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 동고송 ‘고전공부모임’이 묻고, 곽병찬이 답하다 1

0
60
This post is last updated 115 days ago.
저요, 저요!

(편집자주) [향원익청] 책잔치를 하면서 아쉬움이 너무 짙게 남았습니다. 행사 진행상 동고송 ‘고전공부모임’ 회원들이 애써 준비한 질문들을 미처 토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곽병찬 저자님과 접선했습니다.질문지를 받자마자 바로 답변을 보내주신 저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전공부모임’이 묻고, 곽병찬이 답하다 1

1.

선생님을 처음 뵙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2013년 5월부터 2017년 7월 18일 연재기사가 마감되기까지 선생님의 문향(文香)을 늘 접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의 교본이었고, 가르치는 학생들과는 함께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지정환 신부를 다룬 마지막 기사, 마지막 문장을 기억합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물과 거름이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선언하셨습니다. “정년과 함께 연재도 마칩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기분은 어땠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기사를 넘기고 났을 때 어떤 기분, 어떤 소회이셨는지요?

신부님은 이미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팔다리 마비가 심해 휠체어에 의지해야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낯설고 물선 한국에서 자청한 고생 때문에 얻은 병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이승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는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조선 말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사료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 봄 돌아가셨습니다.
굳이 정년 이야기를 한 것은 그분의 삶을 본받아, 정년 이후 내가 할 수 있고, 또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게으른 탓에 아직 머뭇거리고 있습니다만, 무언가 소명이 떨어질 것으로 봅니다.

 

2.

연재기사와 책 제목을 비교해봤습니다. 조금씩 바뀐 제목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령 김창숙을 다룬 글에서 ‘우파여, 이 사람을 보라’는 ‘보수주의자여, 이 사람을 보라’로 바뀌어 있습니다. 윤이상의 글에서는 ‘졸렬한 조국’이라는 표현이, 이건창과 이항로의 글에서는 ‘참보수주의자’라는 표현이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우연인지요? 아니면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한 향원익청 기사를 연재하면서 댓글 등의 형태로 공격받은 적은 없으신지요?

제목을 바꾼 것은 출판사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김창숙 선생은 유학자로서 지켜야 할 가치와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분이어서, 정치적 색깔이 강한 좌우로 나누는 것보다는 보수와 진보로 분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이상 선생에겐 조국이 아무리 졸렬하고 고향 통영이 꼴통스러워도(자유당부터 자유한국당까지 통영에서는 항상 꼴통들이 당선됐습니다) 언제나 아름답고 그립고 따스한 곳이었습니다. 윤 선생의 그런 정서를 담아내려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스토킹 하는 자들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동일인물이 분명한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대여섯 개씩 욕설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처음엔 몇 번 훑어보다가 나중엔 아예 댓글 칸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

향원익청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권력이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감추려 하고, 평가절하하려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한편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각 대표적인 인물 몇 분만 소개해주십시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천민 출신이어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경우입니다. 최재형 선생이 그런 경우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이념적인 것도 섞여 있겠지만 그분 역시 천민 출신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여성이기 때문에 배제되는 경우입니다. 안동의 김락 할머니나, 장흥의 이소사, 그리고 김가진 선생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 등이 그렇습니다. 본명이 아닌 게 분명한 ‘김락’ ‘이소사’는 지금까지 본래 이름조차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일제하에서는 물론 해방 후 한국의 근대 체육을 정초하고 일으켜 세웠는데도, 이승만 이후 체육계가 권력의 곁불에 의지하면서 한국 체육의 대부로서 그의 업적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습니다.

 

4.

하준수를 다룬 글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노트를 덮기 전 한 줄 더 추가했다. “이 서류의 보관자에 대해서는 당의 영광스런 배려가 계실 것을 건의함.” 남도부는 노트를 신문지로 돌돌 말아, 원호증과 신분증명서 그리고 몯당숟가락과 함께 갈색 유리병에 넣었다. 그리고 은신했던 행랑채 부엌 바닥을 1미터쯤 파고 묻었다. 그 노트의 존재가 궁금합니다. 직접 보셨는지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타이핑 한 것을 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로부터 제보 받았습니다. 하준수 선생은 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지사였지만,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함양 갑부였던 그의 생가는 지붕도 벽도 무너져 내린 채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야말로 ‘흉가’였습니다. 그에 대한 처벌은 그렇게 가혹하고 처절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은신했고, 노트를 묻은 곳은 바로 성유경-성일기-성혜림-김정남-김정철로 이어지는 ‘창녕 성씨’의 고가입니다. 부관이었던 성일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5.

<향원익청1>에 보면 많은 아름다운 인물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 중엔 우리들이 아는 인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자료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홍범도, 여운형, 윤동주, 김성일, 정여립, 김덕령은 들어본 이름입니다. 김락, 최재형, 이종만, 이소사, 하준수는 들어보지 못한 이름입니다. 이분들에 대한 자료 수집은 어떻게 하셨고, 신문에 다 싣지 못한 낙숫거리 이야기(뒷 담화)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특히 최재형과 하준수의 낙숫거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사실 조국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병든 어머니에게 약 한 번 먹이지도 죽 한 번 끓여 먹일 수도 없는 상황에 버려둔 게 조국이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인은 기아에 쓰러진 자신을 거두어 먹이고 가르쳤습니다. 연해주 최고의 갑부로 도약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와 돈을 모두 조국의 독립에 바쳤습니다. 독립운동가라면 자신의 과거 신분을 조롱하는 양반들이라도 기꺼이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었습니다. 러시아 적군이 일본과 대적할 때는 적군 편에, 백군이 일본과 싸울 때는 백군 편에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하준수 선생은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종만 선생은 남쪽에선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로만 간신히 기억합니다. 탤런트 강동원이 그의 외증손입니다. 강동원은 외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라고 자랑했다가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친일파를 어떻게 애국지사라고 자랑하느냐고. 다행히 향원익청 글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일제하에서나 해방 직후 광산 노동자들의 우상이었습니다. 북쪽에선 김일성이 광산 개발을 위해 직접 그를 초청했고, 기업가로는 유일하게 애국열사릉에 안장하도록 했습니다.

 

to be continued…

 

Avatar
人文, 人問, 人聞... 허생처럼 책읽기!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