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남아 우지마라
*이 글은 월간 <시대> 67호(2019.04)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작가의 말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 전 일이다. 일본의 식민지이던 1930년대 서울에 경성트로이카라 불리던 노동운동 조직이 활약했음을 독자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성트로이카는 수년 간 십여 개의 공장과 학교에서 파업과 동맹휴학을 일으켜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의 전설이 된다.
이정현은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의 한 명으로, 7년간 조선견직에 다니며 3차례나 파업을 주도한 여성노동자다. 이정현을 지도한 이는 훗날 빨치산 사령관이 되는 이현상이었고, 남편이 되는 김연진은 당대 항일투쟁을 선도한 화요회와 신간회의 창립회원이었다.
이정현 부부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손인 김 선생이 나를 찾아온 것은 얼마 전이었다.
“늙어갈수록 부모님이 더 그리워집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인데 외아들인 제가 제대로 모시지 못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김 선생의 나이 올해로 75세, 아버지가 1980년대 초에 사망하고 얼마 후 어머니도 뒤를 따랐으니 양부모를 잃은 지 30년이지만 그리움은 갈수록 깊어진단다.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저희 부모님도 지긋지긋하게 가난했습니다. 저도 학비가 없어 공업고등학교마저 중퇴하고 평생 공사장에서 일했으니 제대로 모실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나마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어머니는 수감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심사에서 탈락했다. 구금 기간에 제한이 없어 몇 달씩 가혹한 고문을 당해도 재판을 받지 않으면 기록에 남지 않는 식민지시대 법률 때문이었다.
김 선생의 부탁은 어떤 형태로든 어머니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건설노조 홍보부장 출신이기도 해서 기록의 의미를 잘 아는 김 선생이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꼼꼼히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핸드폰으로 여러 개의 녹음 파일도 전송해왔는데 어머니로부터 배운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었다. 식민지시대 공장에서 힘겨운 노동에 지친 여성노동자들이 불렀던 울적한 노래들로, 그 중에도 ‘천당 가신 어머니’가 제일 구슬펐다.
복남아 우지마라, 우지 마라
너를 업고 배 주리는 나도 있단다
어머니, 어머니, 얘 젖 좀 주우
천당 가신 어머니는 왜 안 오시나
설움과 가난은 식민지 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의 처지는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다.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간과한 채, 일본이 침략하지만 않았다면, 남북으로 분단만 되지 않았다면 한국인이 아주 행복하고 평등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고 떠드는 얼치기 민족주의자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 논리대로라면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 이외의 모든 나라 노동자들은 부와 자유를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봉건 유습이 남아있던 식민지 여성노동자들이 선진자본주의 나라의 여성노동자보다 더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김 선생으로부터 받은 이정현 어머니의 녹취록에도 여자라서 겪어야 한 차별과 공장 노동의 고통이 나온다.
그러나 이정현은 그 어떤 외부조건도 핑계로 삼거나 원망거리로 삼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작가의 잔소리는 여기서 줄이고 이정현의 구술을 직접 들어보자. 김 선생이 워낙 깔끔히 정리해 왔기에 살짝 윤색만 했다.
엿장수의 딸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아산군 선장면 대흥리라는 곳이야. 양력으로 1910년 1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치욕의 해지. 아버지는 둘째 딸인 내게 정현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곧고 어질게 살라는 뜻이었어.
너의 외가이기도 한 우리 동네는 양쪽으로 나직한 산에 둘러싸인 가운데 실개천이 흐르는 아늑한 곳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양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농가가 백 가구는 되는 큰 동네였는데 마을 앞 논들을 고래실이라고 불렀지. 고래실논들은 집하고 가까워 농사짓기가 좋아서 땅값도 비쌌어.
우리 집도 고래실논을 좀 갖고 있어 그럭저럭 살만했는데 부모님은 아주 부지런하고 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어. 한겨울에도 가마니 짜기며 옷감 짜기를 하느라 일 년 내내 하루도 노는 날이라곤 없이 열심히 일하셨지.
부모님이 들에 나가시면 내가 주로 남동생을 돌봤어. 위로 언니가 있었는데도 거의 내가 동생을 업고 다녔지. 언니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자진해서 업고 다니고 밥 먹이고 씻겨 주었어. 겨우 두 살 차이라 무척 힘에 부쳤는데도 그랬어.
왜 그랬냐고? 참 기막히고 화나는 사연이 있지. 어른들이 왜 이런 말을 하잖아? 너는 엿장수가 다리 밑에 버리고 간 것을 네 엄마가 주워다 키웠다고 말야. 애들을 놀리려고 장난으로 하는 말인데, 절대로 그런 짓 하면 안 돼.
어린 나는 부모님이 놀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 아, 그래서 언니는 새 옷을 해주면서 나는 언니가 입던 옷에 신던 신발만 주는구나 생각했어.
정말 바보처럼 착했지. 다리 밑에서 주워온 내게 밥을 먹여주는 부모님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엿장수 아버지를 만나면 나를 키워준 부모님에게 은혜를 갚아드리라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정성껏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도 열심히 했어.
