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동경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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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만난 사람

*이 글은 월간 <시대> 65호(2019. 01~02)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2018년 12월 8일, 자유게시판에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서울 방문이 거의 확실하네요’라는 글이 달렸다.

‘뭔가 감동적이네요. 북한최고지도자가 서울을 방문하는 날이 이리 빨리 올 줄이야. 그동안 적폐 친일 군사독재 세력들이 막아온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민족이 하나 되는 역사적인 신호탄으로 봐야겠네요. 강성대국의 그날까지!’

올린 글에 환영하는 댓글들이 먼저 달린다.

‘평화와 경협을 위해 서로 윈윈하는 전략을 잘 짜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안정되고 부강한 한반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끊임없이 교류하다보면 김정은도 느끼는 게 많을 거고, 그게 곧 북미 간에도 좋은 영향이 가서 결국 핵 폐기로 갈 겁니다.’

뒤로 갈수록 부정적인 댓글이 많아진다.

‘김정은 서울 오는 거 보면 탈북자분들은 얼마나 치가 떨릴지. 6.25전쟁, 천안함,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과는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백만 살육한 전범단체 조선로동당의 괴수가 온다는데 위인 맞이 환영단 만드는 인간들은 뭔가요? 애국자 한 분 나서서 도시락 폭탄이라도 하나 던져 주었으면 좋겠네요.’

나중에는 싸움판이 되어 버린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 맞기는 해요?’

‘북한 소행이 아니면, 우리 군이 격침시켰다는 거야? 너 간첩이야?’

‘노인네는 태극기 들고 쥐박이, 박그네 면회나 가세요.’

‘그렇게 돼지새끼가 좋으면 너나 북으로 가라. 가족 데리고.’

댓글은 금방 100개에 육박하고, ‘회원 분란 유도 게시물’ 신고도 잇따르더니 글 자체가 열람 금지 되어 버리고 만다.

김정은으로 검색하니 비슷한 글들이 읽기도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다. 문득, 동경의 박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외국 여행이라곤 해보지도 않은 내가 혼자서 동경을 방문한 이유는 늙은 사회주의자 박 선생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10년이 더 지난 2007년의 일이다.

*****

박 선생은 사회주의자였고 내가 만났을 때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였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유물론자가 된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시작해 남로당 고위간부로 활동하다 월북했으나 남한 출신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한 후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온 인물이었다.

박 선생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나 대담에서 남로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대신 북한 정권을 비난함으로써 반공을 국시로 삼은 남한에서 살아남은 드문 경우였다. 생존의 대가는 외로움이었다.

남한의 보수우익은 남로당을 지지하든 북한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그를 잔존 공산주의자로 취급했다. 그들은 박 선생은 믿을 수 없는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북한 정권은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해방직후 사회주의운동가들에 대해 쓰기 위해 이리저리 증언자를 찾던 내가 박 선생의 생존을 확인한 것도 그에 대한 테러 소식이 신문에 보도된 덕분이었다. 이미 사망한 줄 알았던 그가 아직 일본에 생존하고 있으며 두 차례나 암살의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땅에서 테러를 피해 숨어 사는 그의 종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북한 민주화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해온 그는 남한의 사학자들에게는 증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지 오래였다. 여러 역사학자들에게 문의를 해봤으나 88살인 그가 아직도 살아있느냐는 반문이 더 많았다. 북한을 탈출한 늙은 사회주의자들을 모아 북한임시정부를 만들었다던가, 두 번이나 테러를 당했다는 정보는 오히려 내가 전달해주어야 했다.

사방에 부탁을 넣은 끝에 그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입수해 준 이는 모 일간지의 일본주재 통신원이었다. 테러 사건으로 인해 모르는 사람 만나기를 꺼린다는 충고와 함께였다.

전화 통화는 힘들었다. 이틀이나 계속 걸어보았으나 받는 이가 없었다. 통신원에게 다시 문의를 해보니 번호는 맞는다고 한다.

“모시, 모시?”

사흘째 되던 날, 전화기에서 처음 나온 소리는 여보세요란 뜻의 일본어였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는 나는 과감히 한국어로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한국인데요, 박 선생님이십니까?”

“ … ”

상대방은 갑작스런 한국어에 놀란 듯 잠시 말이 없더니 한국말로 응답했다.

“한국이요? 어디, 누구입니까?”

88살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맑고 또박또박한 말씨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의 사회주의운동사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나를 소개하고, 박 선생이냐고 다시 물었다.

“내가 맞소만 … 무얼 물으시려는 겁니까?”

여전히 조심스런 말투였다.

“박 선생님 맞으시군요? 음성이 젊어서 못 알아봤습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제가 전화 드린 건 박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신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지도자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입니다.”

“남로당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해 알고 싶습니까?”

한결 누그러진 말투였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같은 분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돌연 수화기로 낮은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허허허 … 김삼룡? 이주하? 이 나이 되도록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그 분들에 대해 물은 사람은 댁이 처음이오. 언젠가 이현상 씨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 공산주의가 망한 지 벌써 언젠데, 그분들에 대해 이제 와서 뭘 알고 싶어서 그러시오?”

“해방직후 좌우대립에 대해 쓰다 보니 남로당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실제로 남로당 지도자들을 만난 분을 한국에서는 찾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박 선생님의 책에 김삼룡, 이주하 같은 분들을 만난 이야기가 나오기에 찾아뵈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박 선생은 솔직했다.

“함께 활동하기는 했어도 개인적으로는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일제 때부터 활동했던 쟁쟁한 거물들인데 나는 나이도 한창 어린데다 연륜도 적어 개인적인 친분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아는 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 ”

잠시 말을 끊더니 물어왔다.

“나는 벌써 두 번이나 암살을 당할 뻔한 사람이요.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제가 쓴 책이 일본에서도 번역되었으니 그 걸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아까 이름이 무어라 하셨지요? 책 제목하고 출판사, 댁의 전화번호를 불러주시오. 책을 사서 읽어 보고 전화 드리리다.”

일주일 후, 이쯤이면 책을 읽었으리라 생각하고 먼저 전화를 걸려는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박 선생은 사뭇 들떠 있었다.

“당신 책 사서 읽었습니다. 참 좋게 읽었습니다. 그 옛날이야기를 어찌 그리 재미있게 쓴 거요? 나도 몰랐던 이야기도 참 많더군요. 나이도 젊은 분이 어떻게 이리 많은 이야기를 모은 거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일본으로 건너가 선생님을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이야기는 술술 풀렸다.

“물론이지요. 어서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눠봅시다. 내가 해줄 이야기도 많지만 당신이 내게 해줄 이야기도 많을 것 같소.”

