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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東 이야기≫-한・중・일 문명 교류의 교량 산동(山東), 수천 년 얽힌 선연(善緣)과 악연(惡緣)-박영호 저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9-13 17:34
  • 조회108
  • [보도자료]
  • 2026-09-13

≪山東 이야기≫-한・중・일 문명 교류의 교량 산동(山東), 수천 년 얽힌 선연(善緣)과 악연(惡緣)-박영호 저

 

 

서문

 

산동을 여행하다 보면 지역 표시 ‘魯(노)’를 쓴 자동차 번호판이 눈길을 끈다. 산동에는 아직 온돌방이 남아 있고, 산동 사람들은 중국 다른 지역과 달리 목소리 높고 성질이 급하며 현시욕과 의협심 강한 반도 기질로 우리와 많이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산동반도를 ‘제・노 문화의 고향’이라 부르는데, 제(齊)는 강태공이 세운 제나라, 노(魯)는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노나라를 말한다. 제나라가 탄생하기 전 산동의 주인은 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이었고, 래이(萊夷) 또는 우이(嵎夷)라고 불리며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다. 동이족의 표상이 우리나라 붉은 악마 응원단의 도깨비 ‘치우(蚩尤)’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능(陵)과 치우총(蚩尤塚) 비석이 발견된 곳 역시 산동이다. 진시황이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산동 동이족도 함께 사라졌지만 수천 년이 지난 요즘도 산동 곳곳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요동반도는 산동반도를 내리 찌르는 형세며, 새의 부리 같은 산동반도는 한반도 옆구리를 겨냥한다. 분열과 통합을 반복한 대륙의 역사는 황해 건너 가장 가까운 한반도에 수시로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해 바다에는 수천 년간 선연(善緣)의 잔물결, 때로는 악연(惡緣)의 쓰나미가 일었다. 산동은 한반도 침략 때 발진 기지가 돼 황해와 발해 바다에서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장보고 시대엔 산동~완도~규슈를 잇는 항로가 열려 한・중・일 삼국의 ‘해상 실크로드’ 중심이 되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과거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하지만, 사실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종합무역상사에 근무한 것을 계기로 중국 개방 후 곧장 산동 위해시에 진출해 20여 년간 의류가공수출공장을 경영해 오고 있다. 발해사를 전공한 중국인 사학자와 용구시 귀성리 유적지를 답사, 한성백제의 서울 ‘풍납토성’과 산동 래이가 세운 ‘귀성’ 성곽이 똑같이 판축법(=다져쌓기)로 축조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한・중 고대사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체계적으로 사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중국대륙과 동북아 역사에서 두 얼굴의 산동반도와 그 주인공들의 활약상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한・중 역사 이야기를 함께 나눔으로써 산동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제1장 청도의 옛 이름… 낭야

한 폭 그림 같은 ‘중국 속의 유럽’

 

낭야는 칭다오 맥주로 잘 알려진 청도의 옛 이름이다.

‘홍와녹수’, 붉은 기와로 수놓은 지붕, 황해의 푸른 바다, 노산의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청도시는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이 말해주듯 중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소흥에서 수도를 옮겨와 낭야대를 축조한 것이 이름의 유래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시하다 절경에 반해 ‘낭야대각석’을 남겼고, 불로초 구하러 출항한 서복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에 얽힌 고사를 비롯해 삼국시대 촉나라 충신 제갈량 이야기 등 이름도 아름다운 낭야의 역사 보따리를 풀어본다.

 

중국 5‧4 운동 진원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진나라가 산동의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키면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진시황은 제후들의 분봉제를 폐지하고 국가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산동에는 임치・낭야 등 4개의 군을 설치했다.

낭야군은 지금의 산동성 청도시와 제성(諸城)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낭야는 한(漢)나라에 들어와서 산동의 남부 지역을 아울러 다스리는 서주(徐州)에 편입됐고, 당대(唐代)에는 등주부(登州府) 아래 속했다.