동네에 엿장수가 들어오면 혹시 내 친아버지가 아닐까 싶어서 달려갔어. 나는 아버지를 모르지만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겠지 하며 엿장수 앞에서 계속 알짱거렸지. 엿장수들이 그 맘을 알 턱이 있나. 엿장수가 무관심하면 내가 너무 커서 못 알아보는 게 아닌가 싶어 더 가까이 얼굴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더라.
내 마음에는 언제나 키워준 부모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있었어.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없었고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불만을 가질 수 없었지.
하루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영인산 밑에 있는 그예 마을의 외갓집에 갔어. 우리 집에서 그예 마을로 가려면 뎅구지 마을을 지나 5,6킬로 논길을 걸어 곡교천 나루를 지나야 했어. 어린애에게는 아주 먼 길이지. 무슨 말을 전달했던가, 용건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외삼촌이 말하는 거야.
“너희 주려고 멍석을 짜놨는데, 네가 가져가기는 힘드니 아버지보고 와서 가져가라고 말씀드려라.”
부모님 은혜를 갚을 아주 좋은 기회다 싶었어. 내가 가져가겠다고 하니 외삼촌은 미심쩍어 했어. 멍석이 내 키보다도 긴 데다 무거워서 나 혼자는 머리에 올릴 수도 없었거든. 그래도 고집을 피우니까 머리에 올려주시더라.
얼마 안 가 목이 끊어지고 머리가 터질 듯 아팠어. 그렇지만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혼자서는 다시 올릴 수가 없으니 꾀를 냈지. 개울로 내려가 둑에 기대놓으니 혼자서도 다시 머리에 질 수 있었어. 그렇게 개울둑이나 남의 집 담벼락에 기대놓고 쉬기를 되풀이하며 집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어. 내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부모님은 무거운 멍석까지 이고 나타나니 그렇게 기특해 할 수가 없어. 나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키워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았다는 생각에 뿌듯했지. 착한 게 아니라 바보였나봐.
남장 여자
내가 10살이 되던 1919년이야. 아산 읍에서는 만세운동이 크게 벌어졌지만 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나는 무슨 일이 있는가 잘 알지도 못했어. 내 관심은 오로지 면소재지에 생긴 보통학교였어.
공부가 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버지는 두 살 어린 남동생만 학교에 보내고 나는 안 보내주는 거야. 딸이라고 말야. 여자는 살림 가르쳐 시집보내면 그만이고 아들 하나 제대로 가르쳐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는 게 옛날 어른들 생각이었지. 그래도 깨인 아버지들은 딸도 보통학교에 보냈는데 우리 아버지는 벽창호 같았어.
여자라고 차별받는 게 너무 싫고,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동네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그래도 다리 밑에서 주워 와 키워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반항도 못하고 있는데 좋은 생각이 났어. 우리 동네와는 꽤 떨어진 마을에 서당이 있었거든. 서당은 일 년치 수업료가 쌀 한 가마니라서 우리 집 형편으로도 다닐 만 했어. 만만한 엄마에게 서당이라도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
엄마는 어려서부터 내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믿었어. 자랑은 아니지만, 언변도 좋고 기억력도 남다른 게 사실이었지. 학교 대신 서당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알아보니 서당도 여자는 안 받는다는 거야. 여자는 사람이 아니던 시대였지.
어머니는 고민하더니 내게 남동생 옷을 입혀 보는 거야. 얼추 맞더라구. 양쪽으로 길게 땄던 머리도 총각처럼 가운데 하나로 묶었어. 엄마는 내 볼을 꼬집으며 웃으셨어. 그 웃음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를 않아.
“이래 놓으니 영락없는 남자애구나. 아주 예쁜 남자애 같아.”
남동생 옷을 입고 3년이나 서당에 다녔어.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동몽선습, 명심보감까지 뗐지. 서당에서는 한문만 가르치기 때문에 한글은 혼자 깨우쳤어. 기역에 아를 붙이면 가, 니은에 아를 붙으면 나, 한문에 비하면 한글은 너무 쉬웠어. 이틀 만에 깨우쳤지. 구구단도 혼자서 다 암기하고.
훈장 선생까지, 서당에서는 다들 나를 남자로 알고 있었어. 여자애가 남장을 하고 배우러 오는 일도 없거니와, 이름까지 남자 이름이니까 다들 의심조차 하지 않았지.
딱 한 명, 이한식이라는 애가 내가 여자가 아닌가 의심을 한 거야. 어렸을 때 나를 보았으니까.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꼭 따라와. 서당에서 공부하다가도 화장실에 가려면 멀리 집까지 걸어왔다가 돌아가야 했어.
서당에 다닌 지 3년이 되니 가슴도 불룩해지고 목소리고 여자 티가 나서 더 이상 소년 행세가 어려워졌어. 몸이 커졌으니 집안일도 많아졌지. 엄마를 도와 살림하고 논밭에 풀 뽑고, 밤이면 물레 돌려 옷감 짜고 … 농가 일은 끝도 없잖니.
한 3년을 그렇게 사는데 다시 공부할 기회가 생겼어. 서산에 있는 여자잠업견습소에서 실습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1927년, 18살 때였어. 여자 나이 18세를 결혼 적령기로 치던 시절이야. 친구들 중에도 시집간 애가 여럿 있었지. 그런데 나는 시집가기가 싫었어. 시골에서 맨날 마주치는 그 무식하고 멍청한 남자애들과 결혼해서 죽어라고 농사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어. 다시 엄마를 졸라서 잠업견습소에 입학을 했지. 이번에는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더라.
