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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7-20 20:52
  • 조회148
  • [보도자료]
  • 2026-07-20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

 

중국인은, 시안에서 자부심을 찾고 뤄양에서 기도하며 카이펑에서 기개를 얻고 항저우에서 낭만을 맛본다. 난징에서 와신상담하며 베이징에서 미래를 본다.

 

여는 글

 

“30년 후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深川)을 보고 1,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베이징(北京)을 보고 3,00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시안(西安)을 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굴기(崛起)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개혁개방 성과를 대변하는 선전뿐 아니라 찬란한 역사를 구가했던 심장부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베이징과 시안 그리고 뤄양(洛陽)카이펑(開封)항저우(杭州)난징(南京) 등 중국의 역대 도읍지는 중국 역사의 심장부다.

 

공간으로 중국 읽기

공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크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도읍지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공간으로 중국을 읽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도읍지에는 중심으로서 구심력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한편, 그 구심력이 미치지 않는, 또는 그 구심력에 맞서는 독자적인 공간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그 주변의 역사나 또 다른 중심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1장 시안, 실크로드의 영광을 품은 곳

 

천년고도 시안

 

중국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관중(關中)의 땅은 천하의 3분의 1이고 인구는 10분의 3에 불과하지만, 그 부는 10분의 6을 차지한다라고 했다. 수도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즉 안전과 먹고사는 일에서 시안(西安)은 입지 조건이 탁월하다. 시안이 자리한 관중은 금성천리(金城千里) 천부지국(千府之國)”, 즉 천연의 요새가 철옹성처럼 길게 뻗어 있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바로 이곳에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했으니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시안 지역에는 수많은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0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남전인(藍田人) 유적지와 7,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반파(半坡) 유적지는 이곳의 까마득한 과거를 말해준다. 또 시안은 문물제도의 기틀인 예악(禮樂) 제도를 마련한 주나라 이래로 진당 등 중국 통일 왕조의 정치 중심지였던 만큼 중국의 정체성이 빚어진 곳이기도 하다. 서주(西周)의 풍경(豐京)과 호경(鎬京), ()나라 함양(咸陽), 한나라 장안(長安)은 모두 시안 일대에 자리했던 수도의 명칭이다. 화하(華夏) 문명의 발원지, 동방 문명의 상징, 실크로드의 기점은 모두 찬란한 역사의 심장부였던 천년고도(千年古都)시안을 표현하는 말이다.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했던 곳

로마아테나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시안은 역대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서주()은 물론 수()() 13개 왕조가 이곳에 도읍했다. 이들 왕조가 시안을 수도로 삼았던 기간을 합산하면 1,129년에 달하니 그야말로 시안은 천년고도다.

시안은 우리에게 장안이라는 명칭으로 훨씬 친숙하다. 장안, 말 그대로 오래도록 편안히 다스린다는 소망이 반영된 명칭이다. 이름 덕분일까.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이곳에 도읍한 뒤 장안향(長安鄕, 진나라 때 마을 명칭으로, 한나라 궁전 장락궁長樂宮 일대)의 이름을 따서 수도 명칭으로 삼은 이래로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장안은 오래도록 화려한 명성을 떨쳤다.

역사적으로 시안은 중국 서북 지역의 문호였다. 지금은 시안은 서북 각 지역을 기타 지역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한다. 또 중국 경제의 전체 판도에서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지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시안은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갖춘 도시다. 즉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도시다. 국가 역사 문화 명성(名城), 우수 여행 도시, 국제 이미지 최고 도시 등 시안에 부여된 타이틀이 이를 대변해준다. 문화가 도시의 경쟁력인 오늘날, 시안은 그 어느 곳보다 문화적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다. 그 매력의 상담 부분이 유구한 역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실천 동력임을 절감하게 한다.

 

봄날 곡강연에는 환호와 눈물이 한가득

 

봄바람이 살랑인다. 살구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급제화(及第花, 살구꽃)가 핀 행월(杏月, 음력 2) 방방일(放榜日, 과거 합격자 발표일), 급제자와 낙제자의 운명이 갈리고 그들의 환호와 눈물이 1,300년 전 당나라 수도 장안을 가득 채운다.

응시생 수천 명 가운데 진사(進士) 합격자는 33명 남짓이다. 창창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설레게 한다. “서른에 명경과(明經科) 합격은 늦은 셈이고, 쉰에 진사과 합격은 이른 셈이라는 당나라 속담이 대변하듯, 진사과 합격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재수, 삼수는 기본이고 10, 20년 심지어 평생을 시험에 매달려서야 겨우 진사에 합격한다. 물론 평생을 바쳐도 끝내 낙방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들이 비일비재하다.