18세기 청도는 연안이 들쑥날쑥하여 붙여진 이름 ‘교오’로 불리던 교주만(膠州灣)의 한낱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개화기에 독일인이 산동에 들어오면서부터 교주만의 작은 섬 소청도(중국 고대 악기인 고금古琴을 닮았다 하여 금도琴島로 불렸음)를 청도라 했는데 점차 지금의 청도시 면적 전체를 청도라고 부른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전후 배상으로 요동반도 할양을 요구하자 이에 제삼국인 독일이 반대, 소위 ‘삼국간섭’으로 불렸던 독일・러시아・프랑스의 공동 간섭으로 일본의 요구가 묵살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에 은혜를 베풀었던 독일은 1897년 청도 일대를 아시아 진출을 위한 극동의 근거지로 삼았고, 독일의 영향으로 청도는 빠르게 성장 발전했다. 청도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마치 작은 독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구시가지 곳곳에 남아 있는 서양풍의 건물이나 칭다오맥주는 당시 독일이 남기고 간 유산이며 이 때문에 청도시는 중국 속의 유럽이라는 애칭을 갖게 됐다.

중국인들은 청도시를 상징하는 말로 ‘홍와녹수(紅瓦(綠水) 남천벽해(藍天碧海)라고 하는데, 서유럽의 도시들처럼 붉은 지붕으로 수를 놓은 청도는 짙푸른 하늘 아래 노산(勞山)의 울창한 녹음과 황해의 파란 바다를 끼고돌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양 도시다. 지금 중국인들에게는 청도시가 ’가장 살고 싶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제2장 임기시, 동이문화를 먼저 꽃피운 지역

2500년 전의 손빈병법 죽간 발굴

 

산동 임기시는 동이족이 먼저 문화를 꽃피운 곳이고, 춘추전국시대에는 낭야군 관할로 와신상담, 토사구팽 고사로 유명한 월나라 도읍지였다.

그 후 제나라 영토로 편입돼 전국시대엔 패권을 다투는 각축장이었으나 평화시대에는 국경을 초월한 상업 중심지로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다. 임기시 은작산에서 2,400년 전의 병법 죽간이 대량 발굴됐다.

이로써 전설인 줄 알았더니 ‘앉은뱅이 전략가’ 손빈이 실존 인물이었음이 밝혀졌다.

5대조 할아버지 손자(손무)의 이론을 실전에 적용시킨 손빈병법이 오늘날 각국 사관학교 교재, 기업 경영전략 교과서, 인생 교범으로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낭야 임기, 전국시대 자유무역도시… 칼동전은 요즘의 달러

 

지금의 임기시에서 왜 유달리 제나라 화폐가 많이 출토되는지 중국 학계가 관심을 가졌다. “천하의 상인들이 모두 물 흐르듯 제나라로 몰려들었다”고 사마천은 ≪사기≫에 썼다. 당시 제나라 화폐는 지금의 미국 달러처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기축통화였고, 낭야 임기는 국경을 뛰어넘는 산업의 중심, 즉 무역자유지대였다.

낭야 임기에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유물인 죽간(竹簡)을 전시하는 죽간박물전시관이 있다. 1972년 4월 산동성 임기시 은작산(銀雀山)의 서한(西漢) 초기 무덤에서 어마어마한 불량의 죽간이 출토됐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89쪽의 죽간 형태로 발견된 것이다. 이 발굴로 현존하는 손자병법이 손무로부터 시작, 그의 고손자 손빈에 이르러 완성됐으며 춘추 말기와 전국시대의 오랜 전쟁 경험을 집대성한 것으로 손자병법・손빈병법은 별개의 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써 전설인 줄 알았던 손빈병법이 2,400년 만에 고증되어 손무와 손빈 두 사람이 실존 인물이며 각각 병법서를 남겼다는 사마천의 ≪사기≫ 기록이 사실로 확인됐다.

군사(軍師) 손무(孫武)는 춘추시대 오자서와 함께 오나라 왕 합려를 보좌해 패자(霸者)로 만든다. 손무가 쓴 기록이 ≪손자병법≫ 원본이다. 손빈의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가 손자병법 원본의 총론에 해당하는 13편을 주해한 병서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손빈병법≫은 전국시대 중기 탁월한 전공을 세웠던 제나라의 군사(軍師) 손빈(孫臏)이 그의 고조부 손무의 군사사상을 계승・발전시켜 실천에 적용한 군사이론이다. 이 병법은 중국을 비롯해 세계 군사(軍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국경이 없는 전쟁 같은 생존경쟁 시대에도 여전히 각광받는 경영 지침서다.

