용역 침탈 당시 조합 통장의 돈은 6천만 원이었는데 농성비용과 선전비로 벌써 바닥나고 있습니다. 상급노조인 금속노조와 민주노총도 2백 명의 생계비를 지급할 능력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유롭게 발언들을 해주십시오.”

여러 의견들이 나온 끝에 조합원들이 각자 저축했던 돈을 노동조합에 주면 전원에게 똑같이 최저생계비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기로 했다. 나중에 회사로부터 받아내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1천만 원을 내는 조합원도 있고 5백만 원을 내는 조합원도 있었다. 조합은 이 돈을 모아 200만 원씩 모든 조합원들에게 똑같이 지급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이 낼 수 있는 여윳돈은 그게 전부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폐업기간을 버티려면 훨씬 많은 돈이 필요했다. 거듭된 집행부 회의 끝에 지회장이 다시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의 투쟁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를 동서로 나누어 대기업 민주노조를 대상으로 지원금 모금에 들어가겠습니다. 홍보단을 꾸려 순회를 하는데, 목표는 각각 10억 원씩, 총 20억 원입니다. 단, 조건은 반드시 승리하여 전액 갚는다는 조건입니다.”

창조컨설팅 사건이 언론을 타면서, 대공장 노동자들의 호응은 좋았다. 대공장 노동조합들은 나중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기금을 빌려주었고, 조합원들은 자체 모금으로 상당한 돈을 모아 건네 왔다. 최소 몇 달치 투쟁기금이 확보되었다.

두 달이 되어가면서, 회사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벨로우즈 생산이 마비되어 납품이 중단된 데다, 폭행을 지휘한 용역회사 간부 5명과 이들을 고용한 성진 전무이사가 구속되었다. 9월 24일에는 국회에서 성진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어 회장이 출두해야 했다.

노무담당 이사가 김영오에게 전화해온 것은 국회 청문회를 며칠 앞둔 9월 20일이었다.

“지회장님, 노사협상을 재개합시다.”

지회장이 된 후 처음으로 들어보는 정중한 말투였다. 김영오는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담담히 응답했다.

“그러시지요.”

소식을 전달받은 조합원들도 환호성을 올리거나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승리에 취하지도 않으려는 듯, 애써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다.

용역이 던진 흉기에 손가락 두 개를 잃은 조합원이 그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이게 전쟁이었다면 항복을 받아냈으니 이겼다고 기뻐하겠지만 이건 전쟁이 아니잖아. 공장 문을 열면 다시 얼굴 맞대고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인 걸. 회장이 나쁜 짓을 하다가 중단했을 뿐이지.”

사흘 후인 9월 23일, 회사는 정문에 A4 용지에 쓴 공고문 한 장을 붙였다. 직장폐쇄를 철회한다는 짧은 글귀가 담겨있었다. 조합원들은 이 작은 공고문 앞에서 휴대전화로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사흘이 지난 9월 26일 아침, 회사 정문 앞에 2백여 노동자들이 모였다. 사장이 앞에 나와 용역을 고용한 사실을 사과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수와 함께 정문을 열고 들어간 노동자들 앞에는 할일이 산적해 있었다. 작업장은 그날의 흔적이 거의 치워지지 않은 채 난장판이었고 두 달 간 멈추었던 기계들은 일일이 분해하고 기름칠을 해야 했다. 출근을 계속해온 노동자들과의 어색한 관계가 해소되는 데도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업장 정비는 한 달이나 걸렸다. 그 사이 노조는 회사와의 단체협상을 재개해 대부분의 요구조건을 따냈다.

주말과 휴일의 잔업특근을 없애고 잔업수당을 포함한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으로 전환해 퇴직금에 반영하도록 했다. 노조와 상의하지 않고 고용했던 비정규직들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비정규직 중에는 투쟁에 동참한 이도 있고 출근을 계속한 이도 있었지만 모두 동등하게 정규직으로 받아들였다.

조합원들은 밀린 월급에 더해 정신적 보상금까지 받았다. 적금과 보험을 털어 투쟁기금을 냈던 조합원들은 전액 돌려받았고, 대기업 민주노조들로부터 지원 받았던 돈도 모두 돌려주었다. 그날 새벽에 겪었던 공포와 근무를 계속한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지만,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아무도 불만이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협상장에 나갔던 이성자는 협상이 종료된 후 인터넷 신문사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지는 싸움만 했어요. 거의 항상 졌어요. 그래서 지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승리했네요.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승리를 한 거죠. 저는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소녀였는데, 제가 만일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다들 소설이니까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소설보다 현실이 더 거짓말 같다고 할까, 저는 지금도 우리의 승리가 믿어지지를 않네요.”

말하는 이성자의 얼굴에는 두 개의 흉터가 눈에 띄었다. 턱의 흉터는 오래 되었지만 이마의 흉터는 새 살이 돋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그레했다. 기자 하나가 웬 상처냐고 물으니 이성자는 머리칼을 끌어내려 이마의 흉터를 가리며 답했다.

“턱의 상처는 예전에 해고자로 복직투쟁을 하다가 구사대에게 맞은 자리고, 이마의 상처는 이번 침탈 때 용역이 던진 쇳조각에 찍힌 자리예요.”

머리칼을 눌러 상처를 감추는 그녀의 손가락에도 칼에 벤 자국이 선명했다. 기자가 손가락의 흉터는 왜 생겼냐고 묻자 그녀는 손을 뒤로 감추며 웃었다.

“복직 투쟁할 때 생계비가 없어서 식당에 아르바이트를 다니다가 베었죠. 손가락이 완전히 잘리는 줄 알았어요. 그치만 이제는 아프지 않아요.”

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자 하나는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기입하면서, 한자로 어떻게 되는가 묻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써놓았다.

‘이성자(李聖者)’

그들의 눈은 성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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