혼자 해외에 나가보기는 처음이었지만 걱정과 달리 퍽 쉬운 여행이었다. 비자도 없이 여권만 있으면 아무 때고 두 시간 만에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일본이었다. 언어소통도 쉬웠다. 공항에도 지하철에도 택시에도 상가에도 한글로 된 안내판이 널려있었다.

2007년 11월 말 어느 흐린 날 저녁, 나는 동경 지하철 진보쵸 역 계단을 밟아 지상으로 올라섰다. 고서점이 밀집해 있는 대학가였다. 하나둘씩 전등불이 밝혀지고 있는 어스름한 거리는 그다지 번잡하지 않았다. 일본어로 된 간판을 빼면, 70년대 서울 종로통 같았다. 7,8층짜리 나직한 건물들이 여유라곤 없이 촘촘히 서있었고 도로도 좁았다. 작은 공원까지 갖춘 수십 층짜리 대형 빌딩들이 즐비한 서울보다 더 소박해 보였다.

일본에 살다온 친구를 통해 예약해 놓은 호텔은 일본 전역에 수십 군데나 지점이 있는 저렴한 체인 호텔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싼 방을 잡았더니 완전히 지하방이었다. 그래도 창문 쪽을 지상으로 터놓아 일 층 같은 느낌을 주었고, 시설은 깔끔했다.

하릴없이 밤이 깊어가니 배가 고팠다. 카드키를 챙겨들고 밖에 나오니 출판사와 인쇄소가 늘어선 뒷골목은 일찌감치 인적이 끊어지고 있다. 군데군데 불을 밝히고 있는 우동 집의 검고 붉은 장식들만이 눈에 띄었다.

국물 진한 우동에 사케까지 한 잔 마시고 나오니 거리는 적막하도록 고요했다. 불 꺼진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로 환하게 불이 밝혀진 사무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일본공산당 동경지부라 쓰여 있었다. 들어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참았다. 박 선생 연락처를 알려준 기자가 일본공산당 사무실이나 조총련 사무실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었다.

호텔방으로 전화가 온 것은 다음 날 오전 열 시경이었다. 일본인 직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무작정 로비에 나가보니 박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소. 책에 나온 사진대로구려.”

“선생님도 책에 나온 젊은 시절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으세요.”

젊어서 상당히 큰 키와 잘 생긴 얼굴을 가졌을 박 선생의 체형은 옛 사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웃음이 조심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너무 오랜 세월 웃지 못하고 살아온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박 선생의 사무실은 호텔에서 2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는 아무런 간판도 붙어있지 않았다. 한국에서라면 단독주택도 지으려 하지 않을 좁은 터에 지어진 낡은 빌딩의 4층이었다. 승강기는 둘이 들어가 서있으니 서로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비좁았다.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녹차가 좋습니다. 차를 타드릴 테니 잠시 앉아 계시오.”

댓 명이 앉아 이야기하기에 딱 맞을 사무실은 창문 쪽을 제외한 세 벽이 모두 책으로 꽉 차있었다. 일본어 책들이라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나, 박 선생이 쓴 책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보지 못한 책들이네요.”

한 권을 꺼내들고 말하자 박 선생은 전기 주전자로 찻물을 끓이며 대답했다.

“일본에서 꽤 많이 팔린 책들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전쟁이 일어날까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 체제 자체가 마지막 남은 전체주의 공산주의 국가니까 그렇습니다. 일본인은 북한 여행이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도 많습니다. 오히려 한국에는 운동권에 친북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북한의 실상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었다.

“한국 진보운동가 중에는 북한 체제가 옳다고 보는 이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남북통일을 위해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미워하지 않도록 북한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정도인데 우익들이 이를 두고 친북이니 종북이라고 비난하는 거라고 저는 봅니다.”

박 선생은 웃었다.

“한국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작가 선생 들어보시오. 내가 북한 체제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파들과 같은 입장인 것은 아닙니다. 남한 우파들의 주장대로 북한 정권을 붕괴시켜 흡수통일하려고 하려고 했다가는 또 전쟁이 납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져 혼란이 오면 궁지에 몰린 북한 군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이겁니다. 남한에 흡수되느니 중국의 일부가 되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되어야 할까요?”

“당장 통일하려 하지 말고 일단 남북이 경제적으로 너무 큰 차이가 나니까 한 동안 두 개의 나라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지원하면서 서서히 합치자는 겁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진보운동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어떻게 현실화 될 지는 막막할 때였다. 그로부터 11년 후 갑자기 남북이 당장 합쳐질 것처럼 통일 분위기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시절의 대화였다.

북한 문제로 더 토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동경을 방문한 목적은 해방직후 박 선생과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의 인물됨과 인품, 인상착의 같은 구체적인 글감을 얻으려는 것뿐이었다.

“녹음을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이 공개되는 게 불편하시면 녹음은 안 해도 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나이에 못 할 말이 뭐 있고, 숨길 말이 뭐가 있겠소? 그래 무슨 이야기를 들으려는 겁니까?”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해방직후 남한의 사회주의운동에 관해서라면 다 듣고 싶습니다. 특히 개인사진이라곤 겨우 한두 장뿐일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혁명가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요?”

일본 녹차가 맛있다는 말은 맞는다. 11월 말임에도 따로 온방 장치가 없는 서늘한 사무실의 냉기를 뜨거운 녹차로 풀며, 나는 녹음기를 눌렀다.

일제하 사회주의자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을 박 선생은 아흔 살의 나이에도 명석한 기억력과 단어 하나 어긋나지 않는 놀라운 언어구사력을 보여주었다. 나는 길고도 슬픈 이야기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먼저 김삼룡 씨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내가 김삼룡 씨를 처음 만난 건 해방되던 해 1945년 가을이었소.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일제말기 약간의 항일운동을 한 경력으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기자로 들어가면서였지요. 내가 스물여섯 살이었으니 그분은 서른다섯이었을 거요.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은 아련한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도무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당의 최고지도자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오. 해방직후 남한에 난립한 수십 개 정당 중 최고는 단연 조선공산당이었소. 일제말기까지 투쟁한 것은 거의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가 상당히 높았지요. 김삼룡은 조선공산당은 물론 남로당 최고 실권자의 한 사람이었소. 그런데도 거만하거나 권위의식이라곤 느낄 수 없었어요. 참말로 서민적이었지요. 체격은 권투선수처럼 단단한 데다 십 년 가까이 감옥살이 할 때 권투를 많이 해 코가 뭉그러져 뭉툭했지요. 얼굴은 크고 넓적한데다 입술은 두텁고 눈은 자그마했어요. 웃을 때 보면 정말 시골 농부나 부잣집 하인 같았지요. 처음 보는 사람이나 하급당원에게도 시원시원하게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참 어린 초보당원인 내게도 만날 때마다 먼저 아는 체를 하고 수고한다고 악수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요. 참 사람 좋았어요.

