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겨레고전문학선집 4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
- [보도자료]
- 2026-08-03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
내가 즐겁다는 글자 ‘樂’ 한 자를 써 놓으니 거기는 웃는다는 글자가 무수하게 따라붙습니다. 이 편지를 뜯을 때 그대는 나의 별명을 껄껄 선생이라고 지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별명을 사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농가 田家
할아범 새를 보러 밭둑에 앉았건만
개꼬리 같은 조엔 참새가 달려 있네,
맏아들 둘째 아들 들일로 다 나가고
온종일 농가에는 삽짝문 닫혀 있네.
소리개* 병아리를 채려다 못 채가니
박꽃 핀 울 밑에서 뭇 닭이 야단치네.
새댁네 함지** 이고 꼿꼿이 내 건널 제
누렁개 발가숭이 앞뒤로 쫓아가네.
* 소리개 : 솔개
** 함지 : 함지박
翁老守雀坐南陂(옹로수작좌남피)
粟拖狗尾黃雀垂(속타구미황작수)
長男中男皆出田(장남중남개출전)
田家盡日晝掩扉(전가진일주엄비)
鳶蹴鷄兒攫不得(연축계아확부득)
群鷄亂啼匏花籬(군계란제포화리)
小婦戴棬疑渡溪(소부대권의도계)
赤子黃犬相追隨(적자황견상추수)
새벽에 길을 가다가 曉行
까치 한 마리 외롭게도
옥수수자루에 깃들었네.
이슬은 허옇고 달은 밝은데
논물이 흐르며 소리 지르네.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집
둥굴기 마치 돌 같은데
지붕마루엔 박꽃 피어
하늘의 별이 양 반짝이네.
압록강을 건너서 용만성을 바라보고 渡鴨綠江回望龍灣城
외로운 고을이 손바닥만 하네.
빗방울 어지러이 떨어지고
갈*과 달 우거져 망망한 가운데
국경의 하루해 어두워지네.
먼 길 떠날 말 잇대어 우니
쌍나팔 소리 들려오고
첩첩이 쌓여 있는 구름에 가리워
고국의 산들이 흐려지네.
* 갈 : 갈대
용만에서 따라온 군졸과 아전은
모랫길 되돌아가고
압록강 물속의 새들과 고기들
한복판 쪼개서 나뉠 겔세.
집안 간 안부나 나라 안 소식도
이제는 끊어질 것이니
끝없는 저 벌로 머리를 돌이켜
차마 들어서지 못하겠네.
요동의 새벽길 遼野曉行
요동의 이 벌판을 언제나 다 지날꼬.
열흘을 와도와도 산 하나 안 보이네.
새벽별 말머리를 스치어 날아가고
아침 해 밭 사이에서 돋아 올라오네.
열녀 함양 박씨전 烈女咸陽朴氏傳 井序
일찍이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열녀는 남편을 갈지 않는다 하였는데, ≪시경≫의 ‘백주(柏舟)’*도 바로 그런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전에서 후살이(여자의 개가, 후가後家) 가서 낳은 자손을 좋은 벼슬에 등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어찌 뭇 백성의 보통 사람을 두고 규정한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4백 년 이래 백성들이 교화를 받는 과정에서 여인네치고는 귀하건 천하건 관계없이, 집안이 한미하건 혁혁하건 과부 되면 으레 수절하는 것으로 그만 풍속을 이루고 있다.
*‘백주(柏舟)’ : ≪시경≫에 실린 시의 제목이다. 공강(共姜)이란 여자가 남편이 죽은 뒤 재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여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오늘 과부란 과부는 모두 옛날의 열녀 폭이다. 심지어 시골 구속의 젊은 안해(아내)나 행길거리의 새파란 홀어미들이 제 부모에게서 무리한 강요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자손들이 벼슬에 등용되지 못할 부끄러움을 가지는 것도 아니건만, 수절하는 것으로는 절개가 되지 못한다고 왕왕 자살을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등지고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려고 물에 빠지고 불에 뛰어들고 독약을 마시고 목을 매어 죽는 것을 마치 즐거운 곳으로나 가듯 하였다. 열렬하기는 열렬하지만 이 어찌 과한 일이 아니냐?
