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추사코드≫ 서화에 숨겨둔 조선 정치인의 속마음, 이성현
- [보도자료]
- 2026-06-10
≪추사코드≫ 서화에 숨겨둔 조선 정치인의 속마음, 이성현
추사가 보내온 비밀 초대장.
그가 정교하게 설계해놓은 미로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추사(秋史)를 고증학(考證學)의 대가라 부른다. 생전의 추사는 조선 말기 학풍에 죽비(竹篦)를 내리쳤는데, 정작 오늘의 추사 연구자들은 그의 예술에 찬사를 보내는 데 한마디씩 거들며 우쭐댈 뿐 고증학자다운 눈빛을 잃은 지 오래다.
부끄러운 일이다.
잘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짓도 부끄러운 일이나, 수긍하지 못한 채 경배를 올리려니 더욱 부끄럽고, 근엄한 표정으로 경배 올릴 것을 종용하는 노학자의 헛기침 소리에 엉거주춤 고개부터 숙여야 하는 현실도 부끄럽다. 사정이 이러한데 제상(祭床)이 아무리 성대한들 엉뚱한 제사에 불려 나온 혼령의 마음인들 어찌 편하겠는가?
어떤 연구자는 “누구나 추사를 알지만 누구도 추사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 말하기로 하면 함께 사는 가족이나 자기 자신은 아는지 반문하고 싶다. 연구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추사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는바, 차라리 입을 다물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건인지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학자의 태도이고 양심일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이 어찌 녹록한 일이랴마는, 후학들이 추사를 모시기 위해 마련한 의자가 유독 삐꺽거리는 이유를 이제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모든 사학(史學)은 나름의 사료를 근거로 논리를 펼치고, 정설로 자리매김된 학설의 무게는 제시된 사료의 신뢰성의 무게에 비례하여 권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사료는 사료일 뿐 사료가 역사적 진실을 밝혀 주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료는 진실에 접근하는 매개체일 따름일 뿐, 진실은 사료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해석된 사료는 역사를 도둑질하는 도구로 쓰이기에, 학자라면 사료의 바른 해석을 위해 신중해야 한다. 실력 없는 예술가는 시류 따라 한평생 방황하며 보내고, 깊이 없는 학자는 서재 자랑만 하는 법이다. 손에 쥔 것도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데 새것을 찾아낸들 무엇을 밝힐 수 있겠는가? 손에 쥔 것이든 새로 찾아낸 것이든 중요한 것은 해석이며, 해석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새것도 찾는 것 아닌가?
고증학
우리는 송・명대 성리학이 유학 본연의 모습을 훼손하는 공리공론(空理空論)과 독단적 해석임을 경사(經史, 경서와 사기)의 고증을 통해 입증하려는 학풍을 고증학(考證學)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성리학의 아성을 부수기 위한 도끼를 마련하기 위해 생겨난 학문이 고증학이다. 이민족(異民族)에게 정복당한 원조(元朝)와 청조(淸朝) 아래서 치욕과 설움의 피눈물을 삼키던 의식 있는 한족 학자들의 자기반성이자, 한족부흥운동을 위해 마련한 씨앗이 바로 고증학인 셈이다.
고증학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추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지 짐작되지 않는가? 아무리 자신감 넘치던 추사라 해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목표(과거 시험)까지 미루며 단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10년 세월을 보냈겠는가? 평생을 바쳐 매진하여도 끝이 없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시간을 두고 급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수단을 위한 공부였다는 의미 아닐까? 그 10년 사이에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재종(再從, 6촌)형제들이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들에 의해 몰락당하는 참상을 지켜보면서도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만큼 추사는 주변 상황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이 무렵 추사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찬문이 남아 있다.
‘覈實在書 窮理在心 攷古證今 山海崇深 핵실재서 궁리재심 고고증금 산해숭심’
“책에 쓰여 있는 것의 실상을 조사하여 마음속 답답함에 이치를 세우고자 하나 옛것을 상고하여 오늘의 증거로 삼고자 하여도, 산같이 높은 위업을 바다같이 깊은 물이 막아서네.”
