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홍경래전≫ 이명선
- [보도자료]
- 2026-06-21
≪홍경래전≫ 이명선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이 책은 홍경래(洪景來, 1771~1812)라는 한 개인의 전기(傳記)가 아니라 몰락 양반 홍경래와 우국지사 우군칙(禹君則, 1776~1812), 지방의 부호 이희저(李禧著, ?~1812), 유생 김창시(金昌始, ?~1812) 등이 공모하여 봉기한, 세도 정권에 대한 농민들의 항거에 관한 기록이다.
홍경래는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의 주모자로서 임신서적(壬申西賊)의 수괴(首魁), 지략과 술수를 갖춘 간웅(奸雄), 백성을 조정의 학정에서 구하려 했던 혁명가 등 다양하고 상반된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소설 ≪홍경래전(洪景來傳)≫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위해 먼저 홍경래에 대한 일반적인 약전(略傳)을 싣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홍경래는 어릴 때부터 웅략(雄略)이 있고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틈만 있으면 검술을 배우고 날마다 200여 리의 길을 걸으며 출입할 때에는 늘 장검을 찼고 병서(兵書)와 술서(術書)까지 능통하였다. 이렇게 영웅적 소질과 의협심을 가진 데다가 학문적으로 박식했기 때문에 경래를 지지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가 열아홉 살에 과거 보러 서울에 갔을 당시는 국정이 부패하고, 거국적으로 당쟁에 몰두하며 외척이 정권을 농단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통용되며 양반의 자제가 아니면 관리로 등용되지 못했다. 또 지방 차별이 심하여 기호인(畿湖人)이 아니면 아무리 천재라도 승진의 길이 막혔다. 10년 동안 국내를 일주하면서 인정과 풍속, 산천과 도로를 두루 살피고 또 동지 규합에 힘써 가산 청룡사에서 우군칙을 만나고, 이희저, 김창시 등과 결탁하여 훗날을 맹약하고 기회만 기다렸다. 드디어 순조(純祖) 신미년(辛未年) 12월 18일 거사하여 관서 일대를 뒤흔들다가 다음 해 4월 19일 정주성에서 전사했다. (≪사회과학대사전≫ p.754에서 인용)
≪조선문학사≫(조선문학사刊, 1948)를 쓴,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이명선은 이상과 같은 홍경래의 일대기를 소설 ≪홍경래전≫으로 형성화했는데, ‘후기’에서 밝혔듯이 현상윤(玄相允, 1893~?)의 신문 연재소설 <홍경래전>과 소전성오(小田省吾의)의 신문 연재소설 ≪신미 홍경래란의 연구≫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홍경래를 비롯한 봉기 지도자들, 특히 머슴 출신인 선봉장 홍총각의 민중 지향성을 부각시켰다. 이 작품이 비록 분량이 짧고 인물 묘사가 치밀하지 못해 대하 역사소설에서 느끼는 소설적인 재미는 얻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면밀한 역사적 고증과 아울러 저자의 역사적 통찰력에 의해 19세기 민란의 신호탄인 평안도 민중봉기를 새롭게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1990년 8월 편집부
주요 인물
홍경래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 용강 출신. 최고의 지도자. 정주 함락 시에 전사.
우군칙 총참모. 대천 출신. 천비(賤婢)의 서자(庶子). 정주 함락 시에 생포당함.
김창시 부참모. 곽산의 김진사로, 사림(士林)에 명망이 있었음. 창성 가는 도중에서 횡사.
이희저 병첩장. 가산역 관리. 대부호. 정주 함락 시에 생포당함.
홍총각 선봉장. 개천(价川) 출신. 곽산 사송야 싸움에서 전사.
김사용 부원수. 태천 출신. 북군의 최고지도자. 정주 농성 시에 제2회 공격전에서 전사.
1. 귀향(歸鄕)
순조(純祖) 11년(1811) 9월의 일이다.