옛날에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이름난 관리로 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 앞에서 어떤 사람의 벼슬길을 막자고 의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무슨 허물이 있기에 막자고 하는 게냐?”
“선대에 과부가 있었는데 바깥소문이 좋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남의 집 안방에서 일어났을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풍문에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바람이라는 것이 소리만 있지 형체는 없는 것이라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공중에서 일어나서 곧잘 만물을 뒤흔드는 것이다. 어쩌자고 형체도 없는 일을 가지고 뒤흔드는 속에다가 남을 몰아넣는다는 말이냐? 더구나 너희가 바로 과부의 아들이다. 과부의 아들이 그래 과부를 비평한다는 말이냐? 거기들 앉아라. 내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품 안에서 구리돈 한 푼을 꺼내면서 말하였다.
“이 돈에 둥그런 둘레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 돈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네 어미가 죽음을 견딘 부작(부적)이다. 십 년이나 손으로 만지고 만져서 다 닳아 버렸다. 대개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서 나오고, 정욕은 혈기로 인해서 작용하는 것이며, 생각은 고독한 데서 생기고, 슬픔은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과부야말로 고독한 신세요, 지극히 슬픈 사람이다. 혈기가 때로 왕성해지면 과부라고 해서 어찌 정욕이 없겠느냐? 껌벅이는 등불 아래 그림자만 바라보고 홀로 밤을 새기란 참으로 괴롭구나. 더구나 비 떨어지는 소리가 처마 끝에서 뚝뚝 나거나, 허연 달빛이 창을 들이비치거나, 뜰에서 나뭇잎이 나부끼고 하늘가에서 외기러기가 울고 지날 적에 먼 촌의 닭 소리는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의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할 때 눈이 반들반들 해서 잠은 오지 않으니 이 쓰라린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할 데나 있느냐?
내가 이 돈을 굴리면서 온 방 안을 돌았다. 둥근 것이 잘 구르다가도 어느 모서리에만 부닥치면 그만 죽어 버리는데 나는 주워서 다시 굴렸다. 하룻밤에 보통 대여섯 번 굴리고 나면 날이 새더구나. 십 년을 지나면서 해마다 번수가 줄어들었으며, 십 년 이후로는 혹 닷새에 한 번도 굴리고, 혹 열흘에 한 번도 굴렸으며, 혈기가 아주 쇠하면서부터는 더는 이 엽전을 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이십여 년을 내가 싸고 싸서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 공로를 잊지 않자는 것이요, 때로는 내 스스로 경계하자는 것이다.”
마침내 모자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고 한다. 점잖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야말로 열녀라고 할 만하구나!” 하고 말하였다.
아! 그 어려운 절개와 깨끗한 행실이 이와 같건만 당시에 나타나지 않아서 이름이 전치 못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과부의 수절이 전국의 통례로 된 까닭에 목숨을 끊지 않고서는 과부의 절개를 표시할 수 없이 된 것이다.
내가 안의(安義)의 원(수령)으로 온 이듬해 계축년(1793) 모월 모일, 날이 샐 녘에 잠이 어렴풋이 깨었는데 마루 앞에서 두어 사람이 수군수군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고 또 마음이 아파서 한숨짓는 소리도 났다. 아마 급한 일이 생겼으나 내 잠을 깰까 봐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닭이 울었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였다.
“벌써 서너 홰째나 울었습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느냐?”
또 대답하였다.