추사 나이 서른 되던 해, 여든셋의 옹방강(翁方綱)이 보내온 편지 『담계적독(覃溪赤牘)』 전면에 쓴 찬문이다. 여기서 서(書)는 당연히 옛 경서(經書)이니 ‘覈實在書 窮理在心(핵실재서 궁리재심)’은 “옛 경서의 뜻을 헤아려 밝은 이치를 얻고자 한다”는 뜻이고, 그 과정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은 ‘고고증금(攷古證今 : 오늘의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옛 선인의 생각을 상고해 보기 위함)’이나, 경서에 담긴 본뜻〔本意〕을 입증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경서를 산과 같이 높게 받들고자 해도 성인의 말씀과 자신 사이엔 바다같이 깊은 물(시간상의 간극)이 있어 접근하기 어렵다며 고증학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찬문을 통해 추사가 고증학에 몰두했던 이유가 드러난다. 옛 경서의 뜻을 헤아려 마음속 답답함을 풀어내고 오늘의 문제에 증거로 쓰기 위함이란다. 일견 당연한 듯 보이는 문장이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는 성리학에 대한 도전장과 다름없다. 성리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주자가 해설한 것을 정설로 삼으며 생겨난 것이니, 공자의 말씀은 주희(朱熹)의 해석에 의해 그 뜻이 전해진다는 전제하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이 주자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주희를 공자의 공식적인 대변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주희가 공자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다 설명해 주었는데 무엇이 답답한 것이고 무엇을 증명하고자 한다는 말인가? 추사는 조선의 성리학자에게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고증학을 연구하고 있었단 의미다. 지난 일을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문제를 언급하는 모든 행위는 일정 부분 지난 일을 통해 오늘의 문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결국 추사가 조선에 공자를 모셔오려 함은 조선 성리학의 폐해와 허구성을 바로잡기 위함 아니었겠는가?
1부 천재가 설계한 미로
사서루잔서완석루죽로지실일로향실
賜書樓殘書頑石樓竹爐之室一爐香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서예작품 또한 내용〔書意〕과 형식〔書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작품을 걸작이라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추사의 서예작품을 걸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주저한 적도, 시비를 건 적도 없다. 조선 서예사에서 추사의 작품만큼 시각적 감흥이 강하게 전해지는 작품이 없는 까닭에 누구도 쉽게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추사의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라는 반증이다. 그런데 문제는 추사의 서예작품에 나타나는 시각적 감흥이 파격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그 파격 때문에 가독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예는 문장의 가독성을 기초로 하는 까닭에 작품에 담긴 내용과 별개로 시각적 아름다움만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여타 순수 추상예술의 범주에서 거론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추사의 서예작품에서 발견되는 내용의 빈약함과 파격적 서체의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그동안 많은 추사 연구자들은 추사의 학문적 업적을 부각시키는 편법을 사용해왔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였는지 부각시키는 것으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약점에 대해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정한 셈이다. 그렇게 서둘러 사당에 모셔진 추사는 향불에 그을려졌고, 그 결과 누구나 그의 존재를 알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추사가 아무리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석학이었다 하여도 그의 작품에 그의 학식과 사상을 담아내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결국 추사의 서예작품을 조선 서예사의 진정한 보물로 추송하고자 한다면 눈길을 사로잡는 뛰어난 형식에 걸맞은 내용을 그의 이력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불협화음 속에서 추사의 서예작품은 급기야 괴이한 것이 되었다. 괴(怪)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추사의 글씨를 괴이하다 표현하는 말 속에 우리는 이미 추사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괴이함이란 규칙 혹은 질서를 찾지 못할 때 생기는 심리 상태에서 야기된다. 다시 말해 추사체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규칙이나 질서를 추사체 자체에서도, 여타 다른 서체와 비교를 통해서도 찾지 못한 탓에 추사체는 ‘괴(怪)’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생전의 추사 또한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글씨를 ‘괴’로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추사는 봉래(蓬萊) 두 글자를 김병학(金炳學)에게 써 보내며 곁들인 편지에,
“근래 내 글씨를 세상 사람들이 매우 해괴하게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글씨도 또한 말썽의 대상이 되지 않을는지…….”
라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이는 추사 생전에도 그의 글씨가 세간에서 괴이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의미인데, 글씨에 대하여 적지 않은 견해를 남긴 그가 정작 자신의 서법에 대해 타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오늘날 많은 추사 연구자들은 추사체의 괴이함을 그 개성 혹은 독특함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런데 괴이함과 독특함은 같은 차원에서 거론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코가 유난히 뾰족한 것은 독특한 것이나, 코가 두 개라면 괴이한 것이 된다. 추사체의 괴이함이란 단순히 서체나 필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자가 지니는 사회적 약속을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사실 우리는 추사의 작품에 쓰인 많은 글씨들을 문맥상 무슨 글자인지 짐작하며 읽고 있을 뿐 이 글씨가 그 글자라고 규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며, 무엇보다도 그런 방식으로 추사가 글씨를 쓰게 된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우와 자주 만나게 된다. 물론 예술 작품을 고정된 형식 틀에 가둘 수 없고, 위대한 작가는 스스로의 형식을 창안해내는 능력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서예는 가독성을 전제로 성립될 수밖에 없는데 가독성을 해칠 만큼 괴이함을 필요로 했었다면 그 괴이함은 개성 이상의 무언가를 담기 위한 방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간 추사 연구자들은 추사가 어렵사리 설계해낸 괴이한 글자 꼴을 읽어내는 데 급급해 정작 그가 특정 글자를 변환시켜 쓰게 된 이유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에 추사가 남긴 본의(本意)를 놓친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시 말해 추사체의 괴이함을 개성의 범주에서 이해하면 괴이함은 가독성을 통해 일반화되고 괴이함이란 형식상 특성일 뿐인 까닭에 작품의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추사의 작품을 면밀히 비교해 보면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글자 꼴을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으며, 그 변형된 각각의 글자꼴은 작품의 내용에 따라 특정한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결과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추사체의 특성 때문에 형식(서체, 글자꼴)을 통해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추사의 글씨가 어떤 방법을 통해 각기 다른 의미로 변환되는지 몇 가지 예를 통해 추사체의 묘미를 경험해 보자.
