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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탑의 후예≫ 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 황광우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5-26 11:45
  • 조회188
  • [보도자료]
  • 2026-05-26

학생탑의 후예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 황광우

 

학생탑 앞에 서니

바람 소리에 선배님들 함성이 들린다

나도 선배님들 뜻 이어받아 살아가야겠다

 

출간사

학생탑의 후예를 출간하며-홍경표(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회장)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말처럼, ‘광주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없다.’(若無光州 是無民主)는 말도 성립할 것이다. 광주는 독립의 산실이자 민주의 요람이었다. 역사에 바친 청년들의 땀과 피는 기록될 가치가 있다. 학생탑의 후예는 지난 1970년대 독재의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을 선 청년들, 1980년 오월, 광주와 서울에서 활약한 청년들의 헌신을 담았다.

김남주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학생탑의 후예는 이어 민청학련의 나병식과 윤한봉, 박형선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강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1970년대 이곳 청년들의 이야기는 1980년 오월의 위대한 서사를 빚었다. 오히려 살아남아 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김영철, 오월의 비극을 목격하고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살 수는 없다면서 하늘로 몸을 던진 김태훈, K-민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삶과 정신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될것이다.

학생탑의 후예1965년에서 1975년에 이르는 시기 광주일고의 고교생들이 전개한 학생운동을 다룬다. 1929년 그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성진회><독서회>가 있었듯이, 1970년대 광주일고에는 독서 써클 <광랑><피닉스>, <원시림> 등이 있었다. 학생탑의 후예는 이들 독서 써클들의 역사와 이념적 실천적 특질을 해부하였다.

 

 

1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

 

1. 함성의 시인

 

그는 독재자와 한판 싸움에 목숨을 건 전사였다

19721018일 남주는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일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밥을 먹는데 라디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대통령 특별 선언이었다. ‘비상계엄령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머시여? 남주는 분노했다. 한 줌도 되지 않은 깡패들, 모리배들, 반역자들의 난동에 민족의 자존심이 갈가리 찢겨진 순간이었다. 남주는 주먹을 쥐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남주는 박정희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일제 때 우리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군 장교였다. 이런 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남주에겐 몹시 부끄러웠다.

해방 후 남로당에 입당한 박정희는 여순 항쟁 당시, 남로당 소속 장교들의 명단을 이승만에게 넘겨주었다. 자기 혼자의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수백 명 동료의 목숨을 팔았다. 박정희는 가장 더러운 짓을 한 배신자요, 인간 말종이었다.

박정희는 4·19 학생혁명으로 부활한 민주주의를 탱크로 뒤엎은 자였다.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한 박정희, 그는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약속을 깨뜨렸다. 군대로 돌아가지 않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3선개헌을 밀어붙였다. 1969년 남주 대학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사익을 위해선 지옥에도 가는 추접한 모리배였다. 남주의 순수한 마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런 그가 또다시 정치적 폭거를 자행한 것이다. 남주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행동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박통의 노예임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고향에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남주는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광주로 올라온 남주가 찾아간 곳은 친구 이강의 자취방이었다. 남주와 이강은 박정희를 역사의 재판에 회부하여 심판하기로 작정했다. 박의 폭거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유인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 즉 철판과 철필, 종이와 묵지를 마련하기 위해 주머니의 돈을 털었다. 이강은 전세방 입주금을 뺐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두 청년은 거사를 기념하는 역사 여행을 떠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았다.

두 청년은 백산(白山)으로 갔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백산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우리 근대사에 우뚝 솟은 농민전쟁의 성지다. 18943월 농민군은 고부를 치고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농민들로 백산은 말 그대로 인산(人山)을 이루었다. 농민

군이 서면 온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여 백산이 되었다. 농민군이 앉으면 손마다 쥔 죽창이 빼꼭하여 죽산이 되었다. 그래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백산은 갑오년의 농민들이 썩어 문드러진 왕조와 그 관리들과의 싸움을 선포한 곳이다. 남주와 이강은 백산에 올라 100년 전 이곳에 모인 농민들의 의기(義氣)를 회상하면서 창의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들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라

 

그 시절 유인물을 배포한다는 것은 곧바로 체포되는 것을 의미했다.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행위가 체제를 전복하는 행위로 둔갑하던 시절이었다. 지하신문 작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동료를 규합해야 한다. 평소 비판적인 발언을 많이 하던 친구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말이 많은 동료일수록 몸을 뺀다. 고문과 투옥이 빤한 이 위험한 일에 선뜻 나서는 이는 없다.

