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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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 이 글은 월간 <시대>지에 발표된 원고입니다.

 

1.

한나절이라도 휴대전화를 끄고 생활해 보셨는지? 혹시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고립감에 허전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는지? 25년 넘게 몸에 휴대전화를 붙이고 살아온 내가 그렇다. 잠 잘 때조차도 전원을 끄지 못하고 소리만 꺼놓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가끔은 소리를 죽이는 것을 잊을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그런 실수를 했다. 잠자리에 누워 선잠에 빠져 드는데 귓전에 둔 휴대전화가 밤 1시 반이 넘어 요란하게 울어댄 것이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데 도시에 나가 사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지 몰라 받아 보았다.

“여보세요?”

졸음기 어린 목소리로 받는데 저쪽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씩씩하다.

“안 국장님! 접니다, 장이올시다!”

“아… ”

말문이 막힌다. 소리를 죽여 놓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제가 전화번호를 바꿨습니다. 앞으로는 이 번호로 저장해 두십시오.”

“그래요… 그런데 이 밤중에 웬일이래요?”

“오늘이 이 동네 배추 수확이 끝나는 날이라서 같이 일하는 노가다들끼리 술 한 잔 했습니다.”

술을 마시나 안마시나 우렁우렁한 음성은 똑같아서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어떤 때는 이틀 연속으로, 어떤 때는 몇 달 만에 한 번씩 걸려오는 똑같은 전화다. 어떻게 전화를 끊어야 하나 벌써 고민인데 그는 씩씩하게 물어온다.

“요즘 청와대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잘 계시지요?”

또 말문이 막힌다. 상대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게 뻔하다. 냉정하게 대답했다.

“촌구석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내가 청와대 소식을 어찌 압니까?”

동문서답이 시작되었다.

“아, 문 대통령은 잘 계시다고요? 공사다망으로 몸살이 걸리셨다던데 안 국장님이 잘 보필해 주십시오. 이 나라에 귀한 분인데 무리하면 안 됩니다. 아, 요즘 남북문제는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안 동지가 보기엔 잘 돌아가는 것 같습니까? 북한에 퍼주기 하느라고 지금까지 봐줬던 온갖 세금을 짜낸다고 원성이 자자하던데, 사실입니까?”

옆에 앉은 술친구들을 의식해 나의 반응과 상관없이 혼자 큰소리치는 게 분명하다. 끊어 버리고 싶어도 그의 체면을 고려해 나도 듣거나 말거나 혼자 떠든다.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가 있어요? 나도 현 정부가 노동문제는 뒷전이고 통일문제에만 신경 쓰는 게 못마땅하지만 현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거짓말에 현혹되지는 말아야지요.”

“남북이 통일되면 안 국장도 한 자리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 되면 나를 잊지 마십시오. 하하하…”

같이 술 마시는 사람이 여럿인 게 분명하다. 장은 전국을 돌며 김장배추를 뽑는 일당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은 허세 피우는 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제발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황한 소리 좀 하지 말아요. 나는 정치 쪽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요?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술 그만 마시고 어서 들어가서 자요.”

먼저 전화를 끊을 기세에 장은 서둘러 말한다.

“안 국장님! 대통령께 안부 꼭 전해주십시오.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역사에 길이 남을 대통령이 되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아참, 민주노총 본부 동지들에게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투쟁!”

청와대에도, 민주노총 본부에도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게 늘 반복하는 말이다.

“알았으니 어서 들어가 자요.”

끊으려는데 잊지 않고 또 한 마디가 나온다.

“안 국장님, 우리는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완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완희를 잊지 마십시오, 국장님! 투쟁!”

“……”

말없이 전화기 전원을 꺼버렸다. 전화번호를 차단하지는 않았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2.

완희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1987년 여름, 거의 모든 탄광을 휩쓸었던 파업 주동자 중 한 명이던 그가 온몸에 기름을 붓고 스스로 분신해 죽은 것이 이듬해 8월이니 채 1년도 알지 못한 사이였다. 28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은 짧은 기간 동안 그가 행한 모든 행동들을 따뜻한 추억으로 남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주었다.