잠업견습소는 뽕나무를 재배해 잎을 따서 누에를 키우고, 누에가 고치를 지으면 뜨거운 물에 담가 실을 빼내는 제사과정까지 배우는 곳이야. 내가 제9기였어. 반 년 간 기숙사에 살면서 잠업의 모든 것을 배웠지.
수료 후에는 농가에 돌아다니며 잠업 기술을 가르치는 교사로 채용이 되었다. 양잠법, 뽕나무재배법, 제사법, 잠종제조법을 가르치는 일이야. 가르치는 건 쉬웠어. 농가를 방문하는 게 문제였어. 내가 맡은 구역은 청양, 예산, 서산, 아산 등 충남의 거의 절반이었거든.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신작로까지는 버스가 있다 해도 논길 밭길을 따라 농촌 구석구석을 누벼야 하니 소용없었어.
제일 좋은 건 자전거인데 자전거란 게 요즘의 자동차만큼이나 귀하고 비쌌어. 여자가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광경은 거의 볼 수 없었지. 더군다나 시골에서 말야. 그래도 여자를 위한 자전거가 있었어. 치마를 입어도 타기 좋도록 의자 앞의 지지대가 아래로 휘어져 있는, 일본 여자들을 위한 자전거였어.
뜻밖이었어. 내가 사정을 말하니까 아버지가 그 비싼 자전거를 사 오신 거야. 딸이라고 보통학교도 보내지 않던 분이었지만 강사 자격까지 딴 내가 대견해 보였나봐.
자전거를 사온 날은 강습 나가기 전날이었어. 생전 타보지 못한 자전거를 하룻밤 안에 배워야 했지. 밤새 연습을 했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서 넘어지고 또 일어서며 연습을 했어. 무릎이고 팔굽이고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지.
다음날 아침부터 농가 방문을 시작했어. 18살 처녀가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니 들판의 농부들이며 아이들이 신기하게 쳐다봐. 길 가던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고 난리야. 촌놈들은 촌놈들이더라구.
위험한 때도 많았어. 사람 하나 겨우 걸어갈 논둑길을 지날 때도 있는데 너무 좁아 나란히 자전거를 끌고 갈 수도 없으니 올라탄 채로 달려야 해. 한쪽은 키가 넘는 벼랑인데 쓰러지지 않으려면 속도를 내어 달려야 하니 얼마나 겁이 나는지 몰라. 논에 빠져 진흙에 옷을 버린 적이 여러 번인데 다행히 아래 논으로 구른 적은 없었어.
돌과 흙으로 다져진 비포장 신작로를 몇 시간이나 달리고 나면 엉덩이고 허리고 아파 걷기도 힘들었어. 머리, 얼굴 할 것 없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툭하면 바퀴가 터져서 읍내까지 끌고 갔는데 길이 나쁜 곳은 어깨에 메고 가니 죽을 맛이었지.
거의 매일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는데 깜깜한 한밤중에 고갯길을 넘어가려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숲속에 무수히 떠다니는 반딧불이며 달빛에 의존해 고개를 넘었지. 남들은 산속의 반딧불을 도깨비불이라고 무서워했지만, 내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
힘들어도 즐거운 나날이었어. 집에 갇혀 살림이나 하고 종일 밭에서 풀을 뽑으며 사는 또래의 여자애들보다 훨씬 행복했지. 찾아가는 동네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열심히 내 말을 경청하고 서로 자기네 집에 데려가서 밥을 먹이고… 그 착한 분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네.
그런데 내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한 3년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내가 직접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아서 비단까지 짜보자는 욕심이 난거야. 당시 비단을 짜는 잠사공장은 예산에 하나뿐이라 다들 거기까지 고치를 갖다 줘야 했어. 나는 어떻게든 우리 동네에 비단까지 짜는 공장을 세우겠다는 당찬 꿈을 꾼 거지.
정작 우리 집은 누에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뽕나무부터 심어야 했어. 아버지에게 계획을 설명하니 이번에도 순순히 들어주시더라. 강연 다니며 모은 돈을 털어 뽕나무 묘목을 잔뜩 사다가 논둑 밭둑에 촘촘히 꽂았어.
뽕나무가 잎을 딸만큼 크려면 3년은 기다려야 해. 그동안 서울에 있는 비단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로 했어. 그렇게 선택한 곳이 동대문 밖 숭인동의 조선견직이야.
1930년 새해가 왔을 때,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한밤의 어둠이며 벌레는 무서워도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모르던 22살 앳된 처녀였지.
그 사람, 이현상
숭인동에 큰 섬유공장들이 있던 이유는 청계천 하류가 흘러 물이 넉넉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잘은 모르겠어. 주변의 창신동, 신당동에는 굶주리다 못해 올라온 촌사람들이 널렸으니 일손 구하기는 쉬웠을 거야.