다음으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강은 전세 입주금을 뺐다. 남주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촌놈 남주의 말이 걸작이었다. “나는 독재자의 무덤을 파러 갑니다.” 일견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청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청년의 뜻을 곧 알아들었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주었다.

 

 

2. K-민주의 새벽을 연 청년들

 

별들의 이야기

19752월에 석방된 민청사건의 학생들이 석방되었다. 청년 학생들은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 전선을 건설하기 위해 한국 민주화 청년협의회’(민청협)을 결성한다. 그때도 나병식이 주동이었다.

옥중에서 나온 청년 나병식은 먹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 마늘 장사, 수박 장사, 튀김 장사,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1979년엔 풀빛출판사를 세웠다. 신혼의 아내 김순진과 함께 망원동 지하방에서 살았다.

1987212, 나병식은 또 연행되었다. 그러니까 114일 박종철을 죽인 그 정권이 한 달 후, 나병식을 연행한 것이다. 풀빛출판사가 발행한 한국민중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구속했다. 이리하여 나병식은 그가 흠모하는 박형규 목사님과 나란히 사성장군의 반열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독재정권과 싸우다 감옥에 가는 정치범에겐 별을 달아 주었다. 영광의 훈장이다. 두 번 감옥 가는 경우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세 번은 가야 목에 힘을 준다. “, 삼성장군이야.” 네 번 감옥 가는 사람은 사성장군이라 부르는데 매우 희귀했다.

백기완은 삼성장군이다. 1974년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징역을 살았고, 1979‘YWCA 위장결혼식 사건1986권인숙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박형규는 사성장군이다. 1973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이듬해 1974년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서울시경이 꾸며낸 선교자금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고, 1978년엔 기장 청년회 시위 사건으로 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대단한 성직자였다.

문익환은 오성장군이다. 1976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 1978년 유신헌법을 비판하여 다시 수감, 1980내란예비음모죄로 투옥, 1986년 인천 5·3사건의 배후로 투옥, 1989년엔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포옹을 하고 돌아와 또 투옥되었다.

여섯 차례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 197310, 나병식과 함께 첫 감옥살이를 한 김병곤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였다. 1979년 동일방직 노동자를 도운 죄로 또 투옥되었고, 19807, 서울대 후배들과 함께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 활동으로 투옥되었다. 1986년 김근태와 함께 민청련 활동을 하다가 잡혀갔다. 1987년 석방되어선 이제 그만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데, 1988년 구로구청 농성 싸움을 이끌다 또 투옥되었다. 그런데 몸의 세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K-민주의 상징 김병곤은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6. 순교

 

19754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49일 새벽, 이들 8명의 목을 교수대에 걸었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집단 학살이었다. 그것은 독재자의 광기였다.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 사형수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리려는 미친 짓이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을 들추어 본다.

 

이소선 어머니는 민청학련 사건 발표를 보면서 섬뜩했다. 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생들이라나? 체제 전복을 꾀한 사건이라나? 어머니는 당국의 발표 앞에 무서웠다. 두려웠다. 사형이라는 형량도 무서웠지만 관련자들 중 많은 사람이 직접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더욱 놀랐다. 전태일의 장례로 경찰에 잡혀갔던 학생이 유인태, 이철이 아니던가? 영안실에 맨 처음 찾아왔던 장기표까지 수배자라니?

어머니는 이때부터 목요기도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전태일 사건 이후에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고 싸와 준 것에 대해 고마워서였기도 하고,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안타까운 것이 인혁당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인혁당 사건의 내막을 몰랐다.

