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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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리포트≫-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에게 바치는 헌사-정인
- [보도자료]
- 2026-07-29
≪빨치산 리포트≫-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에게 바치는 헌사-정인
“역사의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춘 전설의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에게 바치는 헌사”
★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청년들의 피난처였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죽은 빨치산은 ‘역사의 순교자’였다.
★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1951년 2월에서 12월까지 전체 사살자 4만여 중에서 호남이 62%를 점하였다.
★ 이현상이 빨치산의 상징이었다면, 빨치산의 중심은 김선우 총사령관이었다. 1954년 4월 5일, 김선우는 백운산 상봉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그의 고뇌를 기억할까?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몇 년 전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장안의 종잇값을 올렸다. 아버지 고상욱은 지나가는 방물장수 아주머니를 집으로 데려와 잠을 재워주는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면서 이웃의 잘못을 개인의 탓이 아니라 제도의 탓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작가 정지아의 표현에 따르자면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고상욱은 젊은 시절 4년 동안 산에서 뛰어다닌 죄로 2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고상욱은 정운창이었다. 나는 정운창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을 읽기 시작했다. 뒤져 보니 정운창은 전남인민유격대에 소속하여 김선우와 함께 활동한 빨치산이었다.
이후 나는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의 발자취를 추적하였다. 김선우의 족적을 찾는 과정에서 새삼 『빨치산 자료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벌대 경찰이 미군에게 올린 빨치산 보고서에는 빨치산의 명령서와 회의록, 빨치산이 작성한 자서전, 빨치산이 발행한 신문과 경찰 측이 작성한 토벌보고서 등 빨치산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었다. 영문으로 작성된 한국경찰대의 일일보고서(전3권)는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보관되어 있다가 기밀이 해제되어 공개된 문헌이다.
글씨가 깨알처럼 작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이 자료들을 뒤적이면서 나는 김선우가 쓴 편지를 발견했다. 나는 떨렸다. 『남부군』의 이태도 모르고, 『태백산맥』의 조정래도 모르며,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도 모르는 빨치산의 비밀을 어서 공개하고 싶었다.
나에게 빨치산은 불덩어리다. 빨치산만 생각하면 가슴에 분노의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스무 살 어린 청소년들이 생쌀을 씹으며 토벌대에 쫓겨 다녔다. 여성들이 생솔가지를 꺾어 눈 위에 깔고 잠을 잤다. 아, 열흘을 굶으면서 산골짜기를 헤맸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총에 맞아 죽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간 경우가 한국의 빨치산 말고 또 있었을까?
빨치산은 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도 아니었고, 특정 집단의 전략적 선택도 아니었다. 김선우는 빨치산의 길이 승리를 약속하는 전략이라고 판단하여 대원들에게 입산 명령을 내렸을까? 아니다.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의 지창수가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듯이, 이현상이 오갈 데 없는 지창수의 봉기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듯이, 그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입산이었다. 젊은이들은 전략적 유불리를 따질 겨를도 없이 상황의 전개에 떠밀려 입산하였다.
미군정은 남한에 진주한 처음부터 한국인의 자주적 의사를 무시하였고, 조선공산당을 적대시하였다. 1946년 5월, 희대의 사기극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군정 방첩대 CIC였다. 이 일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이관술을 구속했고, 박헌영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국민의 다수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적대시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인가?
한국전쟁의 불씨는 정판사 사기극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정부를 외면한 채 단독정부를 강행하였고,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부 밑에서 득세하자 젊은이들은 눈이 돌아버렸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1949년 6월 6일 강제 해산당하였다. 배알이 있는 젊은이라면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전쟁의 전야였다.