“통인 박상효(朴相孝)의 형의 딸이 함양으로 시집갔다가 홀로 되었는데 삼년상을 마친 다음 독약을 먹어서 죽게 되었답니다. 급보로 부르러 왔으나 상효가 지금 번을 들고 있는 까닭에 황공하와 감히 제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빨리 가 보라고 일렀다. 저녁나절에 이르러 함양 과부가 살아났느냐고 물으니 아랫사람들의 말이 벌써 죽었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길게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열렬하구나, 이 여자야말로.”
그리고 여러 아전들을 불러다가 물었다.
“함양에서 난 열녀가 사실은 안의 태생이다. 여자의 나이는 지금 몇 살이고 함양 누구에게로 시집을 갖고 어려서부터 그의 마음씨와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너희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여러 아전이 한숨을 지으면서 나와서 말하였다.
“박녀의 집은 대대로 아전입니다. 아비 박상일(朴相一)이 일찍 죽고 이 딸 하나뿐인데 어미마저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비, 할미 손에서 크면서 자손 된 도리를 잘하다가 나이 열아홉에 함양 임술증(林述曾)의 처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아전의 집안입니다. 술증이 본래 몸이 허약해서 초례를 치르고 돌아간 다음 반년도 못 되어 죽었습니다. 박녀는 예에 따라서 남편의 거상을 입고 며느리의 도리를 다해서 시부모를 섬기니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이 모두 무던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제 보니 과연 그럴 만도 합니다.”
그중의 늙은 아전 하나가 감개하여 말하였다.
“그 여인이 시집가기 두어 달 전쯤에 어떤 사람이 와서 술증은 병이 골수에 사무처 사람 노릇을 할 가망이 전혀 없는데 왜 약혼을 물리지 않느냐고 일러 주더랍니다. 할아비, 할미도 은근히 손녀딸에게 그럴 의사를 보였건만 잠자코 대답을 하지 않더랍니다. 혼인 날짜가 임박하자 여자 집에서는 사람을 지켜 슬그머니 술증을 가서 보게 했더니, 술증이 비록 생김새는 곱상스러우나 노점(폐결핵)에 걸려서 기침을 콜록거리는 것이 버섯 같은 몸으로 그림자만 다니더랍니다. 여자 집에서는 겁이 더럭 나서 다른 데로 혼인을 정하려고 했더랍니다. 처녀는 정색을 하고, ‘저번에 지어 놓은 옷이 뉘 몸에 맞추어 지은 것이며 뉘 옷이라고 말하던 것입니까?’ 하면서 애초에 정한 대로 할 것을 소원하더랍니다.”
얼마 후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밤에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감동된 바 있어 열녀전을 지었는데, 산청현감 이면재(李勉齋)가 또한 그에 대한 전을 썼다. 거창 사는 신돈항(愼敦恒)은 일정한 주견을 가진 선비인데 그도 박씨를 위해서 그 절개를 서술하였다.
박씨의 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측해 본다면, 나이 어린 과부로서 오래 세상에 머물러서 두고두고 친척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공연히 이웃 간의 뒷공론을 받는 것보다는 얼른 이 몸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하! 성복날(초상이 난 날) 죽지 않은 것은 소상이 있기 때문이었고, 소상을 지내고 죽지 않은 것은 대상이 있기 때문이었고, 대상을 지나고 보면 삼년상도 끝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먹었던 대로 남편과 한날한시에 순절을 이룬 것이다. 이 어찌 열렬치 않으냐?
선비의 작은 예절 愚夫艸序
지금 민간에서 쓰는 말이 모두 아름다운 말이다. 지금 민간에서 종기를 가리켜 ‘고운데’라고 하고 식초를 가르쳐 ‘단것’이라고 한다. 장사하는 할멈이 “단것 사시오” 하니 어린 처녀애는 꿀인가 하였다. 어머니 어깨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시구나! 어째서 달다고 해요.”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내가 경건한 태도로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이다. 예는 본래 사람의 정리에 응해서 된 것이다. 매화 열매란 말만 들어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그렇기 때문에 식초를 음식에 치는 이외에는 그것이 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종기도 마찬가지거니와 더구나 사람들이 더럽게 여기기를 종기보다 더 추한 것이야 말할 것 있느냐?”