추사가 남긴 서예 작품 속에서 예서체로 쓴 ‘글 서(書)’자를 몇 자 추려보았다.
(A)는 흔히 보는 일반적인 협의 방식이고 (B)와 (C)는 ‘글 서(書)’자를 고자(古字)로 쓴 것이다. 그런데 (C)를 자세히 보면 (B)와 달리 ‘붓 율(聿)’ 부분의 가로획이 하나 덜 그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C)는 잘못 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것이 실수인가이다.
사서루 賜書樓

문제의 ‘글 서(書)’자가 쓰여 있는 현액이다.
270ⅹ73.5cm 크기의 현액에 단 세 글자를 쓰면서 추사가 실수했을까?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흔한 글자이고, 실수라고 하기에는 글자 수가 너무 적고, 실수라고 하기에는 글씨가 너무 크다. 실수가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그리 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추사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간 추사의 <사서루賜書樓>에 대하여 대다수 연구자들은 “서책을 하사받는 누각”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글자의 의미를 직역하여 조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작품의 본의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추사는 <사서루>란 단 세 글자를 통해 매관매직을 일삼는 척족들의 전횡을 고발하고 있으니, 추사체의 묘미이란 이런 것이다.
추사가 남긴 <사서루>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려면 약간의 상식과 눈썰미가 필요하다. 잠시 각각의 글자의 내포된 의미부터 헤아려보자. 우선 ‘줄 사(賜)’ 자는 “하늘이나 윗사람처럼 존귀한 존재가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내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글자로,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일종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추사가 그려낸 ‘줄 사(賜)’ 자를 살펴보면 삐쩍 마른 사람이 들어올리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재물〔貝〕*을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을 ‘賜’ 자의 글자꼴을 이용해 그려 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조개 패(貝)는 재물이란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왜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재물을 들고 후들거리는 앙상한 다리를 앙버티고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일까?
벼슬을 청탁하기 위함이다.
벼슬을 하고자 하면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되지 않는가? 시험에 합격할 능력이 모자라도 뇌물만 바치면 없던 길도 생기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다리에 살 붙을 틈 없이 반평생을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마지막 하나가 부족해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니, 학식이 부족한 탓일까, 세상 물정 모르는 탓이었을까? 이유야 무엇이든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세상이니, 공부보다는 뇌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추사가 그려낸 ‘줄 사(賜)’ 자의 모습이 흥미롭기는 하나, 논리 비약이 지나침을 지적하며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분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賜’가 “존귀한 존재가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은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윗사람이 내리는 은혜를 서서 받드는 것이 왕조 시대의 예법인지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아직도 망설이는 분은 무엇 때문에 추사가 ‘글 서(書)’ 자를 고자(古字)로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붓 율(聿)’과 ‘날 일(日)’ 자로 이루어진 글자 꼴이 아니라 ‘붓 율(聿)’과 ‘놈 자(者)’가 합해진 ‘글 서(書)’ 자의 고자가 그의 의중을 전하는 데 효과적인 글자꼴이었기 때문이다.