운동가들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총살이 이어졌다. 1950년 7월 5일, 헌병들은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수만 명의 좌익수를 골짜기로 끌고 가 학살했고, 경찰들은 수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래서 1950년 10월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청년들의 피난처였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죽은 빨치산은 ‘민족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역사의 순교자’였다. 이들 입산자들을 지휘한 이가 김선우다. 1954년 4월 5일 백운산 상봉에서 최후를 맞을 때까지 빨치산을 이끈 이는 사령관 김선우였다. 백운산 정상이 늘 구름 속에 숨듯이 총사령관 김선우는 역사의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올해는 김선우 타계 72주년이다. 조그만 책자 한 권을 만들어 그의 삶을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2026년 4월 5일, 백아산을 바라보며
정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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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감사의 말 1부 들어가며 1. 빨치산들을 조심하세욧! 2. 빨치산 박현채 선생을 모시고 3. 『남부군』을 읽어 보세요 4.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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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5. 정해진을 알면 김선우가 보인다. 6. 김선우와 정해진의 만남 7.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8. 김선우의 상부선 정해진 9. 정판사 위조지폐 사기극 10. 김선우의 포고령 위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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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고난의 빨치산 11. ‘남부군ʼ 이현상 12. 산사람 13. 지리산을 방문한 국문학자 김태준 14. 백운산 특각이 뭐지? 15. 광주로 파견된 김선우, 전남도당으로 오다 16. 고난의 구빨치 |
4부 이제야 말하는 한국전쟁의 실상 17. 광산치과의 슬픔 18. 이기홍의 구사일생 19. 갈매기섬 20. 닥쳐올 민족의 불행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21. 청천벽력 같은 지시였다 22. 1950년 9·28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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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해방구 백아산에서 23. 전남인민유격대의 기지 백아산 24. 해방구 백아산 풍경 25. 식량 비축 사업의 책임자 정운창과 김선우 26. 광주서중 3년생 소년 박현채, 입산하다 27. 전남도당의 쌍두마차 박영발과 김선우 28. 해는 지고 29. 함평 양민학살 30. 오지호 화가도 빨치산이었다 31. 김선우의 고뇌 32. 1951년 2월 빨치산 리포트 33. 김선우를 만나러 가다 죽은 정해두 34. 1951년 3월 빨치산 리포트 35. 숯이 된 시신을 묻고 36. 화학산 사람 사냥 37. 1951년 4월과 5월 빨치산 리포트 38. 1951년 6월 빨치산 리포트 39. 총상을 입은 박현채 40. 해방 6주년 기념 대회 41. 백운산 정치학교 |
6부 빨치산의 편지 42. 겨울 대토벌 43. 70년 만에 도착한 김선우의 편지 44. 겨울의 첫눈이 나렸습니다 45. 한국 경찰이 미군에게 올린 일일 보고서 46. 지리산의 겨울 47. 김선우의 정세 보고 7부 김선우의 최후 48. 퇴로가 없는 한국의 좁은 지형 때문에 49. 우리 사령관님은 안 돌아거셨어라우 50. 정운창의 하산 51. 박현채의 하산 52. 오지호와 빨치산들의 뒷이야기 53. 인민의 사랑 속에 승리하는 백운산 인민유격대 54. 돌아온 김선우 55. 백아산을 ‘오금일 산ʼ으로 부른다 56. 휴전협정과 토벌 57. 입산자의 운명 58. 김영승의 회고 59. 김선우의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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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나가며 60. 빨치산의 중심은 김선우였다 61. 김선우의 계승자 박현채, 회고록을 쓰다 62. 빨치산 역사가 정관호 63. 우리 사령관님은 참 따뜻한 분이셨어요 64. 긍께 그날이 마지막이었어 65. 빨치산 리포트 66. “모다 처녀들이었이야” 67. 김선우 총사령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
김선우 연보 부록-1. 김선우 수용자 신분장 부록-2. 1951년 월별 빨치산 리포트 참고문헌 |
3. 『남부군』을 읽어 보세요 2024년, 구례에서
2024년 3월, 정지아 작가를 만났다. 정지아는 『빨치산의 딸』을 쓴, 빨치산 문학의 대표적 작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구례에 가면 화엄사가 있고, 화엄사 입구에 반야원이 있다. 호젓한 찻집이다. 작가를 만나자마자 불쑥 물었다.
“빨치산 문학을 읽으려고 하는데요. 추천하는 작품 하나가 있다면 뭡니까?”
“이태의 『남부군』이죠.”
의외였다. 내가 『남부군』을 처음 읽었을 때, 그때가 1989년 즈음이었다. 읽고 난 후 나에게 남은 빨치산의 이미지는 어두웠고 음울했다. 설마 이태의 『남부군』을 빨치산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추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지아 작가의 추천으로 나는 『남부군』을 다시 읽었다.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읽는 『남부군』은 역시 명작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젊은 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치열하게 기록할 수 있을까?”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죽고 없는데, 누구와 함께 지난 일의 그 장대한 서사를 복원할 것인가? 모닥불을 쬐다가 스르르 잠들 듯이 쓰러져 죽어간 빨치산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해놓은 이태 선생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쓰는 일도 힘들었겠지만 공개하는 일은 못지않게 어려웠을 것이다. 1989년은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가 구속되었고, 문익환 목사가 투옥되던 시절이었다. 빨치산은 대한민국의 주홍글씨였다. 진실의 편에 서는 일은 늘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 이태는 『남부군』을 출간했다. 남부군이 살아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태의 본명은 이우태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진실이 충돌할 때, 진실의 편에 선 사람, 곡학아세하지 않은 이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정인: 선생님, 그때 젊은 시절, 왜 하필이면 산사람의 길을 걸었던가요?