 

곡강연(曲江宴)에서 소외된 낙제자였던 황소

봄꽃 흐드러지게 핀 날 곡강(曲江)에서 열리는 축하연은 당 중종 신룡(神龍) 연간(705~707)에 시작되었다. 봄날 곡강의 왁자지껄함은 170여 년 뒤 사그러지고 만다. 곡강연의 조종을 울린 것은 황소의 난이다.

앞의 온정(溫定)이 소심한 복수에 그쳤다면 황소(黃巢)는 대담한 복수를 실행에 옮겼다. 황소도 진사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한 전력이 있다. 그 역시 곡강연에서 소외되어 피눈물을 흘린 낙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전당시화(全唐詩話)의 기록에 따르면, 황소는 곡강연에서 진사 합격자들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분노의 시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낙방한 뒤 국화를 노래하다(不第後賦菊)라는 시다.

 

가을 중양절(重陽節) 다가오면,

국화가 핀 뒤 다른 모든 꽃은 죽으리니.

하늘을 찌르는 향기가 장안에 진동하고,

온 성에 황금 갑옷 가득하리.

 

과거에 낙방한 황소의 마음속에 용솟음치던 반란 욕구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황금 갑옷으로 표현한 국화는 다름 아닌 황소 반란군이다. 그의 시는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장안은 황소가 이끄는 수십만 농민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황소가 과거에 합격했더라면, 곡강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더라면 황소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곡강연에서 소외되어 피눈물 흘리는 이가 존재하는 한 황소의 난은 언제든 일어났을 것이다. 수많은 좌절과 한숨과 눈물을 외면한 곡강의 축제는 또 다른 황소를 키워냈을 테니 말이다.

인재를 제대로 발탁하지 못하는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황소가 당나라에 반기를 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모순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재력이 받쳐주어야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던 현실 역시 낙제자를 절망에 빠뜨렸다. 장안 출신으로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뒤 출가해 승려가 된 한산(寒山)나를 농사꾼 아들이라 비웃네(笑我田舍兒)라는 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과거에 낙방하면 돈 없어 떨어진 것이라네. 언젠가 돈 있는 날이 오면 탑 꼭대기에 이름을 남기리.” 지금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꼬집는 수저 계급론의 당나라 버전이 아니겠는가.

곡강연은 처음에는 낙제생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중종 때 진사 합격자를 축하하는 자리로 변했다. 영광과 기쁨에 대한 축하보다 좌절과 슬픔에 대한 위로가 먼저인 사회, 그런 곳에서라면 봄날의 꽃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시안 동남쪽에는 당나라 때 황가 원림(園林)이 있던 곡강 경내에 곡강지유지공원(曲江池遺址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봄꽃 필 무렵 찾아가는 게 제격이다. 그 꽃에 울고 웃던 이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희망하면서…….

 

 

2장 뤄양, 용문석굴과 모란의 도시

 

역대 아홉 왕조의 수도였던 천하의 중심

 

이곳은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거리가 모두 같다.”(사기』 「주본기(周本記))

3,000년 전, 주나라 제2대 왕인 성왕(成王)의 명령에 따라 낙읍(洛邑)을 건설하고 구정(九鼎)을 안치한 주공(周公)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구정은 왕권을 상징하는 아홉 개 솥이고 주공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말한 낙읍은 바로 뤄양(洛陽낙양)이다.

먼저 그 이름부터 살펴보자. ()은 낙하(洛河)를 가리킨다. 따라서 낙양은 낙하의 양(), 즉 북쪽이라는 의미다. 서울의 옛 이름 한양(漢陽)이 한강 북쪽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강의 북쪽을 가리킨다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즉 산에서 유래한 지명은 산의 남쪽에 위치하면 이 붙고 북쪽에 위치하면 이 붙는다.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서 서악에 해당하는 화산의 북쪽의 위치한 화음(華陰)이 그 예다.

 

뤄양이 있는 허난은 어떤 곳인가

양과 지명의 관계를 말한 김에 뤄양에 위치한 허난(河南하남)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과거에 ()라고 하면 황하(黃河)를 가리키고 ()이라고 하면 장강(長江)을 가리켰다. 중국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 가운데 강남(江南)은 장강의 남쪽, 강동(江東)은 장강의 동쪽을 가리킨다. 허난은 황하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동시에 중국 23개 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취음 선생 백거이, 향산에 잠들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자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백거이(白居易), 술을 마주하고(對酒)

 

인생이란 달팽이 뿔 위처럼 좁은 공간에서 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것,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말고 그저 즐겁게 웃으며 살자. 이는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일흔이던 841년에 쓴 시다. 이 시를 쓰고 5년 뒤 백거이는 세상을 뜬다.