* 형성문자 ‘書’ 자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聿(율)과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者(자→서)의 변형(變形)이 합(合)하여 이루어짐.-인용자
‘붓 율(聿)’은 마침내〔遂〕, 오직〔唯〕, 무엇에 대해 서술함〔述〕 등의 의미로 쓰이며, “열심히 노력하여 원하는 대상이나 경지에 도달함”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놈 자(者)’는 대명사로 ‘이것〔此〕’이란 의미가 되니, 추사가 ‘書’ 자의 고자를 쓰게 된 이유는 ‘원하던 관직을 제수하는 문서’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추사는 ‘書’ 자의 ‘聿’ 부분의 마지막 가로획 하나를 생략한 채 ‘者와’ 연결시켜 결과적으로 틀린 글씨를 쓰고 말았다. 이것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면 추사는 무슨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시경≫에 ‘聿修厥德(율수궐덕)’이란 말이 나온다. “선조(先祖)의 덕을 사모하여 서술함”이란 뜻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 시험은 기본적으로 경서에 대한 시험이고, 경서는 선조의 지혜와 덕을 기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율수궐덕’하는 일이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는데 ‘붓 율(聿)’의 획이 하나 모자란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합격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모자라는 부분을 뇌물로 채우고자 들어올리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재물〔貝〕을 들고 힘겹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직을 어디서 파는지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뇌물을 바치면 관직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뇌물을 바쳐도 바칠 것 아닌가? 그래서 추사가 그려낸 ‘書’ 자의 ‘놈 자(者)’ 부분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획이 ‘누각 루(樓)’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것 아닐까? 관직을 파는 곳이 ‘樓’이고 그곳에서 승낙하면 관직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추사가 그려낸 ‘書’ 자의 ‘者’ 부분의 대각선 획을 주의 깊이 관찰하면 비정상적으로 긴 획의 중간이 살짝 꺾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이 부분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 꺾인 자국이 획을 이어 그은 흔적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처음 그은 획에 가필을 가하여 획의 길이를 길게 내린 셈인데, 이것이 글씨의 균형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글씨의 균형을 찾기 위해 뒤늦게 획을 이어 붙인 것이라면 미숙함을 보완하며 생긴 흔적이라 간주해야 하겠으나, 추사의 감각이 그런 실수를 할 만큼 둔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의 작품이 치밀한 설계하에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이 또한 의도된 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를 것이다. ‘者’ 자의 비정상적으로 긴 대각선 획과 그 획에 남아 있는 이어 붙인 흔적을 통해 추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어 붙인 흔적은 ‘者者(자자, 승낙의 표시)를 쓰기 위함이고 비정상적으로 긴 획은 승낙을 구하는 곳이 ‘樓(루)’임을 시각적으로 지시하기 위함은 아닐까? 이를 확인하려면 추사가 그려낸 ‘樓’ 속에서 ‘벼슬을 사고파는 곳’이란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추사는 어떤 힌트를 남겨 두었을까?
오늘날 ‘누각 루(樓)’를 “주변 경관을 내려다보면 연회를 즐기는 전망 좋은 정자”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원래 ‘樓’는 다층집이란 의미로 “적진을 살피는 감시탑 혹은 감시 초소”의 기능을 담당하는 건축물을 지칭하는 글자다. 그런데 추사는 벼슬자리를 승인하는 곳이 궁(宮)이 아니고 루(樓)라 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일까?

추사가 그려낸 ‘樓’ 자의 ‘女(계집 녀)’ 부분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추사는 3획으로 쓰일 ‘女’를 가필까지 해가며 2획으로 이어 붙였다. 서예에서 필획을 간략히 하기 위해 획을 연결해 쓰는 것이야 특별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추사가 ‘女’를 쓰면서 남긴 붓 자국이 결과적으로 4획이란 것이다. 추사는 3획으로 ‘女’ 자를 쓴 이후에 가필을 하여 획을 이어 붙였으니, 결과적으로 4획을 사용한 셈이다. 추사가 남긴 붓 자국에서 추론할 수 있는바, 그가 그려낸 ‘계집 여(女)’ 자의 모습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거나 일상적인 서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추사는 작품을 완성한 후 뒤늦게 떠오른 어떤 효과적인 방법을 반영하기 위하여 가필을 가해 작품을 수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추사가 3획으로 쓰는 ‘女’를 어렵게 2획으로 바꿔낸 ‘女’ 자의 모양 속에서 그가 떠올린 어떤 생각을 숨기고 있다 하겠는데, 어떤 차이가 생긴 것일까?
“치마를 휘젓고 있는 계집”이란 뜻을 그려내기 위함이다. 추사가 살았던 조선 말기는 세도 정치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친정 식구들에게 권세를 몰아 주던 대비의 치맛바람을 ‘누각 루(樓)’ 자 속에 그려 넣기 위해 추사는 특별한 모양의 ‘계집 여(女)’ 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명(告命) 없이 승하하신 선왕(先王)을 대신하여 왕위 계승권자를 지명하고 나이 어린 국왕 뒤에서 수렴청정하던 대비의 치맛바람이 한두 번 불었던가? 바람을 타려는 자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게 마련이니, 벼슬 사려는 자가 어디에 청탁을 하였겠는가?
