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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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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춘추오패의 우두머리, 제나라의 번영과 몰락, 장웨이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6-05 09:30
  • 조회188
  • [보도자료]
  • 2026-06-05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춘추오패의 우두머리, 제나라의 번영과 몰락, 장웨이

 

잊혀진 제나라를 통해 중국 문명을 다시 읽는다

대륙 진나라와 해양 제나라의 문명충돌과 융합의 문제 제기

춘추오패 우두머리였던 제나라의 문명을 심층적으로 조명

중원이 중화 문명의 요람이라는 생각은 단편적이고 부정확하다

평론가들이 새로운 눈으로 제나라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20년 넘게 몸소 경험한 것과 글쓰기 경륜이 만나 생존적 깨달음으로 가득한 걸작을 탄생시켰다. 평론가들이 새로운 눈으로 제나라를 다시 보게 만든 작품이다.” _ 중화독서보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고 용기와 책임감으로 넘치는 위대한 책이다.” _ 연태만보

 

저자의 내면에 농밀하게 스며들어 있는 비극적인 정서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정한 정신의 여행이자 문화의 여행이며 문명의 여행이다.” _ 연조도시보

 

 

여는 글 방심이란?

 

향기로운 마음, 방심(芳心)’이라고 하면 으레 사랑스러운 여인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막 소녀에게서 움트기 시작한 사랑의 마음이 연상된다. 특별한 순간 그녀의 마음에서 뿜어나오는 향기야말로, 한창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 향기에 취하여 비틀대고 머리가 멍해지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방심은 정말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방심은 한 남자가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할 상황에 빠져들도록 만들 수 있다. 그는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거나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은 극치의 감정에 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자 자기조차 잊게 만드는 절절한 갈망이다. 바로 이때 그는 죽음의 위기가 닥칠지라도, 그 어떤 어려움과 위험을 만날지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지라도 충분히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여자는 마음이 끌리는 남자를 만났을 때 사랑의 마음이 싹트기 마련이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알게 되었을 때부터 여러 번을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 눈빛을 보내거나 말을 건넨다. 이렇게 연애는 시작된다. 이때 두 사람은 얼굴이 붉어지고 귀밑이 화끈거리면서 상대방의 이름만 들어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쩔쩔맨다. 만약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그녀)의 눈빛이 전해지면, 숨기기 어려운 당황스러움과 달콤함에 온몸이 떨려오고 그야말로 버텨낼 재간이 없어지고 만다. 만약 이 시기에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다면, 두 사람은 낮이나 밤이나 상대방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똑똑히 보이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그 무엇도 둘 사이를 막지 못한다,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그녀() 냄새마저도 마치 그녀()의 몸매와 얼굴처럼 또렷하게 얼굴 앞으로 휙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랑의 냄새이다. 그것은 먼 곳에서 전해진다. 천리만리 먼 거리라 할지라도 이 냄새를 막을 수 없다. 물론 이 냄새는 극도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과 마음이 비강에서 반응하여 만들어낸 착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고, 그 유래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사랑에 빠진 마음을 왜 향기로운 마음, 방심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본래 마음에는 정말로 냄새가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마음은 정말로 향기롭다.

 

방심은 부드러운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뜨거움을 배태하며 축적하고 있다. 이 맹렬함과 뜨거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잠재된 온갖 것들이 당사자조차도 놀랄 일들을 매번 만들어낸다. 그때마다 그 많은 노래와 눈물, 그 많은 질주와 간구, 끝없는 호소, 밤의 불면이 용솟음쳐서는 서툴고 어눌한 사람조차도 시인으로 변모하게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확하기 그지없다. 꽃망울이 막 터져서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은 사람의 일생과 꼭 같다.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는 아름다운 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마침내 자신의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천천히 시들다가 우수수 떨어지고 만다.

 

 

오랜 연애와 같은 인생

 

사람이 한평생 사는 날은 3만 일 정도이다. 과연 긴 것일까, 짧은 것일까? 아쉬운 걸까? 쉬운 걸까? 아마도 각자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인간이란 총총히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말에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3만 일 남짓의 나날이 빠르게 휙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날들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내용이 풍부하고 리드미컬한 대본과 같다. 결코 아무런 볼거리 없이 건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길고 긴 괴로운 연애와 같다. 이 세상과 서로 알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처음엔 보는 것 모두가 신기하다가 나중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어진다. 그 안에는 흥미진진한 몰입,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구애, 격렬하고 가혹한 충돌이 들어 있다. 그 뒤로 조금씩 적막해지다가 최후의 이별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과정이다.

 

제나라의 괴인

 

방사와 신선술사는 주로 제()나라에서 왔다. 제나라에 대해 말하자면 한바탕 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제나라는 그야말로 매우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국경선은 계속 바뀌었는데, 국세의 강약에 따라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오늘날 산동(山東)반도 일대였다. 서쪽으로 제남(濟南), 남쪽으로 태산(泰山)에 이르렀고, 교래하(膠萊河) 이동이 배후지였다. 제나라의 수도는 오늘날의 임치(臨淄) 일대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고 영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물고기와 소금을 얻기 쉬워 풍요로웠다. 또한 망망대해와 가까웠기 때문에 국민의 성격과 사고방식이 내륙 사람들과 상당히 달랐다.

