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첫 사랑 순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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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순희를 찾아서

*이 글은 월간 <시대> 66호(2019.03)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1.

작가 선생, 오늘은 골치 아픈 노동운동사 녹음일랑 잠시 접어두고 나의 사랑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평생 진보운동을 했으니 다들 나를 골수 좌파로만 생각하는데, 내게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온 첫사랑이 있었답니다.

대전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였지요.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1974년 12월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는 독서실이 있었잖아요? 남녀 학생들이 밤새 공부를 하는 곳이죠. 겨울이라 춥다보니 난로 주변에 모여들어요. 여럿이 연탄난로 뚜껑에 오징어를 구워 나눠 먹다가 눈이 맞았어요.

이름은 김순희, 나랑 동갑이었답니다.

첫 입맞춤의 새벽이 아련하네요. 성탄절을 얼마 앞뒀을 때였어요. 어떻게 대화를 꺼내게 되었는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남이 보면 안 되니까, 푸르스름한 여명이 도시의 뒷골목까지 스며들 무렵, 우린 함께 걷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아침 햇살이 밝아올 무렵 첫 키스를 했습니다. 둘 다 난생 처음 해보는 어설픈 입맞춤이었지만, 황홀했어요. 마치 생명의 비밀을 엿본 듯 신비로운 경험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해가 바뀐 1975년 1월, 우리는 거의 매일 새벽길을 함께 했습니다. 독서실에 가는 게 아니라, 순희를 보러 간 거지요. 순희는 이마가 넓고 머리칼은 갈색이었어요. 커다란 눈매가 서글서글하니 퍽 이국적이어서 걸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눈을 훔쳐보곤 했지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가 몰라요. 주로 책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각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며 집안 식구들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 같아요. 시내를 다 벗어날 때까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요.

순희의 아버지는 경찰관이고 큰오빠는 군인이었어요. 아주 보수적인 집안이었지요. 서울서 대학에 다니는 큰형에게 정치적 영향을 받은 내가 벌써부터 반정부 성향을 띈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상관은 없었어요. 우리는 정치 이야기 같은 거 할 새가 없었으니까요. 대화가 끊어지려 하면, 너무 추워서 입이 얼어붙을라치면, 나는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고, 순희는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데미안>의 한 대목을 암송했어요. 순희 덕분에 나도 독일 소설을 열심히 읽었답니다.

만남의 중독에 빠진 듯, 거의 매일 밀회를 하느라 바쁜 1월을 보내고, 중학교 졸업식이 왔어요. 나는 전교 1등으로 교육감상과 이사장상을 탔는데 부상으로 손목시계도 받았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바로 전날도 순희를 만났어요. 부상으로 받은 손목시계를 차고요. 인적 드문 길만 찾아다니다보니 대전역 북쪽의 으슥한 언덕길을 걷게 됐어요. 밤 9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깡패들이 나타나지 뭡니까? 칼을 들이밀면서 가진 것 다 내놓으래요.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교육감상으로 받은 새 손목시계를 빼앗기고 말았지요.

깡패도 인정이 있던 시절이었는지, 우리가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니까 불쌍하다면서 버스 차비는 돌려줍디다. 수험표도 뺏지 않고요. 그런데 철없는 우리는 그 돈으로 분식집에 들어가 튀김을 사먹었어요. 무서운 일을 당했는데도 즐겁기만 했지요. 순희 집까지 먼 길을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됐더라고요. 그래도 피곤하지가 않았어요.

다음날, 입학시험을 치르고 또 만났지요. 이른 어둠이 찾아온 초저녁이었어요. 그때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영하 15도는 될 매서운 영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전을 가로지르는 갑천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인적 호젓한 곳에서 포옹을 했어요.

순희를 안고 있으려니 추위로 덜덜 떨던 몸이 갑자기 끓어오르더군요. 그래도 성관계에 대해서는 막연한 공포심이 있었어요.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한 지붕 아래 잤어요. 갑천에서 멀지않은 순희의 친척집이었는데 무슨 핑계를 댔던가, 순희는 나를 빈 방에서 혼자 자게 해줬어요. 그리고는 밤중에 몰래 내 방으로 찾아왔는데 불 꺼진 방, 뜨뜻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누웠지만 손만 잡고 있다가 돌아갔어요.

눈이 펄펄 내리는 밤, 대전역에서 서대전역까지 먼 길을 걸어간 적도 있어요. 손을 잡고 뒷골목으로 걷다가 사람 많은 길을 만나면 누가 볼세라, 내가 앞장서고 순희는 몇 미터 뒤에 따라왔어요. 그날 밤, 가로등에 비친 눈발이 순희의 넓은 이마 위에서 춤추다가 긴 눈썹 위에 맺히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가끔은 순희 집에 찾아가 소리쳐 불러내기도 했어요. 순희 어머니는 다정하고 자상한 분이었습니다.