 

 

제3장 한반도~중국 왕래한 옛 바닷길

황해 북・동 연안을 따라가는 ‘노철산수도’

 

한반도에서 중국을 왕래하던 옛날 바닷길은 산동・요동반도를 잇는 200여 개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는 노철산수도.

이 뱃길은 요동반도 남쪽 끝 노철산(여순)에서 동쪽으로 요동 남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장산열도를 거쳐 한반도 서북쪽에 닿고, 다시 한반도 서해안을 끼고 내려가 일본까지 오갔다.

황해 연안을 따라 안전하게 항해하던 동북아시아 고대 항로.

문물 교류 통로로, 때로는 침략전쟁 루트로… 수천 년간 한・중・일 특히 우리와 중국 사이의 선연과 악연을 숱하게 되풀이한 뱃길이다.

 

한무제, 수륙 양로로 고조선을 침공했지만…

 

황해 연안항로가 최초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고조선과 중국 한무제(漢武帝) 간의 전쟁 기록이다.

BC 109년 한무제가 중원을 통일한 뒤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고조선을 침공했다. 그는 수륙 양로 원정군을 편성했다. 수로군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수군 도독으로 삼아 산동반도 제나라 봉지(封地)의 수군 5만을 동원하여 래주만에서 출진, 노철산수도를 거쳐 요동 연안을 떠나 바닷길로 왕검성에 이르게 했다.

육로군이 요서를 가로질러 행군하느라 요동에 늦게 도착, 수륙양동작전을 펼치기 전에 양복의 수로군이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패수에서 고조선 수군에게 패했다.

이때 고조선 원정길에 종군한 사마천은 그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수・륙 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했다. 장수들 중 제후로 봉해진 자가 없다”며 원정 결과를 수치스럽게 평가하는 글을 남겼다.

 

이듬해 산동의 수군을 이끌고 2차 고조선 침공을 주도한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 역시 패전하여 참형에 처해졌다고 적었다.

한무제의 한나라 군이 두 차례에 걸쳐 고조선(위만조선) 원정길에 올랐으나 정벌에 나선 장군들이 거의 극형을 당했고, 전쟁의 승부를 가리지 못해 참전한 장수 가운데 후(侯)에 봉해진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사마천은 상세히 기술했다. 한무제의 원정은 사실상 패배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4장 백제, 경기만~산동반도 ‘황해직항로’ 개척

신라가 항로 장악 후 삼국통일 터 닦아

 

한반도에서 황해를 곧장 가로질러 중국 중원을 잇는 항로를 개척한 것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전쟁을 치른 후 고구려 연안 통행을 못 하게 된 백제가 경기만~산동반도 황해직항로를 뚫어 요서 지방을 경영한다.

새 항로에서 백령도는 이정표가 돼 망망대해에서 경기만으로 들어오는 배를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 장군 이사부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뒤 신주를 설치, 백제가 개척한 남양만~등주 직항해로를 물려받아 중국을 오가는 물류를 독점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아 나가는데…

 

황해직항로(黃海直航路) 뚫은 배경

 

고구려와 싸운 뒤 황해연안항로 못 다녀

백제, 국력 쏟아 경기만~산동반도 직항로 개척

 

우리나라 서쪽 바다 황해는 중국대륙의 산동반도・요동반도와 한반도에 둘러싸여 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은 한반도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웅진반도를 지나 서한만, 압록강 하구를 거쳐 요동반도 남안에 도달하는 연안항로였다. 다시 요동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요동반도 최남단 여순만에 이르면 노철산수도를 타고 산동반도 등주에 닿는다. 이렇게 한반도 서해안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 둘러 등주까지 가는 길을 ‘황해연안항로’라고 불렀다.

삼국시대 중기부터 한반도에서 요동을 거쳐 산동으로 가는 이 연안항로가 가장 안전한 바닷길이었으며 산동반도 등주의 봉래는 그 종착지자 출발지였다.

거꾸로, 중국에서 한반도로 올 때는 봉래를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황해연안항로’를 탄다.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웅진반도를 지나 경기만으로 들어오는데, 계속 한반도에서 남해안을 따라 내려가 일본까지 문물을 전할 수 있었다.