아, 이주하 씨는 좀 달랐어요. 이주하 씨는 가난한 화전민 출신이지만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사회과까지 다닌 지식인 아닙니까? 학비가 없어 졸업은 못했다지만 대단한 지식과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요. 해방 후 여러 신문에 이주하 씨의 글이 실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주하, 이 양반은 도대체 웃는 일이라곤 없어요. 나보다 열네 살인가 더 많아서도 그랬는가, 내 앞에서 농담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다정하게 감싸준 적도 없어요. 참말로 철두철미한 분이었지요. 언젠가 내가 심하게 몸살이 걸려 이틀 간 결근을 했더니 그까짓 몸살 때문에 사업을 미루느냐고, 면전에 대고 무섭게 야단을 치는 겁니다. 어찌나 몸 둘 바를 모르게 호되게 야단을 치는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아마 김삼룡 씨였다면 어디 아프냐 물어보고 약이라도 지어 먹으라고 용돈이라도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허허…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이주하 씨도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격한 선생님 정도였지, 고지식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박헌영 씨나 이현상 씨도 그랬듯이, 공산당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선생님들 같았지요. 혹시 박헌영 씨의 연설을 들어보았다면 어디 시골의 서당 훈장같이 점잖은 말투에 놀라실 겁니다. 반공교재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고 제 부모형제도 죽이는 악마로 묘사되지만 말도 안 되는 모함이지요.

제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이관술 씨였습니다. 일제하 투쟁경력으로나 조선공산당 총무 겸 재정부장이라는 직함으로 보나 박헌영 씨에 이어 조선공산당 제2인자였는데 양복 한 번 입고 다니는 걸 못 봤어요. 깡말랐어도 체조선수처럼 단단한 몸을 가졌는데 얼굴은 눈도 코도 입도 자그마한 게 좀 옹졸하게 생겼다고나 할까, 미남은 아니었어요. 해방 전에 몇 년 동안 넝마주이로 위장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직을 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얼굴 피부도 새까매서 영락없는 촌부였어요. 울산의 큰 부잣집 아들이라 일제 때 많은 땅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는데, 해방 후 나하고 같이 당사에서 일할 때도 늘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졸병 군복을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지요. 참 소박했습니다.

이관술 씨 하면 생각나는 게,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립기념일입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 치하 1925년 4월 17일에 창립되었다가 붕괴를 거듭한 끝에 해방 후 재건되었지 않습니까? 사회주의 세력이 막강한 때라 창립식도 거창했지요.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기념식에 다들 양복 빼입고 모자 쓰고 멋쟁이 차림으로 등장해요. 이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관술 씨가 양복 입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외국에서 구호물자로 싣고 온 중고 양복이 분명해요. 팔이며 어깨가 너무 길어서 허수아비 비슷해 보였지요. 와이셔츠 칼라도 쭈글쭈글하고 넥타이도 한 십 년은 맨 듯이 색이 바랬어요. 이관술 씨가 양복을 입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다들 놀래서 난리에요. 그중 한 사람이 “이관술 동무! 오늘 꼬까옷 입었네?” 하는 겁니다. 다들 얼마나 웃었는지… 그만큼 검소한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지금도 이관술 씨나 김삼룡 씨를 생각하면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아, 그분들의 단짝이던 이현상 씨도 큰 인물이지요. 이현상 씨라면 일제치하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3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분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대단한 항일운동가라고 칭찬할 때면 “이현상만큼 옥살이를 많이 한 사람이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나중에 지리산에 들어가 5년간이나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 아닙니까? 이력만으로 보면 쥐어짜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실제 이현상 씨는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참으로 너그럽고 온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부당원이나 간부들에게 하는 걸 보면 조선시대 선비가 따로 없어요. 뭣보다 인상 깊은 건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도 꼭 존댓말을 써준다는 겁니다. 항상 점잖은 존댓말로 조용히 말했지요. 생기기도 참 잘 생겼어요. 사내답게 넓고 큰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이 어찌나 빛나는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겁날 정도였지요.

요즘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말하길 우리가 극좌모험주의였다는데, 참 모르는 소리들입니다. 동서냉전이 시작되면서 탄압이 극심해지자 총파업으로 맞선 건 사실이지만 당 차원에서 무장투쟁을 선동했던 적은 없어요. 대구폭동, 제주폭동, 여순반란 모두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건들입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또 다시 권력을 잡고 탄압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이러한 혁명적 열정을 수습하고 조직하지 못한 데 있지요.

사실, 인민봉기를 지도하고 조직하고 싶어도 힘들었습니다. 우익과 미국의 탄압이 워낙 극심해서 당 조직을 보존하는 일조차 허덕였으니 말입니다.

탄압 중에도 제일 억울한 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지요. 정판사 사건이라는 것이 우리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건데, 맹세하건데 우리는 위조지폐를 찍은 적이 없습니다. 우익과 미군정의 조작이란 말입니다. 그 증거는 수도 없이 많은데, 부각되지 않은 이야기 중에 이런 일도 있어요. 경찰은 사건의 주범으로 이관술 씨를 지목했는데, 정작 수배가 된 이관술 씨는 두 달 동안 서울 시내 자기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잡히던 날도 자기가 운영하던 해방서점에 들려 책을 몇 권 챙겨가지고 집에 돌아갔다가 체포되었어요. 이 게 말이 됩니까? 도피에는 남다른 경험을 쌓은 이관술 씨가 자기 집에 머물 정도로 태평스러웠던 데는 남모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 최고책임자인 장택상 쪽에서 이 사건은 김창선 등 몇 명을 체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니 이관술은 도망갈 필요가 없다고 언명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은 장택상의 딸이면서도 우리 쪽과 가까웠던 장병민이었습니다. 나중에 장병민도 월북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아무튼 이관술 씨가 정말 위폐를 만들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체포를 기다렸겠습니까? 결국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무기수로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처형되고 말았지요. 참 아까운 분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조선공산당은 해방 이듬해에 남로당으로 확대되는데요, 남로당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대중정당이기는 했지만 미군정의 탄압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같은 실질적인 지도자들은 아예 사무실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사무실에는 나 같은 하부 간부들이나 형식상 위원장인 허헌 씨 같은 분만 드나들었지요.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민족주의 변호사이던 허헌 씨는 참 인격자였지만, 그의 넓은 방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내가 가끔 들어가 두어 시간씩 말상대를 해주곤 했을 정도입니다.