고 송상진 씨의 부인이 남편의 시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호소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시체를 빼돌렸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시체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호소는 애절했다. 모두 응암동으로 향했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 어린 여학생은 울부짖었다. 여학생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시신을 뺏은 버스가 화장터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소선과 몇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가서 버스를 가로막았다. 이소선은 손에 들고 있던 돌로 관을 내리쳤다. 관을 열어젖히니 죄수복을 입은 채로 누운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를 지키기 위해 가족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였다. 경찰은 가족을 밀어내고 차를 움직였다. 그때 문정현 신부가 외쳤다. “이 자리가 내가 죽을 자리다.” 그리고선 시동이 걸린 버스 앞으로 달려가 큰 대 자로 누워버렸다. 차는 신부의 다리 위로 지나갔다.

 

197549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슬픈 수난의 날로 기록되어야 한다. 김지하의 증언 그대로 인혁당은 강령도 없고 규약도 없는 유령조직이었다. 박정희와 그의 하수인들이 그들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조직이었다. 사형을 선고해도 집행은 연기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 집행 5분 전에 황제의 사면을 받고 목숨을 구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 나라의 독재정권은 고문으로 조작한 인혁당 관련자들을, 사형 선고 후 24시간도 넘기지 않고 교수형을 집행했다. 윤한봉은 이렇게 구술했다.

 

첫 번째 징역을 살고 752월에 나왔어요. 7549일날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해요. 사형이 집행된 날, 난 대학에 있었는데,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누가 와서 형님, 사형시켜 부렀어.”라고 말하는 거야. 그때 월남전이 막바지였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몰라. 일어나서 악을 버럭버럭 질렀어. “저놈의 독재자 가만 안 둔다. 이 한 몸 제단에 바치고 목숨 걸고 싸운다.”고 다짐했어요.

데모로는 안 되겠다. 박통을 봐버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테러를 생각했어. 다이나마이트를 준비했어. 긴 이야기할 것 없이 너 죽고 나 죽자. 한 목숨 걸고 일을 처리하자는 것이었지.

 

 

2부 오월과 K-사람들

 

7. 도청에서의 최후 이양현(44)

 

회의실 2층 무대 뒤쪽에 후문 쪽으로 통하는 쪽에 윤상원, 유리창 하나씩 건너, 윤상원 다음에 저, 그다음에 김영철 선배 이렇게 셋이 섰죠. 도청 후문 쪽이 먼저 무너졌습니다.

윤상원 씨 하고 마지막 이야기들을 하고 그랬죠. “윤상원 씨, 참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좋은 친구였는데 저승에 가서도 좋은 친구가 됩시다. 그쪽도 혹시 요렇게 불평등한 사회라면 거기 가서도 학생운동 헙시다.”

그런디 M16 맞아부니까, 옆구리를 맞았는데 아이고~” 하면서 정신을 놔블더라고. 차디찬 바닥에서 그냥 눈을 감으면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폭신한 이불을 깔아서 그 안에 요렇게 눕혀주면 그냥 천당으로 갈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디다. 김영철 선배하고 저쪽에다 이불을 깔고 이렇게 눕혀드리고 했거든요.

 

 

12. 하얀 가운을 입은 시민군 강철수(48)

 

항쟁의 현장은 도청과 금남로만이 아니었다. 전남대병원, 조대병원, 적십자병원, 기독병원도 시민군을 치유한 제2의 현장이었다. 다음은 목포한국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강철수 병원장의 대담이다.

 

517일 저녁이었어요. 인턴을 하면서 경과 기록지 다 쓰고 12시 좀 넘어선 거예요. 인턴 숙소로 내려가는데 보니까 현재 본관 엘리베이터 앞에 공수부대가 딱 도열해 있는 거예요. 그래갖고 깜짝 놀라 6층에 있는 홍예숙 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헐레벌떡 와서 군인들이 왔어요. 그래서 내려가 봤더니 들어오고 도열에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내가 가운을 입고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군인들 중 아무도 대답을 안 해. 웬일이냐 그랬더니 다른 말은 안 하고 간호학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더라고. 간호학교 있는 쪽이 어디냐고 묻길래 저쪽이라고 하니까 바로 그쪽으로 가더라고. 그러니까 517일날 야간에 광주에 내려와 가지고 각 학교별로 군인들이 배치된 거지. 518일 다음 날 응급실에 가 있는데 학생들이 까운 하나 달라고 해. 그래서 학생들에게 까운을 입혀주었어. 보니까 그때 학교에 들어오던 학생들을 무조건 막 두들겨 패는 거야. 몽둥이로. 학생들이 놀래가지고 응급실로 막 달려오니까 우리가 가운 하나씩 나눠 주었지.