“순희야! 순희 있니?”

대문 앞에서 우렁차게 외치면 순희 어머니가 먼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어요. 좀 있으면 순희가 옷을 챙겨 입고 마루에서 사뿐히 내려와 웃으며 나왔지요.

지금은 전망 좋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그때는 시내에도 야산이 남아있었지요. 대낮에 사람 없는 숲길을 걷다가 뒤에서 순희를 껴안아 본적도 있어요. 순희의 자그만 젖가슴이 풋풋했어요. 그 부드러운 살결은 내 영혼을 떨리게 했지만 거기까지였어요.

3월이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성적을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만나지는 말고 편지를 주고받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어요.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아보는 것이 내 삶의 열락이 되었지요.

 

2.

일주일에 두세 통은 편지가 오간 것 같아요. 우리는 편지에 사랑한다느니 보고 싶다느니 하는 말은 쓰지 않았어요. 쓸 필요가 없었지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새로 읽은 시와 소설에 대해, 새로 듣게 된 음악에 대해 썼지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상하게 답장이 오지 않는 겁니다. 나는 편지를 쓸 때마다 왜 답장을 쓰지 않느냐고 투덜댔어요. 그래도 답장이 없어요.

참을 수가 없어 순희네 집에 찾아 갔지요. 마침 어른들이 없었어요. 순희가 들어오라 해서 방까지 따라갔지요. 순희의 방에서는 여자의 향기가 났어요. 남자 형제들만 사는 내 방과는 달랐죠.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순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했어요. 이상했어요. 전과 달리 나를 밀어내는 겁니다. 싫은 표정도 아니면서 완곡하게 나를 절제시켰어요.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서운함을 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여름방학에도 순희 집에 찾아가 불러냈어요. 둘이 모처럼 오랫동안 산책을 했는데 대낮이라 손도 잡지 못하고 떨어져 걸었어요. 충남대 후문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팔이 나의 몸을 스치는 거요. 아! 그 부드러운 살결, 그 아리아리한 촉감이라니!

가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내가 바빴어요. 유신헌법으로 사실상 영구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역사의 무서움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을 때가 아닙니까? 민주주의란 단어만 입에 올려도 눈물이 핑 돌던 시절이었죠. 나는 동기생 몇 명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큰형에게 빌린 <사상계>, <다리> 같은 반정부적인 월간지를 읽으며 분노를 쌓아 갔지요. 공부도 해야 되지, 매일이다시피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편지 쓸 여유도 없었어요. 가끔씩 답장 없는 편지만 보내다가 겨울을 맞았지요.

겨울방학에 딱 한 번 순희를 만날 수 있었어요. 아는 교회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장이었어요. 내가 시낭송을 맡았는데 순희가 온 겁니다. 보는 눈들이 많으니 웃음만 주고받는데, 웬일인지 순희의 눈빛은 짝 잃은 사슴마냥 외롭고 슬퍼 보이더군요. 내가 따로 만나자고 해도 고개만 젓는 거예요. 순희가 내게서 멀어진다는 느낌에 싸한 가슴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슬프고 불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순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어요. 하루는 마음먹고 다시 순희 집에 찾아갔는데 어머니가 나오더니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여전히 친절했지만 나는 쓸쓸했지요.

그리움만 쌓여가던 봄날이었습니다. 보슬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멀리서 순희가 정류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뛰는 가슴보다 더 빨리 달려갔지요. 가까이 보니 순희가 아니더라고요. 얼마나 허탈하던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제는 환상까지 보게 된 거지요.

여름방학을 며칠 앞두고 나와 친구들은 기어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밤중에 몰래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 등사기로 박정희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 교실에 뿌렸다가 들통이 난 거지요. 학교에 난리가 나고, 형사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우리를 잡아갔어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빨갱이 짓을 한다고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몰라요. 고등학생인 우리를 구치소까지 보내더군요.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출소해 보니 학교에서는 퇴학이 되어 있고, 매일이다시피 형사가 집에 찾아와요. 안되겠던지, 부모님은 나를 형이 대학에 다니고 있던 서울로 올려 보냈어요. 종로학원에 등록해 검정고시로 대학에 가라는 거였어요.

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시키는 대로 서울에 올라가 형과 자취를 하며 학원에 등록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순희 생각이 났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순희에 대한 갈망을 절제하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나 여름에 잠시 대전에 내려갔을 때, 우리 집보다 먼저 순희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우리는 열렬히 포옹을 했지요. 순희는 내게 벌어진 일들을 잘 알고 있었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왜 자기가 그렇게 매정하게 굴려고 애쓰는지,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가는 끝까지 말하지 않더군요.