이태: 내가 남로당을 지지한 것은 남로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구요.
그랬다. 1980년 오월 이후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였던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과 이를 비호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많은 젊은이가 운동권의 길로 들어선 것은 전두환의 학살 만행 때문이었다.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 빌붙은 친일파들에 대한 불만이 좌익 동조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경찰서에 끌려가 뺨 한 대 맞고 나오면 좌파로 기울었고, 두 번 끌려가 고문을 받고 나오면 사회주의자로 변모하던 시대였다. 해방 후 정국에서 남한 천지에 그 많은 좌익 동조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거꾸로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우익 세력이었다.
『남부군』 말미에서 작가는 김선우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1954년 2월 27일, 전남유격대장 김선우가 광양 백운산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결하였다. 그는 투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선비형의 사나이였다.”
4.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를 찾아서 2024년 5월, 광주 계림동에서
빨치산의 대표는 누가 뭐래도 이현상이다. 로명선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그는 명실공히 ‘지리산의 호랑이’였다. 하지만 고독한 혁명가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비운의 혁명가였다.
이현상은 휘하에는 도당의 조직 기반이 없었다. 유격대란 당의 무력부대이기 때문에 당적 기반이 없는 빨치산 지휘자는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았다. 여순 봉기군이 이현상의 주력이었다. 이현상 부대에는 전남도당의 유격대에서 데려간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1951년 8월 이현상의 남부군이 지리산 달뜨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남부군의 수는 고작 400명이었다.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는 그때 5천 명이 넘는 유격대원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남인민유격대를 빼놓고선 빨치산을 논할 수 없다.
서두에서 언급한 박현채도 소년 시절 무등산과 백아산에서 활동하는 540부대의 일원이었다.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은 곡성군당 위원장으로서 곡성 유격대를 이끌었다. 이들 유격대원들은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김선우를 모르고선 정운창도, 박현채도 알 수 없다. 전남인민유격대의 역사를 모르고선 이들 개개인 빨치산의 삶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화순의 백아산이 늘 구름 속에 덮여 있듯이, 김선우의 삶은 역사의 구름 속에 덮여 있다. 언제나 구름이 걷히고 흰 거위 산 백아산의 전모가 드러날까?
2024년 봄, 계림동에 사는 김결 선생의 거처를 방문하였다. 김결은 김선우의 동생이다. 어르신께 마지막 구정 인사를 올린 지 10년도 지난 것 같았다. 선생은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전에는 젊은이들보다 산을 잘 타던 건강한 어른이었으나 이번에 뵈니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였다.
정인: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몸은 어떠신가요?
김결: 내가 몸이 전과 같지 않다마시. 황 동지! 요즘도 글 많이 쓰제?
선생은 나를 대할 때마다 늘 ‘황 동지’라고 부르셨다. 나는 지난 시기 김결 선생과 함께 진보정당을 세우는 일을 하였다. 음성은 여전하였으나, 몸은 쇠약하였다.
김선우(金善宇), 그는 1918년 5월 2일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에서 가난한 농부 김성중과 어머니 문방림 슬하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결은 김선우의 동생이다. 형은 1918년에 태어났고, 동생은 1936년에 태어났으니 형과 동생은 나이차이가 크다. 김선우와 김결 사이에 김선태(1920)와 김대섭(1922)이 있다. 그리고 두 분의 누나 김선남과 김선임이 있고, 막냇동생 김두봉이 있다.
김선우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아들이 없는 삼촌 김현곤의 양자로 들어갔다. 율포의 중앙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정인: 자라면서 김선우 사령관을 자주 뵈었던가요?
김결: 형님은 집을 나가 살았기 때문에 만남이 드물었지. 어려선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고, 젊어선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였고, 해방전후엔 인천에서 활동하였지. 명절에 어쩌다 뵌 것 말고는 만날 기회가 없었어.
정인: 김선우 사령관의 연보를 작성하고 싶은데요.
