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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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뿌리로 산다≫ - 후손의 기억으로 본 독립운동가와 가족의 삶 – 조한성 권시용
- [보도자료]
- 2026-07-16
≪결국, 뿌리로 산다≫ - 후손의 기억으로 본 독립운동가와 가족의 삶 – 조한성 권시용
독립운동가 열한 분의 후손들이 풀어놓은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아온 그들의 세월에는 영광보다는 상처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보다 민족 독립을 먼저 생각한 할아버지는 후손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사회적 바탕이 되어주지 못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아버지, 어머니의 희생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오히려 후손들에게는 연좌제의 고통일 뿐이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가난으로 고통받은 세월 속에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보다 원망과 서러움이 클 때가 많았다. 부모님의 희생을 자랑으로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며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용기를 내 인터뷰에 나섰다.
이 책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국사편찬위원회 의뢰를 받아 진행한 「독립운동가 후손 구술 수집사업」을 바탕으로 했다. 연구원들은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적게는 4시간에서 많게는 9시간 이상 인터뷰하고 녹취록 보고서를 작성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후손의 기억은 물론 그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보고서에 담겼다. 그렇지만 이 보고서는 학술 연구 자산으로 남을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가 후손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이 책을 기획했다. 독자들이 편하게 읽길 바라며 소설식으로 구성했다.
펴내며
이 책은 인터뷰 기록입니다.
2018년부터 3년 동안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은 30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인터뷰했습니다. 5시간을 인터뷰하며 200쪽에 가까운 분량의 녹취록 보고서가 만들어지죠. 그 자체로 소중한 학술 연구 자산입니다만, 보고서는 보고서로만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들은 그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가다듬었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있길 바라며 소설식으로 구성했습니다. 연구 성과를 참고해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더 보완했습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 11분의 후손들이 풀어 놓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의 삶의 여진에 흔들려 오랫동안 고통 받은 사람, 뒤늦게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고 자랑하는 사람,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알리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 아버지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겨내려 평생을 애쓴 사람, 이렇게 후손들을 이야기는 똑같지 않습니다.
이 책은 뿌리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삶에 옹이가 생기고 생채기가 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든든한 뿌리를 잊지 않았기에 거친 풍파를 견뎌내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층 위에 켜켜이 쌓인 삶의 나이테만큼 묵직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이 책이 작으나마 위안과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김민철
1. 끝내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 장재성(張載性) 지사의 아들 장상백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돌이켜보면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도 자세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아내가 궁금해하며 캐물으면 퉁명스럽게 몇 마디 하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곤 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생전에 아버지에 대해선 되도록 얘기하지 않았다. 제사상 앞에서도 그랬다. 혹시라도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며칠씩 몸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연관된 기억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좋은 게 별로 없었다. 상백이 그러할진대 고초를 온몸으로 겪은 어머니와 할머니는 오직 했겠는가.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연락해 오는 이들은 거의 매년 있었다. 대개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상백의 가족을 찾았다. 매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되면 자연스럽게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인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상백은 그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기자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대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찾아와서 가족들의 상처만 헤집어 놓기 일쑤였으니까. 아버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지만 해방 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해 왔다. 기자들은 대개 아버지의 삶 전체를 제대로 다룰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세상이 조금 변한 걸까. 얼마 전 아버지 모교인 광주일고 동문을 중심으로 아버지를 추모하는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상백의 두 아들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면서 상백에게도 조금씩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이라면 아버지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상백은 자신도 모르게 격정에 휩싸여 온몸이 뜨거워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느꼈다. 어쩜 상백은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의 생애 첫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학생・청년 운동에 뛰어들다
아버지 장재성(張載性, 1908~1950)은 1908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서 장원영과 최예인의 1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장원영은 광주면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술과 친구를 너무 좋아해 그 외의 일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소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장원영의 유난스러운 술 사랑에 수도 없이 술 심부름을 해야 했던 장재성은 평생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1926년 11월 아버지 장재성은 친구 왕재일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에 참가했다. 19살,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였다. 성진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성진회의 조직과 활동은 당시 전남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장석천, 강해석 등 청년 활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의 자매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지역 세포로 활동하면서 광주청년동맹, 전라남도청년연맹 등 광주 지역 주요 청년단체의 간부로 활약하며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조직과 학습을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진회는 4개월 만에 해산했다. 회원 중 한 명의 가족이 일제 형사였기에 비밀 유지가 힘들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버지는 눈앞에 놓인 식민지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방학 때마다 귀국하여 후배들의 독서모임을 챙겼다. 1928년 4월 모교인 광주고보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성진회 회원을 중심으로 동맹휴학중앙본부를 설치하고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1929년 6월 주오대학에서 퇴학을 당한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광주 지역 청년・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등 각 학교의 독서회를 연결하는 비밀결사로,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고, 각 학교 독서회의 재조직을 주도했다고 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고모인 장매성이 중심이 되어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앙본부와 연계 활동을 벌였다.