제나라 서쪽 변경에 이웃하고 있던 나라는 노()나라이다. 노나라에는 바다가 없었기 때문에 풍습과 기질 역시 제나라와 많이 달랐다. 노나라 출신인 성인 공자(孔子)는 생전에 많은 곳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많은 제후국의 배후지를 가보았다. 하지만 그는 제나라의 심장부, 즉 교래하 이동 지역은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방사들이 가지고 있던 비장의 능력은, 바로 공자가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 괴력난신(怪力亂神)’이었다. 제나라의 대학자 추연(鄒衍)*에게서 영감을 얻은 방사들은 그의 대구주(大九州)’설을 받아들여 실천했다. 그들은 바다 밖 세상을 찾기를 꿈꾸었으며 그곳에 정말로 신선이 살고 있다고 여겼다. 방사들의 주요 집결지는 지금의 봉래(蓬萊), 용구(龍口), 내주(萊州) 일대 및 동쪽 곤륜산(崑崙山)과 영성(榮城)곶 등이었다. 방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신기루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신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다. 연해 지역이었던 만큼 고기 잡는 이들이 많았고 각종 바다 고래를 자주 목격했으며, 직접 가보고 살핀 섬들도 많았고 구비로 전승되는 이야기도 많았다. 이런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해안 지역 사람들 특유의 상상력과 사유 방식을 형성했다.

 

* 추연 : 기원전 305~기원전 240.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의 제(, 기원전 1046~221)나라 사람이며, 제자백가 중 음양가(陰陽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추연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보다 조금 뒤의 사람이다. 제나라 땅은 전통적으로 미신적 · 주술적 · 신비적 사상의 경향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국 재래의 오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이원론(陰陽二元論)을 결합하여 음양오행사상을 구축하였다. -인용자

 

서쪽 사람들이 보기에 괴상한 사람들이 제나라 동쪽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진시황이 거리낌 없이 방사들을 죽이던 그 시기, 동쪽 연해 지역에서는 여전히 많은 방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동쪽으로 순행하다가 제나라 낭야(琅琊) 일대에서 또다시 방사들을 죽였다. 계속 동쪽을 향해 나아가던 진시황이 방사들의 근거지에 근접할 즈음, 불로장생의 신선술을 말하면서 감히 진시황을 만나길 청하는 이가 있었다.

 

서복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으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 그는 바로 서복(徐福)이었다. 사기(史記)를 비롯한 정사에는 서불(徐市)*로 기록되어 있는데 후에 무슨 영문에서인지 서복으로 통용되었다. 아마도 후세 사람이 그가 성공적으로 진시황을 속이고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에 착안하여, 어쨌든 제나라를 위해 원한을 쏟아냈으니 결국 큰 복을 쌓은 것이라 여겼던 것이리라. 서복의 수완과 속셈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서불(徐市) : ()나라 낭야(琅邪) 사람.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라고도 한다. 진시황(秦始皇)에게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과 신선이 있다고 상서하면서 이름이 봉래(蓬萊)와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했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어린 남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 바다로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일본에 서불의 무덤이 전한다. -인용자

 

서복이 제나라 해변의 방사라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논쟁이 되는 것은 그의 구체적인 관적(貫籍, 본적)과 최후의 출항지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교동(膠東)반도 남쪽 출신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봉황액(逢黃掖), 즉 지금의 용구 일대 사람이라고 한다. 출항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고대 항해학의 각도에서 볼 때 용구나 봉래만에서 바다를 건너, 먼저 요동반도에 도착한 뒤 다시 일련의 섬들을 따라 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야만 계속해서 풍랑을 피하고 물을 보충하여, 최종적으로 한반도나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항해 조건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복이 출항한 시기는 콜럼버스에 비해 1,700여 년이나 이른 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중국 항해사에 있어서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처음에는 단지 신선을 찾고 선약을 구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지만, 결국엔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남겼다.

서복은 진시황의 신임을 얻어야 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둘러대야 했다. 예전의 방사들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참수되고 말았다. 진시황은 장성(長城)을 쌓고 육국(六國)을 평정했으며, 문자를 비롯해 수레바퀴의 폭과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가 한 일은 모두 전무후무한 대사업이자 실로 엄청난 기획이었다. 이런 그였으니, 아무 이야기나 늘어놓는 해변 지역의 괴인들을 멋대로 죽이는 것쯤은 굉장히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약간 달라졌다. 진시황은 이미 나이가 들어 쇠약해졌고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영웅적인 기개는 남아 있었지만 과거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여러 차례 동쪽을 순시한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신선이 출몰한다는 바다를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여전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 바로 불로장생이었다.