정태식 씨를 아시오? 아, 작가 선생이 쓴 책에 정태식이 나오니 당연히 아시겠지요. 정판사 사건 때 미군정이 우리의 합법적인 기관지를 폐간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로 한 일은 지하신문 발행이었습니다. 이 일을 지휘한 이가 정태식 씨였어요. 요즘 사람들이야 모르는 이름이지만, 일제 때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지요. 삯바느질 하는 홀어머니 아래 어렵게 자라나고서도 경성제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로 그 사연이 신문에도 크게 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상당한 부잣집 딸과 결혼했는데, 공주처럼 자란 여자다보니 황후마마처럼 모셔달라고만 하니 이상이 맞질 않았지요. 그나마 나하고 함께 일할 무렵에는 교통사고가 일어나 부인이 죽고 혼자 살고 있었어요.

정태식 씨는 체구가 작고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세심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약간 곱슬머리에 웃으면 잘은 옥니가 가지런한 것이 빈틈없이 치밀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체격은 작아도 고문에는 엄청 강해서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씨와 함께 대표적인 고문강자로 불렸지요. 정태식 씨는 지하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 씨를 정기적으로 만나 신문기사 내용을 상의했고 나는 그 밑에서 신문기사를 쓰고 인쇄하고 자금을 끌어 모으는 여러 가지 일을 다 했어요. 김삼룡 씨는 우리에게 운동이론을 연구하는 이론 블록도 맡겼기 때문에 수십 명의 지하조직까지 직속으로 관리했지요.

김삼룡 씨를 다시 만난 것은 우익의 탄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10월에는 이를 진압하라고 파견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사병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잖습니까? 두 사건 모두 남로당원들이 주동하기는 했으나 당 중앙에서는 전혀 지시한 적이 없는, 우발적인 폭동이었어요. 여수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정태식 씨가 “또 터졌구나.”하며 한숨을 쉬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비록 지시를 한 적은 없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민들의 의로운 싸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지요. 이현상 씨를 반란군 지도자로 지리산에 보냈습니다. 선비 같은 분인데 빨치산 책임자가 된 거지요. 이때부터 남한은 내란상태가 되었고, 남로당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졌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정태식 씨가 누굴 만나는데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말하지 않아도 김삼룡 씨를 만나러 간다는 걸 알았지요.

접선 시간은 한밤중이었습니다. 당시는 전기사정이 나빠 서울 시내에도 가로등이 없어 밤중만 되면 큰길이고 골목이고 깜깜했어요. 달빛마저 없는 날은 맞은편에서 누가 걸어오는지도 몰라 몸이 부딪힐 지경이었지요. 경찰의 추적이 집중된 우리에게는 이 어둠이 유리하기는 했는데, 너무 어둡다보니 우리 편끼리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어요.

접선장소는 동대문에서 서울운동장으로 가는 큰길가였어요. 사람이 제법 다니는 대로변인데도 깜깜했지요. 나는 김삼룡 씨가 우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에 불을 붙여 슬슬 흔들며 걸어갔어요. 나는 깨끗한 양복에 중절모까지 갖춘 신사차림이었는데 정태식 씨는 귀와 턱까지 덮어 공장노동자 비슷한 차림이었지요. 경찰의 불심검문을 하게 되면 양복 입은 내게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담뱃불을 돌리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려니 맞은편에 중년 남자 하나가 걸어와요. 술에 취한 모양으로 약간 비틀거리는데 옆구리에는 볏짚으로 묶은 명태 몇 마리를 끼고 있어요. 가까이 보니 일본군이 쓰던 털 달린 방한외투를 입었고, 방한모까지 썼어요. 영락없이 동대문시장의 노무자가 술 한 잔 걸치고 명태 몇 마리 사서 집에 돌아가는 모습이었지요. 그래도 내게는 심상치 않아 보였어요. 그 사람도 담뱃불 빛을 유심히 봤는지 가까이 와요. 어둠속에서 아주 잠깐 마주치는데, 얼굴은 털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눈에서 불이 번쩍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누군가 알 수 있었지요. 나는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쳤어요. 몇 걸음 지나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태식과 나란히 서울운동장 뒷길로 접어드는 것이었어요. 김삼룡 씨였던 거지요.

나는 얼른 돌아서서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따라가다가 행인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옆에 따라붙었습니다. 그러자 방한모 쓴 김삼룡 씨가 반갑게 나를 부르는 겁니다.

“박 동무! 얼마나 수고가 많소?”

김삼룡 씨는 귀에 익은 음성으로 반가워하며 어둠속에서 더듬더듬 내 손을 찾아 꽉 쥐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감동이 되던지, 지금도 그 두꺼운 손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참 오래간만입니다.”

개인적인 정담을 나눌 시간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울운동장 뒷길을 걸어가며 밀담을 나누고 나는 그 앞뒤로 오가며 호위를 했습니다. 앞쪽에서 누가 걸어오면 얼른 서너 걸음 앞에 나가 방어태세를 갖추고, 뒤에서 누가 오는 소리가 나면 뒤로 처져 방어태세를 취했지요. 만일 경찰이 체포하려 들면 육탄으로 막아 두 사람을 달아나게 해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경찰은 여차 하면 총을 쏘아대니 생명까지 걸고 막아야 했지요.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합니다. 그날 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서 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남로당 본부에서 벌어진 일들이며 김삼룡, 이주하 씨가 잡혀 죽은 이야기는 제 책에 나왔으니 읽어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말하자면 자꾸 눈물이 나서 말입니다.

*****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녹음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나오니 전봇대 위의 까마귀 떼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 선생은 진보쵸 전철역 입구에 있는 지하 초밥집으로 앞장섰다. 목로와 식탁마다 일본인들이 초밥을 먹고 있었다. 대개 중년남녀들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크지 않은 웃음소리와 두런대는 이야기 소리가 적당히 듣기 좋은 식당 안에는 나직하게 비틀즈가 틀어져 있었다.

박 선생은 메말라 핏줄이 파리한 손으로 나무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집으며 말했다.

“드셔보시오. 이 집 초밥이 근방에서 제일 맛있답니다. 나는 이제 일본음식이라면 지겹지만 모처럼 오셨으니 마음 놓고 드시오. 내가 살테니. 부족하면 더 시키고.”

“아닙니다. 젊은 제가 사야지요. 선생님이야말로 마음 놓고 드십시오. 그런데 선생님은 일본에 사신 지가 얼마나 되신 건가요?”

“1957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왔으니 꼭 50년째요.”

“일제 때 일본말을 배웠고 이곳 동경에서 와세다 대학까지 나오셨으니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았겠네요?”