 

시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백거이

당 선종(宣宗)은 백거이를 애도하는 시 백거이를 애도하다(弔白居易)에서 이렇게 말했다.

 

뜬구름처럼 메이지 않으니 이름은 거이(居易, 편안함에 거하다),

조화무위(造化無爲)하니 자는 낙천(樂天)이라.

어린이도 장한가(長恨歌)를 읊조릴 줄 알고,

오랑캐(胡兒호아)비파행(琵琶行)을 노래할 줄 아네.

 

백거이는 그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짓고자 했다. 그는 시를 짓고 나면 이웃집 노파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쳤다고 한다. 시를 풍자와 교화의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백성의 뜻을 전달하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시, 이런 시로 사회정치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했다. 백거이의 이런 문제의식은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원진(元稹), 장적(張籍), 왕건(王建) 등과 함께하는 신악부(新樂府) 운동이라는 일종의 문학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현실을 꼬집고 시대의 폐단을 질책하는 내용의 시 창작이 권세가에게 눈엣가시였음은 물론이다. 백거이의 시를 보고서 권세와 돈이 있는 자는 안색이 변했고, 집정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격분했고, 병권을 쥔 자는 이를 갈았다. 결국 원화(元化) 10(815), 백거이는 모함을 받아 강주(江州)로 좌천된다. 암울한 현실 정치 속에서 신악부 운동 역시 좌절되고 만다.

문학 운동으로 사회를 개조하려던 의지가 꺾인 뒤 백거이는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를 짓는다. 젊은 시절 백거이 시에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긴 유교 사상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시기의 시에는 불교적도교적 색채가 짙다. 앞서 소개한 술을 마주하고(對酒)에 보이는 달관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삶의 경지였으리라. “곤궁해지면 홀로 자신을 잘 지키고, 영달하면 천하를 더불어 구제한다(맹자)라는 독선기신(獨善其身, 남을 돌보지 않고 자기 처신만을 온전히 하는 일-인용자)과 겸제천하(兼濟天下, 천하를 함께 구제한다-인용자). 이는 중국 지식인의 삶의 방식이었다. 겸제천하를 꿈꿨던 백거이는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결국 독선기신하며 살아갔다. 뤄양은 바로 백거이가 독선기신하던 삶의 장소다.

 

뤄양 삼절과 당삼채

 

당삼채와 북망산

뤄양 삼절(용문석굴, 모란, 뤄양수석) 외에도 뤄양을 대표하는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당삼채(唐三彩). 채색 유약을 사용한 당나라 때 도자기 당삼채에서 사용된 유약의 색깔은 황색녹색갈색남색흑색백색 등 다양하다. 당삼채의 삼채는 세 가지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을 의미한다. 그래도 주로 사용된 세 가지 색깔을 굳이 꼽으면 백색녹색황색이다.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여러 빛깔이 흘러내려 뒤섞이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당삼채가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이 바로 뤄양이다. 그래서 당삼채를 뤄양 당삼채라고도 한다. 측천무후 때부터 현종 때까지가 당삼채 제작의 전성기였다.

 

당삼채가 대량으로 출토된 뤄양 북쪽 망산 일대는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북망산에 묻힌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부터 훌륭한 묏자리로 알려진 것이다. “북망산에는 빈 땅이 없으니 죄다 뤄양 사람들의 옛 무덤이로구나(왕건王建북망행(北邙行)라는 시구처럼, 우리에게 북망산(北邙山)으로 익숙한 이곳에는 역대 왕조 왕후장상의 무덤이 수두록하다.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義慈王)도 이곳 망산에 묻혔다.

 

뤄양은 고금의 흥망성쇠를 실감하게 해주는 곳이다. 뤄양의 흥망성쇠는 역대 중국 왕조 흥망성쇠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제왕의 교과서라 불리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뤄양성을 보시게나(옛 뤄양성을 지나며(過故洛陽城)라고 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찬하던 19년 가운데 꼬박 15년을 뤄양에서 작업했다. 그가 편찬 작업을 마친 뒤 신종은 옛일을 거울삼음으로써 치도(治道)에 도움이 된다라는 의미에서 자치통감이라는 제목을 하사했다. 자치통감 편찬 목적은 역대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오늘날의 득실을 살피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를 거울로 삼는 것,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도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 고금의 흥망성쇠를 돌아보게 해주는 곳이 천년제도(千年帝都), 모란꽃의 도시(牧丹花城)로 불리는 뤄양이다.