그래서 나는 ‘선비의 작은 예절’이란 글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대체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을 귀머거리라 하지 않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이라 하지 않고 티나 흠집을 살피지 않는다고 하며, 혀가 꽉 붙어서 말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을 벙어리라 하지 않고 남의 비평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며, 등이 낚시처럼 되고 가슴이 굽은 사람은 아첨하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이라 하며, 혹이 달리고 군살이 붙은 사람은 묵중에서 그렇다고 하며, 심지어 손가락이 더 붙고 발을 저는 등 육체적으로는 병신이지만 인격에 흠이 없는 것은 곧바로 지적하지 않고 멀리 에둘러 표현한다. 더구나 어리석음은 도량이 좁은 사람들의 본성이고 다시 고칠 수 없는 타고난 기품이니 천하의 욕된 말치고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여경(汝京, 유언호俞彦鎬의 자)과 같이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다는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의 저작집인 ≪연석집(燕石集)≫을 읽어 보니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과 노염이나 혐의를 사게 될 말마디가 수두룩하다. 모든 작가의 장처(장점)를 모으고 이 세상의 온갖 물건을 포괄하여 정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 마치 무소뿔에 불을 켜 놓고 솥에 그림을 그린 것과 같다. 그 미묘한 변화를 표시한 것은 알에서 벌레가 나오려는 듯하고 번데기에서 날개가 돋으려는 듯하여 구름의 살결과 돌의 뼛속을 들여다볼 만하고 벌레수염과 꽃술을 계산할 만하다. 곧바로 지적해서 말한 것이 어찌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에 그치며 그래서 노염과 혐의를 사게 되는 것도 어찌 초를 시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인가? 사람의 노염을 사게 될 내용도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천지 조화의 노염을 사게 될 내용이랴?
대개 이런 것을 두려워하여 총명하고 슬기로운 뒷면에 숨어 들어가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에 바쁘다. 사람들이 공연히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고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할 것은 없다. 아하!
늘그막에 휴식하는 즐거움 晩休堂記
벌써 오래전에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고관 김술부(金述夫) 공과 함께 화로를 놓고 소고기를 볶으며 하루를 논한 일이 있으니 이것을 세속에서는 전골이라고 한다. 방 안이 후끈후끈하고 고기 냄새가 자욱한데 김 공은 먼저 일어나서 나를 끌고 북쪽 창 아래로 가서 부채를 흔들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맑고 시원한 데가 있네그려. 이런 데는 과연 신선 부럽지 않네.”
조금 있다가 밖을 내다보니 여러 하인들은 심부름을 하느라고 마루 아래 섰는데 추위가 너무 심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그 집의 젊은 분들은 끓는 국을 엎질러서 손을 데었다고 하면서 떠들고 시끄러웠다. 김 공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뜨거운 데서 일찍 물러나오니까 우리는 시원한 재미를 보내마는 고기 한 점 못 얻어먹고 눈 속에서 발만 구르는 사람들이 가엾네그려.”
나는 또한 젊은 분들이 끓는 국을 엎질러 손을 덴 것을 놓고 그에게 은근히 암시를 주면서, 옛날이나 지금 사람들이 벼슬길에 나서고 물러서는 일과 영화롭고 욕되기도 하는 데 대하여 좀 되게 말하였다. 김 공은 언짢아하면서 말하였다.
“실컷 부하고 귀하게 지내다가 비로소 과분한 것을 안다거나 다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쉬려고 생각한다면 벌써 때가 늦었네. 무슨 즐거움이 있겠나?”
