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향연

책보세

  • 인문향연
  • 책보세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다시 읽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이성현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7-03 14:44
  • 조회63
  • [보도자료]
  • 2026-07-03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다시 읽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이성현

 

 

겸재는 단지 걸출한 순수 문예인이었을 뿐일까?

조선시대 대표적 문예인을 둘러싼 기존 미술사학 평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 제3!

 

 

글을 시작하며

 

언제부터인가 학계에서도 진경문화(眞景文化)’, ‘진경시대(眞景時代)’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도대체 진경(眞景)’이 무슨 의미일까?

 

진경(眞景)’이란 말은 오늘날 미술사가들이 조선 후기 문예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다.

조선 후기 문예계의 영수격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흔히 쓰던 참 진()’지경 경()’ 자를 쓰는 진경(眞境)’과 달리 참 진()’빛 경()’ 자를 합한 진경(眞景)’이라는 말을 퍼뜨렸던 것인데오늘날과 달리 조선 후기 문예인들에게 진경(眞景)’이란 용어는 생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흔히 풍경 경()’으로 읽는 ()’ 자가 당시에는 주로 빛 경()’으로 읽었던 탓에 당시 사람이 진경(眞景)’이라 쓰인 글귀를 읽게 되었다면 십중팔구 참된 빛이란 의미를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암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였으니, 당시 글줄께나 읽은 선비들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뭐지?’ 하였을 것이다.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를 뜻하는 진경(眞境)’이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계처럼 빼어난 절경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참된 빛의 산수화(山水畵)’라 하였으니 쉽게 개념이 잡히지 않는 신조어였던 셈이다. 오늘날 이 땅의 많은 미술사가들은 대체로 진경(眞景)’진경(眞境)’을 같은 뜻으로 읽고 있는 탓에 진경(眞景) 개념을 왜 세워야 하는지 그 필요성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빛 경()’은 주변 사물을 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빛 광()’과 달리 논어(論語)위정(爲政)의 북극성의 별빛과 같은 것으로, 세상의 구심점이 되는 빚을 뜻한다.

일찍이 공자께선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별이 도는 모습을 덕치(德治)에 비유하셨고, 시경(詩經)()에 나오는 경복(慶福)이라는 말을 빌려 조선의 법궁(法宮)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였음을 표암이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테니, 이는 그가 하늘 진()’의 짝으로 빛 경()’ 자를 고른 이유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표암이 골라낸 진경(眞景)’이라는 말은 동아시아 정교론(正敎論)과 연결된 정치적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의 법리를 헤아리고 따르는 일련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산수화는 원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 자연경을 빌려 표현해 내었던 탓에 산수화라는 예술 형식이 생겨난 것일 뿐, 원래 자연경이나 자연광을 담아내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과 물[]의 합성어 산수(山水)상간하감(上艮下坎)’ 다시 말해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 ) 위에 있고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 )가 아래 위치한 몽괘(蒙卦, )의 괘상을 문자로 표기하여 괘명과 함께 변경한 것으로 주역(周易)산수몽(山水蒙)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주역산수몽은 통상 교육의 괘로 불리고, 과거 동아시아 정치가들은 통치 행위를 일컬어 흔히 가르친다[敎化]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주역산수몽이 교육의 괘라기보다는 정교(政敎)의 괘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역산수몽은 문명국 주()나라가 주변 야만 부족을 어떻게 교화(문명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이는 훗날 천자 중심의 중국식 봉건제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산수화가 발생되기 적어도 1,500년 전부터 산수 개념은 주역을 통해 널리 확산된 정치적 용어였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역산수몽을 통해 산수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주역산수몽뿐만 아니라 최초의 산수화론서(山水畵論書)를 남긴 종병(宗炳)* 또한 화산수서(畵山水序)첫머리에, 산수화는 성인의 도()를 바탕으로 한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생각을 담아낸 것이라 분명히 명시해 두었건만 산수(山水)와 산수화(山水畵)를 구별하지 않고, ‘유설할 유()’로 읽어야 할 부분을 놀 유()’로 읽어 명산 유람을 권하는 것이 되어 버린 탓에 산수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물론 산수화의 역사가 모두 정치적 비유의 일환으로 그려졌던 것도 아니고, 산수화의 근원을 따져 가며 동아시아인의 자연관과 함께한 산수화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산수화를 풍경의 범주에 묶어 두는 한 아무리 산수화의 차별성을 부각시켜도 이는 그저 독특한 풍경화일 뿐인데이것이 서양의 종교화를 인물화라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 종병(宗炳, 375~443)은 중국 남조 송의 화가이자 문인으로, 산수를 도의 형상으로 보고 그림을 통해 정신적 관조를 이루려는 사상을 펼쳤다. 그의 화산수서는 산수화가 실제 자연을 대신해 마음을 맑게 하고 도를 보게 한다는 와유(臥遊) 사상의 핵심 근거로 평가된다. 종병의 산수화론은 이후 중국 산수화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 형식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인용자