홍경래(洪景來)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자기 고향인 평안도 용강군(龍岡郡) 다미면(多美面) 세동(細洞) 화장곡(花庄谷)에 나타났다.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산속의 절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뚝 떠나고서는 10년 이상이나 종무소식이든 그가, 제법 서늘해진 가을바람을 안고 표연히 나타났다.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가 있었나?”
“산속에 들어가서, 몇 해가 걸리든지 성공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더니 이때까지 산속에 있었나?”
“아마 공부가 어지간히 다 된 게지. 10년이나 했으면 학문을 어느 정도 이루지 않았겠나?”
이렇게 옛 친구들은 물어보았으나, 경래는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우물우물해 버렸다. 그리고서는 “어디 사람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가? 공부만 하더라도 그렇지, 파고 들어가면 도무지 한이 있어야지. 그러나 사내로 태어나서 기왕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에야 끝장을 보고 말아야지, 그대로야 도중에서 물러설 수 있나? 그래서 이번에 다시 결심을 굳게 해가지고 앞으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공부를 계속해 나가서 철저히 한번 그 끝장을 보아볼 작정이네” 하고 굳은 결심을 표명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경래는 어머니와 처자를 거느리고 북쪽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이때까지 살던 집과, 얼마 되지 않으나마 미구에 신곡을 먹게 될 전지(田地)를 사촌과 육촌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걸 다 깨끗하게 청산해버리고 총총하게 떠났다.
“별사람 다 있구먼.”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로구먼.”
“어릴 때부터 호탕하여 엉뚱한 짓만 하더니, 서른두 살이나 먹은 오늘에 와서도 여전하구먼그래.”
동리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경래가 고개 위에 서서 다시 한번 화장곡 동리를 돌아다보았을 때, 양지바른 산비탈에서 나무하는 머슴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또 왔다네
또 왔다네
김경서가 또 왔다네
디려치자
디려치자
평양성(平壤城)을 디려 치자
“저 노래가 무슨 의민지 아시겠습니까”
경래는 쉬고 있는 어머니한테 물었다.
“모르겠다, 무슨 소린지. 예전에는 못 듣던 노랜데, 요새 새로 떠돌아다니는 노랜가 보더라.”
“우리 평안도에 김경서가 또 새로 나타났다는 노랩니다. 김경서 말이에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는 장수 말이지?”
“네. 그런 장수가 또 나타났다는 말이에요. 우리 평안도에.”
“그렇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니. 해마다 심해져 가고 나빠만 가는 세상을, 그런 장수가 나서 빨리 바로잡아 주어야재. 그대로야 어디 살아갈 수가 있니?”
“어머니는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웬 이름은, 새삼스럽게.”
“경래의 경은 김경서의 ‘경 자’고, 래 자는 ‘올 래’ 자입니다. 그래서 김경서가 또 왔다는 것은,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호호 너는 이제 농담도 곧잘 하는구나. 호호호.”
“허허허.”
경래도 어머니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그대로 웃어버렸다.
* 김경서(金景瑞, 1564~1624) : 본관은 김해.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무과에 급제하여 1588년(선조 21) 감찰이 되었다가 집안이 미천하여 파직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 방위전에서 대동강을 건너오는 적병을 막았다. 그해 8월에는 조방장(助防將)으로 2개월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에게 점령당한 평양의 공략에 참가했다.
그 뒤 평안도방어사로 승진했으며, 1593년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의 밑에 있으면서 남원 등지의 도적을 소탕했다.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선조의 명에 따라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찾아왔으며, 일본군의 상황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있다가 부정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604년 포도대장 겸 도정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가 되었다. 그 뒤 만포진첨절제사・북로방어사・길주목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당시 건주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무순(撫順)・청하(淸河) 등의 보를 함락시키자, 1619년 7월 명나라 조정은 조선에서 군사를 파견하기를 청했다.