우리는 그날 헤어지면서 약속을 했어요. 다음해에, 대학 예비고사를 치르고 성탄절 날 명동성당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만나자고요. 그것이 기나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지요. 순희는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 몰라도,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3.

약속은 했지만, 순희에 대한 갈망을 억제할 수는 없었어요. 열심히 종로학원에 다니고 있던 이듬해 봄, 고향 친구로부터 순희가 서울 아현동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보는 그것뿐이었지만, 그리움을 참을 수가 없더군요. 성탄절의 약속을 잊고 순희를 찾아 나섰습니다.

학원을 빠지고 무작정 아현동으로 갔어요. 순희 아버지 이름의 세대주를 찾으면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현동은 아주 큰 동네더군요. 1동부터 11동까지 있던 것 같아요. 주소를 모르니 모든 동사무소를 돌기 시작했지요.

개인정보에 관한 까다로운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타인의 주민등록초본을 맘대로 떼어볼 수가 있었어요. 오후 5시 동사무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종일 아현동 동사무소들을 뒤지고 다녔지요. 그러나 끝내 순희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세대는 찾아내지 못했어요.

다른 방법도 없었어요.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고, 전화를 놓은 집도 거의 없던 시절이지요. 누군가 이사를 가버리면 본인이 먼저 편지를 해오거나 집에 찾아오기 전에는 연락할 길이 없었어요. 친구에게 다시 물어봤지만 아는 건 순희가 서울에 있다는 것뿐이었어요.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면 혼자 노래를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장현의 ‘미련’이 애창곡이었어요.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기약한 날 우리 없는데 지나간 날 그리워하네
먼 훗날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먼 훗날 당신이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는 마지막 가사가 마음에 사무쳤어요. 한참 부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듀엣 둘다섯이 부른 ‘긴 머리 소녀’도 자주 불렀지요. 고향을 떠나 공단에서 일하는 가련한 여성노동자들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노래지요. 순희가 공장에 간 것도 아니건만, 내게는 순희를 그린 노래로 들렸어요.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마침내 대학 예비고사를 치른 그 해 겨울, 1977년 12월 24일이지요. 약속대로 성탄 전야에 명동성당에 갔죠. 몹시도 추운 날이었는데 하염없이 성모상 앞에 서성이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순희는 끝내 오지 않더군요.

몇 시간이나 추위에 떨다가 포기하고 내려간 명동은 온통 성탄절 분위기로 화려했어요. 쌍쌍이 연인들이며 떼지어 몰려다니는 친구들로 물결쳤어요. 나만 혼자였어요. 나 혼자만 외로운 것 같았어요. 얼어붙은 몸으로 홀로 소주를 마시는데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더군요.

대학에 가서도 순희는 만날 수 없었어요.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가담해 군사독재와 싸우느라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지요. 잇단 교내 시위며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바빠서 혼자 사색하고 사랑의 열망에 사로잡힐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먼저 말했지만, 나는 대학 2학년이던 1979년 여름에 교내시위를 주동했다가 퇴학당하고 구속되었는데 가을에 박정희가 죽으면서 몇 달만에 석방되어 복학했지요. 그러나 또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작되어 이듬해 봄 5월에 광주학살이 일어나고 또 다시 구속되지요. 그 와중에 연애 같은 건 생각하기 어려웠지요. 엄혹한 군사독재 아래 시나 소설을 읽고 연애를 하는 건 지식인의 사치라는 생각이 앞선 때였으니까요.

순희를 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대전 집에 가도 순희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갔으리라는 생각에 순희가 살던 집에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언젠가 세상이 좋아지면, 민주주의가 이뤄지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뿐이었지요.

나는 결국 두 번째로 감옥에 가면서 대학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석방되고는 인천의 주물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고, 또 다시 감옥에 갔다 와서 노동운동을 함께 한 여자후배와 결혼까지 합니다. 지금의 아내지요.

아내는 대전 출신의 동갑내기였어요. 더구나 순희와는 같은 학교 동기동창이었지요. 그런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가 몰라요. 연애할 때 아내에게, 나는 평생 단 한 사람 순희만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노라고 고백을 했어요.

아내는 웃는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더군요. 너그러움을 가장한 그 웃음 뒤에 질투가 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잘 넘어간 것은 아내가 남달리 관대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승리자였기 때문이었지요. 나중에 아내의 속마음을 알고, 나는 다시는 아내에게 순희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됩니다.