박 선생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게 어찌 쉽겠습니까? 온갖 막일을 하며 살았던 이야기를 다 하자면 너무 깁니다.”

“왜 한국에 돌아와 정착하지 않으셨나요?”

“남로당 간부 출신에 월북자를 누가 환영합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고위직을 하던 와세다대학 동창의 도움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신분이 보장되기는 했지만, 이미 일본에서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니 갈 수가 있습니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일본에서 처음 결혼하신 건 아니지요?”

“해방 전에 벌써 결혼을 했지요. 어린 나이에 강제로 결혼한 거지만 그래도 자식들을 낳았고 전쟁 때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데려 갔었지요.”

“그럼 지금도 가족들은 북한에 계시겠네요?”

박 선생은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일본에서 반북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식구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고 들었습니다. 죽었겠지요.”

몰랐던 이야기였다.

“아픈 추억을 여쭤보아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남한 정부나 우파들이 선생님을 보호하거나 아니면 뭔가 도움을 주려고 하겠네요?”

박 선생의 어두웠던 얼굴에 엷은 웃음이 피어났다.

“내가 아무리 북한정권에 반대한다고, 어찌 반공우익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그들과 손을 잡겠습니까? 한평생 사회주의자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내가 그럴 수는 없지요.”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렇다고 남한 좌파가 나를 반기는 것도 아닙니다. 1980년대 이후 남한의 진보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이 주류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네들은 더 나를 미워합니다. 좌우익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게 우리 남로당 출신들이오. 내 머리를 한 번 보시오.”

박 선생은 자신의 뒤통수를 보여주었다. 손가락 길이만큼 찢어졌다가 아문 자리가 남아있었다.

“한 번은 맹독을 넣은 음료수로 독살을 당할 뻔 했고 한 번은 이렇게 쇠파이프로 뒤통수를 맞아 한 달이나 입원해 죽다 살아났지요.”

“북한 공작원이 한 짓일까요?”

“당연하지요. 범인을 잡지 못했으니 알 수는 없지만 뻔한 일 아닙니까? 나는 남한의 주사파란 사람들이 참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 북한이란 나라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오? 그 사상의 원천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인데, 세상에 인간 위에 설 수 있는 이념이 어디 있고, 인민을 지배할 권리를 가진 위대한 영웅이 어디 있단 말이오? 굶주리고 억압받는 북한 인민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납니다. 내 젊음을 바쳤던 사회주의 이념의 잘못이고, 김일성을 막아내지 못한 남로당의 잘못이란 생각에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식당의 일본인들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하지만 언성이 높아지자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밥 먹는 시간보다 박 선생의 이야기가 더 길었던 긴 식사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여전히 비틀즈가 노래하고 있었다.

*****

작가선생, 들어보시오. 1950년 6월 25일, 수백만을 죽인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한국에 가보니 소위 진보라는 이들이 말합디다. 미국이 먼저 일으켰다느니, 미국이 일부러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입니다. 박헌영이 전쟁만 일으키면 남한의 남로당원 이십만이 봉기한다고 큰소리쳤다는 말도 있습디다. 참으로 모르는 소리들입니다.

제주와 여수의 반란으로 사실상 내란상태가 되면서, 남한의 좌익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수많은 남로당 간부와 당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산으로 도망쳐 빨치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남로당 조직은 거의 붕괴되었고, 자연히 남로당원들은 생명이 아직 붙어있을 때 북한에서 인민군이 내려와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던 건 던 사실입니다.

박헌영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49년 12월의 일입니다. 북한 땅 해주에 올라가 박헌영 씨를 만난 이주하 씨가 새로운 명령을 가지고 왔더군요. 1950년 5월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에 진보적인 후보들을 대거 내세울 것과 남한 인민들이 어떠한 통일 방식을 바라고 있는가를 3월말까지 보고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남한에서 합법적인 정치진출을 강화하라는 거였습니다. 박헌영 씨가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을 막기 위해 국회를 우리 편으로 만들고, 여론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남로당에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인물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조소앙, 안재홍, 윤기섭, 박건웅 등 양심적인 세력들이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직접적인 노력이 아니라도, 보수우익에 대한 인민들의 감정은 나빴습니다. 국회의석 210석 중 극우파인 독립촉성회 계열과 한민당 계열은 다 합해도 50석이 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승만 정권은 저절로 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비밀리에 여론조사도 했지요. 당연히 평화통일을 원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박헌영은 분명, 총선의 승리와 남한 민중의 전쟁반대 여론을 들어 김일성과 대적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박헌영 씨와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1950년 3월 27일 밤, 기억도 생생합니다. 얇은 미농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한 보고서를 단단하게 접고 검은 종이로 싸서 봉하니 바둑알보다 조금 큰 정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뭉갤 수 있도록 보고서를 손에 감추고, 정태식 씨와 함께 김삼룡 씨를 만나러 갔습니다.

약속장소는 을지로 6가에서 신당동 방향으로 향하는 뒷골목이었습니다. 김삼룡 씨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히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 김삼룡 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시간을 어기면 바로 철수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김삼룡 씨의 신변이 걱정이 되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잡혔다 해도 우리와의 약속을 경찰에 누설할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도 있어서 30분이 지나고 50분이 되도록 같은 장소를 맴돌았으나 낯익은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김삼룡, 이주하 두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다음날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태식 씨는 지나칠 만큼 온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미 경찰의 손에 넘어갔으니 냉정하게 잊고 신임 남로당 총책으로 역할을 해야 할 텐데 나보고 무장대를 조직해 경찰서를 습격해 두 사람을 구출하라는 것입니다. 일제 때부터 절친했던 김삼룡이 죽게 된다는 생각이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습니다.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만류했지만 정태식 씨는 포기하지 않고 검찰에 선을 넣어 석방을 시도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기까지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체포된 지 불과 열흘만이었지요.

정태식 씨가 체포된 뒤, 나는 당내 서열에 따라 자동적으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해주의 박헌영 씨가 지도자였지만 남한의 지하조직은 제가 맡게 된 것입니다.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불과 두 달 후 전쟁이 터져버렸으니까요. 뭘 해볼 만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나기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체포된 남로당 지도부 세 명에 대한 재판이 있던 날이었지요. 수배된 몸이라 참석할 수 없었지만, 며칠 후 장병민을 만나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병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장병민이 수도경찰청장으로 좌익 탄압의 선봉이던 장택상의 친딸이란 건 아까 말했지요. 장병민은 아버지 장택상이 한량기질이 많아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썪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등을 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 채항석이 우리편이다보니 우리와 친해져 2년간이나 자신의 집에 정태식을 숨겨주어 왔던 것입니다. 경찰총수의 친딸 집에 남한 최고 수배자가 2년이나 숨어살았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지요. 장병민 뿐 아니라 당시에는 국회의원, 검사, 경찰, 군인 중에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남로당에 가입한 정부 관리로부터 활동자금을 지원받은 적도 있었지요. 정태식 씨는 결국 장병민의 집에서 체포되었고 장병민 부부도 함께 연행되었는데 아버지 덕분에 석방된 후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재판을 방청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장병민은 재판정에서 일어난 일을 내게 자세히 말해줍디다. 김삼룡을 선두로 이주하와 정태식이 재판정 입구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김삼룡이 뒤돌아서서 두 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하더랍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응답을 하더랍니다.