 

조선 회화사에 겸재 정선만큼 큰 족적을 남긴 화가도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조선 후기 문예의 특성을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규정하고, 이를 진경문화’ ‘진경시대로 확산시키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 문화를 노론이 선도하였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겸재가 조선 회화사에 등장한 것은 대표적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면서였고, 이때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申卯年楓嶽圖帖)은 그의 금강산 그림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겸재는 평생토록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전폭적 후원 아래 화업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서 진경(眞景)’이란 말을 사용하여 조선 후기 문화를 진경문화(眞景文化)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 부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가들 스스로 진경문화는 조선중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 겸재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냉정히 생각해 볼 일이다.

왜냐하면 조선중화사상은 위기에 빠진 조선 성리학을 지켜내기 위하여 마련한 자구책으로,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명분론과 소위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우리 식으로 살자는 고립주의에서 파생된 것인데이를 통해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세력이 노론이었고, 이를 통해 노론의 중심으로 부상한 자들이 장동 김씨들이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의 가장 큰 후원자가 장동 김씨들이었고,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와 부침에 따라 겸재의 이력과 화법의 변화가 함께하였음은 수많은 자료들이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겸재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 그리고 장동 김씨 가문의 삼연 김창흡이 함께한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예인들끼리의 친교일 뿐 정치적 만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대과(大科)는커녕 초시(初試)조차 치른 적 없음에도 당상관(堂上官)까지 오른 겸재의 감투가 너무 무겁고, 예술가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니, 이를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인 양 쉬쉬할 일은 더욱 아니다.

 

겸재 정선이 아무리 빼어난 화가라 하여도 조선 후기 회화의 특성을 그 작품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아니,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조선 후기 문화와 시대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미술사가들의 지나친 욕심이거나 오만이라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조선 후기 화가들이 모두 겸재와 같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도 아니고, 조선 후기 문예계에 불어닥친 새로운 흐름이 회화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부 진경(眞境)과 진경(眞景) 그리고 산수화(山水畵)

2부 표암(豹菴) ‘진경(眞景)’을 말하다

3인왕제색(仁王齊色)도와 사도세자의 비극

 

 

4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소악후월

 

학계에서 겸재가 양천현령직을 제수받고 떠나게 되었을 때 평생지기 사천과 겸재는 소위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약조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사천 이병연이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 김창흡에게 겸재를 소개한 아래 겸재의 작품 세계에 사천의 입김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화가로서 겸재의 이력은 신묘년풍악도첩이전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천 이병연의 소개로 삼연 김창흡의 금강산 여행에 동행할 수 있었기에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겸재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이미 이때부터 겸재의 그림은 사천의 시와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겠다.