 

 

3장 카이펑, 송나라의 찬란한 기억

 

송나라의 절정을 묘사한 청명상하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송나라

고층 빌딩 숲에서 살아가는 지금 우리 감각이 아닌 1,000년 전 사람들의 감각으로 상상해 본다면 송나라 카이펑(開封개봉)은 정말 놀라운 도시였다. 개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술집이 성황을 이룬 것은 당시 사회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일이다. 송나라 때 중국 인구는 처음으로 1억을 넘어섰다. 강남 지역에서는 대규모 논이 개간되고 이모작 쌀 품종이 개발되면서 농민들이 잉여 농산물을 내다 팔 수 있었다. 운하를 통해 강남에서 북쪽으로 운송된 곡물의 양은 당나라 때의 세 배에 이르렀다. 카이펑의 엄청난 인구는 이것에 의지했다.

 

청명상하도가 그려낸 송나라의 카이펑

장택단(張擇端)청명상하도 덕분에 우리는 송나라 카이펑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당나라 장안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방장(防墻, 방어벽, 성곽의 성벽)이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108개 방(,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주 구역)으로 구성된 장안의 폐쇄적 구조가 카이펑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송나라 카이펑에서 살던 이들의 삶은 당나라 장안에서 살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당나라 방제(防制)를 카이펑 주거 지역에 적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통치의 편의성보다는 경제적 실용성이야말로 카이펑을 지배하는 원리였던 것이다.

청명상하도를 보면 길을 향해 문이 난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당시 프랑스 파리보다 임금 밀도가 2~3배 높았던 카이펑이니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재는 정말 큰 재난이었을 것이다. 중국 최초의 소방 조직인 군순포(軍巡鋪)가 송나라 카이펑에 처음 설치된 것도 당연하다. 300보마다 군순포가 하나씩 있었다고 하니 꽤 촘촘히 분포했던 셈이다. 군순포에 소속된 병사는 화재뿐 아니라 도난과 불의의 사고와 교통질서까지 책임졌다. 소방 업무의 경찰 업무까지 겸했던 것이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세운 망루에는 화재가 났는지 살피는 이가 배치되어 있었다. 망루 아래에는 물통사다리밧줄 등 소방용구가 구비되어 있었다.

청명상하도 그려진 카이펑 시내에는 거리마다 가게가 즐비하다. 당나라 장안에서는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장사를 할 수 없었고, 각 방의 문이 여닫히는 시간에 맞춰 통금(通禁)이 엄격히 실시되었다. 반면 송나라 카이펑 거주민은 어디서든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통금 시간은 점차 완화되다가 결국 통금이 폐지되면서 24시간 장사가 가능해졌다. 카이펑에는 6,400개가 넘는 가게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상업용 건물이 개인주택보다 비싸게 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야시장과 새벽시장이 열리는 카이펑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다. () 오락과 상업이 공존하는 종합 센터인 와자(瓦子) 9곳이나 있어서 서민을 상대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와자에는 찻집과 술집, 음식점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구란(勾欄)이라는 전문적인 공연장도 수십 개나 되었다. 구란에서는 이야기와 노래를 섞은 설창(說唱)을 비롯해 곡예잡기연극마술 등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송나라 카이펑의 교통운송 수단 역시 다양했다. 청명상하도에는 배 29, 나귀 등 가축 73마리가 그려져 있다. 말을 탄 사람, 가마를 탄 사람, 크고 작은 여러 수레가 카이펑 시내를 분주히 오간다. 바퀴가 하나 달린 손수레 독륜거(獨輪車)도 꽤 유용한 운송수단이었던 듯하다. 수레바퀴를 수리하는 가게가 그려진 것을 보면, 오늘날 카센터에 해당하는 서비스업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성밖으로 나가는 낙타 모습 역시 매우 인상적인데,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 상인의 운송수단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카이펑의 생명줄인 변하에 떠 있는 배들, 변하 기슭의 번화한 모습,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변하 주변의 장면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홍교(紅橋). 무지개가 걸린 듯하다고 해서 홍교라고 명명된 다리 아래로 화물을 실은 배가 떠 있다. 다리 위는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구경꾼과 행인으로 넘쳐나는 다리, 그 기회를 놓칠세라 행상들이 들어서 있다.