태백시에서 노동문제 상담소를 열고 있던 내게 완희가 찾아온 것은 대파업이 끝난 후였다. 파업 주동자로 해고되었던 그는 광부가 아닌 경비원으로 복직이 되자 원직복귀를 요구하며 싸우던 중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니 막막하다. 어디서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를 올려놓은 기분이다. 마침 나이가 같았던 완희와 나는 금방 친구가 되어 분신하기 전날까지 수도 없이 만나고 전화를 하고 놀러 다녔다. 그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하랴.

몇 해 전의 일이다. 이미 오래전에 카지노 도박장으로 변한 탄광 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평소 술을 안마시던 내가 그날은 과음을 했나보다. 한밤중에 만취해 혼자 옛 탄광의 흔적 위를 거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문득 떠오른 완희 생각 때문이었다. 깜깜한 산중턱에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고함을 치며 울었는지 모른다. 가라앉을만하면 또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지 못하고 두세 시간을 울었다. 죽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데도, 완희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었다.

분신하기 전 며칠 동안, 완희는 하루에도 열댓 번씩 전화를 해왔다. 완희가 중심이 된 8명의 노동자들은 대파업의 주동자로 해고된 대학생 출신 광부 김모의 복직을 요구하며 매일 탄광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이었다. 탄광은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위는 새벽부터 한밤까지 벌어졌다.

완희는 그 모든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내게 알려왔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광부 합숙소 공중전화에서 상담소로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상담소에서 24시간 먹고 자며 대기를 해야 했다.

내가 해줄 일은 별로 없었다. 완희가 말하는 대로 글로 옮겨 유인물로 인쇄해주는 일과 북이며 장구 같은 시위 용품을 보급하는 정도였다. 그보다는 새벽 1시든 5시든 언제든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주는 게 힘이 되어 주었으리라. 자정 넘어 걸려오는 전화는 사건 보고가 아니라 그냥 친구 사이의 대화였다.

“안 국장, 아직 안 잤어?”

“다들 밤새 고생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나? 힘들지 않아? 벌써 며칠째 잠을 못 잤잖아.”

“여태 을방 사람들하고 술집에 있다가 헤어졌어. 두어 시간 있으면 갑방 사람들이 출근하니 자지 말고 기다려야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라니까. 을방 노동자들 반응은 어때?”

“대신 싸워줘서 고맙다고들 하지. 같이 싸우려고 하지는 않어.”

별 내용도 없는 대화는 동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두세 시간이 지나면 다시 걸려오기를 되풀이 했다.

분신하기 전날 저녁, 상담소에 찾아온 완희와 동료들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광부들은 대개 얼굴이 하얗기 마련인데 그들은 열흘째 밖에서 피케팅을 하느라 햇볕에 까맣게 그을은 데다 항의 표시로 삭발을 했다. 수면 부족에다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내가 분신을 해야 할 것 같어.”

대화 끝에 완희의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무슨 소리야? 이깟 일로 분신을 하다니? 분신 같은 거 상상도 하지 말아!”

군청색 광부 옷을 입고 머리띠를 하고 비좁은 상담소에 끼어 앉은 다른 노동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야단을 쳐서 보내면서, 이 정도로 화를 냈으니 아무 일 없겠지 했다.

정말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전날까지도 밤새 울리던 전화도 고장이라도 난 듯 잠잠했고,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8시에 걸려온 첫 전화는 완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완희가 분신했다는, 동료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긴 장례투쟁 기간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왜 화만 내고 소리쳐서 보냈을까, 따라 가서 함께 밥이라도 먹으며 찬찬히 설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였다. 싸움만 도울 게 아니라 보다 차분히 노동운동의 역사며 사회과학 공부를 함께 했다면 그까짓 해고자 복직 문제로 분신하지는 않았으리라는 후회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짧은 기간이지만 연인보다도 더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잃은 슬픔이었다.

슬픔은 내게 깊은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나만이 아니었다. 분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동료 노동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장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3.

해고자 김의 복직과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는 기나긴 장례투쟁은 내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 장씨였다.