519일 광고 앞에서 총을 맞은 학생 김영찬 학생이 전대병원에 왔죠. 복부의 벽이 다 없어 없어져 버렸어요. 내가 병원에 있었지. 여기(복부)가 다 없어져 버렸어요. 매일 내가 드레싱을 해 줬으니까. 복부가 아예 없으니까 난 걔가 죽을 줄 알았는데, 근데 살이 차올라 오더만요. 이렇게520일 발포 전이었을까. 그때 저기 뭐야 MBC 불타고 국세청이 타고. 그때 저녁에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보는데 저쪽 남광주파출소에서 대우병원 그 사이까지 군인들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어요. 저쪽에서 공수부대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면 시민들이 쫙 빠지고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조금 있으니까 남광주파출소에 불길이 올라왔어요.

시민군들이 병원에 와서 약품이 부족하다니까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다 털어분 거야. 다음 날(22)은 진짜 조용했죠. (도청에서) 퇴각해 버리니까. 도청 앞에 상무관이 있었잖아요. 그 안에 시체를 안치했죠. 매장된 여공들 시체 몇 구가 전남대병원으로 왔어요. 이렇게 칼로 찔러서 배에서 구더기가 구들구들 기어다니고 볼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그 이야기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시신의 이름을 모르니까 시신의 특징을 적은 꼬리표를 달았지요. 사람의 신체 부위에서 가슴이 굉장히 넓어요. 그래서 가슴에 총상을 입은 환자가 많았어요. 총상 환자 한 명이 들어오면 동원되는 의료인들의 손이 엄청나요. 머리의 두개골이 날아가 버린 환자도 있었어요. 보니까 표정은 아직 살아 있었고, 맥박도 뛰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살아 있었는데 응급실에서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하더니만 팍 가버리더라고.

 

 

18. 아무 일 없었던 듯 살 수가 없다 김태훈(52)

 

1981527일 침묵 시위

198152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광주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집회였다. 마이크도 없었고 사회자도 없었다.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시위였다. 하지만 아무 구호도 없고 성명서 낭독도 없는 시위, 침묵의 시위였다.

 

학생들 사이사이에는 사복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학생들 무리가 어디로 몰려가면 경찰이 따라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학생과 경찰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저는 도서관 앞에 있었는데요. , “하고 떨어지는 소리 이전에 외마디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때 저희가 조용히 침묵시위 하고 있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외마디 소리가 선명히 들렸죠. 이종현(서울대 원자핵공학과 75학번)

 

학생들이 도서관 등지로 이렇게 몰려다니면서 산발적인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경제학과 4학년이었던 김태훈 학생이 도서관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며 투신했습니다. 그때 당시 도서관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특히 여학생들이 엄청난 비명을 질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경찰 백골단은 시신 위로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신형식(서울대 사회학과 79학번)

 

우리의 벗 김태훈의 마지막 순간을 사람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전두환 물러가라세 번 외치며 빛나는 청춘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 김태훈, 그의 손엔 유서 한 장, 성명서 한 장 없었다. 그러했기에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아프다. 김태훈은 서울대에 입학하였으나 이념 서클에 소속하지 않았다. 광주일고 출신들이라면 다들 입회하였던 이념 서클로부터 김태훈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친구는 말이 없던 벗이었다. 그런 내성적인 친구이었으니 죽음의 결단에 이르기까지 그가 치러야 했을 고뇌는 얼마나 깊었을까? 죽어 민주의 별이 된 벗.

김태훈의 누나 김선혜 씨로부터 동생의 인간됨을 알아본다. 어려서 예쁜 애였고,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귀여운 애였다. 대학 들어가서도 운동권하고는 거리가 먼 애였다. 학생운동 그런 것에 상관없이 살아온 타입. 누나는 태훈이가 휴머니스트였다면서 동생이 고등학교 때 신부님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5·18 때 저희 집이 광주 금남로 가까이 있는 아파트였거든요. 부모님들로부터 (광주항쟁 당시의) 여러 가지 험한 이야기 많이 듣고 그랬어요. 저한테 태훈이가 그러더라구요. ‘아무 일 없었던 듯 살 수가 없다.’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태훈이 본인은 5·18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돼가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 괴로워했던 것 같아요.