이와 함께 아버지는 합법 영역에서 ‘광주유학생회’를 조직해 간부를 맡았고,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에 참가하여 제2회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아버지가 광주 지역 청년・학생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도자 장재성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가족의 명운을 바꿔 놓을 만큼 큰일이 벌어졌다. 광주에서 시작해 전국을 뒤흔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운동의 중심에는 아버지와 독서회 중앙본부가 있었다. 이들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학생들의 집단적 저항을 일제 당국의 민족적 차별 대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1929년 11월 3일과 11월 12일 두 차례 시위를 배우 조정한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 형, 대구복심법원에서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 형량이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모 장매성도 여학생 가운데 가장 긴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남매가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으니,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어디 자식들의 일이 부모 마음대로 되는 법이 있던가. 아버지는 1934년 4월에 만기 출옥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릴 적 상백의 기억이 그러하듯, 해방 후 아버지의 기록은 띄엄띄엄 남아 있다. 아버지는 해방 직후 광주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조직부장으로 일했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될 때 전남 대표 14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1947년 7월에는 우익 청년단체가 광주 민전 사무소를 습격해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아버지와 동료 2~3명을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전국 일간지에 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상백은 서북청년회가 저지른 일이라고 들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중상을 당해 머리와 무릎에 큰 흉터가 남았다. 당시 병원에는 아버지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상백은 여섯 살 무렵이라 철없이 그 사람들이랑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아버지는 비밀스런 지하운동으로 전환한 것 같다. 상백은 이때를 아버지가 도망 다닐 때로 기억하고 있다.
상백의 가족들은 어느 날 밤 급히 짐을 꾸려서 야간열차를 타고 황망히 광주로 돌아와야 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느라 재봉틀을 챙기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정도였는데, 1949년 4월 4일 아버지가 종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얼마 뒤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재판에서 7년 형을 받았다. 혹자는 방북한 사실이 문제가 됐다고 하고, 혹자는 남로당에 가담한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신마저 찾지 못한 원통한 죽음
1950년 7월 11일 아침 형무관으로 있던 아버지의 사촌이 급히 연락을 해왔다. 어젯밤 헌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7월 10일 밤 헌병들에게 들려가 끌려가 피살되었다. 6‧25 전쟁이 벌어지자, 이승만 정권은 대전 이남의 전국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 사범과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아무런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처형했다. 2010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광주형무소에서 불법 학살을 자행한 것은 20연대 헌병대 5중대였다. 보안법 위반으로 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을 받은 사람부터 차례로 장고봉 고개(광주광역시 북구 양산동)로 끌고 가 처형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변을 당했음을 알았지만, 가족들은 곧바로 찾아 나서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서슬이 퍼레 감히 시신을 찾으러 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은 인민군이 광주에 들어오고 난 후였다. 9살이었던 상백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묻혔다는 곳에 찾아갔다. 세 개의 큰 무더기가 있었다. 첫 무더기는 정식으로 형을 받고 수감되었던 수용자들이 묻힌 곳이라 했고, 아래 두 무더기는 예비검속에 걸린 보도연맹원들을 매장한 곳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상백의 코에 쑥을 끼워줬다. 시신이 썩는 냄새를 막기 위해서였다.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혹시 몰라보게 되더라도 광주 민전 습격사건으로 흉측하게 남았던 무릎 위의 큰 흉터를 찾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여름이어서, 너무나 무더웠던 여름이어서,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시신들은 이미 너무 많이 썩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아주 나중까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그렇게 못 미더워하셨다.