사천은 양천 고을로 떠나게 된 겸재에게 자네와 내가 말한 것은 왕망천이 되고자 함이건만[爾我合爲王輞川]’이라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王維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자인 마힐摩詰은 유마경維摩經에서 따왔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는 종남산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집에 은거하며 불경을 읽고 시작詩作에 몰두했다.-인용자

 

이는 자신과 겸재가 함께해온 것은 단순한 우정 때문이 아니라, 당나라의 대시인이자 남종화의 비조(鼻祖) 왕유(王維)처럼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시 가운데서 그림을 취하고 그림 속에서 시를 취함)’의 경지를 이루기 위한 분명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이는 역으로 두 사람의 시의(詩意)와 화의(畵意)가 상보적 관계 속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왕유의 방식[詩意一致]을 취하고자 하여도 두 사람은 왕유와 달리 한 몸이 아닌 탓에, 시의와 화의를 하나로 묶어낼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모으든, 한 사람이 주도하여 이끌어가든 왕유의 방식을 취하고자 하면 결국 상대의 작품 세계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겸재의 작품들은 많은 부분 사천의 의도에 따라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림이든 시이든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생각이나 뜻에 따라 얼개를 구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단순히 실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함은 비유체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모든 비유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약속된 어법이 필요한데동아시아 문예의 비유체계는 시경(詩經)이하 널리 회자되던 시()에 기반하고 있으니, 당연히 겸재보다 이에 능한 사천 이병연이 기본 얼개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대하여 단순히 실제 풍경을 재현(再現)한 것이 아니라 실경에서 느낀 감흥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자 변형을 가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겸재의 그림들이 사천과 무관한 독자적 예술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란 전제를 필요로 하지만, 문제는 적어도 서른다섯 이후 겸재의 화업(畵業)에서 사천 이병연이란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요인,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지향한 예술적 목표 혹은 함께 추구하였던 무언가에 대하여 합리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와 함께하며 망천장(輞川匠)에 머물던 왕유(王維)의 말년 삶과 예술세계를 꿈꿔왔음을 고백하였다. 이는 사천과 겸재의 작품 세계가 왕유의 산수시(山水詩)와 남종문인화를 추구하였다는 뜻이자, 역으로 왕유의 작품 세계를 통해 겸재와 사천의 작품에 내포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잠시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과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와 함께 중국 서정시의 3대 시인으로 불리는 시불(詩佛) 왕유(王維, 699?~759)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학계에선 대체로 왕유의 자연시(自然詩)는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전원시(田園詩)와 사영운(謝靈運, 385~433)의 산수시(山水詩)를 회화적 기법으로 완성시킨 것으로, 자연의 한 점경(點景, 풍경화에 다른 사물을 그려 넣어서 정취를 더함-인용자)으로 녹아든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다. 이런 까닭에 일부 학자들은 왕유는 두보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 시에는 민중의 고통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말과 함께 심지어 그는 육조(六朝)의 정통을 이은 궁정 시인으로 상류 계층의 쾌락을 노래했다라고도 한다. 그러나 왕유의 시 한 편만 음미해봐도 그의 자연시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운 혹은 자연 속에 은거한 자의 행복을 노래하고자 한 것으로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空山不見人 공산불견인

但聞人語響 단문인어양

返景入深林 반경입심림

復照靑苔上 복조청태상 (왕유, 녹채(鹿柴) 전문)

 

텅 빈 산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단지 소문으로 들어온 사람의 말씀이 들려오네.

되돌린 빛을 깊은 숲속으로 들임은

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추고자 함이라네.

 

시각적 혹은 회화적 견지에서 위 시를 읽으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없을 만큼 울창한 숲속에 햇빛이 스며들며 푸른 이끼를 비추는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유일 뿐 왕유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는 등 당나라가 처한 어려움에도 일을 해결해야 할 조정엔 사람이 보이지 않고[空山不見人] 현실적 해법 대신 단지 성인의 말씀으로 알려진 것을 떠드는 소리뿐인데[但聞人語響], 이는 과거의 빛을 되돌려 깊은 숲에 들여[返景入深林] 또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추고자 함이지만[復照靑苔上]

 

이것이 무슨 해결책이 될 수 있겠냐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대가 바뀌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다르건만 현실을 직시하며 해법을 찾으려 들지 않고, 본의(本意)를 확인할 수도 없는 잊혀진 성인의 말씀을 읽겠다며 빛을 비춰봤자 이끼 덮인 비문을 판단할 수도 없으니, 해법은 그냥 엉뚱한 명분으로 쓰이기 십상이란 뜻이다.