백제는 중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항해・조선술을 발달시켜 처음으로 황해를 가로지르는 직항로를 개척했다. 그 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 신주도독부를 설치하고 남양만의 당성을 시발점으로 황해횡단 뱃길을 열었다.

황해횡단 직항로는 남향만 당성포구를 출발, 덕적도 앞의 경기만 다도해를 지나 웅진반도로 올라가 백령도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 산동반도 북안 등주항에 도착하는 뱃길이었다. 이 해상 루트에서 중요한 점은 백령도가 서해 바다의 이정표로, 망망대해에서 경기만으로 들어오는 배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제5장 삼천궁녀 거느리고 날마다 술잔치를 벌여?

의자왕과 백제 멸망의 진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황음, 주색, 삼천궁녀 등 치욕스런 수식어가 붙은 무도한 임금의 대명사였다.

간신들에 둘러싸여 국정을 내팽개치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나당연합군 침입을 받자 계백장군의 5,000 결사대와 함께 나라를 잃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 기록은 과연 진실일까?

왜 의자왕은 신속히 웅진성으로 옮겨 항전한 지 닷새 만에 항복했을까?

역사는 마지막 승자가 만드는 법. ‘해동증자’로 불리며 존경받은 의자왕의 갑작스런 항복 배경을 알아본다.

백제 부흥군이 구국항쟁을 벌인 세종시 운주산성. 산 아래 고산사에는 의자왕 위령비가 있고, 의자왕과 부흥군 원혼을 달래는 고산제를 지낸다.

 

10여 년 전 중국 낙양 골동품상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

의자왕 항복, 백제 멸망의 1,400년 수수께끼 풀어줘

 

2006년 8월 중국 하남성 낙양 시내 한 골동품상에서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로 건너가 출세의 가도를 달린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견돼 현재 하남성 낙양이공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2010년 4월에는 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소(文物保護考古硏究所)가 당나라 때 고관대작들이 묻혔던 서안시 장안구(長安區) 곽두남촌(郭杜南村)에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소사(素士), 손자 인수(仁秀) 3기의 고분을 발굴하여 백제 유민 예(禰)씨 가족묘지였음을 확인했다.

백제 부흥 운동사를 전공한 김영관 제주대 교수는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항복 때문이 아니라 신하들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으며,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파천했을 때(660년), 예식진이 왕을 붙잡아 당나라 군대에 넘긴 장본이었다”고 밝혔다.

예식진 묘지명에는 그가 백제 웅천(熊天) 사람으로 당에 들어가 당 조정으로부터 황실의 호위를 담당하는 정3품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제수되고, 672년 5월 오늘날 중국 산동성 용구시(龍口市) 래주(萊州) 황현(黃县)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이력이 상세히 적혀 있다.

묘지명을 보면 예씨 가문은 5세기 초 중국 산동반도 래주 황현에 살다가 백제의 웅진으로 이주해 귀화한 중국계 이주민 집단의 일부였다. ‘그들 선조는 중화와 조상을 같이 한다’라고 묘지명에 적혀 있다.

백제 멸망과 관련해서 ‘점풍이역(占風異域) 취일장안(就日長安)’이라는 너무나 충격적인 표현이 있다. 번역하면, 바람을 점친다. 자기 자신의 거취를 ‘바람 앞에 맡겨 당나라의 황제가 있는 장안으로 따라간’다 즉 백제〔異域〕의 상황을 점쳐 태양을 따라간다〔就日〕, 태양인 당 황제를 좇아 장안으로 따라간다는 말이다.

 

중국서 기화한 예식진 장군이 모반… 의자왕 포박해 투항

당나라에서 대대로 부귀영화 누린 기록 묘지명에 적혀

 

예식진의 손자 예인수 묘지명에는 “당나라가 천명을 받아 동쪽을 토벌할 때 그 왕이 당 조정에 귀순하지 않으므로 끌고 가 당 고종 황제에게 귀의하였다.” 그 공로로 “예식진이 좌위위대장군으로 내원부개국공의 훈작을 받았다”고 명확히 씌어 있다. 결국 ≪구당서≫ 기록대로 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으로 가서 당에 항복했다는 사실이 그의 후손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예식진의 형인 예군 묘지명에는 “지난 현경(당 고종 연호) 5년에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할 때 하늘을 보고 그 시기와 변화를 예측하여 마침내 창과 칼날이 어디로 귀의할 것인지를 알아차렸다”라고 적어 하극상의 배신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다

당군의 기습으로 의자왕이 황급히 웅진성으로 피해 들어오자 정세의 변화를 감지한 예군이 그의 동생 웅진방령 예식진과 더불어 기회를 보다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귀순한 것이다.