이미 여러 번 만났음에도 완희에게 가려 보지 못했던 그는 대단한 투사요 놀라운 선동가였다. 수줍음이나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수천 군중을 압도하는 우렁차고 선동적인 연설로 파업과 집회를 이끌었다. 완희의 자리를 대신한 그는 나이가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아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이기는 했어도 금방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장씨는 고향 제주도에서 양배추 같은 농산물을 수확하는 일꾼으로 일하다가 집을 짓느라 진 빚을 갚으려고 탄광까지 흘러들어온 성실한 노동자였다. 지하 수 킬로까지 들어가 탄을 캐는 일은 너무 힘이 들어 보통의 광부들은 결근이 일상인데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 매달 40만 원 이상을 벌었다. 대학 졸업자 초봉이 20만원을 겨우 넘을 때니 노동자로는 상당한 수입이었다. 합숙소에서 우연히 완희와 같은 방을 쓰면서 복직투쟁을 함께 하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피케팅이 벌어지기 전까지도 결근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장씨가 이끈 싸움은 성공적이었다. 해고자 김은 복직이 되었고, 어용이라 불리던 노조집행부가 물러난 자리에 노조위원장으로 당선까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새 노조위원장이 된 김은 1980년대 한국의 대학생이라면 대개 그랬듯이 민주화 시위 꽤나 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탄광에 들어온 것은 노동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대파업 때 앞장섰다지만 교회까지 다니는 그는 자본에 대한 적대감이나 계급의식 같은 건 없었다. 탄광 관리자들이며 구 노조 집행부들과도 잘 지냈다. 새 노조집행부를 꾸릴 때도 구 노조간부를 여럿 그대로 기용했다.

장씨와 나는 김의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김을 싫어했다. 그것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했다. 완희와 동료들이 자신의 복직을 위해 싸워줄 때도 김은 완희가 지나치게 투쟁일변도라며 여러 차례 내게 불만을 표했었다. 완희가 분신한 직후 처음 만났을 때 김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것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어색한 웃음은 김의 특징에 불과했고 김은 스스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민주주의자로 행동했을 뿐인데, 장씨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 때문에 완희가 죽었다는 원천적인 미움이었을 것이다.

김이 연말의 단체협상과 이듬해 봄의 임금인상 협상을 파업 없이 넘어가면서 김에 대한 장씨의 미움은 증오로 발전되었다. 협상 기간 내내 혼자 갱도 앞에서 파업을 선동하는 피케팅을 하며 김을 비난했다.

완희에게 그랬듯이, 나는 유인물을 만들어주고 핸드마이크니 북을 지원해 주었다. 완희가 그랬듯이, 장씨는 하루에도 열 번씩 전화로 모든 상황을 보고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대파업 때 한 달 넘게 놀았던 데다 완희의 장례투쟁으로 다시 한 달 넘게 파업을 벌였던 노동자들은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파업하기를 원치 않았다. 함께 투쟁했던 이들도 새 노조위원장을 믿고 좀 더 지켜보자며 장씨의 선동을 외면했다. 장씨는 점점 고립되었다. 유일한 지지자였던 나조차도 나중에는 현장 분위기에 맞지 않는 싸움이라며 중지하라고 설득하고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씨는 거의 병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는 흥분하면 제주도 사투리가 나왔다.

“왜 다들 나만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거우꽈? 완희 덕분에 위원장이 된 놈이 저렇게 개판을 치는데 다들 못 본체 하고 나만 설득하는 거우꽈? 와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네잉!”

이때부터 장씨는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조하지 않는 동료들을 두고 어용들과 결탁했다거나 회사로부터 돈을 먹은 게 틀림없다고 의심했다. 내게 거는 전화도 점점 뜸해졌다. 고립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쯤 되어서는 더 이상 동조를 해줄 수 없어 만날 때마다 질책을 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차분히 소모임부터 시작하도록 인도해 보기도 하고, 완희에게 못했던 노동운동사를 가르쳐 보기도 했다. 관심을 현장 밖으로 돌리게 하려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단체의 강원도 대표로 추천하기도 했다.

별 도움이 못 되었다. 책 한 줄 읽는 것도 싫어하니 공부는 먹히지 않았다. 오로지 투쟁이냐 타협이냐, 동지냐 적이냐 하는 두 가지 기준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데다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조리 회사의 첩자로 단정해 버리니 현장 조직이 될 턱이 없었다.

결국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장 씨는 어느 날 갑자기 탄광을 떠나 버렸다. 완희가 죽은 지 꼭 1년 만이었다. 회사로부터 퇴직금 외에 돈을 더 받아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본인이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회사 간부들이 일부러 소문을 낸 것이 분명했다.