홍교를 비롯해 청명상하도 그려진 송나라 카이펑의 경관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바로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이다.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건물을 재현해 놓은 것은 물론이고, 송나라 때 복장을 한 직원들의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고 다양한 공연도 펼친다.

 

카이펑은 곳곳에서 송나라 자취를 느낄 수 있다. 1988년에 건설된 송도어가(宋都御街)는 송나라 때의 상가를 모방에서 만든 상업지구다. 송도어가 북쪽 끝에는 앞서 소개한 백반루를 복원한 반루(礬樓)가 있다. 송도어가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지점의 고루 주변은 카이펑의 야시장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4장 항저우, 서호의 낭만이 깃든 곳

 

동파육에 담긴 사연

 

소제춘효(蘇堤春曉), 곡원풍하(曲院風荷), 평호추월(平湖秋月), 단교잔설(斷橋殘雪). 서호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전경을 표현한 말이다. 같은 계절이라도 서호의 아침저녁 풍경이 다르다. 어디 그뿐인가. 맑은 날과 궂은 날의 풍경도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모습들이 제각기 아름답다. 북송의 대문호 소식(蘇軾, 1037~1101)은 이런 서호를 중국의 대표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했다.

 

*‘소제춘효는 항저우 서호의 서호십경 중 첫 번째로,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항저우 지방관 시절 만든 소제에서 바라보는 봄날 새벽의 안개 낀 절경을 뜻합니다. 3km 길이의 소제를 따라 버드나무, 호수 안개, 석교 풍경을 감상하는 산책 명소.-인용자

**‘곡원풍하는 곡원에 부는 바람과 연꽃 향이 어우러진 여름 풍경, ‘평호추월은 평호에서 바라보는 가을밤 달빛, ‘단교잔설은 끊어진 다리에 남은 겨울 눈을 뜻하며 모두 항저우 서호십경의 대표 경관.-인용자

 

물빛 찰랑찰랑 반짝반짝 맑으니 좋고,

산색 희뿌여니 비 내려도 훌륭하구나.

서호를 서시에 빗댄다면,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잘 어울리는구나.

- 맑은 뒤 비 내리는 서호에서 술 마시며(飮湖上初晴後雨)

 

서호는 언제 찾아가더라도 아름답지만, 푸른 수양버들과 붉은 복숭아꽃이 어우러진 봄날이면 더 좋을 것이다. 봄날 서호십경의 소제춘효를 만끽할 수 있는 건 바로 소식 덕분이다.

 

소제와 동파육을 탄생시킨 소식

소식은 항저우에서 두 차례 관직을 지냈다. 처음(1071~1074)은 항저우 통판(通判)이었고 두 번째(1089~1091)는 항저우 지주(知州)였다. 앞의 시는 그가 통판을 지냈을 때 쓴 시다. 15년 뒤 소식은 항저우 지주로 있으면서 서호에 제방을 쌓았다. 그 제방이 바로 소제(蘇堤). 호수를 준설할 때 나온 진흙으로 서호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제방을 만든 것이다. 2.8km에 달하는 제방 축조는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저수량이 증가하고 호수의 자정 능력이 향상되어 수질이 호전되었다. 그 덕분에 서호의 미관이 개선되었고, 가뭄과 홍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며, 식수원과 관개용수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었고, 배의 운행이 원활해졌다. 또 제방 덕분에 호수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보 통행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마름을 재배해서 올린 소득으로 서호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소제의 축조가 더욱 뜻깊은 이유는 그 사업이 백성의 삶을 보듬으려는 데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소식이 부임하던 해에 항저우 일대는 자연재해로 흉작이 들었다. 바로 조정으로부터 예산을 확보해 서호를 준설하고 제방을 쌓았다. 소제의 축조는 일종의 공공근로사업이었던 셈이다. 항저우 백성들은 이 일에 노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소제는 소공제(蘇公堤)의 약칭이다. 소공은 소식을 가리키니, 소공제는 소식의 제방이라는 의미다. 소식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이 담긴 명칭이 바로 소제.

광저우를 대표하는 음식인 동파육(東坡肉)역시 소식과 관계가 있다. 항저우 백성들이 소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설날에 돼지고기를 바쳤는데, 소식이 그것을 요리해 서호를 준설했던 이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네모지게 썰어서 간장설탕 등을 넣고 푹 졸인 요리가 바로 동파육이다. 소식보다 소동파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더 익숙한데, 동파육은 바로 소동파가 만든 돼지고기 요리를 의미한다. 이 역시 소식에 대한 백성들의 애정이 담긴 명칭이다.