조선은 사신을 보내어 "본국의 남쪽 변경에 변란이 있어 군사가 부족하다"고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내려 "속히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에 종사하는 공을 이루라"고 하자 5도도원수(五道都元帥)인 참판 강홍립과 함께 부원수(副元帥)로 출전했다. 다음 해 심하(深河) 지방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명나라 군사가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했다.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연락하여 조선과 후금은 본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출정은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남은 병사와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당시 강홍립은 출정 전에 형세를 보아 적당히 향배(向背)를 결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있었다. 김경서는 적진에 있으면서 남몰래 적진의 사정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조만간에 본국으로 보내려 했으나, 이러한 일을 강홍립이 적에게 고발하여 살해당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고향에 그의 충성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다음백과)
2. 다복동(多福洞)
경래가 식구를 거느리고 이사한 곳은 다복동(多福洞)이라는 곳이다. 다복동은 가산(嘉山)과 박천(博川) 양군 사이에 있는 동네의 이름인데, 그리 크고 넓지는 못하나 상당한 요지(要地)다. 동리 좌우에는 그리 험하지는 않으나 나무가 잔뜩 들어선 산이 빙 둘러 있고, 산 너머 한 옆으로는 서울서 의주(義州)로 통하는 큰 절이 있고, 앞으로는 대령강(大寧江)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어 수륙(水陸)의 편리가 매우 좋다.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강과 좌우의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딱 버틸 수도 있고, 숲속은 몰래 틀어박혀 무슨 비밀스런 일을 꾸미기에도 딱 들어맞았다.
어려서부터 천자의 대가리를 때릴 것을 이상으로 하였던 경래라, 녹녹한 시골 선비로 구부러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사회에 대하여, 나라에 대하여 뚜렷이 불평을 품게 된 것은 이십 전후에 과거를 치러 실패한 때부터다.
과거는 원래 경향(京鄕)을 통하여 숨은 인재를 찾아내어 중용하자는 것이 목적인데, 이조 말엽에 이르러 아주 물러져서 문벌 높고 권세 있는 몇몇 대신들의 자제들이 뒤꽁무니로 얼렁뚱땅하여 장원 급제를 독점해버려서, 그 이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붙어볼 도리가 없었다. 문벌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 자식들은, 젖내가 몰칵몰칵 나는 못나고 변변치 못한 것들도 제 집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서 바치기만 하면 진사니 대과니 한림이니 맘대로 골라잡고, 시골서 올라온, 뒤에 아무런 연줄도 없는 자는 아무리 글이 놀랍고 글씨를 잘 쓰고 정론이 당당해도 급제할 도리가 전혀 없었다. 공연히 헛 보따리만 걸어 메고 헛 노자만 써서 왔다 갔다 해본대야 출세할 기회를 잡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사람은 천대가 막심하여 도무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태조(李太組, 이성계)가 서북 사람은 외이불용(畏而不用)이라고 해서 되도록 중요한 자리에는 쓰지 않도록 했는데, 이것이 이조 역대의 임금들에게 충실하게 전해 내려와서 나중에는 아주 으레 그런 것으로 정해지다시피 되었다. 그리하여 서북 사람이면 제가 아무리 출중한 인물이라도 문관이면 지평(持平) 이상에 오르지 못하고, 무관이면 첨사(僉使) 이상에 오르지 못했다. 평안도 놈! 서한(西漢)! 편치(偏癡)!—서북 사람들은 이렇게 불려 내려왔다.
그러므로 경래가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주 처음부터 확정될, 거의 숙명적인 일이었다. 만약 경래가 제 운명에 순종했다면, 과거는 몇 번 시험해 보다가 걷어치우고 시골서 콧물 흘리는 아이들에게 천자 권이나 가르쳐주는 글방 선생님이 되어 늙어 꼬부라져야 하겠는데, 그렇게 되기에는 경래는 너무나 대담하고 야심만만했다. 아니, 야심이라기에는 너무나 순진한 정의감이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도저히 그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경래의 의협심에 불타는 젊은 피가 그것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3. 동지(同志)들
경래의 동지로서 먼저 우군칙(禹君則)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군칙은 경래가 제일 먼저 사귄 동지다. 그는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내가 내다 하고 뽐내는 우가네 집의 첩의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천문 지리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無不通知)했는데 서류(庶流)인 까닭에 처음부터 과거를 볼 자격이 없고, 집 안에 드나 집 밖에 나나 경멸과 학대가 자심하여 억울한 자기의 심정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집을 버리고 각처로 떠돌아다니며 지사(地師, 지관)로 자처했다. 간혹 부잣집 묏자리나 정해주고 돈푼이나 받으면, 바로 주막으로 달려가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들이켜 평소의 불평불만을 술로 마비시켜버렸다.