노래방이 널리 보급된 게 1990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을 이루면서 우리도 노래방에 갈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요. 단체를 같이 하는 이들과 가끔 노래방에 가면 나는 여전히 ‘미련’과 ‘긴 머리 소녀’만 열창했어요.

눈 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대목에 이르면 혼신의 다해 소리쳐 부르기 시작해 마지막에 널 위해 기도하리라는 대목에서는 신들린 사람처럼 절규를 했지요.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모를 순희를 향한 그리움이었어요.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떠나간 순희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던 거지요. 사람들은 내 속마음도 모르고, 환호성을 올렸지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노동자의 정당을 만든다고 전국을 뛰어 다니면서 순희 생각은 조금씩 잊혀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순희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서기 2000년이 시작되고 몇 달 후였습니다. 헤어진 지 25년 만이었지요.

 

4.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동료 중에 주향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대학 후배인 데다 같은 조직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함께 한 막역한 사이였지요.

주향과는 약간의 사연이 있었어요. 주향이가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나서서 두 번이나 남자를 소개해주었는데 그때마다 거부를 해요. 그 과정에서 주향이 좋아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나도 주향을 좋아했지만 애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아내가, 이상에서는 순희가 버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어느 날은 대전에서 새벽 2시까지 회의를 하고 내가 주향이 숙소를 책임지게 되었는데 여관방을 잡아 방까지 들어갔다가 그냥 나온 적도 있어요. 무척 미안하더군요.

주향이로부터 순희 소식을 들은 곳은 대학로의 한 포장마차였습니다. 주향은 그 무렵 노동운동을 그만 두고 모 대학원에서 운영하는 경영자코스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다른 일로 서울에 간 길에 불러낸 거지요. 오랜만에 둘이 소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회고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주향이의 입에서 김순희라는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닙니까?

“형, 김순희라는 분을 알아요?”

깜짝 놀란 나는 말을 더듬었어요.

“어? 어, 어떻게 주향이가 순희를 알아?”

“김순희라는 분이 어렸을 때 형하고 친했다던데요?”

너무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주향이는 설명하더군요. 야간 대학원에서 순희를 만났다는 겁니다.

“성격이 무척 활달하고 개방적인 분이라 다들 좋아했죠. 나하고도 친해져서 카페도 같이 가고 노래방도 여러 번 갔는데 대전 출신이라기에 무심코 형을 아냐고 물어봤어요. 뜻밖에 잘 안다고 하잖아요. 형이 감옥 간 거부터, 최근의 근황까지 대충 알던데요?”

순희가 활달하고 개방적이라는 말이 조금 의아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죠.

“사는 곳은 어디래?”

“구로동에 산대요. 결혼해서 애도 둘 낳았는데 경제적으로 퍽 어려웠나 봐요. 그래도 자신의 사업을 개척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당당해서 보기 좋았어요.”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묻지를 못했어요. 내가 순희를 그리워한 만큼, 주향이도 나를 연모해왔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더 물어보는 것은 주향이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번호 알아?”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더니 전화번호가 집에 있다는 겁니다.

“내게 좀 알려 주겠어?”

“그럴게요.”

주향은 대답했지만, 끝내 내게 전화번호를 보내주지 않더군요. 고의는 아니었을 거고, 무심히 잊어 버렸을 거지요. 나 역시 재촉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향이 마음을 아니 말입니다. 주향이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나 역시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작가선생도 알다시피 그 사이 내게는 큰 불행이 왔지요. 예전부터도 당뇨니 혈압이니 몸이 엉망이었는데 방치를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거지요. 같은 노동운동을 해도 노동조합에 속해 있으면 정기검진이라도 받는데 우리처럼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어디 그게 되나요? 스스로 나를 쓰러뜨린 셈이지요.

건강관리 따위는 신경도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했어요.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되자, 진보운동의 칼날은 내부로 향하지요. 아시다시피, 함께 싸워온 동지들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과 분열이 얼마나 극심해졌나요? 모든 비판, 분열에는 다 그럴싸한 명분이 붙지만, 조금만 큰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소소한 일로 동지들에게 칼질을 하는데 질리고 말았답니다. 내부쟁투가 한참 심할 때는 1천 년 전 소동파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은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평생 사적인 이익이나 권력욕 없이 옳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끼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로 적들보다 더 날선 비난과 반목으로 갈라지는 모습들을 보며,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달게 되면서 사람들 속에 내재한 악의 본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보며, 세상이 무섭기까지 하더군요. 인간의 존재 자체에 회의가 오기까지 하더군요. 어쨌든 그 얘기는 오늘의 주제는 아니니 넘어갑시다.