항저우 동파육의 원형은 쉬저우(徐州) 회증육(回贈肉)이라고 한다. 일찍이 소식이 쉬저우 지주로 있었던 해(1077)의 일이다. 쉬저우 일대에 홍수가 나서 소식은 쉬저우 백성들과 함께 70여 일 동안 홍수와 사투를 벌였다. 홍수가 물러간 뒤 백성들은 고난을 함께해준 소식에게 감사의 의미로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바쳤다. 소식은 그것을 요리해서 백성들에게 답례품으로 건냈다. ‘회증(回贈)은 답례를 의미한다. 홍수와 싸우느라 애쓴 백성들의 노고에 감사할 줄 알았던 소식, 백성들은 그가 선사한 돼지고기 요리를 회증육이라 명명했다.

소식이 돼지고기 요리를 한층 업그레이드한 건 황저우(黃州)로 유배되었던 시기(1080~1084). 그가 저육송(猪肉頌)에서 밝힌 돼지고기 요리법은 솥을 깨끗이 씻은 뒤 물을 조금 붓고, 장작을 피우되 불꽃이 일지 않게 하여 천천히 고기를 익히는 것이다 소식은 다음처럼 돼지고기를 예찬했다.

 

황저우의 질 좋은 돼지고기, 값이 진흙처럼 싸다네. 부귀한 이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몰라. 아침에 일어나 두 그릇 해치우면, 내 배 부르니 그대는 상관하지 마시라.”

 

진흙처럼 싸니 실컷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를 맛나게 요리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소식의 돼지고기 요리법은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의 맛을 사로잡은 그의 요리법은 점점 대중화되었다. 황저우 유배 시절에 소식은 황저우 동쪽 언덕의 땅을 개간해서 농사지으며 동파거사(東坡居士)를 자처했다. 소동파라는 호칭도, 동파육이라는 요리명도 바로 당시 동파거사라는 호에서 유래했다.

쉬저우는 동파육이 탄생한 곳, 광저우는 동파육이 업그레이드되어 완성된 곳, 항저우는 동파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5장 난징, 육조 문화의 꽃을 피운 곳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십조도회

 

화로(火爐), 여름철 찌는 듯 더운 도시를 중국에서는 화로라고 표현한다. 이 말이 생겨난 건 민국 시기(1912~1949)이다. 당시 매체에서 지칭한 ‘3대 화로는 충칭(重慶)우한(武漢)난징(南京)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도시는 각각 창장(長江)의 상류중류하류에 자리한다. 세 도시에는 모두 창장대교가 놓여 있다.

창장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 대교 중에서 우한과 난징의 것은 의미가 각별하다. 1957년에 개통한 우한 창장대교는 제1호 창장대교다. 그런데 이것은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중국이 독자적으로 건설한 첫 번째 창장대교는 바로 1968년에 개통한 난징 창장대교다. 자동차가 달리는 위쪽 다리의 길이는 4,589m, 기차가 달리는 아래쪽 다리의 길이는 6,772m에 달한다. 중소 분쟁이 격화되었던 1960년대에 오롯이 중국 기술로 건설한 난징 창장대교는 자력갱생의 본보기이자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성취로 평가받았다.

 

육조고도, 십조도회의 난징

난징이라는 이름의 생명력 역시 대단하다. ‘()자가 들어간 역대 수도 가운데 오늘날에도 그 이름을 지키고 있는 곳은 남경(난징)과 북경(베이징) 두 곳뿐이다. 주나라의 호경(鎬京), 장안(長安)으로 불리던 한당성세(漢唐盛世)의 중심지였던 서경, 510국과 북송의 수도였던 동경(東京), 요나라의 상경(上京), 후금의 성경(盛京), 만주국의 신경(新京)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태평천국의 천경(天京) 역시 그렇다. 난징에 도읍한 태평천국은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의 건설을 모토로 내세웠고, 그에 걸맞게 수도 명칭 역시 천경 즉 하늘의 수도라고 이름했다. 하지만 천경도 결국 태평천국의 멸망과 더불어 지나간 이름이 되고 말았다.

