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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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호수≫ 이시영 시집
- [보도자료]
- 2026-09-07
≪바다 호수≫ 이시영 시집
시인의 말
시가 무슨 ‘보복’처럼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그것을 밤새워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어느 초라한 사람의 쓸쓸한 생애에도 간혹 이런 축복의 시간은 찾아드는 모양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다 아시겠지만 나는 이미 나 혼자가 아니다. 그분들 속에 내가 들어가 살아 있듯 그들도 내 속에서 이렇듯 사라지지 않는 긴 시간을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매 작품 속의 모든 인물들에게 살아있는 축복 있을진저!
2004년 봄 이시영
장래 희망
김남주의 광주일고 1학년 생활 기록부엔 장래 희망이 ‘법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법관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뒤엎는 해방 전사가 되었다.
* 김남주 : 해방 이후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을 저술한 시인. 전라남도 해남 출생.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수학하였다.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7년 황석영(黃晳暎) · 정광훈 · 홍영표 · 윤기현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91년 신동엽(申東曄) 창작기금을 수상하였다. 작자는 고은(高銀) · 신경림(申庚林) · 김지하(金芝河) · 박노해・백무산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민족문학의 기수로 평가된다.
그의 시는 80년대 정치적인 탄압 때문에 잡지나 시집으로 나오기 전에 지하 출판물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특이한 시인이다.
김남주는 그의 시 「시인이여」에서 암흑의 시대 시인의 일은 ‘침묵, 관망, 도피나 밑이 없는 한의 바다의 넋두리가 아니라 박해의 시대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잠든 마음을 깨우고 참을 일으켜 세워 둥둥둥 북소리와 함게 나가게 하는 것, 전투의 나팔소리, 압제자의 가슴에 꽂는 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이 땅의 독재와 싸우는 무기였고 한편으로 자기 자신과 일상에 안주하여 부정과 불의를 눈감으려는 소시민적 태도에 가해진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그의 시는 외세에 의한 분단과 외세 의존적인 정치권력에 의한 민중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한다. 이 점에서 1960년대 신동엽, 1980년대 민중시인들과 현실인식을 같이한다.
그러나 기법이나 호흡, 특히 외부 세계에 대해서 강렬한 비판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내부의 적에 대한 비판과 폭로를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역설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김수영(金洙暎)의 시와 유사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1980년대 대부분의 민중시들이 형식 면에서 하나의 구호에 가깝다면 김남주의 시는 그러한 민중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름의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반복, 패러디(parody), 풍자 등은 그 증거이다. 특히 식민지 시대 유행가 가사에서 김수영, 김소월(金素月)의 시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들의 시구를 인용하여 텍스트 사이의 상호관련을 맺고 패러디하는 수법은 다른 한국 시인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예라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으로 『진혼가(鎭魂歌)』・『나의 칼 나의 피』 · 『조국은 하나다』, 시선집 『사랑의 무기』 · 『솔직히 말하자』 · 『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 · 『학살』 · 『사상의 거처』 · 『이 좋은 세상에』가 있으며, 산문집 『시와 혁명』,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 『아트 트롤』(H. 하이네) 등이 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수사자 한 마리가 긴 포만의 낮잠에서 깨어나 모처럼 새끼들을 어르며 놀다가 다람쥐처럼 뽀르르 잔등을 타고 오르는 그중의 한 마리를 향해 씨익 웃는 웃음이 우리 할아버지들의 용맹스러운 웃음을 그대로 빼박았다.
여름
동몰골 고원의 얕은 여울 속을 꼬리를 툭툭 치며 거슬러 오르는 경쾌한 송사리들
그러나 그 위의 협곡에는 거대한 망각의 해가 바싹 마른 해를 적시며 기다리고 있다
‘민중의 소리’ 방송
노태우 대통령 시절, 너무 많은 수감 학생들로 인해 서울구치소가 잠시 해방구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밤 8시에 일제히 쇠창살을 치면서 시작되는 학생들의 ‘민중의 소리’방송이었는데 “투쟁! 투쟁!” 하는 쨍쨍한 구호와 함께 화장실 벽에 개구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저 아랫배의 젖 먹던 힘까지를 짜내어 밤 허공에 대고 외치던 이 육성 방송은 그날따라 나의 입소를 환영하는 것이었다. “동지 여러분! 어젯밤 이시영 시인이 저 간악한 노태우 일당과 그 하수인인 안기부 놈들에 의해 국가보안법이라는 천하 악법의 굴레를 쓰고 우리 구치소로 넘어왔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 모두 이시영 시인을 열렬히 환영합시다……” 운운의 그날의 방송 내용은 일일이 다 생각나지 않지만 정세 분석 및 토론에 이어 향후 소내 투쟁 지침 시달, 그리고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합니다” 어쩌구 하는 약간은 달뜬 나의 어눌한 답사로 끝을 맺었던 것 같은데 맨 마지막의 “투쟁! 투쟁! 투쟁!”하는 선명한 구호와 함께 “동지 여러분! 그러면 안녕히 주무십시오”라는 서글픈 인사가 청계산 자락 깊은 밤하늘에 시큰하게 울리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어느 세배
새해를 맞아 어머님께 세배를 올리던 아들이 어머님 등 뒤의 경대에 그득 쌓인 보약첩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어머님! 이러시다간 가난한 소자가 먼저 가겠습니다요.” 그윽한 미소로 세배를 받던 어머님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저런 자식을 내 속으로 낳다니…… 다시는 내 집에 그림자도 얼씬하지 마라, 이놈아!”