 

휘돌아다니다

 

교동반도 동쪽의 원주민은 내이(萊夷) 사람으로 불린다. 이들의 내력에 대해서는 심혈을 기울여 추측해야 한다.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중의 일부 내지 대부분은 아주 먼 옛날 바이칼호 이남에서 이 광대한 교동반도 지역으로 왔으며 용맹한 유목민족에 속한다. 그 당시 요동반도 이남의 노철산(老鐵山) 해협에는 아직 침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즉 옛 등주와 동북 지역 사이에는 커다란 수역(水域)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육지로 서로가 통해 있었다. 그들은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혹한지대에서 줄곧 남하하여 사계절이 분명하고 토지가 비옥한 교동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새로운 지리환경 속에서 준마를 몰던 민족은 점차 마음을 다잡고서 뽕나무 심고 농사지으며 정밀농업의 초창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이곳에서 출토된 도기(陶器)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고고발굴을 통해 계속해서 증명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내()나라를 세웠다. 가장 흥성했던 시기의 내나라 영토는 매우 광활했다. 오늘날의 교동반도 동쪽을 포괄했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황하(黃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태악(泰岳)에 이르렀다. 이는 후에 제나라가 가장 강성했을 때의 강역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어찌 됐든 간에 내나라 사람들은 안분지족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내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인 농경민족과는 달랐다. 유목하던 야성이 그들의 혈관 속에 잠복되어 있다가 자극을 받으면 바로 뛰쳐나와서 그 옛날 휘돌아다니던 습관을 회복했다.

 

내이 사람들의 준마는 많이 줄었고, 누구나 말을 탈 수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있었다.

 

가만히 있고자 하지 않으며 호기심 많고 활발한 동시에 야심이 넘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나라 동쪽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이후에 정말로 제나라 문화와 정치에 영향을 미쳤는데, 제나라의 정치관과 문화관은 죄다 내이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제나라의 왕자부터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런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넓은 옷소매가 펄럭이는 모습은 마치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있을지라도 언행이 매우 가벼웠으며 때로는 매우 충동적이었고 행동도 늘 과장되었다. 이웃에 있던 작은 노나라와 비교했을 때 제나라는 물기가 지나쳤다. 제나라는, 흙에 근본을 둔 노나라의 탄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나라는 그다지 진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제나라는 갈수록 놀이터처럼 되었으며 법률과 기율과 예의가 엄정한 나라는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훗날의 제나라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제나라 환공(桓公)과 위왕(威王) 이후, 민왕(閔王)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지금도 일본과 한반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지역에서도 제나라 동쪽에서 온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사방을 휘돌아다니던 민족은 신기한 것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들은 이리저리 구경하고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주로 상업적인 기회, 그리고 비옥한 토지와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과 강을 찾아다녔다. 만약 정치에 종사할 기회가 주어져서 사회와 민중을 다스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서슴없이 재능을 나타냈을 것이다.

 

많은 여우들

 

포송령(蒲松齡)은 전형적인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임치에서 보냈다. 그 출생지는 임치현 포가장(蒲家莊)이다. 이 마을 동쪽 끝 저지대에는 지금도 샘물이 있고, 샘물 옆에는 오래된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유천(柳泉)이라고도 한다. 포송령이 전한 여우 이야기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며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이토록 뛰어난 여우 이야기는 없었으며 그 이후로도 다른 사람은 여우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작했다고 하지 않고 전했다고 한 까닭은 요재지이(聊齋志异)의 기록의 강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민간 이야기를 총수집한 것으로, 주요 주제는 동물이다. 수집자 포송령의 개인적인 재능과 문학적인 소양에 대해서는 물론 의심할 필요가 없다. 기록의 정확함과 생동감, 문장의 멋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은 이 책이 후세에 전해지며 불후의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들이다.

 

*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은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관소설가극작가로, 대표작으로는 기괴 소설 모음집 요재지이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시험에서 반복적으로 낙방하며 가정교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말년에야 공생[擧人]으로 합격해 문학 창작에 전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용자

 

제나라 지역, 특히 동쪽 연해 일대에는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는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풍습은 몇몇 개인의 역량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지리환경에 의해 생겨나고 변천한 것이다.

 

포송령의 책에서 여우는 인간에게 거의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대자연이란 신뢰할 만하며, 신선과 동물이 참여하는 생활이야말로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의 책은 제나라 특히 교동반도야말로 여우의 고향임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늘 일깨워준다.

 

동래와 서래

 