김결: 나도 잘 몰라.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형님은 수차(水車)를 돌려 방앗간을 하던 삼촌 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어. 율포 중앙초등학교를 다니면서 6년 내내 1등을 했다고 해. 초등학교를 마치고 회천면 면사무소 옆에 고무신 가게가 있었는데 신발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고 하지. 평양으로 가서 노동자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해.
김선우가 언제 평양으로 갔는지 정확한 연도는 확인할 수 없다. 1940년 즈음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942년에는 평양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여인과 결혼하였다.
정인: 평양에서 산 것은 확실한 사실인가요?
김결: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모르겠어. 아버지랑 평양에 가서 형님 결혼식에 참석한 기억이 나. 꽃을 나르는 화동들도 기억이 나고 방 한 칸에서 식구들이 함께 잤어.
김선우가 맞이한 신부는 황해도 출신의 여성, 김명자다. 슬하에 아들 김명기(1943년생)와 딸 김호은(1949년생)을 두었다.
정인: 김선우 사령관을 회고하는 분들마다 김선우의 인품을 고매한 선비와 비슷하였다고 합니다. 혹시 조상 중에서 출사(出仕)한 어른이 계셨을까요?
김결: 김홍업(金弘業)이라는 어른이 계셨어. 11대조(代祖) 할아버지였는디, 이분이 300년 전 보성 웅치에 들어와요.
정인: 어떤 분이셨을까요?
김결: 이 어르신이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했나 봐.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선 마을 이름을 오류촌이라 부르고 호(號)를 유촌(柳村)이라고 지으셨다고 해.
정인: 긍께 출사가 아니라 은일(隱逸)한 분이네요.
김결: 그렇지. 나도 그분이 쓴 시를 보면서 컸어. 제각(祭閣) 기둥에 쓴 시야. 도연명의 시 「사계(四季)」에 대한 화답시라고 해.
도연명의 시 「사계(四季)」
春水滿四澤 봄물이 사방 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여름 구름이 기이한 봉우리에 앉았네
秋月揚明輝 가을 달이 밝은 빛 휘날리고
冬嶺秀孤松 겨울 산에 외로운 소나무 수려하네
김홍업(金弘業) 화답시
仁功春雨澤 어진 공은 봄비의 덕이요
奇變夏雲峯 기이한 변화는 여름 산봉우리 구름과 같노라
襟回秋夜月 은은한 달빛이 나의 옷깃으로 스며드니
志節冬孤松 굳은 절개는 겨울 소나무와 같네
12. 산사람 1948년 11월~1949년 2월 백운산에서
“너,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거 알어?
“뭔데?”
“빨치산은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는 거래.”
산 사람들에겐 세 가지 금기가 있었다. 소리를 내지 말 것, 능선을 타지 말 것, 연기를 피우지 말 것이다. 말소리와 발소리를 비롯하여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나뭇가지 꺾는 소리도 내면 안 되고, 돌이 구르는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능선을 걷는 사람은 눈에 띈다. 걷기 힘들어도 비탈을 타야 한다. 연기를 피워선 안 된다.
밤에는 특히 불빛을 조심해야 한다. 밤에 불을 피우는 것은 자살행위다.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려면 연기가 나지 않는 땔나무를 구해야 한다. 빨치산들이 사용하는 땔나무는 세 가지 맹감, 꽃대, 아주살이 그것이다. 나뭇가지를 우물 정(井)자로 걸쳐놓고 수건으로 깃대를 만들어 부치면서 땐다.
이 정도면 산 사람의 초보를 익힌 것인가? 아니다. 똥오줌도 함부로 누면 안 된다. 냄새가 나지 않도록 반드시 흙으로 덮는다. 대화는 소곤거려야 한다. 총은 항상 휴대한다. 밥을 먹을 때도 휴대해야 하고 심지어는 잘 때도 총을 휴대해야 한다. 신발은 벗지 않는다. 젖었거나 말랐거나 신발은 벗지 않는다. 산사람에게 신발처럼 애를 먹이는 것도 없다. 천으로 발을 감싸는 발싸개를 양말 대용으로 사용했다. 발싸개는 장화나 목이 긴 구두에는 쓸 수 있으나, 짚신이나 고무신에는 흘러내리기 때문에 감고 다닐 수가 없다. 빨치산들은 해진 양말짝도 구하기 힘들었다. 닳아빠진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것도 발에 맞는 고무신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무신이 다 떨어지면 맨발로 다녔다. 산 생활을 하다 보면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혀 맨발로도 다닐 수 있다. 짚신을 신고 눈길을 걸을 때면 미끄러지지 않게 거친 새끼로 감발을 했다. 아이젠이다. 얼어붙은 거친 새끼가 발가락과 발등을 깎아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빨치산에게는 쌀과 보리, 혹은 밀이 한 홉 정도 지급되었다. 반찬은 소금뿐이다. 숟갈을 하나씩 들고 솥 둘레에 앉는다. 왼손바닥에 털어놓은 소금을 혀끝으로 핥아가며 밥을 먹는다. 이 소금밥은 모든 산 사람에게 공통되는 식사였다.