의자왕은 당에 끌려와 회항과 분노,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북망산의 고혼이 되었다. 반면 군주를 배신한 역적 일족은 당 고종의 충신으로 변신, 화려하게 산 모습이 그들의 묘지명에 잘 나타나 있다.

 

 

제6장 진시황・한무제, ‘봉래각’ 절경을 찬탄

의상대사 흠모한 선묘낭자 몸 던져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동쪽 지역을 순시하는 길에 불로초를 구하러 등주를 몇 차례나 찾았다. 한무제가 들렀을 때, 멀리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신기루인 ‘신선의 땅’을 보고 해안의 산 정상에 누각을 지어 처음 ‘봉래각’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도 ‘봉래’라는 지명이 많다.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부르는 것을 비롯해 동네 이름 등 전국에 무려 200군데가 넘는다.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신선이 살며 불로초가 자라는 곳을 동경했기 때문일까?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과 불심이 얽힌 전설에 감동받았기 때문일까?

 

옛 삼신산은 산동 교동반도의 봉래산-방장산-영주산

우리나라는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의 별칭으로 불러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동 교동반도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을 삼신산(三神山)으로 부르며, 신선이 살며 불로초가 나는 곳으로 여겨왔다. 사마천도 ≪사기≫에 그 삼신산이 봉래 앞바다 발해에 있다고 적었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는 춘추전국시대 발해 연안의 “제(齊)나라와 연(燕)나라에서는 동해에 있는 삼신산에 사람을 보내 선약을 구하려고 했다”며 당시 제후들 가운데 “신선방술(神仙方術)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방사 서복(徐福)에게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수천 명의 남녀와 함께 동해로 떠나보내기 이전부터 봉래에는 이미 다양한 신선설(神仙說)이 전해 내려왔다.

한국인에게도 이런 신선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금강산을 봉래산으로 지리산을 방장산으로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이름 붙여 한반도의 삼신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본래 ‘봉래’의 뜻은 쑥을 뜻하는 봉(蓬), 명아주 래(萊) 자로, 봉래는 야생 약초인 쑥과 명아주를 뜻하는 합성어다. 교동반도의 래주・용구・봉래 바닷가에는 다양한 약쑥과 명아주가 옛날부터 해풍을 맞으며 자생해 왔다고 한다.

산동 사람들의 옛이야기에는 ‘봉래’와 함께 ‘삼신산’과 ‘불로초(不老草)’가 늘 따라다닌다. 봉래 약쑥은 동짓달이 지나자마자 새 뿌리를 내려 모든 풀 중에서 새해의 봄기운을 가장 먼저 머금은 새싹이 돋기 때문에 ‘계명봉래초(季明蓬萊草)’라고도 불렀다. 또 봉래 약쑥은 성질이 꼿꼿하여 그 줄기는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는 의미로 벽사장(辟邪杖)이라고 불렀다. 옛날 진시황이 동순(東巡)하며 애타게 찾던 불로초가 바로 이 벽사장일지도 모른다.

 

 

제7장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장군

산동에 독립왕국 세워 당 제국을 뒤흔들다

 

세계 제국 당나라 중심부 산동반도 일원에 독립왕국을 세워 4대 60여 년 동안 지배했던 이정기 장군을 아는가?

망국의 한을 품은 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당나라 용병 장수로 전장을 누비다가 중원에서 고구려 제국을 재건해 당 조정과 당당히 맞섰다.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의 눈으로 당 태종의 ‘정관의 치적’ 뒷면에 감춰진 얼룩진 실상과 모순을 확인했다. 이정기는 대운하를 장악해 당 조정의 숨통을 죄었고, 아들 이납이 춘추전국시대 강태공처럼 제나라를 세워 낙양・장안을 향해 진군하자 당 덕종은 서쪽으로 달아났다.