참으로 희한한 것이,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줄곧 순희 생각이 나더군요. 살아서 병원 문을 나서리라고는 생각 못할 때였지요. 죽기 전에 순희를 한 번만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오락가락 하더군요.

다행히도 머리에 구멍을 내서 피를 빼내는 정도로 수술이 끝났지만, 작가선생이 보다시피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눌해지고 말았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었지요. 겨우 오십대 중반에 말입니다.

 

5.

수술을 받은 후 서울을 등지고 대전으로 낙향에 산 지 몇 해만에 모교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잘 아는 후배가 교감으로 승진하면서 나를 시사강좌의 강사로 초빙한 겁니다.

남학교였던 나의 모교는 남녀공학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하면서도 절친한 후배의 요청이라 기꺼이 승낙했지요.

고등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연을 하면 조는 학생이 태반이잖습니까? 그래서 학생들에게 질문 20문항을 만들어 보라고 했어요. 본인들이 궁금한 걸 풀어주면 흥미를 잃지 않으니까요.

“선생님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세 번째 문항이었을 겁니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앳된 남녀 학생들을 보며 감상에 사로잡혔나 봐요. 학생들의 열렬한 요청을 못 이겨 순희와의 첫사랑을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순희의 이름은 물론 말하지 않았지만, 아내 외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내 생애 제일의 비밀을 털어놓은 겁니다.

학생들은 엄청 좋아하더군요. 긴 이야기가 끝나자, 남녀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소리를 쳤어요.

“선생님, 첫사랑의 여학생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나요?”

“꼭 만나보세요, 선생님!”

순희와의 추억에 가슴이 젖어버린 나는 그 자리에서 약속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가슴에만 묻어두고 살아왔는데, 후배님들의 명령을 받들어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첫사랑을 찾아서 만나겠습니다.”

사실 순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게 없죠. 순희의 여고동창생들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좁은 지역사회에서 내가 첫사랑을 찾고 있다고 하면 금방 소문이 날 것이고, 바람보다 빨리 아내의 귀에 소식이 도착할 테니까요. 아내에게 질투의 고통을 주고 싶지도 않고, 이런 일로 다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평생을 국가권력과 싸우느라 감방에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치고 너무 소심한가요? 소심한 거 맞습니다. 하지만 순희가 스쳐지나간 풋사랑에 불과했다면 그토록 조심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아무튼 간접적인 경로로 순희를 찾아야 했습니다. 머리를 굴려 보았지요. 모교에서의 강연을 주선한 교감선생이 적임자였습니다. 그가 김순희를 찾는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습니다. 비밀을 지켜줄 신중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직접 말하기 쑥스러워 이메일을 보냈지요.

‘술 한 잔 마신 김에 부탁하네. 먼저 모교 강연 때 고백했던 첫사랑 여인을 찾아줄 수 있을까? 여인의 이름은 김순희, 중학교 3학년 말에 만나서 2년 간 열애를 했으니 분명 그녀도 나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거네. 내가 찾아볼 수도 있으나 내가 아는 모든 여성이 집사람과 연관되어 있어 운신이 어렵네. 조용히 찾아주기를 부탁하네.’

바로 다음날 답장이 왔어요. 순희가 다닌 여학교의 총동문회 명부를 입수해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냈다는 겁니다. 집은 아니고 서울의 사무실 연락처였어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아, 그러나 전화를 해보니 신호만 가고 아무도 받지를 않아요. 한국통신에 문의해보니 이미 여러해 전에 해제된 전화번호라는 겁니다. 새로 개설한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니까 개인정보라서 공개할 수 없대요.

후배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국번만 바뀌고 뒤 번호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면서 국번 앞에 1부터 9까지 숫자를 추가해 일일이 걸어보라고 해요. 진짜 그렇게 해보았죠. 없는 번호가 더 많고 받아도 엉뚱한 곳이더군요.

찾기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찾으면 될 것 같았습니다. 주민등록번호만 파악하면 거처를 알아내는 방법이 또 있었거든요. 잘 아는 사회보험노조 조합원에게 주민등록번호를 가르쳐 주면 개인정보를 빼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배에게 말했습니다. 순희의 모교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부탁해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달라고요. 사랑에 눈이 어두워 불법행위를 교사한 거지요. 며칠 후, 후배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형, 미안해요. 범법행위 시킨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가며 김순희 씨가 다닌 여학교 행정실장에게 부탁했는데, 생년월일만 등재되어 있고 주민등록번호는 없답니다. 차라리 경찰청에 있는 제자 녀석에게 부탁해 볼까요?’

고마운 말이지만 생활기록부를 열람한 것만도 불법인데 경찰을 동원했다가 들키면 후배와 그 제자의 밥줄까지 끊어놓을 판이었습니다.