산사람들은 목을 부러뜨린 짧은 놋숟가락을 ‘빨치산의 당증’이라고 했다. 숟가락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하다는 익살스러운 표현이다. 썩은 시체에서 놋숟가락이 나오면 빨치산의 시체임을 의미했다. 당증으로 밥을 먹고 나서 혓바닥으로 당증을 핥았다. 불결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부대에서 낙오하든가 연락이 두절 되면 ‘선 떨어졌다’고 한다. 부대를 찾아가는 것을 ‘선을 댄다’고 한다. 빨치산은 선이 떨어지면 빨리 그 선을 찾아 복귀해야 한다. 선을 찾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낙오병을 ‘멧돼지’라고 불렀다. 불의의 사고로 부대가 흩어졌을 때 재집결하는 장소를 비상선이라 한다. 집결하는 것을 무한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며칠까지 선을 받는다’고 약정한다.
빨치산들은 거점 혹은 주거를 ‘트’라는 말로 썼다.(‘트’는 비밀 아지트의 줄임말이다.) 큰 절을 ‘본사’라고 부르고, 그 산하에 흩어져 있는 조그만 암자를 ‘말사’라고 부르듯, 빨치산의 기본 거점을 ‘본트’라고 부르고, 그 산하에 분립된 소규모 거점을 ‘분트’라고 부른다. 트를 잡는 데에는 몇 가지 수칙이 있다. 첫째, 보초를 서기 좋은 곳이어야 한다. 둘째, 피신하기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 셋째, 샘물이 있어야 한다. 입산 초기에는 귀틀집을 짓고 구들까지 놓았다. 억새나 덤불로 벽체를 엮고 산죽으로 지붕을 이었다. 여름에는 땅이 눅지고 빗물이 스미기 때문에 바닥에 통나무를 깔았다. 그 위에 풀이나 섶을 깔면 훌륭한 거처가 된다.
이동이 잦아지면서 천막생활을 했다. 천막을 접으면 배낭 하나에 다 들어간다. 천막을 늘 지고 다녔다. 제1차 동기 공세 시기에는 천막도 없이 한데서 자야 했다.
해결하기 힘든 것이 신발이었다. 일부 대원들은 짚신을 면치 못했다. 산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신발은 농구화였다. 농구화 한번 번듯하게 신어보는 것이 빨치산의 소원이었다. 대원들은 인민군의 본을 받아서 발싸개를 했다. 갈기도 쉽고, 빨아 널기도 편하다. 신발의 어려움이 동상을 몰고 왔다. 신발이 늘 젖어 있고, 발을 말릴 겨를이 없어 많은 대원들이 동상에 걸렸다.
빨치산들은 밤에 어떻게 잠을 잤을까?
구들 불은 준비가 번거로웠다. 하룻밤이라도 안전하게 잘 수 있을 때 피우는 것이었다. 구들 불은 땅을 한 자 정도의 폭과 깊이로 길게 파내고, 그 구덩이에다 불을 피웠다. 나무들이 다 타서 불덩이만 남으면 그 구덩이를 중앙으로 잡아 천막을 쳤다. 그리고 구덩이에는 얄팍한 돌들을 걸쳤다. 그러면 불기운으로 천막 안이 훈훈해지면서, 돌들은 열기를 품어 그대로 구들장이 되었다. 대원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누워 발들은 모두 구들장으로 따라 나란히 모았다. 그렇게 눕게 되면 발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땅에도 열기가 가해지며 장딴지까지는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구들 불을 피우고 자면 잠도 달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도 가뿐졌다.
빨치산들이 은거한 땅굴, 비트는 어떻게 생겼을까?