 

 

3K-민주의 새벽을 연 고교생들

 

1장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197410, 광주일고 교정에서는 한 학생이 연단에 올라 왜 유신헌법은 철폐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는 성명서를 당당하게 낭독했다. 전교생 2,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았다. 그날의 시위는 모든 학생 시위가 본받아야 할 시위의 교과서였다. 나는 고교 1년 때 이 시위의 교과서를 체험했다.

광주일고생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411, 광주일고생들은 제2차 시위에 돌입하였다. 10월 시위 때, 3학년 형들이 교문을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2학년생들은 교문을 돌파하고 도청으로 진출하는 것을 시위의 목표로 삼았다. 그날은 민방공훈련이 예정된 날이어서 경찰들은

거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광주일고 1학년생과 2학년생은 신속하게 교문을 돌파하여 충장로를 시위의 물결로 바꿔놓았다. “자유정의를 외쳤고,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으샤! 으샤!” 소리치며 달렸다. 상가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오매, 어째야 쓰까!” 하며 호응해 주었다. 이 길에서 외치는 함성, 이 길을 달려가는 고교생의 시위대열은 1929113일에 있었던 선배들의 대시위와 똑같았다.

광주일고생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54, 할복으로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김상진 열사의 추도식을 올렸다. 성명서를 읽고 학생탑 앞에서 묵념하였다. 한 명의 학생이 제적당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자랑스러운 전통에 학교 당국이 먹을 칠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분개했다. 이어 광주일고생들은 개교기념일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고자 하였다. 교문을 돌파하기 위해 후문의 돌쩌귀를 분쇄하여 놓았다. 경찰서로 연결되는 전화선을 끊는 준비를 하였다. 시위를 감행하기 위한 만발의 준비를 하였다. 아쉽게도 한 학우의 실수로 시위는 미수

에 그쳤다. 16인의 학생들이 경찰서에 끌려갔고 취조를 받았다. 10일의 구류를 살았다. 57, 16인의 학생에게 제적 조치가 떨어졌다. 512, 3인의 주동자는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다음날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광주일고에서 시위에 앞장선 학생을 자르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역대의 모든 교장 선생들은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광주일고에서 16인의 학생들이 집단으로 제적된 것은 고교 학생운동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대학살이었다. 학우들이 떠난 빈 책상을 지켜보아야 했던 광주일고생들은 이후 대학에 진학하여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박정희를 몰아내는 시위대열에 앞장을 섰다.

1974년과 75, 유신 체제하에서 일어난 광주일고생의 네 차례 시위는 1970년대 고교생 최후의 시위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적 조명을 받기에 충분한 학생운동이었다. 197410월과 11월 그리고 19754월과 5, 네 차례 전개된 광주일고의 유신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의 수는

어림잡아 2,000명이 넘는다. 이처럼 대규모의 학생이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광주일고생의 시위는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경찰은 사건을 축소하기에 바빴고, 언론은 침묵하였다. 행동의 과감성, 구호의 정치성, 규모의 방대성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고교생의 학생 시위였지만, 사회는 모른 척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힘들다고 옛사람은 말했는데, 열여덟 살 소년들이 어느덧 고희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고교생 최후의 시위에 관한 연구 보고서 한 편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났다. 그날의 시위를 이끈 학생들이 만났다. 만나 그날의 일을 회고했다.

돌아보니 네 차례의 시위는 각기 분리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다. 각각의 시위는 앞선 시위로부터 자극을 받았고, 동시에 앞선 시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하였다. 변증법적 부정의 과정을 거쳐 네 차례의 시위는 변화, 발전되어 나갔다. 1974년과 1975년에 일어난 광주일고의 시위는 광주일고에 국한된 학생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타도하기위한 전국적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시위였다.

