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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7-06 08:59
  • 조회46
  • [보도자료]
  • 2026-07-06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짧은 글귀 안에 담긴 심오한 뜻. 이 책은 문학적 상상력에 목마른 현대인들을 위한 시집이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작가의 심오한 뜻을 파악하는 재미가 있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 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게 눈 속의 연꽃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꺼내가라

 

2

게 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곱 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를 타는 게

에 앉네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 나 사랑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쉽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 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 에탐부톨 : 결핵 치료에 쓰이는 정식 항결핵제.

** 스트렙토마이신 : 아미노글리코시드(aminoglycoside) 계열의 항생물질.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의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극락강

 

사람들이 시간을 하두하두 흘려서

바닥난 강

모래 밑,

한때 느릿느릿한 남풍과

드높은 새털구름이 얹혀 있던 수면을

기억할 수 없는 길,

그래도 강은 있네

시간이 있으므로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건너는 데 0.3초도 안 걸리는

극락강

며칠 후, 우리가 건널

극채색의 흰 강

멀리 미루나무 근처

소풍 나온 또 다른 세대의 어린이들 보이고

 

그러나 그 아이들을 내가 보았는지

기억에 없네

내가 그 강을 건넜는지도

기억이 안 나네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希望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湖南義手足館

 

점심시간에 몰려나와 개고기를 먹는

뻘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가면서

저 뜨거운 佛性을 우그작우그작 먹어치우는

빤들빤들한 健康體들이 내 눈에는, 허깨비 같다

허깨비 같다, 훅 불면 바슬바슬

진흙 먼지 흩어지는

 

몸의 일부들이

全南大學 大學病院 로터리 한켠

湖南義手足館 유리 진열대에 놓여 있다

볼트로 관절을 연결한 플라스틱 다리들, 팔뚝들

그리고 자잘한 손금이며 퍼런 실핏줄 하며

분홍빛 손톱의 흰 초승달까지

영락없이 살아 있는사람 손 같은 살색 고무손,

前生代 얼음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기, 아직도 구멍 흔적이 남은 대학병원 붉은 벽돌 앞

히말라야소나무를 가리킨다, 가리키는 듯하다

링거병을 꽂은 채 환자가 소나무 아래

휠체어에 앉아 있다

, 아픈 사람만이, 實感 난다, 사람 같다

 

비로소 사람에 가까워지려 저렇게 끙끙거리는

푸른 세로줄 무늬 환자복이 휠체어를 밀며

히말라야으로 가고 있는 사이

錦南路에 대학생들이 나타났는지

十方으로부터 길이 방사선으로 들어오는 로터리,

, 막혀 있다

목에 쇠가시가 걸린 듯

무쇠 말들이 車線에서 크락션 방귀, 빵빵거리면서

時間을 뀐다

하루하루 삶이 그저 日常이겠지만

, 바로 그것이 時間性이기 때문에

 

축 늘어진 사람을 얻고 누군가 응급실 쪽으로 뛰어가고

湖南義手足館 건너편 보신탕집 앞

르망, 스텔라 들이 금덩어리 개새끼처럼

땡볕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다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사, 2002(재판 13)

 

황지우 현대문학가/시인

195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문학과지성에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등이 있다.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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