숲이 울창하다 함은 대낮에도 어둠컴컴하다는 뜻이니, 왕유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어두운 숲속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며 푸른 이끼를 비추는 인상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전통 동양화, 특히 남종화의 소재로 다루기엔 적합하지 않은 탓에 실제 작품으로 구현된 예가 없다.*

* 전통 동양화는 서양화와 달리 빛이 변하는 양태를 통해 사물을 그려내지 않는다.

 

한마디로 왕유의 시가 단순하게 단순히 자연경을 읊은 것이라면, 소동파의 시중유화(詩中有畵, 시를 통해 그림을 취하고)라는 말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천 이병연이 겸재와 함께한 것은 왕망천(王輞川)을 이루기 위함이라 하였던 고백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를, 관직에서 물러나 망천(輞川)에 은거한 채 정치적 메시지를 시와 그림으로 담아내었던 왕유처럼 사천과 겸재의 문예활동도 이를 추구하고자 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겸재가 양천현령에 부임하게 된 일은 두 사람, 특히 겸재에게 낭패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천 이병연이 정치적 메시지를 시로 각색해 내고 이를 그림으로 구상한 후 그림과 시를 비교해 가며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정교하게 다듬어내려면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데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장동 김씨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겸재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을 판이었다.

왜냐하면 김창집의 신원 회복과 함께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가 빨라지기 시작하였으니, 그만큼 비밀스럽게 노론계 인사들을 규합할 문예 작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될 텐데이에 겸재가 부흥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른 화가를 물색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 탓에 겸재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30년을 손발을 맞춰온 사천은 풀이 죽은 겸재에게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을 제시하며 등을 토닥였던 것인데문제는 시화환상간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대표적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려면 두 사람이 예민한 정치적 사안에 대하여 충분한 협의가 필요한데이를 서신으로 해결하려면 의사소통도 문제지만, 만에 하나 서신 교류에 문제라도 생기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대다수 작품, 특히 사천의 시와 함께 장첩된 겸재의 그림들은 그가 양천현령직을 마치고 인왕산 기슭에 돌아와 제작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은 겸재가 한양으로 돌아와 왜 뒤늦게 경교명승첩을 제작하게 되었는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동 김씨들의 예상과 달리 영조께서 김창집의 신원은 회복시켜 주었지만,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던 탓에 생각과 달리 쉽게 조정을 장악하지 못한 채 소론과의 줄다리기가 길어지고 있었고, 여기에 어린 왕세자(사도세자)의 대리청정과 함께 균역법(均役法)을 들고 나온 소론의 공세가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겸재가 양천 고을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뒤늦게 격렬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표적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들은 다시 시작된 정치적 위기에 노론계 인사들을 규합할 무언가가 필요하던 차에 겸재가 양청 고을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노론의 입장에서 재구성해낸 경교명승첩만큼 생생하고 실감 나는 선전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천현령직을 마치고 인왕산 기숙으로 돌아온 겸재는 2년 후, 36년 전 36살 때 그렸던 신묘년풍악도첩을 바탕으로 해악전신첩을 다시 엮어내었고(72),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던 해에는 사공표성시화첩을 제작하였으며(74), 일흔여섯이 되는 해에는 인왕제색도를 그렸는데이 작품들은 모두 노론 강경파의 노골적 정치 논리를 감추고 있다. 필자는 경교명승첩도 이 무렵 장동 김씨들의 정치 행보에 활용하고자 화첩으로 엮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경교명승첩에 수록되어 있는 소악후월(小岳候月)이란 작품을 감상하며 겸재의 작품 중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들어보자.

 

소악후월이라는 제목은 달 뜨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중략)

소악루는 동북 현감을 지낸 이유(李橒, 1675~1757)가 영조 13년 현감 자리를 자진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해부터 짓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성리학 연구와 시와 술과 풍류를 즐긴 참된 선비였다. 따라서 그가 사귀던 인사들은 당대 최고 성리학자이거나 최고의 풍류 문사였다. 그러나 강산 주인으로 분리된 이유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와 친분을 맺지 않을 리 없다.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해 가는 것은 이런 친분 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소악루를 짓고 나서 어느 때 이유가 사천과 겸재를 초대하였고, 이때 겸재와 사천은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그 일대를 시와 그림으로 사생하기로 작정했던 듯하다. 이 사실이 문화군주인 영조의 귀에 들어가서 영조는 그림 스승인 겸재를 65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천현령으로 임명 발령해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경교명승첩을 비롯한 한강 일대의 진경산수화들이다. 문화 절정기를 이끌어가는 최고 통치자의 문화 의식이 어떻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게 하느냐 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중략) 소악루 본체 등 큰 기와집들은 숲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 아래 초가집은 그대로 달빛 어린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원로 미술사가 최완수 선생의 소악후월에 대한 해설이다.