액수가 적든 크든 본인이 회사에 요구해 돈을 받고 떠났다는 것 때문에, 장 씨의 이름은 광산노동운동의 수치로 남게 되었다. 나도 한동안 참담한 기분이지만 한편으로는 떠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씨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탄광을 떠난 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해왔는데 점점 과대망상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가 다시 양배추 뽑는 일을 하면서도 탄광에서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탄광에서의 몇 년이 그의 생애 최고의 영광이요, 절정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긍지는 과대포장이 되어 망상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망상에 빠졌다고 해서 일상생활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장씨를 욕해도 나는 그를 욕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난 이듬해, 제주도로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며칠 그의 집에 묵으며 그가 일하는 곳에도 같이 가 보았는데 성실하기만 한 보통의 노동자였다. 기온은 영상이라도 바람이 모질어 고산지대 탄광보다도 더 추운 들판에서 온종일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서는 허세를 부려도 일터에서는 탄광에서 일하던 그대로였다.

 

4.

강씨가 떠나고 몇 년 되지 않아 탄광은 거의 다 문을 닫았고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이들도 거의 다 떠났다. 도시로 간 노동자들은 철근공이 되거나 지하철 터널 공사장에서 일했다. 노조위원장이던 김은 회사의 고위 간부가 되었고, 간혹 탄광노동운동에 관련해 취재하려는 기자들에게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탄광을 떠나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공장도 다녀보고 일당 막노동도 하던 끝에 포클레인을 배워 시골로 내려왔다.

처음 시골에 왔을 때는 식구들은 도시에 남겨두고 혼자 도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매일 밤마다 술판과 포커 판이 벌어지는 합숙소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해도 마음은 편했다. 불안한 수배생활을 안 해도 되고, 일이 끝난 저녁 시간은 완전한 자유인 게 좋았다.

추억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읍내를 비켜 지나는 외곽도로를 닦는 일이라 집 한 채 없는 산중에서 혼자 일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소리쳐 노래를 부르며 졸음을 이겨내곤 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홀로 목이 쉬게 노래를 하다보면 눈물이 나서 앞이 침침해졌다. 때때로 걸려오는 장씨의 전화가 싫었던 것도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전화였다.

연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이었다. 장씨의 전화가 왔는데 무심코 일하는 동네 이름을 말했더니 이튿날 갑자기 시외버스에서 내렸다며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일을 마치고 읍내에 들어갔을 때 장씨는 이미 터미널 근처 정육점 겸 식당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일하던 차림 그대로, 흙먼지와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에 손톱 밑에는 기름때가 까맣게 낀 내가 들어서자마자 장씨는 식당 주인에게 소리쳤다.

“사장님! 이 분이 노무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요. 청와대를 쥐락펴락하는 분이요. 이리 와서 인사 하시요.”

노무현? 국회의원을 할 때 탄광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 왔을 때 여럿이 밥을 먹은 외에는 나하고 아무런 인간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미워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보수 세력이 분열한 덕분에 운 좋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착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외에는 아무런 장점도 발견할 수 없어 실망하고 있던 내가 노무현과 각별한 사이라니?

“창피하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나는 술 안마시니 그만 일어납시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법이 없는 장씨다. 내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식당 주인을 불러 어색한 인사를 시키더니 소주를 한 병 더 마시고서야 억지로 끌려 나왔다.

합숙소에는 손님을 재울 공간도 없거니와 설사 있다 해도 데려가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여관을 잡아주고 일찌감치 헤어지려는데 굳이 다방에 가자고 했다.

시골 다방이란 커피 마시러 가는 곳이 아니다. 맛없는 믹스커피가 담긴 작고 두꺼운 흰 컵을 앞에 놓고 여자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노닥거리다가 맘에 맞으면 커피 백 잔쯤 될 돈을 지급하고 모텔로 데리고 나가는, 일종의 매춘 소개소 같은 곳이다. 인구라야 수천 명도 안 될 조그만 읍내에 다방이 스무 개는 되고 다방마다 일하는 여자가 서넛씩은 되는 이유이다.

시골 다방에 대한 정보는 같이 일하는 노가다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을 뿐, 나는 실제로 다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장씨에게 반강제로 끌려 들어갔다. 역시 여자 몇 명이 일하는 조그만 이층 다방이었다. 장씨는 거기서도 똑같았다.

“어이, 아가씨들 전부 이리 와 한 잔씩들 하지?”

앉자마자 여자들을 불러 옆에 앉히고는 호기 넘치게 떠들기 시작했다.