오늘날까지도 교동의 용구 사람들은 어떤 이들을 서래(西萊) 사람이라고 부르곤 한다. 용구 사람들은 발음만 듣고서도 쉽사리 서래 사람임을 잘 알아낸다. 서래 사람이라는 말에는 배척의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사실 원류를 따지자면, 서래는 제나라에 의해 동쪽으로 내몰리기 이전 시기에 내나라가 가장 흥성하고 발달했던 단계에 존재했다. 그 당시 내나라는 국토의 면적에 있어서도 제나라의 전성기에 비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서래의 북부는 바다로 이어지고, 남쪽은 거()나라와 접하고 있었으며, 서남부는 내천(萊芜)을 포함하고 있었다. 서래의 수도는 대략 교래(膠萊) 평야의 치하(淄河) 유역 중 하류에 있었다. 후에 강() 씨가 산동반도 동쪽에 봉해졌는데, 이때는 서주(西周)가 안정되어 변경을 개척하던 중요한 단계였다. 강씨가 처음 산동반도로 왔을 때에는 그야말로 기반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토지는 협소하여 겨우 노나라 서쪽과 반도 사이의 좁은 틈에서 살아가야 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강대한 내나라와 잘 지내야 했다. 처음에 강씨 제나라는 내나라 사람들의 모든 풍속과 습관을 존중하면서 절대 그들을 비위를 건드리거나 언짢게 하지 않는 등 많은 부분에서 타협했다. 내나라는 동쪽의 가장 풍요로운 평원에서 대대로 오래도록 지내왔는데, 그곳은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조건이 가장 뛰어난 지역이었으며 농업기술이 선진적이고 수공업도 매우 발달했다. 이는 모두 서주(西周)가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제나라가 내나라와 투쟁하며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양국이 대치했던 기간은 꽤 길다. 내나라와 제나라가 영구(營丘)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은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영구는 치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마도 당시 내나라 도성이었거나 아니면 서쪽에 있던 중요 도시였을 것이다. 영구의 소유주가 바뀐 것은 내나라와 제나라의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사건이었다. 양공(襄公) 6(기원전 692)에 제나라가 내나라를 멸한 것은 바로 내나라가 영구를 잃고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내나라의 국력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내나라가 완전히 사라질 지경은 아니었다. 내나라는 ()’라는 지역으로 옮겨 갔다. 많은 전문가들은 오늘날 용구시 남쪽에 있는 귀성(歸城)’이라는 촌락이 라고 판정했으며 이곳에는 상당한 고고학적 근거도 존재한다. 현재의 귀성 고성 유적지에는 판축법(版築法, 흙을 다져 담이나 성을 쌓는 법)으로 쌓아 올린 높은 성벽이 남아 있다. 이곳은 내나라가 동천한 이후의 도성 유적지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용구는 내나라가 동천한 이후의 수도가 되었다. 동천 이후 내나라를 동래라고 한다. 그리고 동천 이전의 내나라 시기는 이에 대응하여 서래라고 한다.

 

부끄러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부끄러워지는지, 그 상황과 반응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익숙히 알고 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가장 기본적이고 더 흔한 표현의 종류인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이미 거의 남아 있지 않기까지 한다. 즉 살아가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거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대체 생활의 진보인가, 아니면 퇴보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고통과 기쁨을 느끼고 웃고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끄러움은 종종 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결점의 하나로 인식된다.

 

예의범절이 무질서에 빠진 혼란한 시대와 사회에서는, 돈과 욕망이 삶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 마련이다. 이성 간에 부끄러움이 드물어졌음은 물론이요, 기타 모든 방면에서도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뻔뻔스럽게 간주되는 행동을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기도 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하기도 한다. 남녀간의 지나친 경계는 불필요하겠지만 이성 간의 방자함 역시 삼가야 한다. 사람에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적당한 부끄러움이 필요하다. 부끄러울 때 붉어지는 얼굴은 결코 보기 싫지 않다. 도리어 더욱 건강하고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현대인은 금욕주의에 콧방귀를 뀌지만, 육욕주의는 훨씬 나쁜 것이다. 부끄러움의 보존은 정상적인 인성의 보존이며 이는 금욕주의와는 대체적으로 무관하다.

 

한 그루의 나무

 

교동에 사는 어떤 노인의 집 마당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나무는 노인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언제나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또 그는 벌레를 잡아 주고 물을 주며 살뜰히 나무를 보살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나무 상태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다. 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애만 태웠다. 그 당시에는 병든 나무를 치료하는 것이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농사일을 하면서 의료 업무까지 병행하던 적각의생(赤脚醫生)만 있었지 나무의사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결국 그 나무는 점점 시들어갔고 몇 달 뒤에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노인은 몸이 점차 안 좋아지더니 나중에는 결국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적각의생이 얼른 와서 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노인은 거절하며 말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네. 나무가 가버렸으니 나도 가야지.” 적각의생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늘 하던 대로 노인에게 주사를 놓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이틀 뒤에 노인은 정말 세상을 떠났다.

 

* 적각의생(赤脚醫生) :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에는 적각의생(赤脚醫生)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맨발의 의사라 불리던 이 사람들은 중국에서 의료 서비스가 가장 취약한 지역에서 1차 의료를 지탱하던 이들이었다. -인용자

 

 

온갖 풀과 문장

 

중국 문학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큰 문인들이 훌륭한 의원인 경우도 많고 혹은 의학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서 비록 전문적인 의원은 아니더라도 의술가들이 말하지 못한 현묘한 이치를 언급하기도 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조설근(曹雪芹, 중국 4대 고전소설 중 하나인 홍루몽의 저자)도 그랬고 소동파(蘇東坡) 역시 그랬다. 유사한 예는 아주 많다. 소동파는 의술가들이 늘 인용하는 대실약허(大實若虛, 크게 실하면 도리어 허한 듯이 보인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온갖 풀에 대해 알게 되면 의술가가 되고, 온갖 풀에 애정이 생겨나면 문인이 된다. 형상사유의 생동감, 변증사상의 정밀함은 좋은 문장만이 갖추고 있는 속성이다.