빈민들은 적당히 땅을 파고 나뭇가지와 잎을 덮은 토막집에서 살았어. 난방 장치도 없고 땔감도 없으니 겨울이면 여기저기서 얼어 죽은 사람이 나왔지. 창신동 뒷산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화강암을 채석해 가느라 절벽이 많이 생겼는데 그 꼭대기로, 밑으로 집 아닌 집을 짓고 구차스럽게 살았어.
공장 생활도 힘들었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으려면 뜨거운 물에 담가야 하는데 요즘처럼 비닐장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맨 손으로 일하니 손이 빨갛게 익어 버려. 여름이면 숨도 못 쉬게 더운 데다 방직기에 말려들어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흔했지.
기숙사라야 목욕시설도 없는 집단수용소라, 여름이면 두피며 사타구니까지 전부 땀띠가 나서 긁다 못해 곪아터지고… 바깥 출입조차 엄중하니까 밤중에 도망치려고 담을 넘다가 떨어져 죽은 여자애도 있었어. 에그, 그 고생을 말로 어떻게 다 해.
나는 그래도 잘 참고 일했지. 직접 뽕나무를 키워 비단까지 생산하는 여류사업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으니까. 비단 짜는 도구를 사려면 돈이 필요하니 20원도 안 되는 월급을 타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어. 다른 애들은 찾아오는 장사꾼들에게 인절미도 사먹고 값비싼 사이다도 사먹으며 조금이나마 여유를 즐겼지만 나는 정말 무섭게 절약했어.
어느덧 또 3년이 지나 1933년이 왔을 때,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어. 정든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눈물도 나왔지만, 기차에 오르니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온 세상이 내 것 같았어.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쁨도 컸고, 지긋지긋한 공장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았어.
집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어. 한껏 부푼 마음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두침침한 마당에 뭔가 잔뜩 쌓여 있는 거야. 방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에게 뭐냐고 물어 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해.
“네가 논둑, 밭둑에 심어 놓은 뽕나무란다.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아버지가 싹 베어서 땔감으로 쓰려고 갖다 놨다.”
뽕나무는 방치하면 한없이 크지만, 크는 족족 잘라서 누에에 먹이면 아주 낮게 키울 수가 있어. 내가 그걸 알기 때문에 논둑, 밭둑에 심어놓은 건데 나무가 커서 그늘진다고 싹 베어 버린 거야.
얼마나 암담한지…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 처음 느껴봤어. 3년 간 그 모진 고생을 견디게 해주었던 희망이 단 몇 초 만에 사라지는 끔찍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엄마에게 한 마디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렸어. 마루에도 오르지 않고, 엄마 아버지가 소리쳐 부르는 데도 외면한 채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어. 차도 없는 밤길을 따라 기차역까지 하염없이 걸어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어. 지금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그때는 눈물도 안 나더라.
조선견직에 다시 들어갔어. 부모님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나를 배신했지만, 공장의 동료들은 돌아온 나를 엄청 반겨주었어. 어제 울며 헤어졌는데, 다음날 다시 만나 또 손을 붙잡고 끌어안고 울었지.
반가우면 뭐해,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공장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지. 꿈이 사라지니 돈에 대한 욕심도 사라지더라. 배를 곯아가며 모았던 돈을 흐지부지 써버리기 시작했어.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어려움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돌려받을 생각 않고 돈을 빌려주었어. 더 이상 기숙사에서 고생하기 싫어서 숭인동에 허름한 셋방을 얻어 이정숙이란 친구와 자취를 시작했지.
내 나이 그때 24살이야. 그때 나이 24살이면 노처녀야. 고향 친구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결혼해서 애가 한둘씩은 있었지. 공장에서도 큰언니였어. 충청도는 가까운 곳이고 멀리 함경도, 평안도에서 올라온 어린애들이 많았어. 나는 힘들고 외로운 그 애들에게 진짜 언니가 되었어. 먹을 것도 잘 사주고 위로도 해주고,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어.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공장에서 언니처럼 잘해주니까 다들 나를 좋아했지. 관리자들까지 나를 무척 믿고 좋아했어.
아마 그런 내 모습을 눈여겨 봤나봐. 어느 날 이정숙이가 나보다 여러 살 어려 보이는 청년을 자취방으로 데려왔어. 가명을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본명은 모르겠는데 성은 변 씨로 기억나.
꽤나 조급하더라구. 만나자마자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자본가과 싸우는 것은 곧 일본침략자들과 싸우는 것이며 독립운동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거야. 비밀 조직가로는 꽤나 경솔한 언행이었지. 아마 정숙이로부터 나에 대해 미리 들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속내를 터놓았을 거야. 그들의 예상이 맞았어. 인생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나는 순식간에 눈을 떠버렸지.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함께 하기로 했다.
두어 차례 우리 자취방에 찾아오던 변은 자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유능한 지도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어. 그 사이 정숙이와 나는 조선견직 내부에서 함께 할 친구들을 모았어. 김남겸, 김복금, 박소재, 권혜정…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름도 잊혀지지 않는 친구들, 동생들이야.
우리를 담당한 사람은 이현상 씨였어.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금산 사람인데 중앙고보 다닐 때 6.10만세운동을 주동했고 벌써 몇 년 감옥살이를 한 투사 중의 투사라고 변이 말해주더라.