모진 시련 속의 신산한 삶
전쟁 직후 좌익 집안에 대한 당국의 감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감시라고 해서 멀리 떨어져서 몰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대놓고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것이어서 감시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제복 입은 경찰이나 사복 입은 형사, 보안대의 요원들까지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 그들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가족들은 언제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공포심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때는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을 할 때여서 불안감은 더욱 극심했다. 그런 밤이면 상백과 여동생은 담을 넘어 이웃인 유양수 씨의 집에 가서 잤다. 공안당국은 집에만 드나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일하는 학교에도 찾아왔다. 그들은 마치 빚쟁이인 양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찾아와 어머니를 괴롭혔다.
1962년에는 지금 생각해도 기막힌 일을 당했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정통성 확보 수단으로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이승만 정권 때는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다가 박정희 정권 때에야 ‘불순한’ 의도로 제도화한 것이다. 그런데 내각 사무처에서 설치된 독립운동유공자심사위원회에서 아버지 장재성에게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가 뒤늦게 취소한다고 번복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에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관련 기관이 제대로 조사도 해보지 않고 덜컥 발표부터 했다가 취소한 것이었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훈장을 주라고 하지 않았다. 저희들이 마음대로 주겠다고 해놓고 다시 공산당을 했으니 줄 수 없다고 번복하니, 상백의 가족은 또다시 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좌제에 갇힌 꿈
사실 상백은 어렸을 때 직업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철이 들 무렵 이것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빨갱이’의 자식은 군인이 될 수도,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대학 입학하던 해에 상백은 아무 이유도 없이 방첩대로 붙잡혀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상백이 혹시 간첩과 접선하지 않았는지를 추궁했다. 이때 어머니도 경찰서로 붙잡혀 가서 조사를 받았다. 단지 ‘빨갱이’ 가족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이었다.
연좌제의 굴레는 참으로 무서웠다. 군인이나 공무원뿐만 아니라 사기업에 들어가려고 해도 규모가 있는 직장은 은밀히 신원 조사를 하기 마련이라 여의치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웠다. 그때도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제도였다. 하지만 주홍글씨의 낙인는 너무나 은밀하고 견고하게 작동했다. 그 시대에 ‘빨갱이’는 맞아 죽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시국 사건에 연루되다
상백은 1986년 9월 『말』지 사건 때에도 친구 김태홍 때문에 한 번 더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갔다. 『말』지 사건이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발견한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기관지 『말』지를 통해 폭로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이 다시 수배되었다. 그러자 그가 전에 은신했던 상백이네가 경찰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경찰은 1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새벽에 문을 따고 들어와 상백을 체포해갔다. 그들은 옆집 벌 키우는 할아버지네도 덮쳤는데, 얼마나 무섭게 들이닥치는지 그 할아버지가 “당신네들은 6‧25 때보다 더 하요”라고 혀를 찰 정도였다. 경찰은 상백을 남영동으로 끌고 가는 한편, 그의 집에 상주하며 가족들을 감시했다. 그들은 이틀 후 철수했는데, 김태홍이 붙잡히면서 감시가 풀린 것이다. 그는 역시 친구였던 상백의 처남 집에서 붙잡혔다.
상백을 체포한 경찰은 잠도 재우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들도 상백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어떤 혐의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김태홍 등 주요 수배자의 체포가 완료되자 경찰은 잔치 분위기였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그들은 작전상 필요하다면 누구나 체포하고 누구든 억압할 수 있었다. 인권이 전혀 전혀 보장되지 않던 독재 치하의 암울한 풍경이었다.
아버지 장재성과 마주하다
얼마 전인 2020년 5월 장재성 지사의 모교인 광주일고의 동문회를 중심으로 장재성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기념사업회는 김상곤 전 교육부총리를 회장으로 하고, 작가 황광우 선생을 운영위원장으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7월 ‘장재성 선생 추모제’를 시작으로 흉상 제작, 평전 출판 등 본격적인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현행 국가보훈부 심사 기준으로는 장재성 지사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어렵기 때문에, 광주 출신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경력만으로 서훈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상백의 가족은 장재성 지사와 관련된 행사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인터뷰도 모두 거절해 왔다. 민주화 이후 극단적인 색깔론이 먹혀들지 않게 되면서 장재성 지사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평생 ‘빨갱이’의 자식으로 피해를 당했던 상백과 그의 여동생은 여전히 이 세상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언제고 정권이 바뀌면 또 다시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백은 구술 인터뷰가 끝난 후 힘주어 말했다. 가슴에 있는 말을 원 없이 다하고 났더니 가슴이 뻥 하고 뚤린 것 같다고. 그렇게 꽉꽉 막혀 답답하기만 하더니 이제야 살 것처럼 가슴이 후련하다고 했다. 그렇게 상백은 오랜 세월을 넘어 늦게나마 아버지 장재성의 진면목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장상백 씨는 지난 2026년 7월 11일 한 많은 이 세상과 작별하셨습니다. 생전에 이 책의 출간을 매우 기뻐했다고 유족은 전했습니다.)