 

고대의 문인들이 단약을 좋아했던 이야기는 아주 많다. 장생을 탐하느라 급급하여 약효가 강한 단약을 먹고서 예기치도 못한 일을 겪기도 했던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했다. 그들은 자양식을 잘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비밀인 단석(丹石)도 있었다. 연단은 일찍이 위진(魏晉) 시기 일부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에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시문을 망치기도 했다. 대시인 이백(李白)은 간절히 신선을 찾고자 했던 사람인데 이와 관련된 그 풍부한 내력과 열정은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금석과 단약의 전문가들, 그리고 도사들에 대한 미련은 그 행적 곳곳에 드러나며 그의 시에도 자주 보인다.

 

학 한 마리 동쪽으로 날아 푸른 바다 건너니,

멋대로 풀린 마음이 어디 있는지 어찌 알리오?

신선은 크게 노래 부르며 내가 오길 기다리는데,

분명 옥수(玉樹)에 올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을 테이지.

()와 순()의 일은 놀랄 바가 못 되고,

나에 대한 시끄러운 말들도 정말 별것 아니라네.

큰 거북아! 삼신산 싣고 떠나가지 말지니,

내가 봉래산 꼭대기에 오르려 하나니.

 

바닷가에서 온 손님이 영주에 대해 이야기하길, 안개 자욱하여 그곳 찾기는 정말 어렵다고 하네라고 시작하는 또 다른 시에는 이렇게 읊었다.

 

높고 푸른 하늘 드넓어 끝이 보이지 않고,

해와 달이 금대(金臺)와 은대(銀臺)를 환히 비추네.

무지개를 옷 삼아 바람을 말 삼아,

구름 속 사람들 줄지어 내려오네.

호랑이가 슬()을 연주하며 난조가 수레를 끄는데,

신선들은 삼대처럼 많이도 늘어섰구나.

 

이상을 통해 볼 때, 이백이 동해의 삼신산과 신선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알 수 있다. 선경에 대한 추구와 선약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한 가지인 법. 서복이 배를 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불로장생의 약이었다. 이백도 서복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발 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참으로 잊기 어려운 경쾌한 옛 시가 있다.

 

나 이백이 배를 타고 막 떠나려는데,

홀연 기슭에서 발 구르며 노래하는 답가(踏歌) 소리가 들려오네.

도화담 연못 깊이가 천 자나 된다 한들,

왕륜(王倫)이 나를 배웅하는 정에는 미치지 못한다오.

 

이 짧은 시는 마치 말을 하듯 평이하지만 결코 내용이 가볍거나 얕지 않으며 장난삼아 지은 것이 아니다. 시인이 배를 타고서 곧 도화담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기슭에서 발로 땅을 구르며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에 이백뿐 아니라 각 시대의 모든 독자들도,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에 있는 왕륜의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발로 땅을 구르며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는 답가 소리가 무엇인지 독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답가무(踏歌舞)’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답가무란 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발로 땅을 구르며 노래하고 춤추는 군중 가무로서, 비교적 고정적인 춤사위와 연출 양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언어에 구애되어 고증할 필요까지는 없고, 오히려 간단하게 해석하는 편이 시의 본래 의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천진무구하고 꾸밈없는 왕륜이 발로 땅을 구르며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이백을 배웅하러 왔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73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깨어난 뒤 꿈에 근거하여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았다. 이것이 미신이었던 우연이었든, 어쨌든 모든 것이 정말 그의 예상대로 되었고 한 시대의 성인은 예정대로 인간 세상을 떠났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에게 공자는 엄숙하고 거룩한 위대한 스승의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정작 공자 자신은 평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순간조차 이러한 색채로 충만하다. 공자는 꿈을 꾼 뒤 혼자서 노래하길,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허물어지려는가? 철인이 시들어 떨어지려는가?”라고 했다. 공자의 제자가 그때 밖에서 돌아와 그 근처를 지나다가 이 노래를 듣고서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즉 스승의 신상에 장차 큰 문제가 생길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과연 공자는 그 제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공자는 평생 겸손하고 품격이 고상한 군자였지만 그의 마지막 노래에서는 자신이 철인임을 드러냈다. 그는 세상과 이별을 고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 결국 자신의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허물어지는 큰일과 연결지으며 가장 심각한 비유를 했던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고대의 많은 성현과 철인이 평생 분주히 다녔던 것 자체가 소박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들의 소박함으로 인해 도리어 물욕에 빠진 세상으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들의 일생은 모두 진실한 소리, “발 구르며 노래하는 소리와 같았다. 평생 열정적으로 손님을 대접했던 그들, 어린이처럼 순박했던 그들은 모두 왕륜과 같은 부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나무수레

 

어떤 현대인이 공자가 주유했던 노정을 따라간 적이 있다. 그 목적은 오로지 성인이 보고 들은 것과 느낀 것, 그리고 분주히 돌아다니던 고생스러움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책에 기록된 여정은 공자의 행적을 간추려서 그 주요 부분만을 뽑아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공자가 겪었던 모든 우여곡절과 피로를 다 망라할 수 있겠는가?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는, 그 당시 공자는 나무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는 덜컹거리는 수레를 타고서 질퍽한 길 위를 지나며 땀과 먼지에 시달렸다. 수레를 끄는 것은 말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야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길을 더디게 만드는 상황이 공자의 주유를 더욱 아득하게 만들었다.