<사서루賜書樓>
“뇌물로 벼슬을 사고파는 척족들의 현장 지휘소”
인간은 누구나 사실보다는 보고 싶은 것을 골라 보고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으니, 이는 학문하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임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이란 가장 타당한 가설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인간이 세운 어떤 학문도 단편적인 증거로 꿰어맞춘 논리일진대 감성의 공명(共鳴)을 통해 전해지는 예술 작품의 본의를 어느 누가 논리와 증거로 모두 메울 수 있겠는가? 그저 공명점을 늘려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2부 대밭에 묻힌 사연
신안구가 新安舊家
앞서 필자는 추사가 과거 시험까지 미루며 고증하게 매진했던 이유가 조선 성리학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잣대와 도끼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가 집어든 잣대와 도끼가 무엇이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하였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가 조선 말기 성리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리하고자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에 맞겠다. 주희(朱熹)의 사당을 부수고자 하였던 것일까?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39.2x164.2cm)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주자성리학의 비조(鼻祖) 격인 주희의 관향(貫鄕)이 신안(新安)임에 착안하여 <신안구가新安舊家>를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가문” 정도로 소개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뜻을 해석하면 무난한 해석인데, 문제는 이것이 서예 작품이란 점이다. 필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신 분은 다시 한번 추사의 <신안구가>를 찬찬히 살펴보시길 바란다.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전한고예경명(前漢古隷鏡銘)’법에 ‘장천비(張遷碑)’ 풍의 팔분예서법을 융합하여 대담한 조형을 단행한 추사체라고 설명한 최완수 선생의 학식과 안목이 없는 탓에 이상한 부분이 안 보이시는지?
그러나 조선 팔도에 ‘전한고예경명’이나 ‘장천비’의 팔분예서법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고 그 서체의 특성이 융합된 서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되겠는가? 그냥 여러분의 눈을 믿고 상식적인 선에서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시길 바란다. 이제 보이시는지?
추사가 그리는 ‘새 신(新)’ 자의 모습이 이상하다.
‘新’ 자는 ‘설 립(立)’, ‘나무 목(木)’, ‘도끼 근(斤)’이 합쳐진 글자인데, 추사는 분명 ‘나무 목(木)’ 대신 ‘아닐 미(未)’를 그려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한고예경명’법에 ‘장천비’ 풍의 팔분예서법을 융합한 서체가 어떤 것인지 몰라도, ‘新’을 이렇게 쓰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파격적인 글씨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상한 글자는 또 있다.

추사가 그리는 ‘옛 구(舊)’ 자를 살펴보면 ‘풀 초(艹)’로 쓰여야 할 부분이 아무리 봐도 ‘艹(초)’ 자는 아니다. 추사는 ‘艹’ 대신 대체 무슨 글자를 그려 넣은 것이고, 왜 그리 한 것일까?
필자 생각에는 추사가 그리는 ‘舊(구)’ 자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져 쓸모없는……”이란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창안된 글자가 아닌가 한다. 추사가 설계해낸 ‘舊’ 자의 ‘艹’ 부분은 자형(字形)과 획수를 고려해 판단컨데 ‘또 역(亦)’ 자를 쓴 것이라 여겨지고, ‘꽁지 짧은 새 추(隹)’는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절구 구(臼)’는 밑창이 깨져 쓸모없는 절구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떠신지?
필자의 지적에 동의하거나, 적어도 흥미롭다 여기시는 분은 이제 <신안구가>의 신안(新安)에서 읽어낸 주자성리학이란 의미와 추사가 그려낸 ‘옛 구(舊)’ 자에 담긴 의미를 겹쳐 보시기를 바란다. 추사가 그려낸 <신안구가>을 통해 무슨 의미가 읽혀지시는지?
추사가 그려낸 ‘옛 구(舊)’ 자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거북) 쓸모없는 학문(밑빠진 절구)이란 의미가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밑창이 깨진 절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추사가 왜 주자성리학을 쓸모없는 학문이라 여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구는 곡식을 도정하거나 분쇄할 때 쓰는 도구인데, 밑창 깨진 절구를 고집하면 어찌 되겠는가? 백성들의 먹거리를 풍족하게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공리공론을 일삼으며 정치적 명분을 세우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란다.
이제 추사가 그려낸 ‘옛 구(舊)’ 자의 ‘풀 초(艹)’ 부분이 ‘또 역(亦)’으로 바뀌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亦’자는 원래 “어린아이가 부모 행동을 따라 하며 배우는” 모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글자다. 그렇다면 추사가 ‘艹’ 부분을 ‘亦’으로 바꾼 것은 무언가 모방한 결과 주자성리학의 폐해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문맥이 만들어지는데……. 도대체 무엇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옛 구(舊)’ 자의 앞에 쓰인 ‘편안할 안(安)’ 자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다.
‘安(안)’은 ‘움집 면(宀)’과 ‘계집 녀(女)’가 합해진 글자로, 여자가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돌보니 집안이 편안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추사가 그려낸 ‘安’ 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집안을 돌보아야 할 여자가 마치 집의 지붕〔宀〕을 세게 걷어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안(新安)이 주자성리학을 의미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아녀자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는 것도 흉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풍습 혹은 예법과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 아닌가?
대체 어떤 집안이기에 여자가 저리도 대가 세고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추사가 살았던 조선 말기 사회에서 저리 행동할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실성한 미친 여자거나 위세 등등한 대비뿐인데 미친 여자의 짓거리를 보고 배웠을 리는 없을 테니, 남은 것은 대비의 행실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폐해와 주자성리학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의미이다. 공리공론을 일삼는 주자성리학은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이끄는 정치적 역할 대신 정치적 명분을 세우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권력을 옹호하는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치 혀로는 보리쌀 한 톨 만들 수 없지만, 세 치 혀로 밥과 떡과 술까지 빼앗을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권력을 비호하는 논리를 만드는 일이다.