이현상 씨와 우리 여섯 명과의 첫 만남은 휴일 날 동숭동에 있던 경성제대 병원 구내에서 이뤄졌어.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여럿이 만나도 의심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였지. 우리는 하나같이 정강이까지 내려가는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고, 이현상 씨는 양복 차림이었어.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 있니? 이현상 씨가 그랬어. 키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부리부리한 눈에 잘 생긴 얼굴이 환히 빛나는 것 같았지.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그윽하고 점잖은지 몰라. 이현상 씨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다들 넋이 빠지게 그 사람을 주시했던 기억이 나.
첫 모임은 인사 차 다 같이 만났지만, 공부는 단체로 할 수는 없었어. 골목마다 반장인지 통장인지가 있어서 수상한 모임이 있으면 바로 신고를 하거든.
이현상 씨는 한밤중에 여공들의 자취방을 찾아와서 한두 명을 상대로 새벽까지 강의하고 사라지는 방식을 택했어. 우리 조선견직만 아니라 동대문 일대 방직공장 여공들을 담당해 매일 밤 돌아가며 가르쳤지.
이현상 씨는 뭐랄까, 마치 살아있는 돌부처 같았어. 처녀 둘이 사는 우리 방에 들어와서는 부처님처럼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몇 시간이고 강의만 하다가 갔어.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러시아혁명사 같은 사회주의 기본 과목을 가르쳤지. 현장 문제에 대한 상담도 했는데, 얼마나 자상하게 우리 이야기를 경청하고 꼼꼼하게 물어보는지 몰라. 정말 믿음직한 사람이었지.
이현상 씨도 나를 무척 좋게 보았던지, 남다른 칭찬을 해주곤 했어.
“이정현 동무는 당당하고 논리적이라 장차 조선의 해방운동을 이끌어 갈 여성이 될 겁니다.”
고마운 말이었어. 여자를 각별히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지. 나는 끝내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동대문에서 노동운동을 한 여공들은 다들 이현상 씨를 존경하고 좋아했어. 이현상 씨가 해방된 뒤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대장을 하다가 죽을 줄은 그때는 아무도 상상도 못했지. 해방되면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 혼자 많이 울었다.
우리 조선견직은 세 차례나 파업을 했는데 주동은 정숙이와 내가 했지만 이현상 씨의 세밀한 지도를 받았어. 이현상 씨는 무조건 싸우라고 부추기지 않고 한 명이라도 더 같이 싸우되 해고당하지 않는 범위에서 싸우도록 지도했어. 제일 컸던 1933년 9월의 파업은 여러 번 신문에 보도가 되었지.
나는 파업이 벌어질 때마다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가방끈이 길어야 사람대접을 받더라. 왜놈들은 보통학교도 못 다닌 내가 하찮게 보였나봐. 이화여고보니 동덕여고보 출신들은 전단만 뿌려도 구속시키면서 나는 몇 차례나 파업을 주동했는데도 번번이 훈방을 시키더라고.
회사도 나를 무학이라고 하찮게 본 건지, 세 번이나 파업을 주동했는데도 다시 일을 나가면 받아주더라. 내가 워낙 열심히 일하고 기술이 좋아서 그러기도 했겠지.
수시로 유치장에 드나들다보니 좋은 일도 있었어. 네 아버지이자 내 남편, 김연진 씨를 만난 거지.
나의 남편, 김연진
김연진 씨를 언제 처음 보았는가는 잘 기억이 안나. 나보다 15살이나 많으니 늙은 선생님의 한 명 정도로 무심히 본 탓이겠지. 내 기억에는 우리가 이현상 씨와 함께 체포되었을 때 처음 본 것 같은데, 너희 아버지 말로는 강릉공산당 사건으로 수백 명이 잡혀오고 난리가 났을 때 처음 봤다 그러더라.
김연진 씨는 항일운동가들 사이에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육촌형인 김좌진 장군과 함께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국내에 들어와서 화요회와 신간회를 만든 사람이지. 화요회는 홍명희, 박헌영 같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결사였고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합쳐서 만든 대중조직이야. 네 아버지는 두 조직의 집행위원으로 신간회 충남지부장을 했으니 김연진을 모른다면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좋았지.
신간회는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해산되어 없어졌지만, 네 아버지는 경찰서 유치장의 단골손님이었어. 경찰은 무슨 큰 행사가 있거나 사건만 나면 요시찰 인물들을 연행해 가둬두니 유치장에 있으면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 네 아버지도 그런 분 중 하나였지.
나이가 워낙 많으니까 선생님처럼 모셨다는 게 맞지. 유치장에서 알게 된 후로도 가끔씩 볼 기회가 있었어. 종로2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김연진 씨의 시국강연을 들으러 간 적도 있었지. 김연진 씨가 사준 종로해장국이 참 맛있던 기억이 나. 종로해장국은 돼지고기 대신 소 등뼈를 고아 만들거든.
내가 자기를 공경하는 모습이 좋았나봐. 그래도 본인이 직접 청혼하지는 못하고 자기네 작은엄마에게 중신을 부탁했어. 김연진 씨는 일찍 결혼해 남자애 하나를 두었는데 부인이 일찍 죽었거든. 내가 아무리 노처녀라도 홀아비가 처녀에게 청혼하기는 어려웠겠지.