잠시 후 최후진술 시간이 되자 정태식 씨는 “만일 앞으로 나에게 생명이 있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의 인간으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언하며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고문강자로 이름난 그가 하루아침에 전향을 선언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두 번째로 재판정에 선 이주하 씨는 “할 말은 많지만 단 한 마디로 나의 심정을 표현한다면 나의 아이는 절대로 정치가는 시키지 않겠다.”고 담담히 말한 게 전부랍니다. 고향이 북한 땅 원산인 이주하 씨는 서울에 데려온 애인과 결혼해 갓난아이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바친 인물의 최후진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요.

마지막으로 등장한 김삼룡 씨만이 자신은 아무 할 말도 없으니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처형해 달라고 했답니다. 이주하와 김삼룡에게는 사형이, 정태식에게는 20년 형이 구형되었지요.

장병민은 말하길, 김삼룡이 두 사람에게 위장전향하라고 급히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았습니다. 한 달 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감옥에서 풀려나온 정태식 씨가 내게 말해줍디다. 김삼룡이 법정에 들어서면서 재빨리 말했답니다. 자기 혼자 다 뒤집어 쓸 테니 두 사람은 전향하여 나가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정태식 씨는 명령이니 따라야 했지만 적들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최후진술을 하자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명분은 국군의 공격에 대한 반격이었습니다. 해방 후 남한 군대가 툭하면 38선을 넘어 북한을 공격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1949년 9월부터는 38선 일대에 교전이 거의 없었으니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아무리 남로당 지도부가 전쟁에 반대했다고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박헌영이 위기에 빠진 남로당원들을 구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멋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일성은 죄가 없다는 거지요. 참으로 모르는 소리들입니다.

이주하가 가져왔던 명령 말고도, 박헌영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근거는 많습니다. 월북한 남로당 간부의 한 사람인 조두원은 전쟁 중 나를 만났을 때 말해줍디다. 남침 결정은 1950년 4월 김일성이 단독으로 소련을 방문해 최종승인을 받아왔으며 남로당 출신들은 눈치만 채고 있었지 정식으로 통보를 받거나 의견을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입니다. 해방직후부터도 박헌영은 중요한 사안마다 소련과 김일성의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 이북에 올라가서는 형식적으로만 부수상이지 연설문조차 당에서 써준 그대로 낭독했다고 합니다.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이던 박헌영 씨가 이 정도니 서울의 우리는 어땠겠습니까? 전쟁이 터지던 일요일,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회의원의 절대다수가 양심세력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고무되어 조만간 조소앙, 안재홍 씨에게 남로당을 다시 합법화 시켜달라고 요구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비록 임시지만 남로당 총책인 나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북한 인민군이 전격적으로 남침을 해오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지트 주인 할머니가 전쟁이 났다고 알려왔을 때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를 넘어 밀려들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서둘러 미아리고개에 나가보니 정말 보따리를 지고 소를 몰고 오는 피난민들로 길이 미어터지고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이 미국에 무기를 요청했다는 소식과 유엔 한국위원회가 북한의 철군을 요구했다는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혔지요. “이런 제기랄!” 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옵디다. 그 날의 암담함을 생각하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슴이 떨립니다.

이관술 씨는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다가 국군에게 처형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천만다행으로 정태식 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암담한 내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 동안 나는 예전 직위로 돌아가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노동당 간부부에서 일해 보려고 이력서를 내기도 했지만 남로당 핵심 중 하나이던 권오직이 추천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거든요.

9월 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인민군의 허리를 끊어버리면서 나는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오르는 피난민 대열에 끼었습니다. 남로당 출신들은 북한에 올라가봐야 찬밥이라는 말이 돌았지만, 남한 땅에 남아 있어도 부역자로 몰려 맞아죽을 형편이니 어쩔 수 없이 월북을 택한 것입니다.

전쟁 중 북한 땅을 지나며 목격한 참상을 다 말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미군의 폭격도 무섭지만 인민공화국 5년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남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지만, 그래도 자유는 있었는데 북한은 밥도 자유도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지 겨우 몇 년도 안 되었을 때인데도 말입니다.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던 나는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 있는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힘은 없지만,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 등 외국에서 오는 예술가, 학자, 기업가들을 접대하는 편안한 자리였습니다.

접대란 게 전쟁의 정당성과 북한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관광코스를 도는 거였는데 이탈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동구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이들은 갑자기 관광코스를 벗어나 시커먼 콩과 옥수수로 가득한 주민들의 밥그릇을 열어보기도 하고 벽지도 바르지 못한 컴컴한 방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합디다. 오히려 잘 사는 일본에서 온 이들은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구경하고 돌아가요. 그리고는 일본 잡지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써대고, 자기가 무슨 북한 전문가인 냥 행세를 합디다. 요즘도 남한이나 일본, 미국의 진보란 사람들이 평양에 가서 대접 잘 받고 와서 북한 찬양을 하는 걸 보면 참으로 가소롭기만 합니다.

미군 폭격기들이 갈까마귀 떼처럼 날아다니는 북한 땅에서 외국인들을 접대하느라 나름대로 편하게 지내던 내게 위기가 다가온 것은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3월 하순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지프가 들이닥치더니 평양 교외에 있는 오두막으로 연행이 되었습니다. 굴밤나무 밑에 보초막사가 있고 그 앞에 혼자 누우면 꽉 차는 조그만 벽돌집이었습니다. 같은 무렵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출신 간부들이 모조리 연행되었다는 걸 나는 몰랐지요.