천경 외에도 금릉말릉건업건강 등이 모두 난징의 또 다른 명칭이다. 각 이름의 사연을 알아보자. 춘추전국시대에 이곳을 가장 먼저 차지한 건 오나라다. 이후 월나라가 새로운 주인이 되고, 이어서 초나라가 이곳을 차지했다. 예부터 풍수가들은 이곳을 왕기(王氣)가 서린 땅이라고 했다. 기원전 333년 초나라 위왕(威王)은 난징 서쪽 석두산(石頭山)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왕기를 누르려 금을 묻었다. ‘금릉(金陵)이라는 명칭은 이때 생겨났다. 이것의 왕기를 누르려 했던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진시황이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산언덕을 절단하는 것이었다. 왕기의 맥을 자르고자 산언덕을 끊어내고 이름도 말릉(秣陵)으로 고쳤다. ‘(, )이란 마소를 먹이려고 잘게 썬 여물이다. 여물을 썰 듯 산언덕을 절단한 데서 말릉이라는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위왕과 진시황은 난징의 왕기를 제거하고자 했지만, 이와 반대로 난징의 왕기를 적극 흡수하고자 했던 이도 있다. 바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해 조조를 물리쳤고, 유비에겐 누이동생을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손권에게 말릉 쪽에 본거지를 두라고 권한 이가 바로 유비다. 결국 손권은 석두산에 석두성(石頭城)을 쌓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건업(建業)이라는 이름은 이때 생겨났다. 북쪽은 창장과 접하고 동남은 각각 자금산, 청량산(석두산), 우화대(雨花臺)로 둘러싸인 이곳은 천연의 요새다. 건업, ‘업을 세운다는 의미에 걸맞게 손권이 도읍한 것을 계기로 난징은 역사의 중심 무대로 부상하게 된다.

오나라를 비롯해 동진(東晉)()6조가 이곳에 도읍해 눈부신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오나라 때 건업이라 청했고, 동진 때는 황제 사마업(司馬鄴)의 이름을 피해 건강(健康)이라 했다. 오나라와 동진, 진의 수도였기에 난징을 육조고도(六朝古都)라 한다. 또 난징을 십조도회(十朝都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앞의 육조에 오대십국 시기의 남당, 명나라, 태평천국, 국민당 정부를 더한 것이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이곳을 수도로 삼은 1368년은 바로 난징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때다. 명나라는 270여 년 지속되었지만, 난징이 명나라 수도의 지위를 누린 건 불과 반세기 남짓이다. 1421, 주원장의 넷째 아들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난징은 여러 왕조의 수도였으되, 그 어느 왕조도 난징에서 길게 도읍하지 못했다. 또 베이징으로 천도했던 명나라를 제외하면 죄다 단명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시황의 저주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여물을 썰 듯 언덕을 절단한다는 의미의 말릉으로 명명했던 진시황은 이곳의 왕기를 없애고자 산언덕을 끊어냈을 뿐만 아니라 강물의 흐름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강물이 도시를 관통하여 흐르게 함으로써 왕기를 씻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 강이 다름 아닌 난징의 어머니 강이라고 불리는 진회하(秦淮河, 친화이어). 진회하는 진시황 전설에 근거해서 당나라 때 생겨난 명칭이다. 진회하의 본래 이름은 용장포(龍藏浦, 용이 감추어진 강)였다.

자신의 제국이 영원하길 바라며 난징의 산을 잘라내고 물길을 돌린 진시황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난징의 왕기 때문이 아니라 진나라가 쌓아온 폭정의 결과였다. 난징에 도읍했던 여러 왕조의 단명 역시 어찌 진시황을 저주 때문이겠는가.

 

 

6장 베이징, 정주세계와 유목세계의 접경

 

원과 명이 선택한 수도 베이징

 

기원전 1122,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소공(召公)을 연() 땅에 봉했다. 연나라 도성이라는 의미에서 연도(燕都)라고 불린 곳이 바로 베이징(北京) 지역이다. 이후 한나라를 비롯해 위나라()나라당나라 때는 베이징 일대를 유주(幽州)로 불렀다. 그리고 요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베이징은 남경중도대도북경 등으로 불렸다.

베이징을 차지했던 역대 왕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로 정복왕조가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938, 거란족의 요나라는 베이징 지역을 남경(南京)이라 칭하고 부도(副都)로 삼았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중도(中都)라 불렸고 몽골족 원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대도(大都)라 불렸다. ‘북경(北京, 베이징)이라 불리게 된 것은 명나라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1403년부터다. 만주족의 청나라에서도 북경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명나라를 제외한 요청은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다. 이들 정복왕조가 북쪽 유목세계를 관할하는 동시에 농경세계를 지배할 거점으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베이징이었다.