청혼을 받은 때가 1936년, 내 나이 27살 때야. 당시는 27살이면 노처녀 중에도 노처녀지. 나하고 나이가 맞는 남자는 30살이 넘어야 하는데, 쓸 만한 남자가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맑스, 레닌을 배우는 바람에 사람 보는 눈이 한껏 높아진 내게 총각이면서 이념적으로도 옳고 인격도 훌륭한 남자가 생길 가망은 없었어. 나이 많은 홀아비이긴 해도 김연진 씨는 저명한 항일투사요, 고명한 인격자였으니 내 마음이 흔들렸지.
고향 집에 편지를 보내 허락도 받았어. 여자든 남자든 혼자 살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시대야. 학력도 돈도 없이 콧대만 높은 딸을 늙은 농부에게 재취라도 보내야 하나 걱정하던 판이니 얼른 허락해준 거야.
결혼식도 하지 않았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딴 전통이니 형식은 무시하는 사회주의자였으니까. 김연진 씨의 삼선동 집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했어.
삼선동 집에는 김연진 씨와 첫 부인 사이에 나온 유일한 자식인 철한이가 기다리고 있었어. 철한이는 그때 12살이었는데 눈이 똘망똘망하고 말하는 것마다 감탄이 나오도록 영리했어. 그렇지만 어딘가 엄마 없는 아이의 초라함과 우수가 엿보이는 것 같았어. 엄마를 잃은 시간이 많이 흘러서였을까, 처음 만난 날부터 내게 친근하게 굴며 어머니라고 부르더라. 정말 착하고 똑똑한 아이였어. 내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게 되었지.
나는 결혼하고도 조선견직에 계속 다녔는데 1938년에 큰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두고 살림만 했지. 남자아이를 낳았다가 일찍 병으로 읽고 나서는 영 아이가 안 들어서다가 결혼 10년 만에 낳은 게 너야.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너는 4살이었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철한이는 러시아어를 잘한 덕분에 외무부에 취직해 계장으로 일하고 있었어.
삼팔선이 무너지고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에 밀려왔는데 이승만이가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피난도 갈 수가 없었어. 인민군이 물러나기까지 3개월간 꼼짝 없이 갇혀야 했지.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김연진 씨와 나는 인민군에게 일체 협조하지 않고 숨어 있었어. 밤이면 뒷문을 열어둔 채, 부부가 교대로 자면서 밖에 누가 오는가 감시했지.
식민지 때 앞장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너의 아버지가 인민군을 피해 숨은 데는 이유가 있었어.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남동생과 육촌형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는 걸 나중에 알았거든. 네 아버지는 엄청 분개하고 그 뒤로는 공산주의자들을 멀리 했어.
본인이 가진 진보사상이 바뀐 건 아니어서 해방 후에 여러 동지들과 진보정당 운동을 했는데 조봉암 선생처럼 소련과 북한에는 비판적이었지. 전쟁 나기 직전에 김연진 씨는 고향 홍성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는데 유세 때 북한을 엄청 비판했으니 잡히면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으로 맞아죽을 판이었어.
둘이 교대로 지키다가, 어린 너를 업고 이리저리 아는 집으로 피신 다닌 덕분에 네 아버지는 무사히 인민군 치하 3개월을 넘길 수 있었어. 그런데 우리가 며칠 아는 집에 숨어 있다가 돌아와 보니 후퇴하는 인민군이 너의 형 철한이와 작은 삼촌 필진 씨를 끌고 가버렸더라. 얼마나 원통하고 기가 막힌 지, 둘이 하루 종일 울었다.
너의 작은아버지는 아동작가 방정환 선생과 소년운동을 벌였던, 아주 순진무구한 분이야. 그런 분을 뭐하러 끌고 갔는지 몰라. 김철한, 김필진, 두 사람 이름으로 몇 번이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도 답이 없는 걸 보면, 끌려 올라가다가 둘 다 미군 폭격으로 죽었겠지. 지금도 두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쫓겨났던 북한군이 석 달 만에 중국군을 등에 업고 또 다시 서울을 점령할 때, 우리 세 식구는 친정이 있는 아산으로 피난했어. 무섭게 추운 겨울이었지. 꽁꽁 언 한강을 넘어 아산까지 얼어 죽지 않고 걸어간 것만도 기적이었어.
친정 마을에 들어설 때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얼마나 정겹고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몰라.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뛰어나오는 엄마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가 몰라.
귀향했을 때가 내 나이 마흔이 넘었어. 이제는 내가 주워온 아이가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가난한 부모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지. 다들 굶주리는 전쟁의 와중에도 부모님과 친척들의 환대를 받으니 다시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네 아버지도 선거에서 떨어진 자기 고향보다는 처가 동네가 마음 편했나봐. 친정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흙벽돌을 찍어 집을 짓고 살게 되었지. 그 세월이 벌써 40년이구나.
토막가 사람들
우리 세 식구 고생한 이야기는 너도 잘 알고 있으니 하지 않아도 되겠다. 아, 토막가 이야기는 해야지.