 

공자는 자신의 나무수레를 대단히 아꼈다.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수제자 안회(顏回)가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빈곤했던 안회의 아버지는 슬픔에 빠진 공자를 찾아와서 말하길, 안회가 평생 공자를 따랐는데 지금 관()도 곽(, 관을 담는 궤)도 없으니 나무수레를 팔아서 곽을 마련하고자 했다. 공자는 안회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에 잠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며 울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안회의 늙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공자는 자신의 나무수레를 지켰다. 그 나무수레가 공자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과 함께 그토록 먼 길을 달렸으며 이미 그 둘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자의 몸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미 공자 자신과 다름없었다.

공자는 나무수레를 탔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느림을 탓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른 현대에, 이 모든 것을 균형을 잡아주고 이 모든 것을 두드러지게 해줄, 느리고도 차분한 항구적인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나무수레야말로 바로 그 항구적인 것이리라.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다

 

어떤 음악을 들은 이가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바로 음률을 가장 잘 알고 음악 방면에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갖고 있던 공자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날 공자의 수레는 마침 임치의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성 남쪽 문에 이르렀을 때, 공자는 한 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그 아이를 안아 수레에 태웠다. 이와 거의 동시에 성안에서 갑자기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는 잠시 숨을 죽인 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즉시 수레를 모는 이에게 서둘러 채찍질을 하게 하여 연주 현장으로 내달려갔다.

이날 공자가 들었던 것은 ()’라는 음악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옛 음악을 연주하면 봉황이 날아왔다고 하니, 그 길함과 장중함과 화려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당시에 들었던 소악은 이미 적어도 천오백여 년 동안 전해져온 것이니, 이 얼마나 오래된 곡인가! 그런데 제나라 악공의 뛰어난 솜씨와 더불어 성대한 진용을 갖춘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제나라에서 연주된 이 옛 곡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제나라 임치의 예악이 어느 경지까지 발전했는지, 지금은 비록 직접 볼 수 없지만 계찰(季札)이라는 오()나라 공자(公子)의 찬탄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다. 악공이 제풍(齊風)’을 노래하자, 계찰은 연신 경탄하면서 음률이 우렁차고 리듬에 여유가 있으며 만물이 조화로운 심원한 경지라고 평가하며, “깊고 넓은 동해와 같다고 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소악을 듣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훗날 노나라 태사(太師)에게 이때 들었던 소악 연주에 대해 말하길,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다고 했다 .

 

공자가 노년에 했던 큰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을 정리함으로써 악을 시()()와 나란히 놓은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은 이미 없어졌다. 공자가 정리하여 보존하고자 했던 가운데 소악이 분명히 중요한 편장을 차지했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동방과 서방

 

옛날에 사람들의 지리 문화적 시야가 아직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동방은 제나라였고 서방은 진()나라였다. 이 두 강대국은 각각 전국시대라는 무대의 막이 내리기 전의 양극을 대표한다. 이 양극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났다. 민속 및 치국 이념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달랐다. 춘추전국시대의 몇몇 역사 단계에서 이 양극은, 한쪽이 쇠퇴하면 다른 한쪽이 성장하는 서로 다른 운세를 지니고 있었다.

 

제나라는 동쪽으로 육지가 끝나는 큰 바다와 이어져 있었고, 진나라는 가장 서쪽에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양국이 직접적으로 충돌을 할 기회는 매우 적었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들은 변동과 이동이 심했다.

 

제나라의 정치경제구조는 바다의 성격이 짙은 동방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제나라는 거세게 굽이치는 물결처럼 충동적이고 과장되며 무척 낭만적이었다. 반면에 대평원에 위치하여 뒤로는 산지에 의지하고 있던 진나라는 내성적이고 신중하며 차분했다. 진나라의 냉정한 눈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을 거친 이후의 진나라는 모든 면에서 더욱 이성적으로 변했고 치밀해졌다. 농업 입국의 보수성과 견고성을 바닷바람이 뚫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웠던 것이다. 진나라는 향락을 절제하는 동시에 기초 시설의 건설에 더 많은 정력과 재력을 투입했다.