반체제
조태일 시인이 광주서중 1학년 때였으니 1956년 어름이었을 것이다. 광천동에서 새벽밥 먹고 부리나케 걸어서 등교하던 조태일 소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식히며 막 그의 교실 복도로 들었을 때였다. 장학 검열이 나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온 학생이 엎드려 마른걸레로 닦고 문지르고 그 위에 양초까지 발라 반질반질 윤을 낸 마룻바닥에 그만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난 소년이 가방에서 잉크병을 꺼내 복도를 향해 내리꽂은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 소식을 듣고 담임이 달려오고 두터운 안경을 쓴 교장이 오고 그때부터 조 소년의 다른 인생이 시작되고 말았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자기가 광을 낸 마룻바닥에 꽈당 하고 이마를 짓찧으며 넘어졌을 그 곰 같은 소년의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라 배꼽을 잡고 웃을 뿐이었다.
* 조태일 : 호는 죽형(竹兄). 1941년 9월 30일 전남 곡성 태생. 1966년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시 전문잡지 『시인』 주간을 지냈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제10회 만해문학상, 편운문학상, 전라남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 시집 『아침 선박』을 간행하였고, 계속하여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 속에서 꽃 속에서』(1991), 『풀잎은 꺾이지 않는다』(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 등을 발간했다.
박영근 시인
세상의 상갓집에 가장 늦게까지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사람이 문구 형님이었다. 사람들이 직수굿한 그를 일러 호상 체질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아무도 그 곁에 오래 앉아 있지 않으려 했다. 다만 대취한 박영근 시인만이 얼떨결에 그 곁에서 이틀이나 밤샘을 하였다.
* 이문구 : 충남 보령 출생.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등의 수하에서 문학 공부를 했다. 단편소설 「다갈라 불망비」(1963)와 「백결」(1966)이 김동리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는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애환과 시대적 모순을 충청도 특유의 토속어로 잘 포착해 형상화하고 있다.
농촌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1950~1970년대 산업화 시기의 농촌을 묘사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현재의 황폐한 삶에 대비시켜 강하게 환기시켜 주는 작품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 풍진 세상을」(1972), 「해벽」(1974), 「엉겅퀴 잎새」(1977), 「관촌수필」(1977), 「으악새 우는 사연」(1978), 「우리동네」(1981), 「다가오는 소리」(1991), 「유자소전」(1993),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2000)와 장편소설 《장한몽》(1972), 《산너머 남촌》(1990), 《매월당 김시습》(1992) 등이 있다.
** 박영근 : 시인 박영근은 잘 알지 못해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로 이어지는 노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마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이 노래의 원작시를 쓴 주인공은 시인 박영근(1958~2006). 슬프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품으며, 민중이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던 시인은 2006년 5월 11일 지병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14년 뜨거웠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자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2023년 5월 11일, 박영근 시인의 17주기에 즈음하여 44명의 시인이 참여한 추모시집 『꿈속의 꿈』이 출간되었다.
시인의 흉상
김수영 시비가 도봉산 아래 그의 선영(先塋)에 있을 때였다. 20주기를 맞아 창비사에서 펴낸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을 헌정하러 묘소를 찾았더니 간밤 어느 엿장수가 시비에 동판으로 돋을새김한 그의 흉상을 수거해 가버리고 없었다. 6월의 훈풍 속에 서서 김수명 선생이 혀를 차며 기막혀했지만 나는 옆에서 자꾸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구리개 약방, 장전, 종묘상과 더불어 애 못 낳는 여자, 곰보, 애꾸 등이 생각났을 뿐만 아니라 캄캄한 여름밤 역시 캄캄한 심정으로 묘 앞에 쭈그려 앉아 생전 처음 보는 부리부리한 눈의 시인의 구리 흉상을 도려내고 있었을 그 엿장수의 시큰한 모습이 떠올라 더욱 안쓰러워졌기 때문이다.