전쟁 중에 수많은 북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 왔어. 정부는 전국 곳곳에 집단촌을 만들어 그 사람들을 살게 했지. 우리 동네에도 애들까지 2백 명에 이르는 북한 사람들이 들어왔어.
우리 부부는 난민을 돌보는 일에 앞장섰어. 네 아버지는 북한 출신들과 술을 마실 때면 이렇게 말했어.
“인민의 행복을 위한 제도가 되어야지, 제도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면 되나? 그건 올바른 사회주의가 아니야.”
독립운동가라고 존경받아 인맥이 넓던 네 아버지는 군청의 도움을 받아서 공유지인 야산을 개간해 북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었다. 방 한 칸에 부엌만 딸린 초라한 집이라도 50가구나 되는 큰 동네였지.
완공된 다음에는 마을 이름도 네 아버지가 직접 지었어. 식민지 때 서울 변두리에 지어진 움막들을 토막집이라고 했지. 너의 아버지는 토막집이 마을을 이뤘다 해서 ‘토막가(家)’라고 지어주었어.
마을을 세우기는 했지만 먹고 사는 게 큰일이야. 김연진 씨는 토막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온천이 있는 온양읍에 큰 육군병원이 있을 때야. 병원 시트를 세탁해 주면 밀가루 배급도 나와. 맑은 날이면 마을 앞 개천에 토막가 여자들이 전부 나와서 시트를 빨았지. 개울둑이며 나뭇가지가 아주 멀리까지 하얗게 되면 장관이었다.
우리 부부는 유물론을 배운 사람들이라 신앙 같은 거 없어. 그런데 성당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주는데 신자들에게만 준다는 거야. 할 수 없이 우리가 앞장서서 토막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성당에 나갔지.
북한 인민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 중에 북한행을 거부하고 남한을 택한 이들이 수만 명이나 됐어. 반공포로지. 전쟁이 끝날 무렵에 풀려난 반공포로들은 고향 사람을 찾아서 월남민 정착촌을 찾아다녔어. 정부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쌀도 주고 밀가루도 줬어.
토막가에도 반공포로들이 많이 찾아왔어. 아는 사람을 만난 경우도 있지만 대개 한동안 머물다가 어디론가 떠나더라.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갔겠지. 그래도 덕분에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었어.
유엔에서 온 구호물자를 배급받는 일도 김연진 씨의 몫이었어. 유엔에서 옥수수가루, 밀가루, 우유가루, 설탕, 소금 같은 식량을 보급했는데 김연진 씨가 책임을 지고 몇 번이나 서울에 올라가 물품을 받아와 공정하게 분배했지.
의식주가 해결된 뒤에는 공부도 가르쳤어. 학교 갈 형편이 못되는 피난민 아이들을 위해 마을회관에 공부방을 열어 한문도 가르치고 한글과 숫자도 가르쳤지. 원주민 아이들까지 배우러 오니 스무 명이 넘었어. 나는 보조 교사였는데 김연진 씨가 바쁘다보니 내가 더 많이 가르쳤지.
공부방은 무료강습소나 마찬가지였어. 서당도 일 년에 쌀 한 가마니를 받는데 우리는 피난민 아이들은 한 달에 나무 한 짐씩, 원주민 아이들은 가을에 볏짚을 내도록 했어. 회관에 불을 때야 따뜻하게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나무나 볏짚을 내지 못해도 상관없이 가르쳤고.
네 아버지나 나나 토막가 사람들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 살림에 도움이 되는 건 별로 없었어. 너무 양심적이라 공공의 재산이라면 쌀 한 톨도 건드리지 않았거든. 너도 알다시피 동네에서 우리보다 어렵게 산 집은 없을 거야. 우리 부모님은 피난민보다 못 사는 너희가 무슨 구제 사업을 하냐고 핀잔을 주곤 했지.
시골 살면서 내 땅 한 평 없었어. 전쟁 통에 두고 온 서울 집에는 너희 작은아버지가 들어가 사니 팔수도 없었지. 자기 농토 없는 농촌 생활이란 게 뻔하지. 소작이라도 해야 하는데, 너희 아버지는 굶어 죽을망정 남 밑에서 일할 위인이 못되니 내가 동네방네 농사일을 해주며 살았지.
닭도 꽤 많이 키웠지. 친척들에게 계란을 팔아서 쌀이니 반찬을 사먹고… 닭 키우는 데는 네 도움도 컸다. 네가 봄부터 가을까지 개구리를 잡아 먹인 덕분에 우리 닭들은 살이 통통하고 계란도 맛이 좋아 인기였지.
철한이처럼, 너도 참 똑똑했어. 개구리를 잡아도 힘들게 맨손으로 뛰어다니지 않고 대나무로 고무줄 총을 만들어서 아주 쉽게 잡았잖니. 네가 잠깐만 나갔다 오면 통에 개구리가 가득했지. 한글도, 한문도 피난민 공부방에서 어깨너머로 다 깨우치고. 제대로 공부를 시켰다면 철한이처럼 수재 소리를 들었을 텐데, 공업학교조차 수업료를 못 내 그만두게 한 것이 내 평생의 한이다.