비트는 실개울이 흐르는 어느 골짜기의 비탈에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골짜기고 비탈일 뿐이었다. 키가 크고 작은 잡목들이 숲을 이루고, 여러 가지 잡풀들이 엉켜 무성하고, 여기저기 바위들이 널려 있는 평범한 산골짜기의 하나였다. 실개울도 수량이 적어서 별달리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있는 듯 만 듯했다. 그 골짜기에 고정비트가 들어선 것은 비트 설치조건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첫째, 물이 있었다. 둘째 골짜기가 평범하였다. 굴 안은 너덧 평의 넓이였다. 천장은 서서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높았고, 무너지는 사고를 대비해서 통나무들을 세 줄로 가로질러 기둥을 받쳐놓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동상의 고통은 혹독했다. 살을 찢어내거나 뜯어내는 것 같은 그 고통은 견뎌내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동상은 손가락 발가락이 푸르죽죽하게 부풀어 오르다가 가무칙칙한 색깔로 변하여 피와 진물이 흘러내렸다. 피고름이 또 얼어붙었다. 손가락 발가락들이 하나로 떡 덩어리가 되고, 그러면서 검붉은 색깔로 변해 썩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문둥병처럼 손가락이 매듭매듭 떨어져 나갔다. 동상은 막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31. 김선우의 고뇌 1951년 2월, 백아산 갈갱이 마을에서
중공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팔로군 출신 병사와 장교들이 내려왔다. 12월 6일, 중공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12월엔 유엔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해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1·4후퇴다.
중공군은 계속 공세를 펼쳤다. 미군과 한국군은 맥없이 밀려났다. 1월 4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으로 이어지는 37도 선을 방어선으로 삼고 대치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후 전쟁은 정전협정 체결까지 33개월간 연장되었다.
총사령관 김선우는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뇌로 괴로웠다. 중앙당의 지도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도당은 한없이 가벼웠다. 하지만 김선우는 놓인 처지를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전면전을 개시한 것도 중앙당이었고, 9·28 후퇴를 명령한 것도 중앙당이었으나, 유격대 투쟁에 소요되는 모든 것을 도당이 맡았다.
한국전쟁은 세계대전이었다. 전황을 결정하는 것은 미군과 중공군이지 북한의 인민군이 아니었다. 따라서 인민군의 예하에서 활동하는 전남인민유격대는 사태의 추이에 대응하기 급급할 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할 정보도 없었고 상황을 타개할 힘은 더더욱 없었다. 빨치산 대원들에게는 모든 빨치산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총사령관이었으나,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어렵게 중앙당의 결정서가 지리산에 도착하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연락원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6개월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당이 아니었다.
총사령관은 전체 전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힘든 것은 상황의 추이를 예측하는 일이었다. 깊은 산 깊은 곳에서 연락병을 통해 전해 받는 정보로는 정세의 추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미 세계전쟁으로 비화된 전쟁이었다. 전선이 교착되자, 한반도의 남도 지역을 책임지는 총사령관 김선우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정규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고, 백아산을 향한 집중적 침공이 개시될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59. 김선우의 최후 1954년 4월 5일 백운산 상봉에서
『남도 빨치산』 6권에는 김선우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저자 정관호는 이 무렵 백운산에서 김선우의 지휘를 받으며 신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 속의 이야기는 김선우의 최후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증언일 것이다. 소설 속의 강차영은 다름 아닌 정관호이다.
4월에 들어서니 응달 눈도 녹기 시작했다. 적정이 없는 때는 굴 밖에 나와서 활동하고, 수색병들이 설칠 때는 굴속에서 대피하면서 제3기 침공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선우 위원장이 강차영과 양수정을 부르더니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조인섭과 박경룡 동무를 데리고 마을에 내려가서 식량도 얻어오고 정보도 수집해 오시오.”
김선우 위원장과 비상 연결선을 정하고, 네 사람은 밤 행군에 나섰다. 4월 3일의 일이다. 강차영 일행이 떠나고, 김선우 위원장도 박인상과 조애덕을 데리고 동굴을 떴다.
강차영 일행은 날이 새기 전에 하천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발치에 이르렀다. 거기서 하루 잠복하면서 목적한 마을의 안팎을 잘 보아두었다가 저녁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날 밤 강차영 일행이 마을로 내려간 것은 밤 아홉 시경이었다. 조인섭과 양수정은 그 집 안으로 들어갔고, 강차영과 박경룡은 망을 보며 주위를 살폈다.
두 사람이 들어간 지 20분쯤 지났을까. 강차영과 박경룡이 기대선 바위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강차영과 박경룡은 총구를 내밀고 숨을 죽이고 있다. 불쑥 바위 위로 내미는 그림자에 대고 강차영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조인섭과 양수정에게 위기 상황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두 사람이 뛰쳐나오면서 발포하였고, 강차영과 박경룡은 두 사람을 엄호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4월 4일의 일이었다.