2. 확실히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대비해 나가면 좋겠어요
- 이관술 지사의 외손녀 박경희와 손옥희
카메라 앞에 산 사람은 두 명이었다. 10살 터울이 지는 이종사촌 자매 박경희와 손옥희. 살면서 구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어디 흔한 경험이던가. 자매는 긴장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데 서로 눈을 맞춘다.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흔. 그건 그들의 뿌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숨죽여 지내며 울분을 삼켜야 했던 인고의 세월. 아직도 곳곳에 편견과 왜곡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에 차가운 시선마저 느껴지지만 그들은 용감히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그들의 외롭고 고달팠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유명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술(李觀述, 1900~1950) 지사의 외손녀들이었다.
박경희는 이관술 지사의 첫째 딸 이정환의 무남독녀였고, 손옥희는 이관술 지사의 다섯째 딸이자 막내딸인 이경환의 장녀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조합이 궁금증을 유발했다. 터울도 많이 지는데 가운데 형제들은 어디 가고 첫째와 막내의 딸들이 친하게 된 걸까. 여기에는 집안의 오랜 비밀이 있음을 인터뷰가 무르익을 무렵에야 깨닫게 되었다.
두 자매는 조심스럽게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만히 듣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그녀들은 인터뷰에서부터 벌써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두 자매와 그들의 어머니들은 기나긴 지난 삶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오랫동안 숨겨진 진실
외할아버지 이관술은 섣불리 입에 올리기도 힘들 만큼 유명한 ‘빨갱이’였다. 게다가 해방 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의 주범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이 해방 공간에서 엄청난 금액의 위조지폐를 찍어내 공산당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박경희와 손옥희의 어머니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빨갱이의 딸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지은 죄도 없이 평생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했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것 때문에 자식들이 피를 볼까 봐 매사 전전긍긍해야만 했단다. 평생을 그러고 살았으니 가슴 속이 어떻게 됐겠는가. 어머니들은 외할아버지 이관술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얘기를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딸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TV 드라마에 나왔어요.”
1971년 무렵이었다. 옥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집에 TV가 없어서 심심하면 이웃집에 TV를 보러 가곤 했는데, 어느 날 TV에서 외할아버지가 나오는 드라마를 방영했다고 한다. 그때는 방송사들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반공 드라마를 제작했다. 특히 <특별수사본부>나 <113 수사본부>, <추적> 같은 대공 수사물이 매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속 외할아버지는 극악무도한 위조지폐범으로 그려졌다. 죄를 짓고 여기저기 숨어 다니다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악인들 중 수괴로 묘사됐다. 옥희는 그걸 본 후 사태의 모든 전말을 납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무런 말도 못 했구나’ 하고.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도 입을 다물었다. 누구에게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경희도 드라마를 봤다. 그녀는 그때 막 결혼을 했을 때여서 시어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봤다. 그녀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모른척하고 화면만 쳐다봤다고 한다.