경래는 경신년(庚申年, 1800)에 (평안북도) 가산군(嘉山郡)* 청룡사(淸龍寺)에서 군칙을 만났다. 당시 경래는 스물한 살이고, 군칙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둘은 초면 인사를 하고서 두세 마디 말을 건네는 동안에 바로 의기가 상통하여 평소에 품었던 불평불만이 저절로 쏟아져나왔다. 그해는 유월에 정조(正祖)가 죽고 순조(純祖)가 새로 들어선 때라, 둘의 이야기는 자연 이것이 중심이 되었다.
* 가산(嘉山) : 평안북도 박천 지역의 옛 지명.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뒤에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가 여진의 거주지가 되었다. 고려초에 신도군(信都郡, 또는 古德縣)이라 하였으며, 960년(광종 11) 습홀(濕忽)에 성을 쌓고 승격시켜 가주(嘉州)라 하였다.
995년(성종 14)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1221년(고종 8) 모반사건이 있었다 하여 낮추어 무령(撫寧)이라 하였다. 1231년 몽고병을 피하여 섬으로 옮겼다가 1261년(원종 2) 육지로 나와 태(泰)・박(博)・무(撫)・위(渭) 등의 주(州)를 모두 가산에 붙여 5성겸관(五城兼官)으로 하고 뒤에 태・무・위 등 3주를 따로 분리하고, 1371년(공민왕 20) 박주까지 완전히 분리하였다.
1413년(태종 13) 가산으로 고치고 군이 되었는데, 1802년(순조 2)에 강등하여 현이 되었다가 1822년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의주부 가산군, 1896년 평안북도 가산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박천군에 병합되어 가산면이 되었다.
** 당시 경래는 스물한 살이고, 군칙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 실제 기록은 당시 홍경래는 29세, 우군칙은 24세였다.
다음에 중요한 동지로 이희저(李禧著)가 있다.
이희저는 가산역속(嘉山驛屬)으로 도내에서 유명한 부호이다.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향안(鄕案)에도 들었는데 이것은 물론 뒤꽁무니로 돈을 먹여서 성공한 것이다. 몸집이 크고, 더구나 배가 쑥 나와서 걸음을 걸으면 뒤룩뒤룩 흔들렸다. 뱃심이 세고 우악스러워서 한번 무슨 말을 내놓으면 누가 뭐래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가 이처럼 부자로 사는 것은 물론 대대로 물려내려온 유산도 적지 않았으나, 그것보다도 사신(使臣)의 뒤를 따라 거의 해마다 중국에 출입하는 역관(譯官)들과 잘 연락해서 중국의 비단을 싸게 사가지고 비싸게 팔아서 큰 이익을 남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인아인척(姻婭姻戚, 사위 집 쪽의 사돈, 혼인 관계를 통하여 맺어진 친척) 간에는 각 골에서 누구누구라고 치는 큰 부자와 큰 장사꾼이 많아서 그 세력은 곽산골에서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경래와 군칙은 희저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넣는 데 매우 고심했다. 원래 위인이 우악스러운지라, 처음에 잘못 건드리다가는 영영 퉁겨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주 신중히 일을 시작했다.
다음에 또 중요한 동지로 김창시(金昌始)가 있다.