막강한 군사・경제력으로 당나라 황실을 쥐락펴락한 이정기 왕국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륙 진출 사례다.

 

망국의 하늘 품고 중원을 공략

 

세계 제국 당나라 안에 독립왕국을 세워 4대에 걸쳐 60여 년 동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15개 주를 지배했던 이정기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망국한을 딛고 일어난 난생의 영웅이었다.

산동성 연태시 봉래(蓬萊)는 발해만과 황해가 교차하는 주요 항구로 예전엔 등주라 불렀다. 봉래각(蓬萊閣)에 오르면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총사령부였던 등주 봉래수성이 멀리 보인다. 발해 무왕은 봉래수성을 정벌한 적이 있고,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은 이곳 봉래로 상륙해 제나라를 건국하고 산동반도 전역을 다스리며 당과 맞서 싸웠다.

역사는 반복된다. 대조영은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698년 발해(渤海)를 건국, 고구려 패망 30년 만에 고구려를 계승한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가 수륙병진으로 고구려에 침공한 것을 그대로 되받아쳤다. 732년 수군대장 장문휴를 보내 당나라 해군기지 등주 봉래수성을 선제공격하고, 무왕 자신은 육로로 마도산(지금의 산해관)으로 진격해 과거 고구려 침공의 전진기지였던 유주도독부를 초토화시켰다. 그 후 발해는 날로 번창하여 중국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송했으며 지금도 그 바다를 발해라고 부르고 있다.

발해 장문휴 장군이 삼족오 깃발을 펄럭이며 산동의 등주 봉래성을 공격할 무렵, 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요서의 영주(營州) 땅에서 태어났다. 영주는 조양(朝陽)의 옛 지명으로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이 집단으로 끌려갔던 곳.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한 당나라는 20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의 유민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이정기는 고구려 패망 60년 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영주에서 출생했다.

패망한 나라 백성들을 삶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대부분 중국인의 노예로 살던 고구려의 유민들이 신분을 상승시킬 유일한 길이 바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영주는 당나라 동북지역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였다. 이정기도 이 지역을 지키는 군인의 길을 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정기 왕국에 대한 새로운 평가

 

이정기가 일구어 4대에 걸쳐 지배한 독립왕국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강소성 일부까지 포함하며 한반도보다 넓다. 그러나 우리 역사서에는 이정기 일가의 활약상이 단 한 줄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중국 사서 ≪구당서≫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에 이씨 일가의 전기가 자세히 실렸다. 단지 육당 최남선이 일제강점기에 쓴 ‘조선역사강화’에 이정기 이름이 처음 나올 뿐이다. 육당은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는데, 이정기가 이미 망해버린 나라 고구려의 후손으로 중국 내 광대한 지역을 총괄했다”고 짤막하게 다룬다.

중국 역사가들도 ≪구당서≫ ‘이정기 고려인야(李正己高麗人也)’로 시작되는 이정기 열전의 4대(代) 60여 년의 역사를 세계 제국 당나라에 대항하다 토벌된 번진, 잊힌 영웅 이정기 일가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다행히 요즘 일부 역사 연구자와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륙 진출 사례로 이정기 일가 ‘중원 속의 고구려 제왕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 같은 시기에 당나라 무령군 장수로 활용하며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 몰락을 지켜본 해신 장보고 이야기도 아울러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당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고 망국의 한을 씹으며 살았던 고구려 백제 유민 중에는 당의 용병장수로 이름을 떨친 고선지, 흑치상지 등도 있다. 그러나 이정기는 같은 시대의 이런 인물들과 달리 평가해야 한다.

이정기의 높은 기개와 발자취는 후대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며 유산이다. 고구려 유민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군사 경제력을 결집시켜 중국 한복판에 독자적인 고구려 왕국을 다시 세웠다는 사실을….

 

 

제8장 “적이 적을 치게 하라.”

당 태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술책은 성공했을까?

 

“적이 적을 치게 하라”는 이이제이 술책은 당 태종이 처음 한 말이다. 이민족 사이, 또는 같은 민족 내부에 갈등과 분열을 부추겨 서로 싸우게 만든 뒤 어부지리를 취한다는 뜻.

