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 동고송 ‘고전공부모임’이 묻고, 곽병찬이 답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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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問에서 人聞으로!

(편집자주) [향원익청] 책잔치를 하면서 아쉬움이 너무 짙게 남았습니다. 행사 진행상 동고송 ‘고전공부모임’ 회원들이 애써 준비한 질문들을 미처 토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곽병찬 저자님과 접선했습니다.질문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변을 보내주신 저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전공부모임’이 묻고, 곽병찬이 답하다 2

 

6.

향원익청 1권은 김창숙과 김락을 맨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의성 김씨 안동 사람들입니다. ‘안동’하면 진성 이씨 이황이지 않는지요? 그런데 이황은 1권의 3부, 300쪽에서야 나옵니다. 안동 사람들, 특히 진성 이씨 사람들이 <향원익청>을 보면 ‘대노’할 일입니다. 왜 의성 김씨를 먼저 다루었는지요? 향원익청(鄕遠益聽)이라고 마을이 멀수록 소리가 시끄러울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김창숙 선생을 머리에 올리자고 한 것도 출판사 편집자의 의견이었습니다. 열사 지사들의 우열과 순위를 가리고 싶지 않아 편집자의 뜻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의성 김씨이고 성주 출신입니다. 사드가 성주에 배치된다고 하자 성주유림은 도포에 갓을 쓰고 박근혜에게 항의하러 상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이 하신 이야기가, ‘어떻게 김창숙 선생의 고향에 그런 것을 배치하려 하느냐’였습니다.
안동에서 진성 이씨는 소수입니다.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청음 김상헌의 안동 김, 권오설 선생의 안동 권씨, 유성룡의 하회 유씨, 유치명의 전주 유씨 등의 후손들이 더 많습니다.^^

 

7.

시대가 폭력적이었기에 더 외로웠고, 시대가 가난했기에 더 따뜻했으며, 시대가 더러웠기에 더 맑았던 이들이 많았다.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이한열, 박종철, 전태일, 윤동주……. 그들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진선진미의 삶을 살았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시대의 정화수였고 시대의 위로였다. 그 빛과 향훈은 진흙탕 속 고통이 빚어낸 것이니,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위대한 역설인가.

역사와 문학과 철학이라는 세 새끼줄을 하나의 동아줄로 엮어낸 이 시대 인문의 절창이요, 모두가 본받아야할 승묵입니다. 그런데 박종철과 전태일 사이에 윤상원이 빠진 게 아쉽습니다. 개정판 낼 때 삽입할 뜻은 없으신지요?

죄송합니다. 깜빡 했습니다.
윤상원, 윤한봉 김남주 등 빠진 이름이 많습니다.

꼭 반영하겠습니다.(편집자, 꼭 기억하겠습니다)

 

8.

8쪽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미색의 공식을 찾으려 애썼다”면서 미학을 탐구하다가, 클레오파트라며 베아트리체며 서양의 미인을 거론하시다가, 다시 양귀비와 서시, 왕소군과 초선 동양의 미색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10쪽에서 “어질고 의로우며 바르고 지혜롭다”는 인의예지 사단을 들추면서 이런 도덕적 본성을 체현한 이를 옛사람은 가인(佳人), 즉 아름다운 사람이라 불렀다고 쓰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이렇게 미학이 도덕적 본성으로 귀결되는 것인지요? 아니 미학을 도덕적 본성으로 환원해도 좋은 것인지요? 미의 원리를 숭고에서 찾았던 칸트의 도덕주의가 아닌지요?

제 사유의 깊이가 그렇게 깊지는 않습니다. 아름답다는 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지금도 궁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미태건 군자의 덕성이건 대개는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고 끝내 풍화돼 사라지지만, 어떤 이들의 이야기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남아 맑은 향훈을 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덕성 때문이건 사랑 때문이건 아니면 지극한 슬픔이나 그리움 때문이건 그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령 2편의 우포늪에 나오는 옥천댁 이야기는 비록 평범하고 단순하지만 돌아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시울이 시큰거립니다. 쪽지벌 갈밭과 억새밭 사이로 눈물을 뿌리며 걸어가던 새색시 옥천댁, 그는 불과 삼십 리도 안 되는 그 길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되돌아가지 못했습니다.

 

9.

영화 <소오강호>의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강호무림의 고수였던 선배 세대가 젊은 후배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못다 부른 소오강호를 자네들이 이어주게나.” 아직 못다 부른 ‘향원익청’이 있는지요? 다시 써야 할 ‘향원익청’이 있는지요? 동고송은 인문통신 발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월 1회에 <못다 쓴 향원익청> 또는 <향원익청> 3을 싣고 싶습니다. 도와주실 거죠?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편집자, 선생님께서는 절대 두 말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10.

어떤 제품에는 반드시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설명서가 있는가 하면, 그냥 무시하고 맘 가는대로 해도 되는 설명서도0 있습니다. 향원익청을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는 설명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울러 독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진리는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대응설과 맥락설입니다. 사고와 실제가 일치하는 것을 진리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대응설입니다. ‘지구는 둥글다’라는 경우겠지요. 예수의 산상수훈처럼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설명하는 하는 경우가 맥락설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빛이 되어주고, 감동으로 활력을 주는 진리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포늪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떠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철새가 얼마나 많이 날아들고, 아침 안개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이야기해도 잠깐 그때뿐입니다. 우포늪을 진실로 아름답게 하는 건 그 속에 사는, 옥천댁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그의 눈물과 고통과 번민과 그리움 등 살아있는 무늬로 그려진 이야기가 없다면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혹은 어떤 곳을 읽을 때라도 그 속에서 이야기와 그 무늬를 찾아보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무늬의 어울림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내 이웃에게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이란 인간 삶의 무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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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 人問, 人聞... 허생처럼 책읽기!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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