돈을 벌려고 애는 썼지. 누에치기 하느라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팔다리가 쑤신다. 동네 사람들에게 누에치기를 권한 건 나였어. 처음에는 다들 무척들 좋아하더라. 거의 온 동네 여자들이 누에를 키웠지.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방마다 잠사를 만들고, 봄부터 가을까지 정말 힘들게 일했지.
누에가 컸을 때, 마지막 뽕잎 주기가 제일 힘들었어. 이쪽부터 뽕잎을 주기 시작해 저 끝에 갔다가 돌아오면 이쪽의 뽕잎은 하나도 없어. 내가 여기는 뽕잎을 주지 않았나, 번번이 의심을 했을 정도야. 다시 처음부터 뽕잎을 주다보면 어느덧 새벽이 와버려. 밥도 싫고, 오로지 실컷 잠을 자고 싶었지.
그렇게 일 년에 세 번을 되풀이하고, 장마철이면 비에 젖은 뽕잎을 일일이 닦아야 하고… 그 고생을 해봤자 거의 벌이가 되질 않았어. 누에가 돈이 좀 된다니까 너도나도 사방에서 키우니 과잉생산이었지, 누에치기부터 비단 짜기까지 하겠다던 나의 어린 시절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던가, 돌이켜 생각하면 웃음만 나와.
비록 경제적으로는 실패하고 몇 해 못 가 포기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때였다. 마침내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한 거니까. 너희 아버지도 그때만은 밤새워 함께 일했고 공고를 중퇴하고 돌아온 너까지 같이 일했지. 자식이 할 수 있는 제일 큰 효도는 부모 옆에 있어주는 거라는 걸 그때 알았다.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제 더 할 말이 없구나.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고, 죽을 만큼 고생한 것도 없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조선견직에서 함께 싸운 친구들이 가끔 생각난다. 한 명이라도 살아있다면,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구나. 정숙이, 남겸이, 복금이, 소재, 혜정… 친구들이 보고 싶다.
아들의 말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면요, 근본이 선한 분들이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마을의 경조사나 토막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서는 걸 제가 참 많이 봤거든요. 아무 이익도 없는 일인데도 참 헌신적이셨지요.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분들이었다고 할까요.
또 한편으로는 참 똑똑하신 분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똑한 사람이 평생 자기 땅 한 평 못 사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쁜 사람이 부자 되기가 쉽지,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부자 되기란 원래 힘든 거 아닙니까?
동네 어른들은 만일 우리 어머니가 여고만 다녔어도 장관은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했지요. 그만큼 말도 잘하시고 인정도 많고 활동적인 분이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와 저를 먹여 살린 게 어머니였지요.
아버지는 그야말로 선비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기보다 책 읽고, 신문 보고 사람들 가르치는 게 딱 맞는 사람이었지요. 장모가 되는 저희 외할머니는 자기 딸 고생시킨다며 은근히 사위를 구박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유엔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서울에 올라갈 때면 꼭 저를 데리고 갔지요. 종로 2가쯤 되려나, 아버지 친구들이 드나드는 어떤 사무실에 가면 ‘5일회’니 ‘수요회’니 하는 모임들이 열렸어요. 어린 나는 무슨 활동을 하는가 알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와 친구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사무실에서 바둑을 두며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욕한 기억이 납니다. 함께 칼국수를 먹으며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말들을 나눈 기억도 나고요.
군사독재가 무서웠지만, 아버지를 꺾지는 못했답니다. 아버지는 우리 선장면에서 동아일보를 구독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온갖 압박을 받았지만 끄덕도 않으셨지요.
당시 서울신문은 어용이고 동아일보는 야당지여서 시골은 식당이든 이발소든 학교든 어디를 가나 서울신문뿐, 동아일보는 보급소조차 희귀한 시절이었지요. 동아일보 보급소는 군청이 있는 아산읍에 하나뿐이니 신문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배달부가 우리 집까지 올 수는 없었지요.
아산군청에서 선장면으로 공문을 나르는 전령이 있었어요. 동아일보 아산지국에서 전령에게 그날 내려온 신문을 주면 전령은 면사무소에 온 길에 바로 옆에 있던 국민학교 수위실에 놓고 갑니다. 그럼 제가 찾아서 아버지께 갖다 드리는데, 이 과정이 보통 며칠은 걸리니 신문이 아니라 구문이었지요.
경찰지서장이며 면장, 교장 할 것 없이 아버지를 볼 때마다 동아일보 끊고 서울신문을 구독하라고 권해요. 집까지 찾아와서 압력을 가한 적도 있습니다. 면장이 찾아왔을 때 아버지가 능청맞게 한 대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왜들 그랴? 난 신문소설 보려고 구독하는 거여. 내갸 무슨 소설을 보든 당신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잖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란 말이지.”
아버지의 과거 전력을 알아서인가, 되먹지 못하게 괴롭히는 공무원은 없었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동아일보를 구독할 수 있었지요. 요즘 동아일보가 보수반동 신문이라고 비난받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네요.
자, 제 이야기도 끝났습니다. 이제 저도 손자들 돌봐주며 사는 늙은이가 되고 보니 갈수록 부모님이 보고 싶네요. 거동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어머님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고 싶은데 자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찾더라도 일본어로 되어 있어 번역도 어렵고 말입니다. 그래도 계속 찾아보렵니다. 그것이 자식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