 

진나라의 상앙과 같은 시기, 위왕과 선왕의 성세였던 제나라에는 사치의 물결이 점점 더 높이 밀려들었고, 넘치는 재화로 인해 사람들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임치성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조차도 극도로 거만했고 득의양양하게 우쭐댔다. 마치 다른 지역은 모두 촌스러운데 유독 자신들은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현대적인 신민(臣民)이라도 된 양 말이다. 소진(蘇秦)이라는 연()나라 사자가 이런 상황을 관찰한 뒤에 훌륭한 글을 한 단락 남겼는데, 이 글에는 제나라의 상황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임치의 시민에 대한 묘사에서는, () “집에는 부가 쌓여 있고 사람들은 의기가 양양하다라고 표현했다. 바로 이런 도시와 시민이 존재했기 때문에 극소수 지식인들의 계획대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나라는 자신의 궤도를 따라 고집스럽게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고 마지막엔 무시무시한 곳까지 이르렀다.

 

서방의 진나라는, 상앙의 강성기를 거친 뒤 장의(張儀)의 연횡(連橫)까지 성공함으로써 서쪽을 강력히 차지하고 있는 대국으로 확실히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동방의 제나라는, 진나라와 다른 여러 제후국들이 빈번히 쟁탈을 벌이던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층 여유로웠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릴 수도 있었다. 제나라는 역사상의 그 어느 시대보다 성대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사치스러운 물질주의 역시 범람하기 시작하여 기세가 맹렬해지더니 전대미문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제나라 역시, 극성하면 쇠하게 되는 단계를 맞이하여 자기 운명의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향하게 되었다.

 

가장 번화한 도시

 

춘추전국시대에 천하에서 가장 번화했던 도시를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임치를 놓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소진이라는 사람이 했던 말을 다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 소진은 대단한 유세가였다. 옛 책에 기록된 소진의 행위를 통해 볼 때, 그 인품과 덕성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으며 때로는 모순점도 많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사실은, 그 당시에 소진은 경험과 지식이 정말로 풍부한 인물이었으며, 중국 땅 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왕의 주위를 맴돌았던 키신저 같은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임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임치는 매우 부유하고 실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우()를 불거나 슬()을 연주하고, 투계와 개 경주를 하며, 쌍육 놀이와 공차기를 즐깁니다. 임치의 길에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 어깨가 서로 스치며, 옷깃과 소매가 이어지면 장막을 이룰 정도이고, 사람들이 흘린 땀이 비가 될 정도입니다. 집에는 부가 쌓여 있고 사람들은 의기가 양양합니다.”

 

천하에 두루 발자취를 남겼던 소진이 처음 알게 된 동방의 도시로 인해 얼마나 놀라고 의아해했는지, 이 말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한 나라의 주요 도시, 특히 수도가 있는 곳은 솔직히 말해서 각지의 물산과 인물이 모여드는 중심지일 따름이다. 그것은 특정 시기 국민의 정신과 성격,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더욱 마치 거울처럼 정확하게 비추어준다. 사마천은 동부 연해의 제나라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의 특징을 이렇게 개괄했다. “그곳 백성들은 도량이 넓고 감추어진 지혜가 많은데, 이것이 그들의 천성이다,” “그곳의 풍속은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매우 지혜롭고 논의하기를 좋아한다.” 사마천은 제나라 사람들이 논의하기를 좋아하고 매우 지혜로우며 성격이 여유롭고 도량이 넓은 것에 대해 이를 일종의 천성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징으로 인해, 실제로 훗날 제나라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국력이 나날이 강대해지고 문화와 학술이 전면적으로 흥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방사와 도가가 모여들고 상공업이 번영하고 체육과 도박업이 생겨났던 것도 모두 지역과 인문의 결합을 통해 나온 현실적인 결과였다. 인격을 기르고 지지해 주는 토양을 떠나서는, 즉 지리환경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축구의 발원지라고 오늘날 세계의 인정을 받은 곳이 바로 임치이다. 당시에는 축구를 축국(蹴鞠)’이라고 불렀다. 가죽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규칙에 따라 놀았는데 놀이 규칙은 현재의 축구와는 좀 달랐다. () 소진의 기록에 따르면, 임치의 백성들은 체육과 예술에 뛰어나고 마음이 여유롭고 한가했다. 이는 입고 먹는 것에 대한 걱정 없이 안정되고 만족스러운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의 임치성 안에서는 일반 시민마저도 의기양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생동적인 칭찬인가! 임치는 그 당시 도시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직하학궁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춘추전국시대에 출연한 거대한 학술의 전당이다. 유명한 백가쟁명의 학설 역시 직하학궁을 통해 탄생했다. 제나라 왕들은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호기로운 행동을 했다. 직하학궁을 건립하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지대한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하학궁은 그것이 임치의 직문에 새겨졌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환공 전오(田午) 때에 창건되어 제나라 마지막 왕인 전건(田建) 때에 끝을 맺기까지 도합 150년 동안 여러 세대를 거치며 존재했다. 직하학궁 초창기의 환공 전오는,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던 환공이 아니라 전씨가 강씨를 대신한 전씨 제나라가 드러난 이후의 왕이다. 두 환공을 구별하기 위해서 통상적으로 후대의 환공을 가리켜 환공 오()’라고 부른다.