이쯤 읽으면 추사하고 <신안구가>를 중간부터 읽게 된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추사가 <신안구가>를 쓰게 된 이유가 단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주자성리학을 비난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새 신(新)’의 ‘나무 목(木)’ 부분이 ‘아닐 미(未)’로 바뀐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추사는 왜 ‘木’ 대신 ‘未’를 그려 넣은 것일까?
추사가 그려 넣은 ‘아닐 미(未)’는 ‘아니다(not)’가 아니라 ‘아직(yet, still now)’이란 의미로, “아직은 새로움을 추구할 때가 아니다.”라는 경고와 함께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기 위함이다. 추사가 그리는 ‘新(신)’ 자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려면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일신기덕(日新其德)’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일신(日新)은 태양과 같이 크고 명료한 대덕(大德)을 일컫는 것으로, 바로 “천도(天道)를 새롭게 함”이란 의미가 된다.*
* ≪논어≫의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이란 의미도 ≪주역≫ ‘대축괘’를 통해 읽으면 단순히 “나날이 새롭게……”라는 작은 의미로 이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자께서 ≪주역≫을 어찌 생각하셨는지 생각해보면 ≪논어≫의 구절이 ≪주역≫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천도를 이해하여야 천명을 바로 알 수 있고, 천명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따라 성(性)이 정해지며, 그 성(性)에 따라 백성을 이끄는 것이 바른 정치다. 그런데 왜 추사는 아직이라 했을까?
한마디로 말해 대비를 등에 없고 권세를 휘두르는 자의 힘이 너무 성해 경거망동하면 개죽음을 당하기 십상이니,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우고 치밀한 계획하에 철저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사가 그려낸 ‘신(新)’ 자의 ‘도끼 근(斤)’ 부분이 무슨 뜻이 되는지 알아보자.
≪회남자淮南子≫에 ‘草木未落 斤斧不得入山林(초목미락 근부부등입산림)’이란 말이 나온다. “나무 이파리가 무성할 때 도끼를 들고 벌목하러 입산해봤자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니, 매사에 때가 있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도끼〔斤〕를 통해 “적합한 시기(벌목할 때)”라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손 쳐도, “벌목에 적합한 시기”가 “정치적 거사를 행할 적기”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신다면, 도끼가 천자(天子)의 힘을 상징하는 것임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이제 ‘설 립(立)’, ‘아닐 미(未)’, ‘도끼 근(斤)’을 하나의 문맥으로 엮어 추사가 그려낸 ‘새 신(新)’ 자에 담긴 의미를 읽어 보자. 립(立)은 ≪논어≫ <위정> 편의 ‘이립(而立)’을 빌려 읽으면, “신(新)의 뜻을 세우고(천도를 바르게 세우려고)”라는 의미가 되며, ‘근(斤)’은 “벌목하는 도구(개혁의 수단)”가 되는데,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未〕라는 의미가 익힌다. 추사가 그린 도끼의 도낏자루가 구부러지고 짤막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부 추사의 가면극
화법유장강만리 서집여고송일지
畫法有長江萬里 書執如孤松一枝
조선 문예사에서 추사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영・정조 시대를 조선 문예의 황금기로 평가하는 학자들에겐 조선 고유의 문예적 성과에 냉담 혹은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추사의 문예관은 조선 문예의 독자성과 추진력을 가로막는 암초로 보인다. 18세기 조선 문예의 자생적 근대성은 19세기 추사라는 암초를 만나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 근대로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8세기 조선 문예의 자생적 근대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여겨온 추사의 문예를 제대로 읽고 있었던 것인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완당전집≫을 거듭해서 읽을수록 그의 문예론은 중국의 문예론과 비슷한 듯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추사의 문예론을 중국 문예론의 범주에서 해석하고 규정했던 것은 어쩌면 우리가 그의 글을 익숙한 중국 문예론의 연장선상에서 관성적으로 해석한 까닭에 그의 본의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는 아닐까?
추사가 고증학에 매진했던 이유는 성리학에 의해 훼손된 유학 본연의 학풍을 되살리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추사가 언급한 서예사의 정통 계보와 유학의 변천사를 겹쳐 보면 어떤 그림이 나오는가? 유학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리학으로 귀착되었고,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은 송은 중국 역사상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최초의 제국이다. 송의 멸망은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었다.