필자가 최 선생의 글을 길게 인용하게 된 이유는 겸재의 작품을 아끼는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상식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논리를 통해 억지로 명작을 만들어낸들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고, 그것이 당시 문화를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냉정히 생각해 볼 때도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영조께서 아무리 문화군주였다손 쳐도 양천 고을 목민관 자리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한강 유역의 명소나 찾아다니며 그림이나 그리라고 고을 수령 직을 내렸다는 것인가? 영조께서 겸재의 작품 활동을 돕고자 하셨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많건만, 많고 많은 방법 중에 하필 목민관으로 임명하는 것이라니영조께서 양천 고을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목민관 자리는 녹봉이나 타 먹으며 편히 쉬는 한직으로 여겼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목민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자들 때문에 백성들의 한숨 소리 깊어지고, 이를 목도한 다산 선생께선 목민심서를 저술하였건만,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리 문화가 중요하다 해도 국왕다운 국왕이라면 백성들의 삶을 먼저 배려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이를 문화를 중시하는 최고 통치자의 귀감으로 치켜세우다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라 하였다던 마리 앙투아네트 망언과 무엇이 다른지 자문해 보시길 바란다.

 

정선, 소악후월

 

최 선생은 소악후월(小岳候月)’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림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겸재가 그린 소악후월은 이미 둥근달이 떠 있다. 다시 말해 남산 높이만큼 떠오른 둥근 달을 그려넣고 소악로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小岳候月]’는 제목을 병기해 두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최 선생은 후월(候月)’()’기다릴 후()’로 읽었으나, 겸재가 소악후월에서 제()하였던 것은 소악루에서 달이 변하는 조짐을 살피며 향후 일어난 일을 가늠해봄이란 의미로 해석됨이 마땅할 것이다.*

* ‘기다릴 후()’징조 후()’, ‘조짐 후()’로도 읽는다. 이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병사를 척후병(斥候兵)이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앞서 필자는 겸재의 종해청조(宗海廳潮)를 설명하며, ‘민물[()]에 한강물이 역류하는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결국엔 한강물이 바다로 흐르게 흐르기 마련이듯 노론의 정치 이념을 통해 조선의 질서가 확립될 것임을 비유한 작품이라 풀이한 바 있다.

그런데그 밀물이 가장 높아지는 시기는 보름달이 뜰 무렵이니, 겸재가 소악후월에 보름달을 그려 넣은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한마디로 한강을 역류하는 밀물의 힘이 가장 강할 때이자, 노론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소론의 기세가 정점에 이른 시기라는 뜻이다. 이는 역으로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은 노론의 힘이 위축된 시기였다는 뜻이다.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고 있던 겸재 또한 소론의 눈치를 살피며 낯선 고을에서 홀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한 탓에 겸재는 정국의 흐름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을 테고, 정국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조짐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희망을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하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도 보름달이 떠오르며 도무지 기세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겸재가 소악후월을 그리게 된 것을, 꺾이지 않는 소론의 기세에 하늘을 원망하며 늘그막에 홀로 정적들의 눈치나 살피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담아낸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그러나 소악후월을 자세히 살펴보면 겸재는 오늘도 보름달이 떠올랐지만, 보름달이 떠오른 것도 모르고 과거 보름들이 떠올랐을 때의 기억 속에 빠져 있는 자들이 많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대학(大學)에 이르길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라 한다.