대개 김 공이 일찍이 정치에서 물러설 것을 용감하게 단행하지는 못했을망정 이렇게 말한 데는 역시 자기대로 느낀 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개성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양(梁) 씨 집의 젊은이 정맹(廷孟)과 친해져서 그 부친의 학동(鶴洞) 별장에도 가서 논 일이 있다. 꽃과 나무가 줄지어 서고 집과 뜰도 깨끗이 거두어 놓았으며 큰 마루에는 ‘만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양 노인은 순박한 것이 옛날 어른의 기풍이 보이는데 날마다 같은 동리의 노인네와 모여서 활쏘기나 장기 두는 것으로 일을 삼고 거문고와 술로 소일을 한다. 대개 명예, 잇속, 권리와 같은 길에서 일찍이 벗어나와서 늘그막을 편안하게 누리고 있었다. 이야말로 늦게 휴식하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내 글을 받아서 기로 삼겠다고 한다. 아하! 김 공은 일찍이 이 지방의 유수(留守)로 있었으며 그가 갈려 간 후에도 이 지방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전골을 먹던 옛일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양 노인의 늦게 휴식하는 즐거움을 치하한다. 또 이 글을 써서 시끄럽게 굴다가 손을 데는 세상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다.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答大丘判官李候端亨論賑政書
지붕 위의 비둘기가 비가 오라 우짖고 날이 들라 우짖어 완연히 꽃철을 앞둔 날씨라, 벌써 먼 곳의 아지랑이가 눈에 어른거리고 이제 뜰 앞의 푸른 못물에는 비치는 대로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소송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아전들마저 물러가니 오늘은 처음으로 한가로운 틈을 얻어서 일 년 만에 비로소 원 노릇 하는 재미를 알았습니다. 뒷짐을 지고 난간을 거닐면서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는데 그리운 친구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이때 귀한 편지가 내 앞에 떨어지니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속에 그리는 정이 통해서 산과 물로도 가로막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온 경상도 72개 고을이 불쌍히도 극심한 흉년을 만나서 모두가 큰 규모로 기민 구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원 된 사람으로서는 기민을 되도록 정확히 뽑아내야 하고 구제 물자를 되도록 많이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자니 심려되어 정신을 쓰다 보면 어찌 고달프고 고생스러워 몸이 축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귀 군과 같이 감영을 턱 밑에 놓고 앉았고 사무가 번다한 고을로서는 도처의 어려움이 다른 고을보다 곱절 더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사이 이웃 고을 원들의 편지를 받아 보면 근심과 걱정이 지나쳐서 찌푸린 이맛살이 종이 위에 비치고 끙끙 앓는 소리가 붓끝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답장을 써 보내는 내 마음까지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상에 구애되지 않고 낙천적으로 지내오던 그대조차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모습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 개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 우리나라에서는 관리를 등용하는 길이 극히 편협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학식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을 꿰뚫고, 재주가 학문과 무예를 겸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꼼짝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활개치며 나라의 큰 계획을 토의하고 임금의 덕화를 돕는다고 하는 사람 치고 대과 출신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다음 소과 출신도 남행으로 나가서 벼슬을 한다고는 하지만 아랫도리의 관리를 더 넘어서지 못합니다. 밤낮 소원이 어느 고을의 원이나 하나 얻어 하는 것인 만큼, 그 고을이 크고 작은 것이나 따지고 그 고을에 특산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다니니 처신이 허드레 일꾼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이름은 한 고을의 어른이라고 하여도 매사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며, 행여나 평정(評定)에서 견디어 내려고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에 분주합니다. 자기가 맡은 고을에 무슨 폐단이나 있다거나 백성들의 고통이 어떻다거나 그런 일은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습니다. 겨를만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 보려고 했됐자(해봤자) 자기 힘으로는 어찌 도리가 없으니 생각하나 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중 재능이 있다는 사람도 장부나 정리하고 나라의 재산이나 엄하게 보관해 가며 죄나 짓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번 평생에 품었던 뜻을 펴 볼 수 있는 기회로는 오직 기민 구제의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나나 그대나 크게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작게는 진사도 되지 못하여 모두 일 없는 몸으로 맥없이 살며 용렬하게도 동리 간에서 웃고 떠드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제 딴에는 의복을 갖추고 나간다고 하나 남루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며, 말로는 양반이라고 부르나 실상 양반 노릇을 못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머리가 허옇고 살가죽이 쭈글쭈글한 채 아무런 희망도 붙이지 못했더니 요행 늘그막에 이르러 앞서거니 뒷서거니 벼슬 한 자리씩 얻어 하게 된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말한 벼슬을 살기에 적당한 나이는 벌써 지났다고 하지만 직분을 다하기에는 아직도 앞날이 남아 있습니다.