우주관에서부터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믿음과 기준이 무너져 버리는,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망국의 설움과 혼돈 속에서 술에 취해 현실을 입고자 했던 한족 출신 학자들이 조금씩 술에서 깨어나며 깨닫게 된 망국의 원인은 바로 공리공론에 빠진 성리학이었고, 유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론 중 하나가 고증학이었다. 추사가 서예사에 큰 족적을 남긴 왕희지, 구양순, 저수량 같은 걸출한 인물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원대를 주목하라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송의 멸망 과정에서 노출된 성리학의 폐해와 문제점에 대한 한족 학자들의 우려와 자성, 그리고 저항정신이 그 당시 선비들의 문예작품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된 선비의 정신은 도리(道理)가 흐려진 현실에 도리를 세우는 일이고, 이는 선비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사회적 책무이다. 이것이 선비의 문예가 사의성(寫意性)을 중시하게 된 연유이다.
참된 서예에 대해 추사는 “가슴속 기세가 흘러나와 글자의 안〔裏〕과 행간에 이슬처럼 맺혀야…… 〔氣勢在胸中 流露於字裏行間(기세재흉중 유로어자리행간)〕”라 하였다. 글자에 안〔裏〕이 있다면 당연히 글자의 바깥〔表〕도 있을 것이고, 행간(行間)이 생기려면 글자를 연이어 써야 한다. 무엇을 글자의 거죽〔表〕이라 하고 무엇을 안〔裏〕이라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보자.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 ‘나라 국(國)’ 자를 쓰든 이완용이 ‘나라 국(國)’ 자를 쓰든 그것이 ‘나라’를 뜻하는 것임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 글자의 거죽〔表〕이고, 독립투사가 생각하는 ‘나라’와 매국노가 생각하는 ‘나라’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글자의 안〔裏〕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씨를 보고 그 글씨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떤 현상을 특정한 감정 혹은 느낌과 연결시키는 일은 대부분 경험과 학습의 결과이다. 더욱이 글자란 특정 표식과 특정 의미를 결합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을 통해 결정된 까닭에, 개인의 필체 속에서 약속된 의미 이상의 느낌을 간취해내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글자는 사회적 약속인 까닭에 특정인이 특정 글자에 개인적 감회를 담아두었다 해도 타인이 그것을 저절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예술가는 작품의 본의를 감상자의 감각에만 의지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약속된 어법이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상징과 비유, 나아가 코드라고 부른다.
화법유장강만리 서집여고송일지 畫法有長江萬里 書執如孤松一枝
이 작품에 대하여 최완수 선생은 “화법은 장강이 만 리에 뻗친 듯하고, 서세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고 해석하며 고예(古隷)의 필의로 후한(後漢) 팔분서체의 ‘곽유도비(郭有道碑)’의 고예 필법을 살려 웅건하고 질박하게 펴낸 걸작이라 소개하고 있다.
한편 미술사가 유홍준 선생은 “그림 그리는 법에는 양자강 일만 리가 다 들어 있고, 글씨의 뻗침은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 같네.”라고 해석하며, 추사의 글씨 중 글자 구성에 멋이 한껏 들어 있는 명품으로, 그 내용은 예술의 정신성을 양자강 일만 리와 노송의 가지에 비유한 것이라 하였다.
두 사람의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크게 보면 ‘고예의 필의’를 살린 작품이란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작품의 필의(筆意, 작품에 담긴 내용)을 서체(書體, 형식)를 통해 감상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추사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이름도 생소한 ‘곽유도비’의 고예의 필법을 알아야 하고, 날카로운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일반인은 소위 전문가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입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입은 얼마나 정확한 것이고, 무엇보다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긴 한 것인지 묻고 싶다. 장강만리(長江萬里)가 왜 그림 그리는 법에 필요하고 고송일지(孤松一枝)가 글씨 쓰는 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려면 먼저 장강만리와 고송일지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장강(長江)이 중국의 양자강(揚子江)을 지칭하는 것임은 틀림없으나, 문제는 왜 하필 양자강이라는 특정 대상과 화법을 연결시키고 있는가이다. ≪남사南史≫에 ‘장강천참(長江天塹)’이란 말이 나온다. ‘양자강은 천혜의 요새’라는 뜻으로, 양자강은 중국 역사상 방어선 또는 저항군의 근거지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그림 그리는 법과 군사적 요새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한마디로 선비의 그림은 저항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선비의 그림이 표현 대상의 재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비의 그림이 왜 사의성(寫意性)을 중시했겠는가? 저항운동을 공공연하게 펼칠 때 야기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고송일지(孤松一枝)’는 무슨 뜻이 될까?
≪도잠陶潛≫에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이란 말이 나온다.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 우뚝하구나-인용자) 얼어붙은(힘겨운 시절) 험준한 고갯마루를 홀로 지키고 있는 뛰어난 지도자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나무(지도자)는 왜 홀로 고갯마루에 버티고 있는 것일까?