‘아냐,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다른 길로 찾아볼게.’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있나요. 공상만 했습니다. 순희의 집을 알아낸다면 미리 꽃다발을 한아름 보내고, 다음 날 찾아가 ‘띵동’ 벨을 누르는 겁니다.

“당신은 누구시오?”

순희의 남편이 나와서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거지요.

“나는 순희의 첫 남자입니다. 너무 늦게 인사를 드리오.”

사실상 포기한 채 또 얼마나 지났을까, 교사 후배가 흥분해서 직접 전화를 해왔어요.

“형, 찾았어요! 마침내 찾았어요. 전화번호는 아니고 이메일 주소예요. 그렇지만 확실해요. 김순희 씨가 얼마 전까지 여고동창과 주고받은 메일 주소랍니다.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오히려 다행이었지요. 메일이라면 내 어눌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되니까요. 낭랑했던 소년의 목소리만 기억할 그녀에게 늙고 병든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후배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순희의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 이름부터 밝히고 물었지요.

‘40년 전에 만난 소녀를 잊지 못해 지금까지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기억이 나시는지요?’

번개처럼 답장이 왔어요. 기적이었습니다.

‘정말 모처럼 심장을 뛰게 하는 소식이네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님의 소식을 당사자로부터 듣게 되는 일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서 연락이 된 것을 하늘에 감사합니다. 가끔 풍문으로 님의 소식을 들었답니다. 만날 기회는 있었지만 님이 불러줄 때까지 기다렸지요. 반갑습니다, 순희.’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온 내가, 나도 모르게 양 주먹을 모아 이마에 대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는 거 아닙니까!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 사랑 순희를 만나게 해주시는군요.”

재회의 날은 일주일 후인 6월 중순으로 잡혔습니다. 내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안 순희가 대전으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장마철이었지요. 만나기 전날 밤, 하늘은 밤새 천둥 번개로 우르렁거렸어요.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한 여인을 잊지 못해 재회의 날을 기다리며 산 지 40년, 그 긴 세월이 끝나는 날인데 어찌 잠이 오겠습니까?

밤새 거의 잠을 못 이루고도 새벽에 일어나 님에게 무슨 선물을 드릴까 뒤적여 보았습니다.

먼저 고른 선물은 독서실 회원증이었습니다. 우리를 처음 만나게 해준 독서실 회원증을 나는 아직도 갖고 있었던 거지요. 그 작은 종이쪽이야말로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제일의 증거였습니다.

순희를 만나던 때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묵은 앨범을 뒤져보니 독사진이라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찍은 사진이 유일해요. 순희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했던 ‘그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챙겼습니다.

운동가요가 담긴 씨디도 한 장 골랐어요. 파란만장한 생애, 사적인 이익 한 번 챙기지 않고 역사와 민중을 위해 살아온 동료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순희뿐 아니라 그녀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전날 미리 써둔 편지까지, 선물을 챙겨 책상 앞에 앉으니 그녀가 서울을 떠나는 고속철도에 오를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편지봉투에 부기했습니다.

‘먼 길 오고 있는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벌써 그대에게 가 있습니다.’

 

6.

아침 9시, 아픈 다리를 끌고 집을 나섰습니다.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승용차를 끌고 온 후배의 도움으로 꽃집에 들려 꽃다발까지 한아름 샀지요.

대전역 2층, 고속철 개표구에서 기다리는데 유리창에 비친 구부정한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더군요. 힘 빠진 다리 쪽으로 상체는 기울고, 운동을 못하는 데다 약물 후유증으로 얼굴은 퉁퉁 붓고 배는 불룩 쳐져 있었습니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서있는 것만도 힘들어 얼굴과 옷은 금방 땀에 젖어들었습니다.

‘순희는 얼마나 늙었을까? 넓은 이마에 주름은 얼마나 그려졌을까? 오뚝하던 코와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은 그대로겠지? 갈색 머리는 또 어찌 변하였을까? 수줍은 듯 웃던 그 미소는…’

먼저 알아본 것은 순희였습니다. 먼 과거 속에 빠져있던 내 앞에 한 여인이 다가와 섰어요. 말은 필요 없었지요. 준비한 꽃다발을 건네고 가볍게 포옹을 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어요.

‘순희야, 왜 인제 오는 거니?’

세월은 순희의 모습도 바꿔 놓았더군요. 오뚝한 코와 입술과 눈은 그대로였지만 갈색 머리칼은 푸석푸석해졌어요. 나는 순희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마음속으로 속삭였습니다.

‘순희야, 왜 인제 왔어?’