광주일고생들이 시국에 대해 유달리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담대한 행동을 하였던 데에는 광주일고 특유의 학생운동 전통이 있었다. 192911월 대시위에 전국의 5만여 학생들이 동참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통에 대해선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이래 광주일고에선 연례행사처럼 교내시위와 가두시위, 성토대회와 심포지엄이 전개되었다. 또한 면면히 계승되어온 광주일고 학생운동의 배후에는 <광랑><피닉스>, <원시림> 등의 동아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주목한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였으니 <광랑><피닉스>는 분명한 독서회였다. 하지만 그들은 독서 토론에 그치지 않았다. 방학이면 농촌봉사활동을 하였고, 연탄배달을 하였다. 봄과 가을이면 산과 강을 찾아 선배와 후배가 만나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독서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학생들의 자주적 결사체였다.

광주일고생들은 해마다 교지 무등에 자신의 의식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시와 수필을 올렸고, 여행기와 논문을 투고하였다. 교지 무등은 광주일고생의 정신사라고 보면 될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교지 무등에는 교단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교사들의 육성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민성, 김용근, 주기운, 문병란, 최갑진, 지성철 선생처럼 교단에서 학생들과 영혼의 씨름을 벌였던 교사들의 문제의식이 교지 무등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편자는 무등47호부터 56호까지 문제작들을 샅샅이 뒤졌다.

우리는 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동료가 당한 고문 사실을 서로 모르고 살았다. 학생탑의 후예는 광주일고 학생운동을 주도한 17~8세 소년들이 겪은 국가 폭력과 인권 유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보고서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 하였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광주일고의 시위를 주도한 우리는, 네 차례의 유신반대시위 전개 과정에 대해 보고서를 남기고자 한다.

 

2. 고문 : 최수일 (51)

 

19755월 시위 모의 사건의 주동자 최수일은 서광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잠시 후 서광주경찰서 형사 3명이 나를 연행하여 검은 지프에 태웠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이 빨갱이 새끼는 죽여버려야 해라는 등 온갖 욕설과 폭행을 가하였다. 서광주경찰서 정보과 취조실에 끌려갔다. 그들은 나를 밤새 한숨도 재우지 않고, 곤봉으로 때리고, 우산대로 찌르고, 주먹으로 전신을 구타하였다. 새벽녘에는 정보과장이란 자가 나에게 다가와 담뱃불로 입술을 지졌다.

 

최수일이 끌려가 수사를 받은 곳은 세 곳이었다. 51일 밤 당일 끌려간 곳이 서부경찰서였다. 52, 끌려간 곳은 화정동에 소재한 중앙정보부 밀실이었다. 그곳에서 34일 고문을 당한 후 다시 끌려간 곳이 당시 도청 맞은편에 소재한 전남도경 대공분실이었다. 최수일은 자신이 당한 고문 체험을 이렇게 구술했다.

 

52일 밤에 기관원들이 나를 인계받아 알 수 없는 지하실로 데려갔다. 건장한 신체의 수사관이 나를 집어던지기 시작하였다. 엉겁결에 낙법을 썼더니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집어던졌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기절하였다가 깨어나길 반복하였다. 어떤 점잖은 말투의 수사관이 다가와 물었다. “김대중이냐? 김영삼이냐? 또 누구냐?” 하면서 배후를 밝히라고 심문하였다. 4일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다시 모르는 수사관 2명에게 나를 인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전남경찰청 대공분실이었다. ‘악몽의 23이었다. 손에 수갑을 채워 무릎 사이에 끼우고 곤봉에 걸어 책상 사이에 걸어놓는 통닭구이를 하였다. 손가락 관절 사이에 볼펜을 넣고 조였다. 손톱 밑에 압침을 박았다. 곤봉으로 발등과 발가락을 때렸다. 종이를 말아 성기에 박았다. 이후 오줌을 쌀 수 없었다.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4부 진실을 찾아서, 독서 서클

5부 시위주도자 대담과 회고

 

1장 대담

 

5. 광주일고생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19754월 추도식을 주도한 박석면 대담

 

거창하게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 할 수 없으나, 우리가 나서야 한다. 정치가 개판인데 이런 현실을 가만히 두고 나서지 않는다면 청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어. 광주일고가 갖는 상징일 수도 있고. 고등학생들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야 하는데, 광주일고생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그런 사명감 같은 것이 내면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아.”