결국 아무도 외할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경희와 옥희 두 사촌 자매가 외할아버지의 진면목을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외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내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한 항일혁명가였으며,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이 미군정과 공안당국의 조작이었다는 사실까지. 오랜 기간 반공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던 한 애국지사의 명예는 더디게나마 회복의 도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는 법. ‘폭풍이 지나간 들에도 꽃은 피고 지진이 지나간 땅에도 샘은 솟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나긴 암흑의 시대를 넘어 왜곡과 편견으로 일그러졌던 위대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다섯 손가락에 꼽혔던 민족지도자
해방 후 이관술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에서 중앙검열위원 및 총무부장・재정부장 등을 맡으며 사실상 박헌영에 이어 조선공산당의 2인자가 되었다. 1945년 10월 중도 계열의 ‘선구회’라는 단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로 추천하는 인물에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는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촉망받는 정치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미군정은 이른바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발표해 핵심 피의자로 이관술을 지목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것으로 그는 민족의 지도자에서 하루아침에 나라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위조지폐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즉각 피신했지만, 그해 7월 경찰에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서에 갇혔고, 그 이듬해인 1947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후 가족들은 이관술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6‧25 전쟁이 터졌으므로 전쟁 와중에 운 좋게 풀려나 북으로 갔거나 전장에 휘말려 어딘가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손녀들은 외할아버지 이관술의 생사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외할아버지의 동덕여고보 제자인 손응교가 알려준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외할아버지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이승만 정권의 좌익 수감자에 대한 조직적 처형으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관술이 1950년 7월 3일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집단 살해된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남겨진 가족들
외할아버지 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1948년 무렵 경희의 어머니 이정환(이관술의 맏딸)은 중매로 면 서기로 일하고 있던 박동철과 결혼했다. 19살 되던 해였다.
그런데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찰과 관에서 박동철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종용했다.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가입을 강요하는 데다가 가입하면 이관술의 형량도 감형되고 풀려날 수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자, 그는 예비검속으로 울산형무소에 갇히고 말았다.
경희를 임신해 만삭이었던 이정환은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왕복 40리 길을 걸어 면회를 다녔다. 박동철은 만삭의 아내가 안타까워 오지 말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 다시 가보니 형무소는 텅 비어 있었다. 어디에도 박동철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경희의 어머니 이정환은 남편이 울산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후 여자들만 남은 본가로 돌아와 막내 이경환과 함께 살았다. 경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이경환은 조카 경희을 애지중지했다.
이경환은 경희가 국민학교 다니던 1958년 무렵 결혼했다.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왔지만, 이경환은 가풍이 있는 가문 출신이지만 고학력이 아닌 사람을 골랐다. 너무 지식이 많으면 외할아버지처럼 되어 버릴까 봐 일부러 배운 사람은 피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경환은 친정집에서 멀지 않은 양동마을 손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친정집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경환은 결혼 후에도 친정집을 오가며 살았다. 1960년 이경환의 맏딸 옥희가 태어났을 때 혼자서 외롭게 컸던 경희는 동생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애기가 있을까 하며 물고 빨고, 학교가 다 끝나면 달려가 업어주고 놀아주고 했단다. 이것이 10살 터울의 사촌 자매가 가운데 형제들도 없이 친자매처럼 자라게 된 이유였다.
외손녀들의 삶
6‧25 전쟁 직후에는 경찰들의 감시가 극심했다. 경희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경찰들은 집에 아무도 없어도 마음대로 들어와서 오만 군데를 다 뒤지고 다녔다. 그들은 신발도 벗지 않고 대청에 올라와 집안을 어지럽혔다. 경희는 어려서 경찰들이 왜 왔는지 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섭기만 했다. 어머니는 “미친놈들이 심심하니까 또 왔는 갑다”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경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경찰들이 외할아버지 때문에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단다.
옥희는 나이 차가 있어서 다행히 경희가 겪어야 했던 일은 거의 피할 수 있었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2010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5년 대법원은 외할아버지가 불법적인 국가 폭력의 희생자임을 인정했다. 2015년에는 최초로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이 미군정에 의해 날조되었음을 입증하는 학술 논문이 나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임성욱 선생의 박사학위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였다. 임성욱 박사는 직접 논문을 들고 울산까지 찾아와 어머니 이경환에게 큰절을 했다. 그동안의 설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고마운 일이었다.
2019년 4월 울산 지역 활동가와 연구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드디어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유족들의 도움도 컸지만, 외할아버지 이관술을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성심성의껏 노력해 준 덕분이었다. (…) 12월에는 밭에 묻었던 ‘학암 이관술 유적비’를 생가 부근에 다시 세웠다.
