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 황광우 작가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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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곽병찬의 <향원익청>을 읽는다.

 

 

곽병찬, 황광우.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을 힘들게 구했습니다. 그럼, 모자쓴 분이 바로…

“기진한 아이는 길가 돌무덤에 묻혔다. 도라지꽃 한 송이 피고, 산 꿩이 울던 어느 날, 여인의 머리카락은 눈물방울과 함께 툭툭 떨어졌다.”

어느 아이의 무덤인가. 한 움큼의 슬픔이 곧 솟구칠 것 같다. 도라지꽃과 산 꿩과 여인의 머리카락이 화하여 문향을 피운다.

“잠은 쉬이 오지 않는다. 달은 이미 서쪽 산자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은빛 잔물결 위로 붉은 여명이 깔렸다.”

무슨 번뇌가 그리 깊었나. 달이 서산에 넘어가도록 뜬 눈으로 보낸 밤이었다.

그렇다고 <향원익청>은 소설 단편의 묶음집이 아니었다. 뜨겁게 장중하게 역사를 일군 이들의 이야기였다. 조명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의 피맺힌 이야기였다. 북에서 남으로 남파된, 산사람 하준수의 이야기는 이렇다.

“결국 하산했다. 1953년 10월 초였다. 입산한 지 3년 4개월이었다. 고가 행랑채에 숨어들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백두대간에 오른 이래 겨울 눈보라, 여름 비바람을 맞으며 풍찬노숙한 세월에 대한 기록이었다.”

‘혁명의 조국’마저 쓰다 버린 패잔병, 하준수 그는 유리병에 일기를 넣고 조심스럽게 땅 속에 파묻었다.

<향원익청> 전편을 관통하는 뜨거운 울음, 차가운 슬픔은 그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었다.

“나는 황홀한 마음으로 그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품위와 예지와 성실의 빛이 흐르는 얼굴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었다.”

원불교의 지도자, 정산 송규 종법사에 대한 기록이다. 철학자 안병욱이 목도한 종법사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마음이 공연히 기뻐지는” 얼굴이었다.

곽병찬의 방황은 그곳으로 귀결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 찾으려 하지 말자.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에 주목하자.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지 않고…향기는 멀수록 맑고….” 香遠益淸(향원익청)

나는 젊은 시절 ‘쫒기는 삶’을 살았다. 1980년 이래 네 차례 사고를 쳤고, 그때마다 수배의 올가미가 조여 왔다. 나에겐 쫒기는 삶을 도운 ‘세 장의 자기앞수표’가 있었다.

한 장은 황지우 시인이 주었다. 1986년 인천에서 5.3 사태를 치르고 정국이 험악한 때였다. 종로 뒷골목 어느 국수집에서 나는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받았다.

한 장은 작고한 김태홍 선배가 주었다. 1986년 11월 홍대 앞 ‘말’지 사무실에서였다. 두툼한 입술, 서글서글한 눈매의 김 선배는 “힘들 터인데 쓰라.”며 주었다.

또 한 장은 곽병찬 기자가 주었다. 1989년 10월경 신림동 길거리에서였다. 노태우가 ‘쫒기는 사람’의 뒤를 더욱 악랄하게 쫒던 시절이었다.

2019년 4월 19일 나는 ‘<사단법인> 인문 연구원 동고송’을 창립하면서 곽병찬씨를 모시고 조촐한 책잔치를 열었다. 30년 후 마련한 결초보은의 자리였다.

예로부터 입덕(立德)과 입공(立功)과 입언(立言)을 삼불후(三不朽)라 하였다. <향원익청>은 이 시대가 낳은 인문의 승묵(繩墨)임에 분명하다. 나는 문장가 곽병찬의 입언(立言)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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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 人問, 人聞... 허생처럼 책읽기!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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