 

칸이자 황제이고자 했던 쿠빌라이와 대도

베이징이 중국 전역의 수도가 된 건 원나라 때다. 1215, 칭기즈 칸의 몽골군은 금나라의 중도(베이징)을 함락하고 연경(燕京)이라고 개칭했다. 약탈과 파괴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궁전도 죄다 불타 없어졌다. 바로 이해에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태어났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大汗대한) 자리에 오른다. 그는 연경을 다시 중도로 바꾼 뒤 부도로 삼은 뒤 이어 마침내 중도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고 이곳에 새로운 도성을 세우라고 명했다. 새로운 도성이 세워지는 동안 쿠빌라이는 1272()개국을 선포하고 이듬해 중도를 대도라 개칭했다.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대도 건설을 주관한 이는 한족 출신의 유병충(劉秉忠)이다. 쿠빌라이가 채택한 이라는 중국식 국호 역시 유병충이 제안한 것이다. 시초와 근원을 상징하는 ()을 국호로 삼은 것은 중국 전통과 조화를 꾀하는 동시에 원나라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이었다. 금의 분열 국면을 종식한 이 일찍이 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에 비견된다는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의 말처럼 쿠빌라이는 초원 지대에서 온 유목민 정복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정주사회의 실질적 통치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첫 번째 몽골 통치자였다. 대도 건설은 정주민을 통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말 위에서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칭기즈 칸이 중도를 파괴했고 쿠빌라이 칸이 그곳에 대도를 건설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천하를 정복하려면 파괴가 우선이지만, 그것으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정복자가 아닌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 그는 대도를 건설함으로써 정주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1267년에 건설하기 시작해 1283년의 완공된 대도는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했다. 특히 시장이 궁성 북쪽에 있어서 앞쪽(남쪽)은 조정이고 뒤쪽(북쪽)은 시장이라는 배치까지도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장안성에서도 구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왼쪽은 종묘이고 오른쪽은 사직이라는 고공기의 배치대로 서쪽 평칙문(平則門) 안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두고, 동쪽 제화문(齊化門) 안쪽에는 태묘(太廟)를 두었다. 쿠빌라이는 수도라는 상징적 장소를 중국식으로 건설함으로써 중국인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대도가 중국식으로 건설되긴 했지만, 건물 곳곳에는 몽골 문화를 상기시키는 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골 초원의 흙을 가져다 황실 제단을 지었고, 그의 아들들은 몽골식 천막에서 지냈다. 정주세계의 중국인에게 다가서는 동시에 몽골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는 것은 칸이자 황제로서 천하를 아우르고자 했던 쿠빌라이가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과제였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천안문

 

중화인민공화국을 상징하는 국장(國章)에는 천안문 위로 별이 다섯 개 있고 톱니바퀴와 이삭이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다. 톱니바퀴와 이삭은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한다. 다섯 개의 별은 공산당 지도 아래 인민의 단결을 상징한다. 천안문은 반제국반봉건의 민족정신을 상징한다. 황성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이 어떻게 반봉건을 대변하는 상징이 될 수 있었을까? 국장에서 천안문은 황권의 상징이 아니라 5·4운동 이래 인민의 투쟁을 상징한다.

 

천안문, 신중국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음에도 기존에 독일이 차지했던 산둥(山東) 이권을 반환받지 못한 채 일본에게 빼앗길 상황에 처했다. 일찍이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일본이 그의 황제 즉위를 지지해 주는 대가로, 산둥 이권을 포함해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승인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권력을 잡은 돤치루이(段祺瑞) 역시 일본의 재정 지원을 받았기에 산둥 이권에 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산둥 이권의 중국 반환이 무산되고 돤치루이 정부가 일본 요구에 동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인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중국의 이권을 노리는 열강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열강과 결탁한 군벌에 대한 분노였다.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國賊)을 몰아내자!” 베이징 학생들은 이렇게 외치면서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91954, 바로 이날의 시위가 계기가 되어 반제국주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동맹 수업 거부, 총파업이 이어졌고, 정부는 결국 민중의 요구에 굴복해 친일파 관리를 파면했다. 또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이던 중국 대표는 중국 내 일본 권익을 인정하는 강화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1949101, 30만 명이 모인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알리는 개국대전(開國大典)이 열렸다. 그야말로 넘볼 수 없는 황권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인민공화국수립이 선포된 것이다. 개국대전이 시작되자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마오쩌둥(毛澤東)이 천안문 성루 위에서 건국을 선포했다. “동포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이 버튼을 누르자 오성홍기(五星紅旗)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이와 더불어 신중국 탄생을 축하하는 예포가 28차례 발사되었다. ‘28’이라는 수는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의 기간을 상징한다.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1921723)에 참가한 사람은 13, 이들은 전국의 50여 명뿐인 공산당원을 대표해 한 자리에 모여 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마오쩌둥은 그 13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유진,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메디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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