획기적인 전기는 2023년 유족들이 제기한 정판사위조지폐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였다. (…) 유족들을 비롯한 각계의 노력은 재심 결정으로 이어졌으며, 무기징역 선고 79년 만인 2025년 12월 15일 경찰의 무죄 구형, 22일 재판부의 무죄 선고라는 가슴 벅찬 결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관술의 명예 회복은 이제 첫 단추를 꿴 데 지나지 않는다.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기념관 건립 등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희와 경희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꿈만 같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외할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기왕에 시작된 일인 만큼 옥희와 경희는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 볼 생각이다. 외할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는 일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좀 더 넓게는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매는 이를 위해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한발 한발 꾸준히 나아가리라 스스로 격려하고 다짐해 본다.
3. 일상을 스쳐 간 의식주가 모두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 김상덕(金尙德) 지사의 아들 김정륙
돌아보면 참으로 힘겨운 시절이었다. 제대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고, 가족의 건강을 챙기기도 힘들었으니, 하지만 정륙은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신의 삶까지 옥죄어 왔지만 결코 아버지를 탓하지 않았다.
궁금해한 적은 있었다. ‘독립운동이 뭐라고 그렇게 가족까지 버려두고 전념하셨을까?’라고. 정륙은 아버지 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자료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민족의 ‘독립’이 어떤 의미였고, 독립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아스러운 일은 나이가 들수록 고난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는 점이다. 양쯔강 남안에 있었던 집과 함께 뛰어놀던 아이들, 덥고 습한 날씨, 주로 먹던 음식들, 조선민족혁명당의 어른들과 조선의용대의 대원들, 그리고 나의 가족, 거기에는 어릴 때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엔 너무도 가슴 아픈 고통스러운 일상도 함께 있었다. 그토록 힘겨웠던 나날이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세월의 힘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선생님, 먼저 태어난 곳이 어딘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부터 말씀해 주시죠.”
면담자의 질문이 시작되자 정면을 주시하던 정륙의 시선은 어느덧 시공을 넘어 80여 년 전 남중국의 이역, 그때 그곳으로 옮겨간다.
27년간 독립운동을 지속한 아버지 김상덕
정륙의 아버지 김상덕(金尙德, 1891~?)은 1891년 12월 10일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저전동(현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재전리)에서 김성옥, 김경익 부부의 5남 1여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19세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22세 되던 해인 1912년 뒤늦게 고령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 1915년에 경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졸업과 함께 학교 후원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한 그는 거기에서 운명과 같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 2‧8독립선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상덕은 11명으로 구성된 실행위원 중 한 명으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2월에야 풀려났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27년간 계속된 그의 기나긴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상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활동이 1921년 워싱턴 회의 이후 구성원들의 분열과 갈등으로 지지부진해지자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혁명대표자대회에 참가하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해 개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김상덕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일원인 윤자영과 함께 활동하면서 상해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김상덕은 김동삼과 함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단체였던 한족노동당 조직에도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민족유일당의 결성과 활동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시사연구회에 참가해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고,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김상덕은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독립당에 참여해 그 산하 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약했다.
이후 김상덕은 난징에 머무르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 김상덕은 십수 년 만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정부 내각에도 참여해 선전부 선전위원회 위원, 문화부 차장, 문화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해방 전국에서 김상덕은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렸다. 그는 대체로 김규식의 노선을 따르면서 김원봉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또한 그는 이승만과 깊은 관련을 가졌던 민족통일총본부와 한국민족대표외교후원회 등에 참여해 이전과 다른 면모도 보여주었다.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동참하는 모순된 모습이었다.
1947년 2월 김상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입법의원으로서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헌법 제정 제안에 참여하는 한편,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를 요청하는 동의안 제출에도 가담했다. 김규식이나 김구의 노선과는 달리 명확히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것이다.
김상덕은 1948년 5‧10선거를 통해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민족통일총본부 소속으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헌법 제정 과정에 기초의원으로 참여하여 활발한 의정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0월 23일 그는 친일파 숙청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되짚어 보면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27년에 이르는 독립운동 경력과 해방 후 정치 활동을 고려할 때, 반민특위를 주도했던 소장파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한민당이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의원들까지 모두가 용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김상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들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의 공세가 본격화하면서 아버지는 위원장직을 사임했으며 반민특위도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당시 아버지의 수행비서를 했던 분의 말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5월 말에 은밀히 찾아와 아버지를 회유했다고 한다. 장관 자리를 줄 테니 반민특위 활동을 유야무야하라는 요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승만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고, 그로 인해 결국 물리적 탄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일상의 의식주가 모두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김상덕은 반민특위 위원장 사임 이후 국회의원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다가, 1950년 5월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번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정권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선거 비용의 융통까지 철저히 막은 탓이다. 그는 야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가로운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6‧ 25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정륙의 가족은 한강 다리가 폭파되면서 발이 묶여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반민특위 관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직에 있었던 몸이므로 인민군을 피해 친척 집에 몸을 숨겼다. 얼마 후 인공(人共)의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관사의 가구와 물품을 차압했다. 그런데 수색 도중 집안에서 권총이 발견되어 사달이 났다. 반민특위 조사관 심윤이 엉성하게 숨겨 놓은 권총이었다.