당나라가 주변 국가를 다스릴 때 쓴 전략이다.

종주국이 이민족을 견제하고 복속시키려는 이이제이 술책. 이를 바탕으로 한 당 태종의 호전적 패권주의는 과연 성공했을까?

요즘 중화중심이란 기치 아래 중국이 구사하는 소수민족정책과 인접국에 대한 외교정책은 당 태종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구멍난 ‘이이제이’ 책략

 

661~662년의 제2차 여・당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당사국인 고구려와 말갈 및 당나라 외에도 신라와 당에 복속한 거란과 돌궐 및 철륵(鐵勒)이 참전했다. 한편 남쪽 백제의 옛 땅에서는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이때 거란과 철륵이 당나라에 저항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철륵은 당나라 편에 서서 참전했지만, 중간에 창끝을 당나라로 돌려 당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철륵은 한나라 때 흉노라고 불렸다가 후에 몽골이 되는 유목민족으로 바이칼 호수 남쪽 오늘날 외몽골 초원지대에 살았다. 646년 당 태종은 동쪽의 고구려를 제외하고 유일한 위협 세력이었던 북쪽의 철륵 부족인 설연타마저 멸망시켜 철륵의 11개 부족 모두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철륵 부족들은 대고구려 전선의 당나라 참전 용병이 됐으며, 철륵의 계필하력은 용병 대장으로 활약하던 중 661년 요동도행군 총관으로 2차 고구려 침공의 전면에 나타났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항복받은 이민족으로부터 대규모 물자와 장정들을 차출해야만 했다. 과중한 전비와 전역(戰役) 요구는 거란과 해족의 저항을 불렀고, 당이 본격적으로 두 번째 고구려를 침공한 그해 8월에는 철륵의 주요 부족이 반란을 일으킨다. 당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시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립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제9장 ‘해양왕국’ 꿈꾼 신라인 장보고

그가 세운 산동 적산법화원 터를 찾아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를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재물과 복을 주는 명신(明神)으로 1200년 동안이나 숭상해 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

그는 왜 우리보다 남은 나라에서 더 유명할까? 콜럼버스와 이사벨라 여왕이 만나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스페인을 수백 년간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유럽의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우리의 영웅 장보고와 신라 흥덕왕이 의기투합한 ‘해양왕국 꿈’은 왜 꺾였을까?

한민족사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인 장보고… 이런 영웅이 다시 등장하기를 기대하며 장보고 시대의 중국 거점 산동 적산법화원 터를 찾아갔다.

 

 

“장보고는 나라를 생각하는 동아시아 큰 인물”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세계인(世界人)이었던 장보고를 영웅으로 처음 주목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인 두목(杜牧, 803~852)과 일본 자각국사 엔닌(圓仁, 794~864) 스님이었다.

두목이 살았던 양주는 장강과 회수가 함께 흐르는 강회 지방의 대운하 요지로 당시 중국 제1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그는 시중에 퍼진 ‘해상왕의 무용담’을 들었는데, 바로 동아시아의 영웅이 신라인 장보고임을 알았다. 두목은 그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장보고의 영웅적 일대기를 소상히 적었다. 그는 장보고를 ‘안록산의 난’을 평정해 충의지사로 알려진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에 필적하는 현인”이라며 “지혜와 용기가 특출하여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 ≪번천문집(樊川文集)≫ :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부 3편과 시 361제 392수를 수록.

**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 : 당 중기의 명장으로, 당대 손꼽히는 충신이자 권신. 분양(汾陽) 군왕(郡王)으로 봉해져 곽분양이라고도 불린다. 당대 최고의 명성과 위엄까지 모두 가졌던 인물.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곽자의가 출정했다는 소문이 돌자 저절로 무산된 반란도 있었을 정도였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와 함께 중국의 정사(正史) ≪신당서≫를 편찬한 송기(宋祁) 또한 ≪신당서≫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서 “장보고는 나라를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큰 인물”이라고 극찬한다. “옛말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릇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는 현자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이 등용된다면 한 사람만으로 족한 것이다.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진(晋)에 명재상 기해(祁奚)가 있고 당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는데 누가 감히 동이(東夷)에 인재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제10장 황해와 발해 접점의 요새 등주수성

문물교류 창구이자 한반도 침공 전초기지

 

등주수성은 황해와 발해가 맞물리는 지점에 위치한 천혜의 군항이었다. 봉래 혹은 등주란 이름으로 고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다리’였으며 당 태종의 한반도 침공 전초기지였다.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는 등주수성과 인연이 깊다. 그는 북원(北元)의 눈을 피해 여러 차례 명나라 사행길에 올라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등주 해로를 다시 열었다.