4월 5일 새벽, 김선우 위원장은 박인상, 조애덕과 함께 88능선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내곽의 비트에 대피하고 있다가 도로 서골로 넘어갈 작정으로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원릉 가까이에 이르니 날이 훤히 샜다. “동무들 잠깐 거기 서 있으시오.” 김선우 위원장은 수행하는 두 사람을 거기 멈추어있게 하고, 왼쪽으로 바위 등을 넘어 자취를 감추었다. 바로 뒤에 총성이 울렸다. 1954년 4월 5일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상은 소설 『남도 빨치산』에 서술된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소설에서 역사로 들어가 보자.
1954년 2월 김선우는 백운산의 폐광 굴에 숨어 있었다. 광양에서 지하사업을 하던 유상기가 군경들의 추적을 피해서 폐광 굴에서 김선우 위원장을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굴의 소재가 군경에게 유출되었나 보다. 몰려오는 군경에 맞서 유상기는 맹사격을 가하면서 뛰쳐나왔다. 김선우의 탈출로를 확보하고 자신은 그 자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 호위병 조병탁도 함께 전사했다.
위기를 모면한 김선우는 기요과 및 선전부 대원들과 함께 서골에 머물러 있었다. 바위 너덜겅 사이 자연동굴에서 대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관호 등 네 사람을 정보수집 겸 식량 보급 차 간전 쪽으로 내려보냈다. 이튿날 88골짜기 양지 사면에 마련된 지하 비트에서 하루를 잠복했다. 그 뒷날 새벽에 호위병 박문상, 기요원 전덕례는 함께 백운산 주능을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때 잠복하던 침공군의 저격을 받고 김선우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1954년 4월 5일의 일이다.
61. 김선우의 계승자 박현채, 회고록을 쓰다 1993년 가을 광주에서
김선우와 박현채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김선우와 박현채가 한자리에 선 적은 있었다. 1951년 1월 1일 백아산 학천마을에서 열렸던 신년식 때였다. 그때 김선우는 총사령관으로서 신년사를 하였고, 그때 그 자리에서 박현채는 광주서중학교 교복을 입고 소년 빨치산을 대표하여 신년사를 하였다. 이런 경우 하부 일꾼 박현채는 총사령관 김선우의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김선우는 박현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총사령관이 540부대 소속 유격대원 박현채를 독대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선우의 정신적 스승 정해진과 박현채는 광주서중학교를 매개로 선후배 사이가 된다. 정해진이 나온 경성제대는 서울대학의 전신이다. 정해진이나 박현채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점에서 같다. 그러니까 두 분은 광주가 배출한 대표적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김선우는 1918년생이고, 박현채는 1934년생이다. 둘 사이에는 16년의 세월이 격하고 있다. 둘은 전남인민유격대의 주요 인물이었다. 김선우는 8개 전구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관리, 지도하는 총사령관이었고, 박현채는 광주지구 540부대에 소속하여 항미소년돌격대를 이끈 똘똘한 소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격투쟁은 나이 먹은 어른들이 하는 투쟁이 아니다. 10대의 소년들이 그 날렵한 몸으로 신출귀몰하게 싸우는 것이 빨치산 투쟁이다.
소년 박현채의 투쟁은 김선우가 창건한 전남인민유격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역으로 박현채처럼 광주서중학교 출신의 민활한 소년 유격대원들이 있었기에 전남인민유격대가 존재할 수 있었다.
김선우가 시계의 바늘이라면 박현채는 시계의 톱니바퀴였다. 김선우는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백운산 상봉에서 눈을 감았다. 김선우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박현채를 통해 부활하였다.
빨치산 시절 선배들로부터 배운 정신을 갈고 다듬어 마침내 박현채는 한국민주주의의 새벽을 열었다. 일찍이 박현채는 『후진국경제론』을 집필하여 대한민국 학생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고, 이어 1971년에는 김대중 선거 캠프에 결합하여 『대중경제론』의 골자를 만들어 주었으며, 1978년도에는 『민족경제론』을 집필하여 1970년대 후반기 학생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죽는 날까지 가슴 속에 묻어두고자 했던 빨치산 이야기를 박현채는 조정래를 통해 복원하였다.
1988년 조선대가 민주화되면서 이돈명 변호사가 조선대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 이돈명 총장은 박현채를 구원 투수로 등판시켰다. 많은 학생들이 박현채의 강의를 청강하였다. 무리였을까? 서울과 광주, 그 먼 길을 매주 왕복하였으니 말이다. 그 시절 교수들은 소주에 삼겹살을 많이 먹었다. 교수들이 삼겹살의 비계를 먹지 않으면 박현채 교수가 분노하였다.