아, 다시 사람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남로당 지도부 중에 이승엽이라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일제치하에서 저명한 항일운동가였지요. 전쟁 중에는 사실상 남한 전역을 지휘하는 서울시당 위원장을 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승엽과는 사이가 나빴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승엽은 기회주의, 출세주의자였습니다. 해방된 바로 다음날 일제하 전향자들을 모아 조선공산당을 만들더니 박헌영이 등장하자 해산하고 박헌영에게 붙어 충복이 됩니다. 박헌영과 함께 월북한 후로는 박헌영을 배신하고 김일성에게 붙어 내무상이 되지요. 이런 자가 권력을 잡았으니 온갖 오만방자한 짓을 많이 할 수밖에요. 그렇다고 이승엽이 미국의 간첩이란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대개 남로당 간부들은 이승엽을 좋아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지도부 중에는 이강국 씨도 유명했지요. 정태식 씨처럼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경성제대에 수석 입학하면서 유명해진 데다 부유하던 처갓집 덕분에 독일에 유학 가서 공산당에 가입한 분이지요. 귀국해서는 해방되기까지 여러 잡지를 만들어 심도 깊은 사회주의 이론을 퍼뜨린 똑똑한 사람입니다. 듬직한 풍모에 인품도 좋은 분이었습니다. 전쟁 때 평양 교외에서 대령계급장을 달고 헝가리 의료단이 봉사하는 웬그리아 병원의 병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가 쓰러져 입원하자 어찌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병원장이 호방하니까 그 밑에 일하는 간호사나 환자들도 웃음을 놓을 때가 없었어요. 마치 전쟁터 속의 작은 휴식처 같았지요. 병원에 있는 동안 이강국 씨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이현상 씨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여순반란을 이끌기 위해 지리산에 내려간 이현상 씨는 전쟁이 끝난 직후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남한 국군과 경찰은 서로 자기네가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주장합니다만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내가 이현상 씨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월북해 평양에서 외국인 접대소 일을 하고 있던 1956년입니다. 어느 날 평양 시내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어떤 여자가 ‘오빠!’하며 부르는 겁니다. 조복애였습니다.

조복애는 나의 고향과 가까운 경남 하동 여자로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요. 이관술 씨와 함께 정판사 사건의 누명을 쓰고 죽은 박낙종 씨의 며느리이기도 한데 해방직후 공산당 탄압을 피해 박헌영 씨를 따라 월북했던 여자입니다. 조복애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남로당 핵심간부 7,8명과 함께 38선을 넘어 내려오다가 체포됩니다. 그런데 인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무사히 살아났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지리산에 들어가 이현상 씨와 함께 빨치산을 했지요. 그러다가 이현상 씨가 죽은 후 구사일생으로 산을 내려와 대구에서 야채 행상을 하며 버티다가 무사히 월북한 것입니다.

오빠, 동생하며 지내던 조복애를 살아서 만나다니 얼마나 반가운지. 하지만 남한 출신들이 언제 끌려가 반동으로 몰릴지 모르는 상황이라 맘 놓고 재회를 기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조복애는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조복애의 말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휴전이 된 후 산중의 빨치산 중 이현상 다음 가는 사람에게 북한에서 무전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다름 아닌 이현상을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조복애는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기록을 보니 아마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무전을 받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남로당 4인방 중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현상 씨가 아닙니까? 남로당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다행인 건 남한 군경이 서로 자기들이 죽였다고 허세를 부리니까 북에서는 이현상을 영웅으로 칭하고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았지요. 만일 이현상 씨의 죽음의 진실이 드러났거나 살아서 월북했다면 그 역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렸겠지요.

나는 평양 교외의 벽돌집에 갇혀 혼자서 꼬박 2년간 연금되어 있다가 1956년 봄에 풀려났습니다. 그해 2월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그 여파가 북한에도 밀려온 덕분이었습니다. 김일성 일당독재까지 바꾸지는 못했지만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와 개인숭배를 배격하고 서구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한도 할 수 없이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일시적이었지요. 김일성과 모택동은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면서 거꾸로 소련을 수정주의라 비판하게 되는데, 어쨌거나 나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평양으로 돌아와 보니 정태식 씨는 몇 번 잡혀가서 문초를 받았으나 다행히 풀려나와 북한 정부 기관지인 민주조선에서 내는 잡지 ‘인민’의 교정부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장병민 부부도 살아있었습니다. 장병민은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장택상이 함께 피난가자고 권했지만 거부하고 북한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 출신들이 모조리 숙청되면서 그녀와 남편도 평양 교외로 쫓겨나 노동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리 길을 걸어서 찾아간 장병민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방 두 칸짜리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그나마 부엌이 달린 안방은 다른 가족이 살고 작은 방에 살고 있더군요. 헌 신문지로 바른 방문에는 문고리도 없이 새끼를 손잡이라고 달아놓았습니다.

“채항석 선생! 장병민 부인!”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방문 앞에 다 떨어진 여자 신이 한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새끼줄을 당겨 문을 여니 어두침침한 방안에 웬 여자가 귀신처럼 누워있었습니다. 장병민이었습니다.

“부인! 어디 아프시오?”

황급히 일으켜 앉히니 장병민은 나를 알아보고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주기는 했어도 시대를 호령하던 경찰청장의 딸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여자가 폐인처럼 더러운 몰골로 병들어 누운 것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이나 둘이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한 뒤에 장병민은 말해주더군요.

“아이를 낙태하고도 얼음장 같은 냉방에서 미역국 한 그릇 먹지 못하고 굶어 아랫도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어요. 일어날 수가 없어요.”

“부인!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내가 6.25 때 채 선생을 은행에 취직시킨 것이 잘못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동안, 나는 장병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채항석을 은행에 취직시켜준 적이 있습니다. 채항석은 미군이 올라오자 부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할까봐 인민군 후퇴 대열에 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내가 취직만 안 시켰더라도 북한에 올라가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박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내가 어렸을 때 매일 술만 먹고 기생첩을 얻어 우리 어머니를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원한이 박힌 탓이지요. 그 모순을 공산주의가 해결해줄 줄 알았는데… 나는 죽어도 좋아요. 우리 집 주인과 아이들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면 …”

말하면서 다시 엎어져 우는데, 가만히 보니 방바닥에 풀뿌리가 몇 개 보입디다. 아이들이 하도 배가 고프다고 해서 풀뿌리를 먹이려고 뽑아오라 했다는 겁니다. 내게도 돈이라곤 한 푼도 없으니 도와줄 수도 없었습니다. 남편 채항석은 새벽 6시에 일을 나가 밤 10시가 되어야 돌아온다니 그를 만나볼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 채 가슴에 천근같은 한만 얹고 나오는데 밭두렁에서 장병민의 딸이 나물을 캐고 있었습니다.

“경숙아!”