“아가씨들, 이 분에게 인사들 하지? 우리 안 국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무현 대통령과 절친한 친구요, 아주 유명하고 대단하신 분이야. 오늘 잘 모셔야 해.”

“어머 그러세요? 뭐하시는 분인데요?”

여자들이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역시 식당 주인보다는 다방 여자들이 비위를 더 잘 맞춘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그냥 공사장 인부요. 내 친구가 장난으로 농담하는 거니까 신경들 쓰지 말아요.”

말려보아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정색을 하고 야단쳐도 장씨는 멋대로 떠들었다.

“우리 안 국장님이 옛날에 탄광노동운동의 대부였단 말이지. 내가 하나님처럼 모시던 분이야.”

심한 과장이지만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놀리는 것도 아님을 나는 잘 안다. 망상이 신념으로 진화한 것뿐이다. 다방 여자들은 더 가관이다.

“어머나, 그렇게 대단한 분이세요? 영광이에요. 오빠, 그런데 탄광이 뭐하는 데야?”

장은 여자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오른손을 번쩍 치켜 올려 투쟁 구호를 외친 다음,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거는 체하고 그냥 다방을 나와 버렸다. 혹시라도 따라올까 싶어 서둘러 읍내를 빠져나오는데 깊은 밤 그림자가 뒤통수에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공사장에 도착하고서야 내일 새벽에 일어나 일해야 해서 먼저 나왔으니 놀다 가라고 전화해주고 바로 전원을 꺼버렸다. 장씨를 직접 만난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5.

이후에도 장씨의 전화는 계속되었고, 웬만하면 받아 주었다. 하지만 만나는 일만은 피했다.

장씨가 끝내 이혼을 하고 머물 거처도 없이 제주에서 태백까지 1년 내내 밭떼기 상인들을 따라 객지 생활을 하는 사이, 나는 도로공사로 인연을 맺은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 멀리까지 집 한 채 없어 밤이면 전등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싼 땅을 사서 가장 싼 자재들로 집을 짓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포클레인에 과수원도 하고 소까지 키우며 바쁘게 살아갔다.

장씨의 전화는 갈수록 뜸해졌지만 결코 끊어지지는 않았다. 며칠 연속으로 걸려올 때는 아예 받지를 않지만, 몇 달이나 소식이 없을 때는 궁금해 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내 삶에 그가 뛰어드는 것만은 피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다시 10년쯤 지났을까, 단풍 좋던 가을날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계룡산 갑사로 단풍놀이 가는 길이었다. 친구 둘을 태우고 갑사로 올라가는 외길을 따라 차를 모는데 트럭 한 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남자 몇이 경운기로 실어 나른 배추를 트럭에 싣느라 바빴다. 김장철이라 농촌 어디 가나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트럭이 비키기를 기다리며 무심히 바라보는데 문득, 일꾼 중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장씨였다. 거리가 멀어 확실치는 않았지만, 큰 키에 단단한 체구, 검고 길쭉한 두상이 틀림없이 장씨처럼 보였다.

“아, 이거 참 어떻게 하지?”

친구들에게 설명할 겨를도 없이 내려서 반가워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데 친구들은 속도 모르고 태평이었다.

“기다려봐, 비켜주겠지.”

트럭은 한참 후에야 비켜주었고, 그때까지 장씨는 한눈 한 번 안 팔고 열심히 배추를 상차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선팅이 되어 있어 장씨가 보았더라도 누구인지 몰랐겠지만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앞만 보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갑사는 연꽃무늬 문창살이 인상적이던 절이었던 것 같다. 일부러 느릿느릿 절 구경을 하고 돌아내려오는 길에는 트럭도 노동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막상 장씨가 보이지 않으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옛 친구와 담배 한 대 나눠 피울 관용조차 없는 나의 위선을 수치스러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얼굴이 비슷할 뿐 장씨는 아니었으리라 자위하면서, 돌아오는 내내 울적했다.

문득, 며칠 전 전화가 왔을 때 요즘은 어디서 배추 작업을 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장씨는 나만이 아니라 탄광에서 함께 했던 몇몇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비슷한 전화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먼저 전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는 전화는 없고 일방적으로 걸기만 하는 전화기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난 김에 오늘밤 전화 한 통 해줄까, 망설여진다.

 

안재성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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