“짜식들아, 나의 동지들은 이 비곗살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갔어. 이리 내놓아, 내가 먹을랑께.”
1993년 8월, 박현채는 서재에 틀어박혔다. 빨치산의 삶을 회고하면서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자 한 자 찍어나갔다. 그 시절엔 386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 대우전자에서 출시한 워드프로세서로 타이핑하던 시절이었다. 화면이 좁았다.
선생은 먼저 간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날마다 울었다. 원고는 자주 다운되어 사라졌다. 세 번째 쇼크가 박현채의 뇌를 강타하였고, 선생은 말을 잃었다. 1995년 박현채가 숨을 거두면서 회고록은 미완으로 끝났다.
지인들은 박현채의 회고록이 영영 사라진 것으로 알았다. ‘박현채의 말년을 갉아먹은 글’, 한 맺힌 회고록 말이다. 선생의 유고를 정리하던 어느 날, 정윤형 교수가 사라진 육필 원고를 찾아냈다. 쓰러지기 직전에 원고 한 부를 출력해 놓았던 것이다.
67. 김선우 총사령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1951년 12월, 산사람들은 엄숙한 계절 앞에 섰다. 산사람들에게 가장 처참한 시기가 왔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백선엽에게 토벌 작전을 맡겼다. 백선엽은 지리산 주변 9개 군을 가리키며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적”이라며 소탕할 것을 지시했다.
군경 5만 명의 토벌대는 주요 능선을 장악하면 그곳에 벙커를 구축하고 주둔하였고, 무전 교신기를 들고 빗으로 훑듯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색전을 펼쳤다. 혹한과 적설이 빨치산들을 괴롭혔다. 식량은 바닥이 났다. 부상자와 동상자가 속출했다. 총에 맞아 죽고,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었다. 백선엽 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발표하였다.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ʼ
제1차 동계 토벌이 끝난 1952년 4월, 3천여 명의 유격대원이 생존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무렵 1953년 7월 27일, 1천여 명의 유격대원이 생존하였다. 북은 빨치산을 외면했다. 휴전협정 문서에는 후방에 남은 물자와 장비의 철거에 관한 조문까지 있었지만, 후방에 남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알고 보니 빨치산의 기지는 지리산이 아니라 백아산이었다. 1951년 8월 이현상의 남부군이 지리산 달뜨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남부군의 수는 400명이었다. 그때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는 5천 명이 넘는 유격대원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의 상징이었다면, 빨치산의 중심은 김선우였다.
1954년 4월 5일, 김선우는 백운산 상봉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그의 고뇌를 기억할까?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분단의 비극과 김선우의 최후를 노래하련만…. 하늘은 나에게 시혼(詩魂)을 주지 않았으니, 3천 년 전 트로이 벌판에서 있었던 이야기, 아킬레스에게 쫒기던 헥토르의 최후를 노래한 호메로스처럼, 72년 전 백운산 상상봉에서 있었던 이야기, 토벌대에게 쫓기던 김선우의 최후를 노래하는 일은 언젠가 올 미래의 시인에게 맡겨야할 것 같다.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릴 따름이다. 빨치산의 고뇌와 희생에 값하는 보답은 문학밖에 없지 않은가?
<전사 2> 김남주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우리들이 갑오농민에 대해서 이야기하듯
마치 우리들이 한말의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듯
◎ 정인, ≪빨치산 리포트≫, 다크북스, 2026
☞ 작자 정인은 황광우의 필명이다. 황광우는 195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 고교 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1977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978년 광화문 시위에 연루되어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1984년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를 집필하였고, 1985년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출간하였다.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을 주도하였다. 1996년 <플라톤논술아카데미>를 창립했고, 2001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했다. 2009년 전남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2014년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019년 (사)<인문연구원동고송>을 창립하였고, <장재성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대표 저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1984)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1985)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1990) 『레즈』(2003) 『철학콘서트』(2006) 『젊음이여,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2007) 『소크라테스 전-사랑하라』(2013) 『철학의 신전』(2014) 『역사콘서트』(2015) 『촛불 철학』(2017)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2019) 『이름 없는 별들』(2021) 『김영철 평전』(2022) 『시민군』(2023) 『오월이 온다』(2025) 『역사가 온다』(2025) 『학생탑의 후예』(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