 

 

2장 회고

 

3. 우리가 걸은 가시밭길 황광우

 

()만 한 크기의 0.7평 징벌방이었다. ‘철컥!’ 하며 쇠문이 나를 가두었다. 순간 폐쇄공포증이 엄습하였다.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1974년 고1 시절,

1 4월 어느 날, 3학년 지병주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광주일고의 우중충한 낡은 강당 건물 옆에서 병주 형은 나에게 <피닉스> 서클에 입회할 것을 제안하였고, 나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친구 이태연도 함께 입회하였다. 문종훈, 강길상 등이 <피닉스> 멤버로서 함께 만났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입시 공부에 몰두했던 것에 반해, 이념 서클의 학생들은 올바른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농성동에 있던 지병주 형의 집에 자주 갔다. 그곳에서 손호상, 이영목 2학년 선배들을 보았다. 19741021일 광주일고 교정에서는 전교생이 집결하여,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항규 형이 성명서를 낭독하였는데,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구호를 외쳤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이 시위의 주도자가 지병주였다. 형의 사뭇 비장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한 달여 서울에서 피신 생활을 했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1 여름방학 때,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병주 형으로부터 받았다. 좋은 책 많이 읽고 좋은 친구와 우정을 깊게 나누라는 조언의 편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우에게

어제는 나주의 어느 산골에서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자연(自然)은 인간(人間)보다 위대(偉大)하고 또 많은 걸 가르쳐준다는 평범(平凡)한 진리(眞理)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침은 이리도 시원스럽고 상쾌하다. 생활(生活)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길들이고 싶다. 인생(人生)의 중대한 문제 가운데 만남이라는 문제가 있다. 언제 누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 인생을 크게 결정짓는다. 그중에서도 고교(高校) 시절에서는 스승이라든지 친구의 만남이 중요(重要)하다. 대개의 인생관(人生觀)이나 생활관(生活觀)이 이때에 틀이 잡히기 때문이다.

난 꽤 친구가 많고 또 다 드물고 귀한 녀석들이지만, 보다 더 많은 친구와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나보다 나은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너무 잘 알면서도 막상 그러기는 매우 어렵다. 친구 중에서도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그건 금방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대개 고교 초기 시절, 통하는 친구는 꽤 드물 것이다. 넓은 포용력(包容力)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만나고 같이 잠자면 고3쯤 되어 잊을 수 없는 벗이 될 것이다. 대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친구가 몇은 드러나 있을 것이다. 보다 진보적인 생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면 많은 능력 있고 좋은 친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너는 더 큰사람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음악이라든지 미술, 여행, 등산 등 일생 동안 즐기고 인격 형성에 도움을 주는 취미를 하나쯤 갖도록 해라. 그것도 고교 시절에 틀이 잡혀야 한다. 이렇듯 고교 시절은 참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시기이다. 시간을 아끼고 잘 이용하기 바란다.

방학 중에 너희들과 한밤 지새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시간 내서 집에 한번 들리기 바란다.

731일 아침 병주

 

19741115, 광주일고에서는 또 한 차례의 시위가 터졌다. 10월 시위가 3학년들의 기획이었다면, 11월 시위는 2학년들의 기획이었다. 2학년은 더 대담하였다. 각 반의 반장들과 유도부 학생들까지 합세하였다. 먼저 신민호는 호루라기를 불며 복도를 돌았다. 각 반 반장들은 나가자!” 선동하였고, 유도반 학생들은 교무실 문을 막았다. 학생들은 교문을 뛰쳐나와 충장로를 지나 도청까지 진출하였다. 그날은 민방공훈련 날이었다. 거리에 경찰이 없는 허점을 비집고 기획한 이 시위는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벗들의 어깨를 걸고 뛰면서 당당히 외쳤다. “자유! 정의!” “유신철폐!” 도청 앞에서 난생처음 최루탄을 마셨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고 숨이 막혔다. 일부는 전남여고로, 광고로 진출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승리감에 모두 신이 났다. 학교에선 우리를 강당에 수용하였다. 손호상 등 5명의 주동자가 광주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그중 손호상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황광우, 학생탑의 후예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 2026, 다큐디자인

 

황광우(인문학자)195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 고교 시절 유신철폐 시위로 투옥되었다. 1978년 광화문 시위로 징역을 살았고, 1980년 오월 관련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후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했다. 1986년 인천 53 시위로 수배를 당했다. 19876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창립하였다. 2019인문연구원 동고송을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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