≪송사宋史≫에 ‘王琪性孤介 不與時合(왕기성고개 불여시합)’이란 표현이 나온다. (왕기는 성품이 고고하고 강직하여 당시의 세태와 타협하지 않았다-인용자) 어려운 시절이 닥쳐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생각해 보라. 고개마루에는 관문이 있고 관문(關門, 국경・요새 등의 길목에 세운 성문-인용자) 안쪽에는 보호해야 할 백성과 지켜내어 내야 할 체제가 있으니, 고송(孤松)이 고갯마루에 버티고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고송일지’의 의미는 ‘고송제일지(孤松第一枝, 고송의 제일 높은 가지)’로 읽으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진다. 나무의 맨 윗가지의 방향에 따라 나무가 기울어진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이니, ‘고송제일지’란 홀로 저항하고 있는 지도자의 의향(意向)을 비유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둘 부분이 있다.
추사가 분명 ‘서집(書執)’이라 써놓았음에도 그간 많은 추사 연구자들에 의해 ‘서세(書勢)’로 읽고 해석되어온 부분을 원문에 따라 ‘서집(書執)’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동안 ‘서집(書執)’을 ‘서세(書勢)’로 읽게 된 이유는 ‘고송일지(孤松一枝)’를 서체(書體)로 이해했기 때문인데, ‘고송일지’는 서체가 아니라 서의(書意)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은 서의가 정확히 어떤 것일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松柏之有心也 貫四時而不改柯易葉(송백지유심야 관사시이불개가역엽)’이라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이 지나도 가지와 잎을 바꾸지 않으니, 이는 그 절개와 지조가 굳건하기 때문이다-인용자) 소나무의 미덕은 추위에 굴하지 않는 푸르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꾸지 않는 가지〔枝〕에 있단다. 결국 ‘고송일지’의 미덕은 지조에 있으며, 지조를 지키려면 뜻을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까닭에 ‘기세 세(勢)’가 아니라 ‘잡을 집(執)’이라 쓰고 있는 것이다.
畫法有長江萬里 화법유장강만리
書執如孤松一枝 서집여고송일지
“장강만리를 취한 화법은 (장강 만 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고송일지를 서의(書意)로 삼은 작품과 같다(절조와 저항정신이란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 추사가 선비의 문예에서 가장 중요히 여긴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앞서 필자는 추사가 이광사를 비난하며 뽑았던 칼날이 너무 무디고, 그의 학식을 고려할 때 칼춤 또한 막무가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추사 생각에 선비의 문예는 어지러운 세상에 도리를 세우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저항정신이 있어야 완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추사가 조선 성리학을 통해 권력을 틀어쥔 권세가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병폐를 치유하려면 조선 성리학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언행은 정치적 탄압으로 돌아올 것이 자명하니, 그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힘을 기르며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쓸데없는 시빗거리를 피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읽고자 하면 우선 작가가 남긴 흔적에 충실해야 하거늘, 원작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설픈 해설자일수록 함부로 오자(誤字) 타령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나 원작자가 남긴 흔적이 분명함에도 해설자가 자기 수준에 맞춰 멋대로 원작자의 작품을 난도질해대는 짓은 해설자가 어줍지 않은 솜씨로 재창작하겠다고 나선 것과 다름없으니 어이없는 일이다. 추사의 문예작품이 해설자의 첨삭과 지도가 필요한 수준이라 말하고자 함인가?
글을 마치며
추사의 작품들과 씨름하며 예상치 못한 그분의 면모와 마주칠 때마다 내 눈에도 보이는 이것을 저명한 추사 연구자들이 왜 보지 못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잘못 본 것 아닐까?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몇 번을 자문해보고 책상을 벗어나 숨을 고르고 다시 확인했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필자가 읽은 30여 종의 추사 연구서들이 모두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으니,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상식일 터이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그러나 추사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 정교한 풀이 과정 끝에 정답이 놓여 있는 수학 문제를 칠판 가득 써놓고 재주껏 풀어 보라고 팔짱 끼고 서 있는 장난기 많은 선생과 만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추사 선생의 실력을 믿었기에 부정할 수 없는 명료한 정답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선생이 흐릿한 성격이 아님을 알았기에 어정쩡한 답은 틀린 답으로 간주하였으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계속 찾게 되었다. 결국 추사 선생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에 필자같이 아둔한 사람도 선생의 화려한 굿판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겠다.
◎ 이성현, ≪추사코드≫, 들녘, 2016
☞ 저자 이성현 : 역사학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20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동아미술상 수상작가전을 비롯한 150여 회의 단체전 그리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현역 화가이다.
30년간 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지나치게 문헌 연구 중심으로 경도된 미술 이론들을 접하며 많은 문제점과 병폐를 절감하였다. 이에 화석화된 미술사 연구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작품 중심의 연구 풍토를 환기시키고자, 정설로 자리매김된 기존 한국미술사에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바른 미술사는 어떻게 정립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화가의 눈으로 확인한 추사의 모습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