5, 6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대는 이미 중요한 고을을 두 번째로 책임졌고 나도 역시 한 고을을 맡았는바, 이런 큰 흉년을 만나서 빈민을 구제하여 베풀어 주는 것이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마땅히 심력을 다 기울여야 하고 씀바귀도 냉이 맛으로 자셔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신세타령을 해 가면서 스스로 괴로운 내색을 하고 있습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50년 동안 항상 끼니를 걸러서 입 주체를 못 하던 주제에 임금의 은혜를 한껏 입어서 지금 갑자기 부잣집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늘 한복판에 수십 개의 큰 솥을 걸어 놓고 굶주려 비슬비슬하는 천 4백여 명의 동포들을 청해다가 한 달에 세 차례씩 즐거운 자리를 가집니다. 이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무슨 즐거움인들 이만하겠습니까?
저 장공예(張公藝)*가 억지로 9대가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참았다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참는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랴.”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남에 대하여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인도 참을 수 없는 일에 대하여서는 참지 않는 것이 이렇습니다. ‘참을 인(忍)’ 자가 한 자만도 오히려 심하거든 어찌 차마 백 자씩이나 쓰겠습니까? 백 자를 쓴 이면에는 찡그리고 찡그리어 온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가로 세로 외로 바로 잡히고 있을 것입니다. 양미간의 ‘내 천(川)’ 자와 이마의 ‘북방 임(壬)’ 자도 보는 듯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참다 보면 소경이요, 귀로 잠 다 보면 귀머거리요, 입으로 참다 보면 벙어리입니다. 이것은 아주 옳지 못합니다. 측은한 마음의 싹을 끊어 던지려면 마음에 칼을 한 번 찌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왜 쓸데없이 같은 글자를 백 자씩이나 포개 쓰고 앉았겠습니까?
*장공예는 7세기 중국 사람으로서 9대조 이후의 자손들을 모두 모아 한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당 고종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묻자 그는 참을 인(忍) 자 백 자를 써 보였다고 한다.
내가 즐겁다(樂)는 글자 한 자를 써 놓으니, 거기는 웃는다는 글자가 무수하게 따라붙습니다. 이렇게 지낸다면 한집에 백대도 살 것입니다. 이 편지를 뜯을 때 그대는 내 별명을 껄껄 선생이라고 지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별명을 사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돼지 치는 이도 내 벗이라 答洪德普書 第二
내가 평생 사귀며 다닌 범위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격과 처지를 살펴 그저 웬만한 사람은 모두 친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명예를 따르고 세력에 붙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눈에 뵈는 것도 친구가 아니요, 오직 명예, 잇속, 세력뿐입니다. 이제 나는 거친 풀숲 속에서 숨어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머리를 깎지 않은 중이요, 안해를 가진 승려입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 가운데서 명예란 다 무엇에 쓸 것입니까? 옛사람의 말이 움직이면 남의 말밥에 오르내리지만 그래도 명예가 뒤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헛소리에 가깝습니다. 겨우 한치만 한 명예를 얻었을 뿐 벌써 한 자만 한 흉하적(남의 결점을 들어 말하는 자)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명예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늙은 뒤에 이르러서는 그런 줄을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나도 나이 젊어서는 뜬 명예에 몸이 달아서 남의 글줄을 표절해 가지고 칭찬을 더러 듣기도 하였지만 명예는 겨우 송곳 끝만큼도 안 되고 흉하적이 쌓여서 산을 이루었습니다. 한밤중에 조용히 생각할 때 명예란 것을 내 손으로 깎아 버리지 못해서 한이거니 왜 다시 그 근처에를 가까이 가려고 들 것입니까? 명예를 위한 친구가 내 눈에서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또 잇속이나 세력에도 좀 덤벼들어 보았지만 모두들 남의 것을 빼앗아 제게로 가져갈 궁리요, 제 것을 덜어내어 남에게 줄 작정이 아닙니다. 