처음 접하는 사물도 근본과 말단의 관계를 살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사물과 달리 일[]은 끝난 연휴에야 원인과 결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까닭에 결과[]를 통해 원인[]을 따져 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까닭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의 결말을 예측하려면 이미 지난 과거의 경험을 통해 판단 근거를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현재 진행 중인 일에서 어떤 조짐을 읽어내고 과거의 사례를 참고하여 발 빠르게 대처하여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어렵건만, 보름달이 떠올라도(유리한 상황에 정점에 도달함) 이를 모르고 지나치면 일이 모두 끝난 후에야 그때가 기회였구나땅을 치며 후회할 일만 남지 않겠는가?

최완수 선생은,

 

숲속 우거진 성산 등성이 아래 소악루 건물이 큼직하게 지어져 있고(중략) 소악루 본체 등 큰 기와집들은 숲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 아래 초가집은 그대로 달빛 어린 숲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라며 소악루와 주변 경관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겸재의 소악후월엔 소악루가 없다. 최 선생이 소악루라 열심히 소개한 큼지막한 건물은 소악루가 아니라 양천향교를 그린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건물의 구조도 누각 형식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인접한 초가들과 버드나무 그리고 정박해 둔 배의 돛대 등을 참고해 볼 때, 이 건물이 소악루라면 소악루가 민가 근처 강가에 인접한 장소에 지어졌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악루는 동정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진 중국의 악양루에 빗대어 소악루라 하였으니, 당연히 산등성이에 위치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결국 겸재가 산등성이 위에 위치한 소악루에서 양천향교를 내려다보며 그렸다는 뜻이지 소악루를 그린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겸재가 소악루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소악후월이라 했던 것이다.

 

아직도 겸재의 소악후월에서 소악루의 흔적을 찾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겸재가 그린 소악루라는 작품과 소악후월을 비교해 보시길 바란다.

 

정선, 소악루

 

겸재는 분명 소악루라 제()하였지만 그림 속 장면은 양천관아와 주변 경관을 그렸을 뿐 소악루로 여길 만한 누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겸재가 그린 소악루청해청조등을 살펴보면 양천관아가 한강을 바라보며 궁산을 등지고 있는 모습으로, 궁산이 화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소악후월은 궁산이 화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 소악후월은 소악루에서 양천관아 방향을 내려다보는 축 선상에 위치한 대규모 건축물을 그렸다는 뜻이 되는데그곳에는 아직도 양천향교가 서 있다. 그렇다면 겸재는 왜 소악루에서 보름달을 살펴보며 향후 일어날 일의 조짐을 살펴봄[小岳候月]’이란 의미의 화제와 함께 양천향교의 모습을 그려 넣었던 것일까? 한마디로 양천 고을 유생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기록해 둔 일종의 정탐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겸재는 양천 고을 유생들이 보름달이 떠올라 민물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과거의 아픔 기억에 머물러 있는 탓인지 감히 배를 띄우려 들지 않고 있으니, 걱정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 한다.

겸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분은 소악후월에 그려진 보름달이 어느 방향에서 또 오르고 있는지 확인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남산 우측 광나루 방향이다. 그런데양천향교 앞 강변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녹음이 짙어졌으니 대략 늦봄에서 초여름 경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 양천현에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려면 광나루 방향이 아니라 백악산 좌측을 살펴봐야 한다.

 

무슨 말인가? 양천향교의 유생들이 정치 환경이 변한 것을 모르고 과거지사(過去之事)를 통해 판단하고 있는 탓에 보름달이 떠올라 한강의 수위가 최고조에 달하는 물때가 찾아왔지만(유리한 정치 환경), 수많은 배들을 묶어두고 있다 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양천 고을 유생 중에 노론을 위해 영입할 만큼 욕심나는 인재도 없지만, 소론과 함께하며 노론의 위협이 될 존재들도 못 되니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자, 아직 소론의 위세가 도성 밖까지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겸재의 소악후월의 내포된 화의(畵意)를 살펴보았으니, 이쯤에서 사천 이병연의 시 소악후월에는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읽어 보자.

 

巴陵明月出 파릉명월출

先照此欄頭 선조차난두

杜甫無題句 두보무제구

終爲小岳樓 종위소악루

 

파릉에 밝은 달이 떠오르면

먼저 이 난간머리를 비추리.