김창시는 여기서는 좀 떨어져 있는 (평안북도) 곽산(郭山) 사람이다. 일찍이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곽산 김 진사로 통했는데 문장재예(文章才藝)로 당시 평안도에서는 선비들 사이에 제일 명망이 높았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하는 짓이 모두 풍성풍성해서 꽤 많던 재산을 다 없애고 지금은 도리어 빚이 적지 않았으나 그런 것은 근심하는 빛조차 없었다. 평안도 이태백(李太白)으로 자임하고, 술만 얼큰히 취하면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읊는 것이 제일 상쾌한 일이었다.
4. 장수(將帥)들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면 모사니, 명사니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직접 병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서 지휘하는 장수가 필요하다. 경래는 이러한 장수를 얻느라고도 각처로 돌아다니며 별별 수단을 다 썼다.
경래가 제 편으로 끌어넣은 장수 중에 먼저 홍총각(洪總角)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총각은 곽산 사람으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원래 이름은 이팔(二八)이나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해 홍총각으로 통했다. 기운이 장사라 먹기도 남의 세 몫 먹고, 일도 남의 세 몫하고, 자기도 남의 세 몫 잤다. 산에 발매(산판의 나무를 한목 베어 냄)를 가면 우연만한(웬만한, 어지간한) 나무는 손으로 쑥쑥 뽑아버리고, 좀 큰 나무는 도끼질을 하는데 그 도끼가 보통 도끼는 휘휘 날린다고 해서, 대장간에 가서 특별히 큼직하게 버려서 보통 장정은 잘 들지도 못할 만한 것을 가지고 한 번이나 두 번만 찍으면 턱턱 쓰러지고, 아무리 큰 나무일지라도 세 번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져 나르는 데도 보통 지게는 약해서 못 쓰고 특별히 굵은 나무로 커다랗게 만들어서 산더미처럼 추켜 싣고 단숨에 져 날랐다.
다음에 중요한 장수로서 이제초(李濟初)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제초는 (평안남도) 개천(价川) 사람으로 어려서 산에 들어가서 상자(相者, 관상가) 노릇을 했는데 그때 장수물을 먹고서부터 힘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장수물이라는 것은, 그 절에서 10리는 더 산속으로 들어가서 큰 바위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는 물인데 처음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그 절 스님 한 분이 이것을 발견하고 여러 해 두고서 밤중에 남몰래 받아먹고서 기운이 아주 장수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그 스님이 밤마다 어디로 나가는 것이 하도 수상해서 제초가 몰래 그 뒤를 밟아갔더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물을 한 바가지 받아먹고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 물이 무슨 물인가 하고, 그 후부터 제초도 몰래 그 물을 훔쳐먹었다. 그리하여 그 스님 다음가게 힘이 세어졌다. 그러나 이 소문이 퍼져 그 근처 사람들이 다 알게 되어, 모두 몰려가서 장수물을 받아먹자 여러 사람이 알고부터는 물 효과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제초는 힘이 세어졌다는 것이다.