이름이야 본래 값을 들이지 않는 공짜라고 해서 혹 쉽사리 서로 줄 수 있지만 실지의 잇속이나 실지의 세력을 누가 얼른 그렇게 남에게 드러내 준답니까? 덤벼들어서 한몫 보려다가는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져서 결국 기름그릇에 가까이 갔다 옷만 버리고 말뿐입니다. 이 역시 이해를 따지는 비루한 소리라고 하더라도 사실이 확연히 이렇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형에게 훈계를 들은 적도 있는 만큼 이 두 길에서 비켜 선지는 벌써 10년이나 됩니다. 내가 이제 세 종류의 친구를 다 버린 다음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친구를 찾아보아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 도를 다하려 하던 친구란 것이 과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어찌 사실로 한 사람도 없기야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에서나 바른길로 인도해 준다면 돼지를 치는 종놈도 내 어진 벗이요, 의리를 가지고 충고해 준다면 나무하는 머슴도 내 좋은 친구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친구나 벗을 전연 못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돼지 치는 놈이 옛글을 토론하는 마당에는 참여키 어렵고 나무하는 머슴이 인사 범절을 차리는 자리에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옛사람의 사적과 내 처지를 비교해 보면서 왜 울적한 생각이 없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후는 그런 생각조차 끊어 던졌것만, 사마휘(司馬徽)*가 조밥을 빨리 지으라고 재촉하고 장조와 걸닉**이 나란히 서서 밭갈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의 참다운 즐거움이 눈에 뵈는 듯해서 산에 오르거나 물가에 나섰을 때 혼자서 그 광경을 그려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사마휘 : 중국 후한(後漢)의 은자. 자는 덕조(德操), 호는 수경(水鏡). 유현덕(劉玄德)이 사마휘에게 인재를 추천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제갈량(諸葛亮)ㆍ방통(龐統)을 추천함. 제갈량(諸葛亮)ㆍ서서(徐庶) 등과 종유하며 은거 생활을 하였음.
**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 공자와 같은 시대의 은자로, 세상을 피해 은둔한 인물들로 ≪논어≫ <미자> 편에 등장.
벗의 일에 대해서는 형이 특별한 의협심을 가지신 줄 알거니와, 중국에서 사귄 구봉(九峯)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하늘 저 끝에서 이 끝으로 어렵게도 편지를 붙여 보낸 것은 과연 천고의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생,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이라 꿈속이나 다름이 없어서 실지의 재미는 적을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나라 안에서 그런 친구를 발견한다면 서로 숨기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없으며 천리를 멀다 않고 서로 찾아다니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거니와 형이 그런 친구를 이미 발견한 일은 없습니까? 아니, 그만 마음속으로 단념해 버리지나 않았습니까?
지난날 나는 이야기에서도 이 점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울적한 생각이 떠오르기에 이렇게 묻습니다.
◎ 박지원 씀, 홍기문 옮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2004
☞ 저자(글) 박지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를 통해 불후의 문장가로 조선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호는 연암(燕巖). 조선 중기 학자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민하였다고 한다. 1752년(영조 28) 혼인하였고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 당시의 국내정세는 홍국영이 세도를 잡아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1780년(정조 4)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을 갈 때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이 속에는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강조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실학사상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