두보에게 없던 시[詩句]

마치기 위한 소악루라오.

 

사천 이병연은 소악루에 올라 달을 살피며 앞날을 가능해보는 것[小岳候月]은 중국의 파릉(악양의 옛 이름) 지역에 밝은 달이 떠오르면 악양루 난간에 달빛이 제일 먼저 닿듯 양천 고을의 분위기가 변하는 조짐은 소악루에서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사천이 파릉명월출(巴陵明月出) 선조차난두(先照此欄頭)’라 하였던 것은 양천 고을 유생들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소악루라는 뜻이 되는데겸재의 소악후월은 소악루에서 양천향교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소론의 기세가 높아지고 노론 세력이 위축되는 어려운 시기가 도래하자, 혹시라도 양천 지역 유생들이 소론을 지지하며 힘을 보탤까 걱정하며 소악루에 올라 양천향교를 내려다보며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에게 양천 고을 유생들의 동태를 잘 감시하여 두보가 끝내 쓸 수 없었던 시를 양천 고을 소악루에서 쓰는 것으로 좋은 결말을 맺도록 하자고 한다[杜甫無題句 終爲小岳樓].

무슨 말인가? 두보가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며 계속되는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늙어 버린 신세를 한탄하며 지은 시 등악양루(登岳陽樓)의 속편을 양천 고을 소악루에서 마무리하자 한다.

이는 결국 두보는 그토록 바라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등악양루라는 시를 쓴 이듬해 58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지만, 겸재는 양천 고을에서 객사하는 일 없이 인왕산 자락으로 돌아와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하자는 뜻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일을 한시라도 앞당기려면 하늘만 바라보며 두 손을 놓고 있을 일은 아니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양천 고을 유생들의 동향을 살피며 노론에 도움이 될 만한 현장의 정보를 수집하여 전하는 것으로 일조를 할 수밖에 없는데이는 결국 양천 고을 목민관에게 고을 백성들을 잠재된 적으로 간주하고 척후병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주문한 격이라 하겠다.

휘영청 밝은 달과 한강의 봄 정취에 취하고 싶은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 왠지 마음이 불편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그런 분이 계신다면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악양루(岳陽樓)가 그저 풍광만 아름다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것인지 자문해 보시길 바란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애틋함이 없으면 공허해지기 쉽고, 삶과 유리된 예술은 그저 허상일 뿐이다. 그저 절경 타령으로 범벅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보고 있노라면 중국인들이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애송하는 모습이 부럽다.

 

등악양루(登岳陽樓)두보(杜甫)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

老去有孤舟 노거유고주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

 

예부터 동정호()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랐네.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과 남으로 갈라진 탓에

건곤(천하의 질서)은 밤낮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게 되었다네.

친족과 동지를 한뜻으로 묶어줄 수 없어

늙은이는 외로운 배를 취하러 가고 (피난 길에 나서고)

종군하며 관산 북쪽으로 가야 할 (젊은이는)

(악양루) 처마의 기대여 눈물 콧물 흘리는구나.*

 

*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예부터 동정호에 대한 소문은 들었으나 / 악양루에 올랐네. / 오나라와 초나라는 동과 남에서 싸우고 / 천지는 변함없이 동정호에 떠 있네. / 친한 벗에게서 한마디 소식 없고 / 늙어가며 남은 것은 외로운 조각배 신세인데 / 고향 땅 관산 북쪽에는 전란이 그치지 않으니 / 악양루 처마에 기대 목놓아 통곡하네라며 계속되는 전란으로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는 두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내용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시가 그런 내용이라면 吳楚東南坼이란 시구가 쓰이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두보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 의해 봉건제가 군현제로 바뀌게 된 것이 중국이 끝없는 전란에 휩싸이게 된 주원인임을 지적하고자 이 시를 쓴 것이라 여겨진다.

 

 

이성현,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다시 읽는 겸재의 진경산수화-, 들녘, 2020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댓글()

  • 연번

    제목

    파일

    작성자

    작성일

    조회

맨처음이전 5페이지12345다음 5페이지마지막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