순희는 손수건을 꺼내 땀 흘리는 내 이마를 닦아주고, 절뚝거리는 나의 손을 잡아 부축해 주었어요. 마치 서로의 세월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의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싣고, 가만히 순희의 손을 만져 보았습니다. 소년에게 첫 키스의 아픔보다 더 날카로운 추억을 새겨주던 그 보드랍던 손이 아니었습니다. 궁핍을 견디며 두 아이를 키워온, 거칠고 주름진 손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억압당하였던 우리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던 우리의 사랑을 추억하며, 하염없이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먼저 간 곳은 순희가 살던 동네였습니다. “순희야!” 부르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마중 나와 주던 그 집은 없어졌지만, 대문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그대로더군요. 순희와 내가 돌아와 골목길 앞에 서 있듯, 그 골목길도 우리 앞에 돌아온 거지요.

한 장의 사진을 아니 남길 수 없지요. 사진은 후배가 찍어주었습니다. 먼저 순희의 독사진을 찍고, 또 함께 찍었어요. 우리는 마치, 수십 년을 행복하게 살아온 초로의 부부처럼, 후배의 카메라 속에서 함께 했어요.

말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낯설어서가 아니라, 존중의 마음이었지요.

“순희씨, 기억나요? 싸락눈 내리던 날이었지요. 저쪽 구석진 곳에서 내가 그대의 앞가슴을 처음 만져 보았는데요.”

내 말에 순희는 조금도 쑥스러움 없이, 소녀 시절의 수줍음이라곤 없이, 큰 소리로 웃었어요.

“그랬어요? 난 기억이 전혀 안나요.”

조금 섭섭했지요. 그런데 서로 기억하는 주제가 다른 것뿐이었어요. 옛 동네에서 벗어난 승용차가 천변을 달릴 때 순희는 내게 물었습니다.

“기억나요? 이 다리 아래 갈대숲에서 내가 연설을 해보라고 했더니 님은 케네디처럼 연설을 잘 했어요. 얼마나 목소리가 우렁차고 발음이 좋았던지. 나는 그때 님한테 완전히 반해 버렸다는 거 알아요?”

나는 까마득히 잊었던 일이었습니다.

“아, 그랬던가요?”

“그럼요! 소녀의 혼을 빼가기에 충분했지요.”

우리는 대전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올랐습니다. 후배가 예약해둔 곳이었어요.

나는 생전 가보지 않은 고급 양식당에서, 우리는 포도주에 곁들인 고급스런 치즈며 빵과 샐러드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 긴 세월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마음이 이리 맞을 수 있는지,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받은 순희는 자기가 가져온 사진을 건네더군요. 처녀 때 찍은 사진과 순희가 낳은 두 아이의 사진이었어요. 처녀 때의 순희 모습에 중학교 3학년의 흔적이 남아있듯이, 다 큰 두 아이의 얼굴에도 순희의 흔적이 남아있더군요.

순희는 그림도 한 장 준비해 왔어요.

“선물이에요. 처녀 때부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조선시대 화가 혜원이 그린 ‘월하정인도’의 복사본이었어요. 조각달이 낮게 뜬 밤길을 걷는 연인 옆으로 한시가 들어간 그림이었어요.

‘달도 기운 깊은 밤,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달빛 아래 몇 시간이고 거닐던 그날들을 상징하는 그림을 준비해온 것만 봐도 순희가 나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지요. 순희가 그 시절의 추억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나는 그림을 받으며 말했어요.

“이 그림을 내 방에 걸고, 죽는 날까지 순희씨를 생각하지요.”

우리는 긴 세월을 거슬러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함께 거닐던 골목길과 야산을 떠올리며, 깡패들을 만났던 밤을 이야기하며 소리 내어 웃었어요.

“그런데 순희 씨, 예비고사가 끝난 성탄절에 명동성당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기억나요? 그때 왜 나오지 않았어요?”

수십 년이나 궁금했던 질문이었지요.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어요.”

“아니, 왜요?”

순희의 표정이 서글퍼지더군요.

“나는 님한테 편지가 올 때 마다 꼭 답장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님의 편지에는 왜 답장이 없느냐는 원망이 늘어가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는 편지 겉봉에 적힌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님의 집을 찾아갔어요. 어머니가 대문 밖으로 나오시더니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아들은 서울대 법대에 갈 아이니 만나지 말라고요. 내가 보낸 편지도 중간에서 가로채 다 불태워 버리셨다며, 다시는 내 아들 볼 생각 말라더군요.”

“아! 그럴 수가!”