서울에서 부르던 그 애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입술이 새파란 경숙이가 찬바람에 벌벌 떨며 멍하니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예쁘고 활달하던 아이가 영양실조로 바싹 마른 얼굴로 추위에 떨고 서있는 모습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돌아서는데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립디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날 나는 죽어도 북한을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가졌던 모든 이상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노선은 항일투쟁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사회주의 이론이 가진 휴머니즘의 원칙들은 영구히 유효하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마르크시즘도 사회주의도 아닌, 김일성 일가를 위한 독재국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혁명이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듬해인 1957년 6월, 나는 마침내 중국에 가게 된 기회를 이용해 북한을 등졌고, 북경과 광동을 지나 홍콩에서 일본행 밀항선을 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꼬박 50년째 살고 있습니다. 남한도 북한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기에, 이 외로운 땅에서 반세기를 보내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구려. 이제, 이제 그만합시다.

*****

박 선생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통곡을 했다는 장면이 열군데도 넘는다. 자서전의 제목도 통곡이란 단어로 시작된다. 그날 저녁까지 이어진 긴 인터뷰도 기어이 눈물로 끝을 맺었다.

박 선생은 북한의 해방을 위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박 선생을 포함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망명한 이들이 199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조직했다고 했다. 남로당 출신들에게 유격전술을 가르쳐 빨치산으로 남파시키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이던 박병율, 휴전협상 때 북측 대표로 나온 이상조, 북한의 노동조합총동맹의 위원장이던 서휘 등 십여 명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4백여 명의 회원을 조직했다고 했다. 박 선생은 이상조, 서휘와 함께 공동의장을 맡았다.

“아무도 우리의 의견은 듣지 않습니다. 북한은 우리를 죽이려하고, 남한은 공산당 출신이라고 우리를 불신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래도 우리는 사회주의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구국전선의 초기 집행부는 거의 다 사망해 버렸다. 박 선생은 눈물을 거두고 말했다.

“다들 죽었습니다. 나도 이제 머지않아 죽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 한민족에게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없도록 애써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찬바람 부는 들판에서 덜덜 떨며 풀뿌리를 캐고 있던 채경숙이의 파리한 얼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직 살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살아있다면 꼭 탈출시켜 자유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가 없겠지요?”

말하는 박 선생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왜소함이다. 억울하고 원통한 무수한 죽음들 속에 외롭게 살아남은 이들의 한 맺힌 인생 앞에 우리 세대 민주화투쟁의 고통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박 선생과 늦은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지니 동경 거리는 또 다시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홀로 남겨져 배회하는 거리에는 그날도 일본공산당 사무실만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일본공산당도 민족주의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기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음료수라도 사들고 올라가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박 선생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듬해였다. 89세 노인이 혼자 비행기 여행을 한 이유는 생애 마지막 정리를 위함이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박헌영의 아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일본에 갔을 때 박헌영의 아들이 남한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꼭 만나겠다고 온 것이었다. 기꺼이 안내를 맡았다.

남한에서는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라 쫓기고, 북한에서는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의 간첩이라며 처형당한 박헌영의 자손은 일찍 스님이 되어 평택의 한 고찰에서 주지를 맡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지만 함께 늙어가는 처지인 두 사람은 오래 헤어졌다가 재회한 형제처럼 반가워했다. 서로 몰랐던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종일 시간을 함께 했다. 어린 나이에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 현장에 있었던 스님은 세상에 잘 못 알려진 이야기들을 수정해 주었고 박 선생은 평양에서 박헌영을 만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스님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전쟁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거의 매일 미군기가 날아와 융단폭격을 퍼부을 때였지요. 김일성은 평양외곽 지하벙커에 있었지만 아버님은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임시 청사에서 일을 보고 있었지요. 외국인 접대 문제로 허가를 받을 일이 있어 찾아간 길에 내가 남로당 출신들에 대한 박대가 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러더군요. 남에서 올라온 동무들은 왜 그리 불만이 많냐며, 공화국에 불만을 가지면 안 된다고, 꾹 참고 살라고 말입니다.”

박 선생은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로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실은 그래서 나는 박헌영 선생에게 지금도 불만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때 왜 그렇게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건지, 어차피 당할 걸 좀 더 과감하게 북한 정권의 모순을 지적하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어 버린 건지, 그랬다면 그 죽음이 역사적 가치라도 가졌을 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우리 아버님만 아니라 일제 때 쟁쟁하던 투사들이 다들 그러셨으니,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스님은 박헌영의 아들로서 남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이야기해 주었고, 박 선생은 북한에서 탈출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반세기 세월을 넘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했다. 박 선생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내가 평양에서 외국인 접대 일을 할 때인데 말입니다. 책임자가 허정숙 씨였단 말입니다.”

허정숙이라면 남로당 위원장이던 허헌 변호사의 딸로, 식민지시대 여성운동부터 항일무장투쟁까지, 나중에 북한 정권에서는 여성으로서 최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매일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이 불바다가 되고 있던 어느 날입니다. 허정숙 씨가 한밤중에 별다른 용건도 없이 나를 호출하는 게 아닙니까? 방에 가보니 야릇한 촛불 아래 위스키와 안주가 차려져 있고 허 여사가 때 아닌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겁니다. 무슨 용건인가는 설명도 없이 내게 양주를 권하는데 영 분위기가 야릇합디다. 아주 이상해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물었다.

“허정숙이라면 네 명의 남자와 결혼해 당당히 성이 다른 네 자녀를 낳아 키운 성평등주의자 아닙니까?”

“그렇지요! 놀라시겠지만 일제시대에도 페미니즘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지식인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을 은근히 두려워했습니다. 이강국 씨가 무슨 수필에서인가 페미니즘을 언급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묘한 분위기가 어찌나 나를 유혹하던지 혼났습니다.”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스님의 물음에 박 선생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무리 술과 한복으로 유혹을 해도 그렇지, 나보다 거의 스무 살은 많으니 넘어가기가 어렵더군요. 쩔쩔 매다가 도망쳐 나오고 말았답니다. 아무튼 대단한 여걸이었지요.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들도 말할 것 없구요.”

70년 전 이야기다. 그때 그 사람들은 이제 다 죽고 없다. 박 선생도 살아있다면 99살이다. 이미 사망했을 테지만, 이제는 뉴스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 부고 기사도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

2018년 12월 18일, 김정은의 서울 방문이 올해 안에는 어려울 거라는 뉴스들이 뜬다. 신기하게도 뉴스 밑에 거의 아무런 댓글도 달리지 않는다. 열흘 전만해도 뉴스가 나오자마자 댓글이 줄을 잇더니 조용하기만 하다. 내가 잘 들어가는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도 김정은이니 서울 답방이니 하는 키워드로 검색해 봐야 열흘 전 글만 나온다. 이 침묵의 뜻이 무얼까? 박 선생이 생존해 있다면 해설을 해주실까? 나는 모르겠다.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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