 

제나라 역사를 전면적으로 살펴보면, ‘직하가 흥하자 국운이 흥했고, ‘직하가 쇠하자 국세가 위험했으며, ‘직하가 멸하자 제나라도 끝이 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직하학파가 형성되기 이전 제나라의 모든 번영기와 흥성기에서는 백가가 모여 모일 수 있는 사상의 분방함과 자유로움, 직하의 싹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직하학궁이 진나라나 그 밖의 다른 지역이 아닌 제나라에서 탄생한 데에는 마땅히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던 것이다. ‘논의하기를 좋아하는()나라 사람들의 전통이 없었다면, 동해 바닷바람의 북돋움이 없었다면, 방사와 상인들이 뒤얽혀 분주히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염업과 제철업이 대규모로 흥기하지 않았다면, 반도의 유세가들이 빈번히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모이지 않았다면, 직하학궁이 과연 어떻게 최종적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위대한 학부가 시대에 응하여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천지인(天地人) 삼자의 인연이 서로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왕과 선왕 시대에 이르렀을 때 직하학궁은 이미 흥성기로 들어섰다. 이때 직하학궁에는 천하의 이름난 학자와 문학가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며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순우곤(淳于髡)과 추연에서부터 순자(荀子)와 맹자(孟子)에 이르기까지 상대부에 속하는 사람만 해도 7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굉장히 후한 대우를 받았다. 대저택에 살았고 외출할 때는 호화로운 수레가 동원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맹자의 경우 외출할 때에 언제나 사오십 대의 수레가 뒤를 따랐다고 한다. () 이들 직하 선생의 의도는 명확했는데 다스리지 않게 논의하는 것이었다. 각자 대담하게 마음껏 말하고 저마다 글을 통해 학설을 내놓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직하학궁은 그 시대의 가장 크고 가장 심오한 두뇌 집단이자 문화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그 시대에 두근두근 고동치던 중국의 문심(文心)은 분명 직하에 있었다. 우러러볼 만한 이 정점과 중심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와 동시에 천하의 지혜로운 인물들을 모두 유인하여 끌어들였다. 전국시대 문화사에 있어서 어느 정도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의 발자취를 직하에 남겼다. 이는 사마광(司馬光)직하부(稷下賦)에서, “천리 안팎의 뛰어난 선비들을 불러 모으고 백가의 위대한 학술을 총괄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유명한 백가쟁명에 대해 말하자면, 직하학궁 안에서 학술적 논쟁이 펼쳐지던 쟁명의 활기찬 분위기와 장면을 조금이나마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은 저서에서 보이는 관념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일반적인 학술적 관용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때로는 일상과 생활에서도 직접으로도 표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학궁 안에서는 언제나 창과 화살이 오가듯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으며 변론의 풍조가 비할 데 없이 성대했다. 유명한 변론관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들의 품격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익살스럽고 재미있었던 순우곤, 웅변을 쏟아내던 맹자, 타고난 변론의 귀재 전병(田騈), 그리고 추연예열(兒說)노중련(魯仲連) 등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도리를 설파하기 위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을 주장을 펼칠 때면, 이치에 근거하여 증언하면서 서로 타협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랄하게 조소하며 풍자했고 말이 매몰찰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마다 뒤질세라 앞을 다투며 다들 오만한 기세로 다른 이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변론과 반박과 힐난은, 마치 전쟁터에서 승패를 가르듯이 기세가 드높고 기백이 넘쳤다. 전파(田巴)라는 변론가는 변론을 통해 놀랍게도 하루에 1,000명이나 설복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뚜렷한 논리와 거침없는 언변을 지닌 이가 1,000명에 달하는 사내대장부들을 차례대로 논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장면은 중국에서 유일무이라며 세계에서도 드물다. 기록에 따르면 많은 승려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차례대로 반박하고 힐난하던 대토론장은 오직 현장(玄奘)이 사신으로 갔던 서역의 사찰에만 있었다. 직하학궁의 눈부시고 웅장했던 문화와 사상의 기세가 이제는 그야말로 이미 역사가 되고 말았다.

 

직하학궁은 한 세기하고도 반세기를 경과한 뒤에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이런 학궁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직하학궁에 의지하여 입지를 세웠던 제나라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장웨이, 지음 이유진 옮김,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글항아리, 2025(2)

 

장웨이張煒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195611월 산둥성 룽커우龍口시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소설, 산문, 문론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대표작으로는 옛 배古船(한국어판 제목은 새벽강은 아침을 기다린다) 구월의 우언』 『외성서外省書』 『추행 혹은 낭만』 『고슴도치의 노래』 『너는 고원에 있다』 『독약사毒藥師』 『불천약서不踐約書등이 있다.

 

옮긴이 이유진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연세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신화의 역사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늘날 우리 시각으로 중국 역사와 문화를 읽어주는 인문학자로, 복잡한 중국 역사를 대중적인 언어로 소개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상식과 교양으로 읽는 중국의 역사』 『한손엔 공자 한손엔 황제: 중국의 문화 굴기를 읽는다』 『차이나 인사이트 2018(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중국 사상의 기원-무에서 예로, 예를 인으로』 『중국 고대건축의 이해』 『진붕: 진시황에서 유방까지』 『신세계사』 『미의 역정』 『중국 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 『중국신화사(공역)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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