정말 몰랐던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얘기를 해준 적이 없었어요. 아니, 기억조차 못하셨겠죠. 가해자는 기억을 못하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왜 순희 씨는 내게 그 얘기를 안 했어요? 왜 편지에 답장도 않고 나를 멀리 하냐고 몇 번이나 물어도 답을 안 했잖아요?”

순희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쳐갔어요. 여전히 이국적인 큰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어요.

“잊었는가요? 님도 내게 그랬잖아요. 고등학교 퇴학당하고 한 달인가 감옥에 갔다 온 후 내게 보낸 편지를 잊을 수가 없어요. 잠시 헤어져 있자는 내용이었죠. 편지도 하지 말고, 집에 오지도 말라고요. 그 편지를 보고는 친구도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확실히 우리 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고 체념을 했던 거죠.”

아, 미칠 것 같았어요.

“그 편지는 사랑을 그만 두자는 게 아니라 내가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으니 순희 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잠시 떨어져 있자는 거였지요. 형사들이 매일 우리 집 앞에 죽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랬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님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잠시 어두웠던 순희의 얼굴에 밝은 빛이 돌아오더군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눈을 감았어요. 눈을 감고 생각했지요. 지난 일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어머니에게 문전박대를 받고, 내게 절연의 편지를 받고 홀로 울었을 순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순희 씨를 찾으려고 아현동 동사무소를 전부 뒤진 적도 있어요. 대학에 가서도 오로지 순희 씨를 그리워하면서 연애 한 번 제대로 안 했어요. 여학생이 커피 한 잔 먹자고 하면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그리워하는 여자가 있다고 대답했어요.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내가 아현동 오빠네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부모님은 대전에 계셔서 주소를 옮기지 않았거든요. 대전 우리 집에만 갔더라도 연락처를 알았을 텐데요.”

웃음을 찾던 순희의 목소리가 다시 서글퍼졌어요.

“그렇지만 연락이 닿았다 해도 이뤄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처음부터 길이 달랐으니까요.”

“길이 다르다니요?”

“사실 나는 간간이 고향 친구들을 통해 님의 소식을 듣고 있었어요. 세 번이나 감옥에 갔다는 것, 노동운동하려고 공장에 다닌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죠. 누구와 결혼했다는 것도요. 요즘도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며 청빈하게 산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그러니 우리의 길이 맞닿을 수가 없지요.”

순희는 말했어요. 자기는 어려서는 나처럼 아웃사이더의 삶을 희구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인사이더의 삶을 살고 있다고. 결혼 초에는 몹시 궁핍했지만 이제는 강남에 점포를 가진 수완 좋은 여류사업가가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순희의 의류사업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의 대화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어요. 소녀 시절의 순희는 슬펐으나 중년의 순희는 밝았어요. 소녀 시절의 순희는 말수가 적었으나 중년의 순희는 청산유수였어요. 자기 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순희의 표정은 밝았고 음성은 낭랑하기만 했어요. 여느 50대 여성이라면 세파에 찌든 표정만으로도 나이를 숨길 수 없을 텐데, 순희는 밝고 명랑하기만 했어요. 푸석푸석한 머리칼만이 세월을 알려주는 것 같았지요.

순희가 이야기하는 내내, 우리는 서로의 이마가 부딪힐 듯 탁자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순희는 내 이마에 배어나는 땀을 닦아주며 말했고, 나는 연신 순희의 머리칼을 올려주며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며 열심히 들어주었어요. 그 긴 세월 들어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안타까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포옹을 했지요. 이번에는 한참이나 힘껏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힘없이 놓아주었어요. 순희의 몸이 떨어질 때, 내 몸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 썰렁한 느낌이었어요.

서울행 고속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로 들어가는 순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40년이나 간직했던 보물을 잃은 듯 허전하더군요.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순희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순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고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몇 해 전의 재회 이후로 다시는 직접 만나지 못했다는 거지요. 대신 가끔씩 메일이나 문자로 서로를 확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요즘의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렇듯이, 만나거나 통화조차 않고 글로만 대화를 하는 관계가 된 거지요. 그나마 세월이 가면 더 뜸해지겠지요. 평소에는 거의 연락이 없다가 해가 바뀌거나 명절 때면 새로 나온 아이콘을 넣어 안부 문자를 보내는 사이가 되겠지요. 아쉬움도, 슬픔도 없이 멀어져가는 그런 사이가 되겠지요.

작가선생,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말이 시시한가요? 그래도 나는 순희를 내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힘겹게 살아온 내 생애 한편에 늘 밝은 빛으로 존재해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순희가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순희의 추억을 되새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답니다. 순희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기를 희망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첫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닐까요? 미완성이기에 더 여운이 긴 것 아닐까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작가선생, 작가선생에게도 첫사랑이 있었겠지요?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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