* 김수영 : 서울 출생.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서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쓴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민음사(民音社)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1982년 6월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납본 필증’ 없이 사전 배포했다고 하여 이틀간 안기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날 때였다. 퇴계로에서부터 트럭 하나가 우리 뒤를 따라붙더니 중앙청 문공부까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수사관들과 함께 어느 국장 방으로 갔더니 백지를 내밀며 ‘재산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그 트럭에는 시중 서점에서 압수한 1만여 권의 시집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원효로 경신제책에선 나와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형과 함께 시집 1만 권이 분쇄되었는데 분쇄기를 직접 잡은 김 상무의 엄지손가락 없는 오른손이 마구 떨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김 상무에게서 폐휴지값 5만 8천 원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유정다방
송기원이 월간 바둑에 근무할 때였다. 천상병 시인이 그의 부인을 모시고 와 아래층 다방에서 그를 불러냈다. 그러곤 그동안 자기를 많이 도와준 분이라며 부인에게 인사시킨 후 따뜻한 커피를 대접하였다.
* 송기원 : 1947년 7월 1일 전남 보성군(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성군)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고교 재학 당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다. 이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현 중앙대 문창과)에 입학했으며, 1974년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그는 등단 이후 자유실천문인협회(자실),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활동하며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소설가 이호철이 구속되자 문인들과 함께 데모에 나섰다가 처음 구속됐고 이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1990년 '오봉옥 시인 필화사건' 등으로 4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 천상병 :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1945년 광복 후 귀국했다.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유치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고, 송역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했다. 그리고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게재하면서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했다.
그는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뤘으며, 이때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에 따른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때 주위 사람들은 행방불명된 천상병이 죽은 것으로 알고 그의 첫 번째 시집 『새』를 유고시집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1972년 친구 목순분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결혼했으며, 이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문학선집『구름 손짓하며는』, 시집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간행했다. 그의 시에서는 고단한 삶과 비통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며 소박·단순하고 투명한 시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고향 사람
고향 근처인 남원 출신으로 가슴이 떠억 벌어지고 고혈압이 있으며 말할 때마다 두툼한 목이 자라처럼 쑤욱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안기부 대공 수사 요원이 있었는데 피의자 차림인 내 군복 윗도리의 아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이번에는 꼭 목 끝까지 채워서 구치소로 넘겨주겠노라며, 자기는 사람 잡아넣는 것이 취미라며 정말 단추 같은 눈으로 싸늘히 웃으며 말하는데 만정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김용택
창비사가 마포경찰서 뒤 광덕문화사 3층에 있을 때였다. 아침부터 웬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사과 궤짝을 어깨에 바투 메고 부리나케 3층 계단을 오르더니 창비사 문을 벌컥 열고는 쿵 하고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씽긋 웃는데 섬진강에서 갓 올라온 김용택 시인이었다.
* 김용택 :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에게 맑은 서정을 선물하는 시인 김용택. 전라북도 임실 진매마을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2008년 교직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자연과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글로 호흡했고, 아이들의 작품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2001년에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문학 장르인 시를 엮어 『시가 내게로 왔다』를 소개해 대중에게 시가 좀 더 친숙해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섬진강 연작을 통해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지금은 고향에서 작품 활동 및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게 서방
동네에서 게를 제일 잘 잡는 사람은 형원이 아재였다. 동패들과 어울려 장에 가다가도 작은 개울을 만나면 “아 저기 게가 있구먼” 하고 두루마기 자락을 걷고 들어가 가던 장도 잊어버린 채 한나절이고 반나절이고 엎드려 게를 잡았는데, 특별한 미끼도 없이 강아지풀 같은 것을 꺾어 게 구멍에 들이대고 “요요요……” 하면 어김없이 게들이 꼬리를 물고 달려나와 그의 팔에 안겼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일러 게 서방이라고 했는데 밤에 마누라 다루는 솜씨는 따로 있는 건지 가서 차라리 게 구멍이나 건드리라고 벌써 여러 차례 집 밖으로 쫓겨났다는 소문이었다.
◎ 이시영, ≪바다 호수≫, 문학동네, 2023
☞이시영 : 시인.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같은 해 『월간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호야네 말』 『하동』 『나비가 돌아왔다』가 있다.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지훈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임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