14세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 일본은 남북조시대로 두 천왕이 싸우는 통에 왜구들이 극성을 부렸다.

등주수성에는 우리에게 이순신처럼 중국인들과 시진핑 주석이 존경하는 ‘왜구를 격퇴한 영웅’ 척계광 이야기가 살아 있다.

 

 

중국 사행길에 남긴 시편들 한문학사에 우뚝

 

포은 정몽주는 등주를 오가는 사행길에 ‘등주과해(登州過海)’, ‘봉래역시한서장(蓬萊驛示韓書狀)’, ‘봉래각(蓬萊閣)’, ‘등주선사(登州仙祠)’ 등 많은 시편을 남겼다. ‘등주과해’와 ‘봉래역시한서장’은 요동에서 발해에 이르는 광막한 사행길을 지나 마침내 등주 지부성(之罘城) 앞바다에 도착해 봉래각을 바라보며 발해를 건넌 나그네의 회포를 토로한다. ‘봉래각’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등주의 웅장한 건축물을 노래한 작품이다.

특히 ‘등주선사’는 포은의 호방한 시재(詩才)가 잘 드러나 “지부성 아래 옛 신선당을 찾았지만 사행 가는 남행길이 깊어 소동파의 신기루〔海市〕 시에 화답을 못 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내 중국 문인들과 교감은 물론 동아시아 한문학사에 큰 획을 긋고 있다.

정몽주가 등주에서 명나라 수도 남경을 오가면서 산동반도 곳곳에 있던 신라촌을 방문해 고려서원을 세우고 한반도 유민들을 위로 격려한 발자취도 엿볼 수 있다.

포은 시편(詩篇) 중 ‘밤비 내리는 제성역(諸城驛夜雨)’에 나오는 제성역은 오늘날 유방시, 즉묵현의 즉묵은 청도시다. 산동과 강소성의 경계에 자리한 연운항을 지나며 읊은 ‘배 타고 회음을 출발해서 보응현으로 향하다(舟發淮陰 向寶應县)’ 시편의 회음은 오늘날 회안시(淮安市), 보응현은 남경과 맞닿은 운하도시로 국제무역항 양주(揚州)다.

특히 지금의 청도 일조(日照)시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신라방・신라촌이 있던 곳으로, 포은이 사행길에 다녀가면서 일조 천태산 아래 서원을 세우고 백성을 위로하며 ‘일조현에서(日照县)’ ‘일조천태산’ 그리고 ‘천태산안기사’라는 세 편의 한시를 남긴다. ‘일조현에서’는 황해 바다 건너 고향 영일만을 그리워한 작품이다. 보국(報國) 일념 이면에 깊숙이 감춰진 포은의 진솔하고 위대한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일조현日照县

 

海上孤城草樹荒 바닷가 외로운 성엔 초목이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 제일 먼저 뜨는 해 부상으로 오르고

我來東望伋怪首 내가 온 동녘 바라보며 시름하였지

波浪搖應接故鄕 파도 물결은 멀리 고향에 맞닿으리라

 

오늘날 봉래시 등주박물관에는 한・중 우호의 선구자이며, 유가(儒家) 문화를 전파한 사자로서 포은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박영호, ≪山東 이야기≫, 씨에디터, 2019

 

☞ 박영호 : 지은이는 1951년 2월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종합무역상사인 국제상사 지사 과장과 해외업무팀장으로 일했다. 1990년대 초 의류제품을 수출하는 백성교역상사를 창업했다. 한・중 수교 직후에는 산동 웨이하이에 중국 현지 공장을 설립, 니트의류를 만들어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역사기행에 관심이 많아 산동 각지를 여행하면서 산동반도의 역사 변천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거꾸로 한반도와 한국인은 산동반도를 위시한 중국 역사의 흐름에 어떤 변수가 돼왔는지를 살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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