중요한 장수로서 다음에 김사용(金士用, 미상∼1812년. 조선 후기의 무신. 일명 사룡士龍. 평안북도 태천 출신. 어려서부터 지략이 뛰어나 이목을 끌었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태천 사람으로 우군칙과 동향이라, 군칙의 추천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 용맹이 홍총각이나 이제초에 지지 않고, 또 그 위에 지략(智略)이 출중하여 문무를 겸비한 대장감이다. 경래가 처음 그를 만나 시험해 보고 홍총각과 우군칙을 한데 합해 놓은 셈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이외에도 당당한 장수를 적잖이 모았다. 그 방법으로는 먼저 이제초를 끌어넣을 때에도 쓴 방법이지만, 다복동에서 금점(金店, 황금을 파내는 곳. 금광)을 한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려서 대량으로 장정을 모집했다
5. 신도회의(薪島會議)
6. 십이월(十二月) 십팔일(十八日)
7. 가산(嘉山)의 연홍(蓮紅)
8. 기로(岐路)
9. 북군(北軍)
10. 운명(運命)의 순간(瞬間)
11. 안주(安州)
12. 송림(松林) 싸움
13. 반역자(叛逆者)
14. 정주(定州) 농성(籠城)
송림의 패전으로 남군은 정주로 몰리고 사송야의 패전으로 북군은 그 중심을 잃게 되어, 이미 대세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다. 허항・김견신을 대장으로 하는 의주의 의병은 정월 11일에 사용(金士用)이 지키는 양책잠을 쳐 회복하고 더욱 기세를 높이며 남하하고, 사송야 싸움에서 이긴 관군은 이와 전후하여 선천을 쳐 회복하고 의기충천하여 북쪽으로 올라왔다. 남하하는 의병과 북행하는 관군 틈에 끼어 사용도 소수의 수비군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모두 집어치우고 잔병을 거두어 샛길로 숨어서 정주성으로 뛰어들어가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때는 청천강 이북의 8읍을 점령하여 평안도 전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를 보이던 경래의 혁명군도 기병한 지 20여 일에 작전의 실패와 반역자의 속출로 도처에서 패퇴하여, 정월 20일경에는 정주성 단 하나를 보존하게 되었다. 이거나마 각처에서 관군과 의병이 7, 8천이나 모여들어 겹겹이 둘러쌓음으로 정주성의 운명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주성이 함락함에는 전후 4개월이나 걸렸다. 신미년(辛未年, 1811) 12월 18일 기병한 이래, 임신년(壬申年, 1812) 4월 19일 북장대(北將大)가 폭발하여 정주성이 완전히 함락한 날까지 통산하면 실로 다섯 달에 걸치는 것이다.
정주성 공방전에 있어서의 양군의 가지가지의 고심, 교묘한 작전의 안출, 새로운 무기의 발명 등 이야깃거리가 많으나 여기서는 일일이 그것을 기록할 여유가 없다. 다만 불과 2, 3천밖에 되지 않는 경래의 혁명군이 고립무원한 외로운 성을 지켜 4개월이나 싸워나갔다는 것은, 그들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운명의 공통됨을 자각하고 참으로 일치협력하여 가장 대담하게 가장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둔다. 그리고 여기서도 홍총각이 제일 용감하게 초인적인 활약을 했다.
정주성의 함락과 함께 경래・군칙・홍총각・희저・사용 등은 어찌 되었을까? 이 중에서 사용은 제 2회 공격전에서 전사하고, 그 이외에는 정주성이 함락할 때, 혹은 성과 운명을 같이하고, 혹은 관군에게 사로잡혀 서울로 호송되어 참혹한 사형을 당했다.
경래는 정주성과 운명을 같이하여 장렬한 전사를 했는데, 그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이 중에는 그때에 죽은 것은 가짜 경래고 진짜 경래는 거기서 빠져서 도망하여 산속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경래가 죽었든 살았든 용이 되려다가 용이 못된 것만은 사실이며, 용강 이시미(이시미는 용이 되려다 못 된 이무기. 용강 이시미는 홍경래. <용강 이시미>라는 남사당 꼭두각시놀음이 있다)는 기어이 이시미에 그쳤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 후기
홍경래를 쓰려면 용강에도 가고, 다복동・정주 같은 데에도 가서 자료를 수집해가지고 붓을 드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지금은 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 아무 준비도 없이 대담하게 붓을 놀렸다. 미비한 점, 그릇된 점이 비일비재일 것이다. 우선 이대로 내놓는다. 후일에 기회 있는 대로 다시 고치려 한다.
1947년 1월 7일
◎ 이명선, ≪홍경래전≫, 범우사, 2006(2판)
☞ 이명선
초창기 문학 연구자. 충북 괴산 출신으로 청주고보 졸업 뒤 경성제대 중문과를 졸업(1940년)하고, 휘문고 교사를 거쳐 서울대 중문과 조교수(1946~49)를 지냈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문학동맹’에서 활동했다. 학내 이념 대립 와중에 좌익으로 규정돼 교수직을 그만두었다가 인공치하에서 대학에 복귀해 몇 달간 ‘반짝 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