이로 인해 정륙과 정륙의 집에서 하숙하던 고려대 학생 천금준 형이 내무서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조사 과정에서 다행히 친일파 숙청을 위해 일했던 반민특위 위원장의 가족이라는 점이 밝혀져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륙은 풀려난 후 고열로 앓아누웠다. 처음 겪는 연행과 조사로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정륙이 앓아눕자 걱정이 된 가족들은 은신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소식을 알렸다. 아들이 걱정이 되었던 아버지는 다음날 불쑥 집으로 찾아와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 정륙은 괜찮았다고 말하며 오히려 아버지가 염려되어 얼른 가시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버지가 대문을 나서는데 벌써 지프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정치보위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어디론가 데리고 사라졌다. 그것이 정륙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소위 ‘모시기 작전’에 걸린 것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남한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끌고 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벌인 작업이 이른바 ‘모시기 작전’이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정륙의 가족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4후퇴 때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모든 살림이 털리고 집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가족이 함께 살아가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가족은 살길을 찾기 위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나중에 누구든지 잘 되면 서로 연락해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정륙은 경부선 화물열차를 공짜로 얻어 타고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다. 연고는 없지만 임시 수도이니 무엇이라도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너무도 순진한 것이었다. 부산은 이미 피난민이 넘쳐나 단순노동 일거리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입고 간 옷가지와 물건을 팔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던 정륙은 결국 부산 정착을 포기하고 합천군 청덕면에 있던 외갓집에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고령에 있는 친가는 가족이 너무 많아 차마 찾아갈 수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며칠에 걸쳐 노숙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은 서럽게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심 좋은 할머니 한 분을 만나 부뚜막에서 추위를 피하며 보리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부뚜막에서 웅크리고 자던 그날은 유난히 아버지의 생각이 많이 났던 날이었다. 일상에서 누리던 의식주가 모두 아버지가 베푼 은혜였구나, 하고 아버지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1. 끝내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 장재성 지사의 아들 장상백
2. 확실히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대비해 나가면 좋겠어요
- 이관술 지사의 외손녀 박경희와 손옥희
3. 일상을 스쳐 간 의식주가 모두 아버지의 은혜였구나
- 김상덕 지사의 아들 김정륙
4. 한 걸음씩이라도 진보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이효정 지사의 아들 박진수
5. 양심에 가책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 김창숙 지사의 손녀, 김찬기 지사의 딸 김주
6. 일제하 공산주의운동은 그 자체가 독립운동이었습니다
- 권오설 지사의 양자 권대용
7. 아버지는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였습니다
- 최능진 지사의 아들 최만립
8.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 류자명 지사의 손자 류인호
9. 여러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버지를 기리는 일이었습니다
- 차리석 지사의 아들 차영조
10. 영정사진 들고 아버지가 간 길을 걷고 싶습니다
- 김진성 지사의 아들 김세걸
11. 후손마저 돌아보지 않는다면 누가 해 주겠어요
- 원심창 지사의 양자 원형재
◎ 조한성・권시용, ≪결국, 뿌리로 산다≫, 민족문제연구소, 2026
저자(글) 조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료 읽는 법과 연구사 정리하는 법 등을 훈련하며 역사학의 정수를 배웠다. 반독재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을 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이 일으킨 유도회사건儒道會事件을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교와 수원과학대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참여했다. 2006년부터 3년 반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일제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반대편에 섰던 지식인들의 활동과 고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진지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물음을 좇아 한?일 양국의 기록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최근까지 발표된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여 한국 근대사를 정리했다. 2014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과 새 조국 건설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던진 7개 비밀결사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대서사, 《한국의 레지스탕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